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기 2세 드 네슬 Guy II de Nes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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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1352년 8월 14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브르타뉴 모롱 | |
아버지 | 장 1세 드 네슬 | |
어머니 | 마르그리트 드 멜로 | |
배우자 | 멜룬의 이자벨, 가마슈와 드뢰의 잔 | |
자녀 | 마리, 욜랑드, 로베르, 장 2세 | |
직위 | 프랑스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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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프랑스군 원수.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으나 모롱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오페몽의 영주인 장 1세 드 네슬과 마르그리트 드 멜로의 아들이다. 조부 기 1세 드 클레르몽은 프랑스군 원수로서 1302년 플란데런 백국의 반란 토벌에 나섰다가 1302년 황금 박차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1345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로부터 프랑스군 원수로 선임되었으며, 1350년 아르투아, 부르보네 및 플랑드르, 불로네, 푸아투, 리무쟁, 생통주, 페리고르, 앙주, 브리타니 및 메인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1350년 10월 프랑스의 새 국왕 장 2세의 대관식에 참여했다. 1351년 2월, 장 2세의 명령을 받들어 가스코뉴 국경지대에 위치한 요새이며 잉글랜드 수비대 600명이 주둔하고 있는 생당장젤리를 포위하고 요새로 이어지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했다. 수비대는 몇 달간 결연히 버텼지만,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아군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의 세네샬 존 드 체버스턴과 친 잉글랜드파 가스코뉴 영주인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는 생장당젤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백 명의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이들은 수적으로 열세했기 때문에 적 포위망을 뚫을 생각은 없었지만 수비대에 물자를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기 2세는 일부 병력를 남겨서 계속 포위하게 한 뒤 대다수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러 출진했다. 1351년 4월 1일, 기 2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생트 마을에서 약 3마일 떨어진 도로에서 잉글랜드군을 요격했다. 잉글랜드군 기사들은 즉시 말에서 내려 고지로 올라가서 전투 대열을 형성하고 말을 후방으로 이끌었다. 네슬은 양 측면의 소규모 기병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리게 한 뒤 고지를 에워싸서 공세를 펼쳤다. 그리하여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인근의 타이르부르와 토네-샤랑트의 잉글랜드 수비대에서 분리된 수백 명의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다. 이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프랑스군은 패주했고, 600명 가량의 프랑스 기사가 죽거나 사로잡혔다. 이때 기 2세 역시 생포되었다.
존 드 체버스턴은 생트 전투에서 승리한 뒤 생장당젤리 요새로 접근했지만 포위망을 뚫지는 못하고 보급품을 수비대에 전달해 준 후 철수했다. 한편 장 2세는 지휘관들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하자 친히 추가 병력을 이끌고 포위군과 합세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의 구원이 더이상 오지 않자, 생당장젤리 수비대와 주민들은 1351년 8월 장 2세에게 항복했다. 그 후 수개월간 옥고를 치르던 그는 장 2세가 10,000 크라운의 몸값을 지불해준 덕분에 풀려났다.
1352년 5월, 장 2세는 기 2세를 프랑스 원수로 선임한 뒤 브르타뉴 원정을 맡겼다. 기 2세는 왕명을 받들어 브르타뉴의 도시 렌에 병력을 소집한 뒤 플로에르멜, 푸쥬헤 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부 병력을 남겨서 포위를 이어가게 한 뒤 렌으로 가서 병력을 더 끌어모으려 했다. 한편 브르타뉴 주둔 영국 사령관 월터 벤틀리는 잉글랜드에서 데려온 1,500명의 중장병 및 장궁병을 이끌고 두 곳을 구하기 위해 행진했다. 그는 포위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플로에르멜에 있던 브르타뉴의 대리 수비대장 로버트 놀스와 합세했다.
기 2세는 벤틀리가 포위망을 뚫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쳐부수기 위해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다. 벤틀리는 이에 대응해 1352년 8월 14일 렌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모롱 마을 동쪽 언덕 꼭대기 가장자리에 전투 대형을 결성하고, 각 측면에 기병과 궁수병을 배치했으며, 중앙에 중장병을 배치했다. 그 뒤에는 숲과 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우익 부대 앞에는 브렘빌리 성이 계곡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윽고 전장에 도착한 기 2세는 적의 병력이 2,000명 밖에 안 된 걸 보고 벤틀리에게 사절을 보내 이 점을 지적하면서 프랑스를 떠나기로 약속한다면 전장에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벤틀리가 제안을 거부하자, 기 2세는 적을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로구스 드 엥거스트가 이끄는 프랑스-브르타뉴 기병대는 좌익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부대는 말에서 내려서 도보로 적진을 공격할 준비를 갖췄다.
이윽고 전투 개시 나팔이 불어오자, 장이 이끄는 프랑스 좌익 기병대가 잉글랜드 우익 궁수대를 향해 돌진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자신들을 달려오는 적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지만, 적군이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자 겁을 집어먹고 숲속으로 달아났다. 그 사이, 말에서 내린 프랑스-브르타뉴 주력 부대는 언덕을 기어올라 잉글랜드의 중앙 중장병 부대를 공격해 수목 경계선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측에 있던 프랑스 병사들이 언덕의 훨씬 더 가파른 부분에 직면해 전진 속도가 느려졌다. 벤틀리의 좌익 궁수대는 이 기회를 틈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적을 향해 화살을 계속 퍼부을 수 있었다.
계속되는 화살 세례에 견디지 못한 프랑스 우익 부대가 후퇴하자, 궁잉글랜드 좌익 궁수들은 검과 도끼를 챙기고 중앙에 밀집한 적군의 측면을 요격했다. 이에 전의가 꺾인 프랑스 중장병들은 언덕으로 밀려났다. 이 무렵 잉글랜드 우익 궁수대를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로구스 드 앵거스트는 위기에 빠진 중앙의 아군 부대를 구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지만, 우익 궁수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로구스가 이끄는 군대의 발목을 잡는 바람에 제때에 이동하지 못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측면이 찔린 상황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프랑스군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벤틀리의 중장병들은 즉시 적군을 추격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패주했지만, 전투에 참석했던 별 기사단 89명 만은 끝까지 항전했다가 전원 사살되었다. 프랑스 사령관 기 2세도 전사했으며, 프랑스 기사 500명이 추가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3. 가족
- 잔 드 브휴이예흐-르-샤뗄: 브휴이예흐 영주 토마 2세의 딸.
- 마리 드 클레르몽-네슬: 바헨느 영주 라울 르 플라멩의 부인.
- 욜랑드 드 네슬: 오제보스크 영주, 프랑스 왕실 시종, 툴루즈 및 알비의 세네샬.
- 로베르 드 네슬: 노르망디의 피카르디 영주 시에르 드 꾸시의 기사.
- 장 2세 드 네슬: 기 2세의 영지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