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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0 19:07:00

김빙

金憑
(1549~1590)
조선의 인물. 김익한의 아들. 본관 통천(통주)

전주 사람으로 1580년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좌랑을 지냈다. 기축옥사 때 형조좌랑, 추국관이 되었다.

정여립과는 동향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친밀하게 지냈으나 정여립이 동인과 가까워지면서 틈이 생기게 되었다. 정여립이 자결하고 관련자를 조사하기 시작할 무렵, 추국관 김빙이 백유함의 무고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김빙 사건은 기축옥사의 시작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으며 김빙의 무고로부터 기축옥사의 참혹한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빙의 사건에 대한 기록은 왕조실록, 연려실기술 등의 기록과 민인백의 토역일기의 기록이 있다. 김빙 사건에 대한 기록은 주로 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정여립의 시체에 형을 집행할 때 형조좌랑이며 추국관인 김빙 역시 백관의 반열 속에 있었다. 그는 본래부터 풍현증이 있어서 날씨가 춥고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마침 그날 날씨가 추워서 김빙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평소 김빙을 꼬깝게 여겼던 백유함이 김빙이 슬피 운다고 모함하였다. 김빙은 장형을 맞다가 끝내 사망했으며, 이때부터 조정과 민간에서는 백유함을 두려워해 바로 보지 못하였다.

한편, 민인백은 토역일기에 그날의 상황을 좀더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정여립의 시체를 군기시 앞에 무릎을 꿇려 놓고 목을 벤 다음, 모든 관리를 차례로 보게 하였다. 그리고 전주 사람 전적 이정란과 형조좌랑 김빙에게 정여립이 맞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그때 이정란은 평소 정여립과 사이가 좋지 않아 맞다는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돌렸는데, 김빙은 정여립의 시신을 만지고 눈물을 흘리며 "네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는가"라고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민인백은 진안현감으로 정여립과 그의 아들 정옥남을 잡았으며 그 공으로 평난공신 2등에 책록된 인물이다. 정여립은 민인백에게 포위되었을 때 스스로 자결하였고 그의 아들 정옥남을 생포하였다. 민인백은 이들을 전주를 거쳐 한양으로 이송하였다. 그리고 추국이 열릴 때 그 자리에서 벌어진 일을 일기 형식으로 남긴 것이다.

1610년에 김인우가 기축옥사 때 죽은 사람들에 대해 신원을 청했는데, 사관은 이 일에 대해 평가하면서 관련자들이 스스로 화를 취한 것이라고 하면서 김빙에 대해서는 하늘을 가리키며 해를 두고 맹세해 그가 죄가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언급했다.

조선씨족통보, 동국만성보 등에서는 김빙을 통천 김씨의 시조라고 기록했다. 김빙은 통천김씨 중시조 김원등의 8세 손이며 김빙 이전에 대과에 급제한 통천김씨 인물로는 1419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낸 김호, 1517년 정축별시에 급제하여 병조정랑, 남원도호부사를 지낸 김권, 1553년 계축 별시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낸 김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