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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2:07

김구현(1872)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2년 1월 7일
경상도 의령현 상정면 덕교동
(현 경상남도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1] 749번지)[2]
사망 1932년 4월 12일 (향년 60세)
경상남도 의령군
본관 광산 김씨[3]
상삼(象三)
가족 배우자 이시성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413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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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독립유공자 김응현(金應鉉)은 그의 4촌 동생이다.

2. 생애

1872년 1월 7일 경상도 의령현 상정면 덕교동(현 경상남도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749번지)에서 아버지 김재호(金在昊, 1838 ~ ?.8.30.)[4]와 어머니 전주 이씨(1852 ~ 1929.1.15.)[5]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중순에 4촌 동생 김응현(金應鉉)을 비롯하여 덕교리 유지인 조균구(曺均九)· 조두환(曺斗煥)· 조균수(曺均壽)·박용주(朴龍周) 등과 함께 한 자리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크고 작은 태극기를 만들어 위에 '대한독립'이라고 크게 쓰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3월 20일 밤, 30여 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마을 입구에 모여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각자 가진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를 외치며 몰려갔다. 이후 상정면장 강재수(姜載秀)를 끌어내어 앞세운 뒤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였고, 약 2시간에 걸쳐 상정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만세시위의 주동자로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6월 2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았고[6],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1919년 7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면서[7], 형이 확정되어 결국 약 1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32년 4월 12일에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사망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2020년 5월 31일 배우자 전주 이씨 이시성(1890 ~ ?.12.11.)[8]의 유해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1] 광산 김씨 집성촌이다. [2] 이 지번에 광산김씨재실이 위치해 있다. [3] 양간공파(良簡公派)-판군기감사공파(判軍器監事公派) 35세 현(鉉) 항렬. [4] 자는 덕언(德彦). [5] 이정선(李廷善)의 딸이다. [6] 1919년 7월 10일 대구복심법원 집행원부 [7] 1919년 7월 10일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8] 이기호(李琪浩)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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