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기욤 쿠지노 드 몽트뢰유 Guillaume Cousinot de Montreu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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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400년 ~ 1484년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오를레앙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투르 | |
아버지 | 기욤 쿠지노 | |
어머니 | 잔 오르페브르 | |
직위 | 몽트뢰유 영주, 정치인, 역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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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귀족, 정치인. 잔 다르크의 일대기를 다룬 <처녀 연대기>의 저자로 유명하다.2. 생애
오를레앙 출신이며, 파리 삼부회 의장이며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 및 샤를 1세 도를레앙의 총리를 역임했던 기욤 쿠시노와 변호사 피에르 오르페브르의 딸 잔 오르페브르의 아들이다. 학계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기 위해 총리 기욤 쿠지노를 '대' 기욤 쿠지노로, 역사가 기욤 쿠지노를 '소' 기욤 쿠지노로 구별하기도 한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19세기까지 삼촌과 조카 관계로 인식되었지만, 기록 연구가이자 기독교 영지주의 부흥 운동가 쥘 두아넬(Jules Doinel, 1842 ~ 1903)의 연구로 부자 관계가 입증되었다.아버지 기욤 쿠지노는 루이 1세 도를레앙이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부하들에게 살해된 뒤 루이 1세 도를레앙의 미망인인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요청에 따라 파리 삼부회를 주재해 용맹공 장을 성토하는 연설을 했으며, 아르마냑파의 적극적인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로 인해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장악한 뒤 전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 아르마냑파를 지지했으며, 1420년대에 오를레앙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후 잔 다르크의 원정에 참여했으며, 1438년 샤를 7세의 비서가 되었고, 행정과 재정을 담당하는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광산 및 별채의 총독 및 감독관을 역임했으며, 왕실 총리 및 시종장을 역임한 후 왕실 의원 및 청지기의 직위에 선임되었다. 1442년 도피네 의회의 첫번째 의장이 되었다. 1444년부터 14449년까지 잉글랜드 주재 대사를 맡았으며, 1449년부터 1461년까지 루앙의 왕실 세네샬을 역임했다. 1451년 스코트랜드 대사로 파견되었지만 그의 배가 잉글랜드 해안에서 난파된 후 포로가 되어 샤를 7세가 노르망디의 소금세 수입으로 받은 20,000 에퀴를 몸값으로 지불할 때까지 억류되었다. 1456년 몽트뢰유의 영주가 되었고, 1459년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를 역임했으며, 만토바 공의회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논의하는 데 참여했다. 이후 몽펠리에 집행관, 살스르샤토의 대장 직위를 받았다.
1461년 샤를 7세가 사망한 후 새 국왕에 오른 루이 11세에 의해 아버지의 눈과 귀를 가린 간신으로 규탄당하고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영향력 있는 귀족들의 중재로 석방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 11세의 시종에 선임되었다. 1462년 루이 11세의 요청에 따라 랭스 대주교 장 주브넬 데 우르생과 함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의 프랑스 왕좌에 대한 주장을 반박하는 논문을 작성했다. 1464년 9월 29일에 루이 11세가 아브빌 시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루이 11세의 고문이자 기사로 언급되었다. 1465년 루이 11세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한 대귀족들이 공익 연맹을 결성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루이 11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며, 그 보상으로 연금이 600프랑에서 3,000 프랑으로 인상되었다. 1470년 로마 대사로 다시 활동했다.
1483년 루이 11세가 사망한 후 새 국왕 샤를 8세의 고문이 되었고, 1484년 투르의 삼부회 회의에 참석한 후 같은 해에 그곳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