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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5 20:33:48

길버트 마셜

파일:헨리 3세와 길버트 마셜의 화해.jpg [1]
성명 길버트 마셜
Gilbert Marshal
생몰년도 1194년경 ~ 1241년 6월 27일
출생지 노르망디 공국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베드퍼드셔 던스턴블
아버지 윌리엄 마셜
어머니 이사벨라 드 클레어
형제 윌리엄, 마틸다, 리처드, 월터, 안셀, 이사벨라, 시빌라, 에바, 조안
배우자 스코틀랜드의 마조리
직위 제4대 펨브로크 백작, 잉글랜드 왕실 마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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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제4대 펨브로크 백작, 잉글랜드 왕실 마셜. 윌리엄 마셜의 3남이다.

2. 생애

1194년경 노르망디 공국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초대 펨브로크 백작이며 당대 잉글랜드 최고의 기사로 칭송받은 윌리엄 마셜이고, 어머니 이사벨라 드 클레어는 제2대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의 딸이자 제4대 펨브로크 여백작이다. 그는 성직자로서의 길을 걸었고, 1227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하급 성직자 계급인 시종을 맡았다. 그러던 1233년 여름, 형 리처드 마셜 헨리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길버트는 형에 의해 아일랜드 내 잉글랜드 귀족들과 아일랜드 보안관 모리스 피츠제럴드를 상대하는 대리자로서 아일랜드에 보내졌다.

1234년 4월 1일, 리처드 마셜이 커리 전투에서 모리스 피츠제럴드가 이끄는 아일랜드군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된 뒤 4월 16일에 킬케니 성에서 사망했다. 이제 펨브로크 백작령의 상속인이 된 그는 웨일스로 돌아간 뒤 헨리 3세에 협상을 제의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에드먼드 리치 및 여러 잉글랜드 주교가 헨리 3세에게 이에 응하라고 권고했고, 헨리 3세는 그들의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1234년 4월 초, 리처드 마셜의 반란을 초래한 피에르 데 로슈는 왕실 업무에 간섭하지 말고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몇 주 후 피에르에 의해 재무장관에 선임되었던 피에르 드 리보도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1234년 5월 말, 길버트 마셜과 헨리 3세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헨리 3세는 반란을 일으킨 이들을 사면하며, 영지와 직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자신에 대한 충성 서약을 갱신하도록 했으며, 길버트 마셜은 왕에게 3천 마크를 바치기로 했다. 그 후 6월 11일에 워체스터에서 헨리 3세에게 기사 계급을 받았고, 성직자로서의 지위는 취소되었다. 이후 펨브로크 백작과 잉글랜드 왕실 마셜의 지위도 인정받았다. 그 후 스코틀랜드 왕 일리엄 1세의 딸인 마조리와 1235년 8월 1일에 버윅어폰트위드에서 결혼해 후계자를 낳으려 했다.

한편,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는 리처드 마셜이 이전에 누렸던 프랑스 내 영지를 길버트가 계승하는 걸 거부했다. 이에 헨리 3세는 페번시 영지를 보상으로 하사했다. 또한 헨리 3세는 1235년 1월에 길버트에게 후견권과 왕궁을 잇달아 하사해, 웨일즈 남부 변경지대를 거의 완전히 장악하도록 했다. 1236년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와 잉글랜드 간의 휴전 기간 중인 걸 무시하고 모건 압 하이웰로부터 메레디스 성을 탈취하고 요새화했지만, 허웰린이 이에 보복하고자 군대를 일으켜 그의 영지를 위협하자 위협을 느끼고 휴전 조건에 따라 메레디스 성을 모건에게 돌려줬다. 1240년 허웰린이 사망하자, 길버트는 동생 월터와 함께 웨일스를 공격했다. 월터는 1231년에 웨일스인이 점령헀던 카디건 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남부 웨일스 영주 멜그윈 피찬이 길버트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강요했고, 길버트는 이에 대한 대가로 사생아인 이사벨라를 멜그윈의 아들 리스와 결혼시켰다.

한편, 길버트 마셜을 포함한 마셜 가문은 리처드 마셜을 죽인 모리스 피츠제럴드에게 강한 적의를 품었다. 1235년 모리스 피츠제럴드의 대리인인 헨리 클레멘트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살해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사람들은 길버트 마셜이 사주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모리스 피츠제럴드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공식으로 마셜 가문에 유감을 표하고 리처드 마셜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으며, 리처드 마셜의 영혼을 위해 수도원을 건립하겠다고 약속했다.

1241년 6월 27일, 길버트 마셜은 헨리 3세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던스턴블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가했다. 그러나 도중에 낙마한 뒤 다리가 등자에 끼는 바람에 질질 끌려가다가 겨우 구출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하면서 사망했고, 런던의 템플러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마조리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기에, 동생인 월터 마셜이 펨브로크 백작으로 선임되었다.


[1] 캔터베리 대주교 에드먼드 리치의 중재로 화해하는 헨리 3세와 길버트 마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