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907년 |
함경남도 단천시 | |
사망 | 1930년 7월 22일 |
함경남도 단천시 |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단천의 삼림조합의 부당한 처우를 규탄하고 그로 인해 잡힌 군민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다 피살된 독립운동가.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1]2. 생애
1907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났다. 김득수가 20대가 되던 시절 단천에서는 일제에 의해서 삼림조합이 강압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삼림조합은 일제의 산림정책의 실행과 삼림자원의 보호-감시를 위한 것이었으며 과도한 조합비를 농민들에게 물리는 각종 폐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삼림조합 자체를 부정하는 투쟁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김득수도 단천삼림조합 반대투쟁에 참여하였다. 당시 일제는 농민들에게 임산물 채취 금지와 조합비의 과중한 부담을 통해서 생계수단을 박탈하였고 이에 김득수는 삼림조합에 반대하는 기조를 주도하였다. 그 후 일제와 삼림조합의 폭압적 행태에 맞서기 위해 농민조합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면민 200여 명이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그 후 공격의 규모를 더욱 더 키우기 위해서 7월 18일 단천군청으로 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들과 대치하게 된다.[2]일경은 해산을 하면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하였고 이에 면민들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경은 그날 밤 시위 주도세력 20여 명을 검거하며 오히려 탄압을 일삼기 시작했다. 그 후 경찰과 군수와의 면담도 실패로 돌아가면서 농민들은 하다면·복귀면·파도면을 중심으로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삼림조합의 해체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7월 20일에는 2000여명의 단천군민들이 단천군청을 공격하였고 단천경찰서을 습격하여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경과의 충돌이 발생하고 군중들을 향해 발포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김득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총상을 입고 순국하였고 2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3]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