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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6:19:57

김흥락



1. 개요2. 생애3. 저서4. 참고문헌

1. 개요

김흥락(金興洛)은 본관이 의성(義城)으로 1827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종손으로 한말 퇴계 학통을 잇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 문화권의 핵심 지도자이며, 위정척사론을 견지하고 안동 지역의 전기 의병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파락호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은 김용환이 그의 손자이다.

2. 생애

1895년 12월 30일 내려진 단발령 소식이 안동에 전해지자 김흥락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논의를 이끌어 냈다. 논의 과정에서 김흥락은 1차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지병과 대묘(大廟: 학봉 김성일의 사당)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봉화 닭실[酉谷] 출신의 참봉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권세연이 이끄는 1차 의진이 결성되자 안동부성에 머물며 여러 문중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안동의진은 1896년 1월 하순 안동부성 탈환에 성공하고, 3월 7일 지휘부를 포(砲)를 중심으로 하는 전투적인 편제로 편성하였다. 일주일 뒤 권세연이 의병장에서 스스로 물러나자, 김흥락은 후임으로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를 선출하고 하회의 류도성(柳道性)과 함께 지휘장(指揮將)을 맡아 안동의진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1896년 의병대장 그의 사촌 김회락을 집에 숨겨두었다는 의심으로 일본군은 학봉종가의 종손인 그를 포박하고 집을 약탈하였다.

이를 지켜본 손자 김용환(1887)은 파락호라는 오명을 들으면서 노름꾼으로 위장하여 독립운동 군자금을 대는 활동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의병이 해산된 뒤 검제 서산재(西山齋)에서 학문에 몰두하다가 189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에 참가한 회장꾼이 6천 명이 넘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3. 저서

저서로는 서산집(西山集)이 있다.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