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A5034><colcolor=#fff> 대한민국 육군 중위
김수영 金壽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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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립서울현충원 김수영 소위 묘지석.jpg | |
출생 | 1922년 |
사망 | 1950년 8월 27일[1] (향년 28세) |
경상북도 안강지구 도음산 384고지 |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26연대 |
최종 계급 | 중위 (대한민국 육군) |
가족 |
아들 김종태, 딸 김광성 며느리 김혜자 손자 김동훈, 손녀 김진희 손녀사위 이동옥 증손 이시형, 이주형 |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갑종간부후보생 1기로 임관했으며, 6.25 전쟁 중 전사했다. 최종 계급은 대한민국 육군 중위(추서)이다.[2]2. 전사
김수영 소위는 안강-기계지구 전투 당시 도음산 384고지에서 수도사단 황규만 소위[3]의 소대가 몰살 위기에 빠지자, '김 소위'는 급히 증편된 자신의 소대를 이끌고 증원하러 왔다가 북한군의 기관총 사격에 전사했다. 시신은 급박한 전황 때문에 도저히 후송할 길이 없어 황규만 소위와 김수영 소위의 소대원들이 표식을 설치한 후 가매장했다.3. 이름 없는 묘
황규만 준장은 김수영 소위의 시신을 가매장한 이후 13년 만인 1963년 다시 찾아내어 이듬해인 1964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정식 이장하고, 매년 명절마다 김수영 소위의 묘를 찾아 돌보았다.그러나 황규만 준장은 김수영 소위의 성만 알고 있었을 뿐, 이름을 알지 못했다. 전투 당시 증편된 소대를 인솔해 온 김수영 소위는 황규만 소위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갑종 1기 김 소위 입니다" 라고만 말했고,[4]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난전 중 북한군의 기관총 사격에 김 소위가 전사했기 때문이다. 황규만 장군은 현충원의 묘비명을 임시로 '육군 소위 김 의 묘'라 써 넣고[5], 이후 꾸준히 김 소위의 이름과 유족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육군보병학교(현 갑종간부후보생) 1기 출신이던 라보현 예비역 육군 대령을 만나 갑종 1기 동기명부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결과 26년만에 안강-기계 전투에서 전사한 김 소위는 1922년생 '김수영 소위'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황규만 준장은 김수영 소위의 유족들과 연락이 닿아 비로소 유족들에게 김수영 소위의 현충원 안장 소식과 묘비 위치를 전할 수 있었다. 그 때까지 김수영 소위의 유족들은 김 소위의 부하 장병에게서 전사했다는 소식만 전해들었을 뿐 어디에 묻혀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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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중위 김수영의 묘
1990년 11월 18일
1950년 8월 27일 경북 안강지구 도음산 전투에서 전사[6]
1964년 5월 29일 국립묘지에 안장하다
1990년 현충일
예비역 육군 준장 황규만 삼가 기록하다
그러나 현충원에 있는 김수영 소위의 묘비에는 지금도 '육군 소위 김 의 묘'라고만 쓰여 있다. 워낙 사연이 극적이라 전쟁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 국방부에서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 묘비를 그대로 두기로 한 것이다. 대신 묘비 앞에 김 소위의 이름과 사연을 새긴 추모비를 설치했다.[7]1990년 11월 18일
1950년 8월 27일 경북 안강지구 도음산 전투에서 전사[6]
1964년 5월 29일 국립묘지에 안장하다
1990년 현충일
예비역 육군 준장 황규만 삼가 기록하다
4. 관련 항목
[1]
전쟁기념사업회의 전사자정보에는 8월 24일로 기재.
#
[2]
사망 당시 계급은 소위로, 전사 후 1계급 특진.
[3]
전투 당시의 계급으로, 6.25 전쟁 발발 당시 불과 20살 약관의 나이였다. 정확히는
육군사관학교 1학년이었는데 전쟁이 터지자 장교로 동원되었다. 이후 황규만은 전쟁이 끝난 후까지 살아남아 진급했고, 1975년에 육군 준장이 된다.
[4]
당시는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고 국군 내에서도 일본 군대에서 쓰던 습관이 남아 있었다. 일본 육군은 정식 편제로 부르는 것 외에도 '나카지마 부대', '모리 부대'라는 식으로 지휘관의 성을 따서 제대의 별칭을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한국군도 초기에는 이 영향을 받아 '민 부대', '김 부대'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예시로 든 두 부대는
포항 전투 당시 국군 7사단
민기식 부대와,
마산 전투 당시 미 24단과 함께 싸운 해병대 김성은 부대 등의 실제 사례다. 즉 6.25 전반부의 급박한 상황의 임시 편제를 넣기 애매한 경우 지휘관 이름을 그대로 붙였고, 특히
영천 전투는 항목에서 보듯 잔존병력을 모두 긁어모아 방어선을 재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편제가 엉망진창이었다. 사실 구 일본군의 이런 임시 제대 작명 관습은 미 육군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 킨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Kean) 등의 예시에서 볼 수 있듯 미 육군의
태스크 포스 작명법과 동일한 것이다.
[5]
언젠가 이름을 찾으면 묘비에 새겨넣어서 이름을 완성하기 위해서 딱 두 글자가 들어갈 자리를 비워두었다.
[6]
戰이 간제차인 战으로 새겨져 있다.
[7]
다만 1990년 당시의 개인이 비석을 조성하는 관례에 따라 한자로 쓰여있어 사연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흔한 비석 박아놓은 것으로 보여 아쉬움이 있다. 거기다 바닥에 있기에 모르고 밟고 지나갈 수도 있으니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