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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1:52:41

김우재(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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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의 농구인
<colbgcolor=#eeeeee,#191919> 김우재
출생 1995년 1월 20일 ([age(1995-01-20)]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96cm| 체중 96kg
포지션 농구선수( 센터/ 은퇴)
학력 삼선초등학교 (졸업)
삼선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졸업)
프로 입단 2017년 드래프트 3라운드 1순위 ( 부산 kt)
소속 부산 kt 소닉붐 (2017~2018.12)
원주 DB 프로미 (2018.12~2019)

1. 개요2. 아마추어 및 선수 시절3.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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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농구선수. 프로 이전에는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며 3점슛과 수비에서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프로로 입단한 뒤에는 거의 정규리그에도 나가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선수를 은퇴를 한 아쉬운 선수였다.

2. 아마추어 및 선수 시절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한 건 삼선중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였다. 경복고등학교에서는 문성곤, 이종현, 최준용 등의 그늘에 가렸지만, 부상을 당해 빠져있을 때 공백을 메우며 성장세를 이어갔으며 마지막 학년 때 농구부가 창단한지 처음으로 전국대회 4관왕(춘계연맹전, 연맹회장기, 대통령기, 전국체전)을 이끌었다.

파일:중앙대 농구부 김우재.jpg
하지만 중앙대학교로 진학한 뒤 2015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3학년 때 허벅지 부상으로 고생을 했었고, 준준결승전에서 최준용 허훈의 연세대학교에게 져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파일:부산 kt에 입단한 신인 3인방 양홍석, 허훈, 김우재.jpg
파일:원주 DB 시절의 김우재.jpg
그러나 선수로서는 첫 해에 출전 기회가 거의 없었던데다가 다음 해에 들어선 이후부터 고작 2경기 나와 2분밖에 못 뛴게 전부였고, 이어 정희원과 함께 최성모를 상대로 원주 DB로 옮겼지만 D리그에만 출전했을 뿐 1군 리그에서도 출전 횟수가 적은 게 전부였다. 결국 시즌 종료 뒤 FA 협상이 결렬되면서 불과 2년만에 선수 커리어를 마쳤다.

3. 플레이 스타일

빅맨의 기본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능력과 조직적인 트랜지션 등으로 열세를 만회했으며, 중거리 슛이나 스텝 등도 능숙했다. 또한 빈 자리를 잘 찾으며 쉽게 넣었거나 경기 흐름으로 리바운드 위치 선정 능력도 뛰어났지만, 출전 시간보다 코트 안의 효율성이 더 높았다. 묵직한 힘으로 버텼던 것과는 달리 골밑에서 신장만큼 탄력을 이용한 수비나 리바운드 등이 필요해 보였던 반면 세로 수비가 약했던 것이 운동능력 부족의 단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