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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8-18 11:08:34

김가기

金可紀[1]
? ~ 858년 2월 25일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기타

1. 개요

신라 때의 입당유학생이자, 도사. 중국의 속신선전, 태평광기, 한국의 해동이적, 해동전도록 등에 김가기의 이름이 실려 있다. 중국의 전당시에 당의 장효표(章孝標)라는 시인이 신라로 귀국하는 김가기에게 지어주었다는 시가 실려 있는데 장효표는 791년에 태어나서 873년에 죽었고, 태평광기에 김가기가 858년 2월 25일에 하늘에 올라갔다고 했으므로 그는 아마도 그가 빈공과에 급제했다는 당문종 개성 연간(836-840)에서 헌안왕(재위 857-861) 시기까지 활동한 것이 된다.[2]

2. 생애

기억력이 뛰어나고 글을 잘지었으나 성격이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도교의 양생술과 연년술 익히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입당유학생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빈공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하는 대신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살면서 화초 기르는 것으로 소일하거나 아니면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뭔가 생각하거나, 도덕경을 비롯한 도교 경전들을 주로 읽으며 지내다고 한다. 3년 동안 당에서 살다 신라로 귀국하였으나 다시 당으로 돌아와서[3] 종남산에서 도사로써 살게 된다.

속신선전에 따르면 당선종 대중(大中) 11년( 857년) 12월에 조정에 표문을 올려, "신(臣)이 옥황상제의 명으로 영문대시랑(英文臺侍郞)으로 임명받아 내년 2월 25일에 마땅히 하늘에 오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종이 이상하게 여기고 중사(환관)을 시켜서 입궐하게 했지만 가지 않았고, 궁녀 네 명과 향악(香樂)과 금채(金綵)를 김가기에게 하사하고 두 사람의 중사(환관)을 보내어 김가기를 가까이 모시게 했는데, 김가기는 이들을 모두 물리친 채 혼자 조용한 방에서 지냈고, 밤만 되면 매일 그의 방에서는 누군가와 담소하는 소리가 들려서 중사가 몰래 엿보니 선관(仙官)과 선녀(仙女)가 각각 용과 봉황의 등에 앉아서 서로 마주 대하는 것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 김가기가 말한 날 오색 구름과 난새와 고니가 하늘에 날아들고 피리 소리가 허공에 울리더니 온갖 비단 양산이며 깃발, 구슬로 장식한 가마 수레가 공중에 나타나고, 관리뿐 아니라 주변에 사는 주민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지켜보는 가운데 김가기는 하늘에서 내려온 행차와 함께 승천하였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모두 김가기가 정말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고 믿고 그가 하늘에 오른 2월 25일에 제사를 지냈다고 해동이적에 전하고 있다.

3. 대중매체에서

곽재식 모살기에 그를 다룬 작품이 실려 있으며, 소설가 김태연은 <풍류왕 김가기>라는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4. 기타

2006년에 김가기가 우화등선했다는 종남산 자오곡에 김가기를 기리는 도관(道觀, 도교 사원) 금선관이 건립됐다. 도관 건립에는 한국의 민족 선도(仙道)를 연구하는 세계금선학회 등이 관여했다.


[1] 조선 후기 정동유가 지은 주영편에서는 태평광기에서는 김가기의 이름에서 김가(金可)를 복성(두 글자로 된 성)으로 보고 있다며, 한국에서는 통성명하는 자리에서 으레 자기 성을 '내 성은 ~~가(家)요'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그걸 복성으로 오해하고 그렇게 적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경우 김가기의 이름은 '김기(金紀)' 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2]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해동전도록을 인용해, 김가기가 당문종 개성 연간(836~840)에 당에서 최승우 등과 함께 빈공과에 급제했고 이들이 승려 자혜(慈惠)와 함께 종남산에서 종리장군(도교 팔선의 하나인 종리권을 가리킨다)을 만나 도교 서적을 전수받은 것이 한국에 도교가 전래된 시초라고 지적하고 있다. 택리지에도 김가기가 최치원이나 최승우와 함께 영암군에서 배를 타고 당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최치원이 당에 건너간 것은 기록상으로는 868년이고 최승우도 890년에 들어가서 893년에 빈공과에 급제했기 때문에 해동전도록이나 택리지의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그만큼 한중 양국에서 김가기가 네임드였다고 할 수 있을 듯. [3] 이는 최치원이 관직을 버리고 은거한 것과 같은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입당유학생들의 애초의 유학 목적이 골품제를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펼칠 수 있는 길을 얻으려는 데 있었지만 골품제 아래 신라에서는 그것을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입당 유학한 학생이나 승려 가운데는 골품제의 현실을 넘지 못하고 끝내 최치원처럼 벼슬을 버리고 숨어버린 사람도 있었지만, 최승우처럼 신라 정권에 반기를 든 호족 세력에 가담하거나 그들을 지지하는 입장에 선 사람들도 많았다. 어찌 생각하면 김가기는 다시 당으로 들어간 버전의 최치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귀국한 뒤에 다시 당으로 들어 갔다가 그곳에서도 답이 없음을 깨닫고 신라로 돌아왔다는 설이 존재하는 최치원과는 달리 김가기는 당으로 재입국한 뒤 죽을 때까지 신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김가기는 김씨이므로 진골귀족일 가능성이 높으니 최치원과는 같은 고민을 갖지 않았으나 이 당시 신라는 계속 왕위다툼이 이어져 혼란하였고 김가기는 거기 끼이기 싫었거나 패배한 쪽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 김가기가 언제 귀국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839년에는 신무왕 민애왕을 죽이고 즉위했고, 846년에는 문성왕 장보고 등을 제거하고 김양조차 실권 없는 자리로 내쫓는 등 왕권강화를 위한 대숙청이 있었는데, 이 둘 중 하나에 말려들어 당으로 돌아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