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金憑1549년( 명종 4) ~ 1590년( 선조 23) (향년 41세)[1]
조선의 인물. 김익한의 아들.
조선시대를 통틀어봐도 손꼽힐 정도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2. 생애
전주 사람으로 1580년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이조좌랑까지 올랐다.정여립과는 과거 사이가 좋았지만 틈이 생긴 지 오래였다. 이후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는 상소가 올라가자 정여립이 자결한 뒤 관련자들을 색출하는 기축옥사가 벌어졌다.
이 때 죽도에서 자결한 정여립의 시체를 육시하고 있었는데, 김빙도 문무백관 반열 속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본래부터 풍현증, 즉 안구건조증이 있어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나곤 했다. 그리고 이 때도 날이 차고 바람이 불자 눈물이 흘렀는데, 그러자 백유함이 역적을 위해 울고 있다며 무고를 했다. 백유함은 김빙과 사이가 나빴었다고 하는데, 진짜로 정여립의 편이라 여긴건지 고의로 무고를 한 건지는 불명이다. 결국 김빙은 역적을 위해 울었다는 이유로 장형을 당하다가 사망했다.
1610년에 김인우가 기축옥사 때 죽은 사람들에 대해 신원을 청했는데, 사관은 이 일에 대해 평가하면서 관련자들이 스스로 화를 취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김빙에 대해서는 하늘을 가리키며 해를 두고 맹세해 그가 죄가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언급했다.
통천 김씨의 인물에 대해서는 김빙 이전 인물들에 대해 이름이 나와있는 경우도 있으나, 조선씨족통보, 동국만성보 등에서는 통천 김씨의 시조라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