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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9 18:46:58

김병화(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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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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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화
Kim Byong Hwa
파일:attachment/김병화/kbh.jpg
출생 1936년 5월 16일
일본 효고현 고베시
사망 2021년 3월 21일 (향년 84세)
평양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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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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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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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평양음원대학
정당

1. 개요2. 생애3.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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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지휘자.

2. 생애

1936년 5월 16일에 태어났다.

재일 한국-조선인으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행정직인 창작 창조부장 겸 지휘자, 인민예술가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지휘자였다.

일본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났고, 어릴적 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 작곡과 지휘를 배웠다. 1954년에는 일본 고베 청년 합창단 겸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1955년부터 도쿄 음악센터 예술국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고, 1959년에는 버르토크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해 주목받기도 했다.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하여 평양국립예술극장에서 피아니스트로 재직하면서 평양음악무용대학[1]에서 지휘를 배웠다. 1963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국립예술극장 지휘자를 맡았고, 1970년에 조선국립교향악단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어 조선국립교향악단에서 수석 지휘자의 직책을 수행하였으며, 2000년도에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서울 공연에도 참가하였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2005년에는 김일성상을 수여받아 김일성상 계관인이 되었다.

이후 장룡식에게 수석 지휘자 직책을 넘겨주고, 행정직인 창작 창조부장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가 현재는 고령으로 인해서 퇴직 했다. 이후 1만명 대공연에서 잠시 등장하여 노인들 합창을 1회 지휘했다.

이후 조선국립교향악단 창립 70주년 기념음악회에 출연해 조선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해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를 지휘 및 공연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제자가 바로 수원대학교 교수 박태영이다.

국립교향악단 창작창조부 고문 자격으로 은퇴생활을 보내던 중 2021년 3월 21일에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김정은이 화환을 보내주었으며, 조선중앙통신은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 예술적재능을 마음껏 꽃피우며 관록있는 예술창조집단의 수석지휘자로 성장한 김병화동지는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그네뛰는 처녀》,《아리랑》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을 훌륭히 지휘형상함으로써 주체교향악발전에 이바지하였다."라고 그의 업적을 칭송했다. 9월 16일,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주체교향악발전에 이바지한 국립교향악단 창작창조부 고문이였던 김병화동지"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3. 수훈



[1] 현 김원균 명칭 평양 음악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