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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 길학성(吉學成) |
본관 | 해평 길씨[1] |
출생 | 1868년 11월 20일 |
평안도
영변대도호부 팔원방 석성리 (현 평안북도 영변군 화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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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8년 10월 27일 |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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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길학성은 1868년 11월 20일 평안도 영변대도호부 팔원방 석성리(현 평안북도 영변군 화평리)에서 아버지 길영복(吉永福)과 어머니 수안 이씨(遂安 李氏)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길학선(吉學善)이 있었으며, 서촉 명씨 명신경(明信京)의 딸과 태원 선우씨 선우림(鮮于林)의 딸 등 두 명의 부인과의 사이에 장남 길윤기(吉允箕)와 차남 길윤호(吉允昊), 그리고 딸 한 명을 두었다. 이후 읍내면 동부리(현 녕변군 녕변읍)으로 이주하였다.그는 영변군 동부동 천도교 교구장으로,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1919년 2월 25일 평양에서 천도교 도사 오영창(吳永昌)의 전보를 받고, 28일 서울 천도교 중앙총부에 가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계획을 전달받았다. 이에 그는 곧장 서울로 향했고, 3월 1일 태화관과 종로 등지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3월 2일, 길학성은 중앙총부의 지시에 따라 지방에서 제2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영변으로 돌아갔다. 그는 3월 5일 영변에 도착한 뒤 여러 차례 교인들과 접촉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 준비했다. 3월 11일, 영변군 영변면 용포동 천도교 신자 김형성(金瀅垶)의 집에서 교도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고, 비록 죽더라도 대도주의 명령을 준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잠복해 있던 경찰의 급습으로 체포되었고, 1919년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6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고, 결국 당일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출옥한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28년 10월 27일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길학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영변·석성파 27세 학(學)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