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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4 19:55:50

그리스도의 변용


파일:Transfiguration_Raphael1.jpg
그리스도의 변용
Trasfigurazione
작가 라파엘로 산치오
제작 시기 1518년 - 20년
크기 410 x 279 cm[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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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미술관

1. 개요2. 그림의 여정3. 그림 자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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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파엘로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유작이다. 현재 이탈리아 로마 시 안에 위치한 바티칸 바티칸 미술관 피나코테카에 전시되어 있다.

가로 279cm, 세로 410cm 의 거대한 유채 패널화로 라파엘로가 제자와 조수의 도움 없이 혼자 그리기 시작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림을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라파엘로의 평생에 걸친 예술적 성취를 집대성한 걸작으로 모나리자 이전에 16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화였다(most famous oil painting in the world).

2. 그림의 여정

1515년에 교황 레오 10세의 부재상, 수석 조언자(vice-chancellor and chief advisor)인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는 프랑스 나르본의 대주교였다. 그는 라파엘로에게 나르본 대성당의 제단화 제작을 요청한다. 1516년 12월, 로마에서 레오 10세와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피렌체의 산 로렌초 대성당의 외관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미켈란젤로와 만났다. 그리고 이들은 미켈란젤로에게 라자로의 부활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한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드로잉은 하겠지만 그림을 그리지는 않겠다고 했고 결국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절친인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그리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세바스티아노는 '라자로의 부활'을 완성했고 그 그림은 현재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각각 시스티나 경당과 교황의 방에 그린 그림으로 경쟁했던 것처럼 간접적인 2차전이 된 셈이다.

성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 로마 고대 유물 발굴의 총 책임자, 도시 계획가로 매우 바빴던 라파엘로는 1518년 7월까지 그림을 시작하지 못했다.[2] 바사리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그림에 착수하면서 제자와 조수의 도움 없이 혼자 그리기로 결심했다. 작업을 시작하고 열정적으로 매달렸으며 그림은 여러차례 변형을 거쳐 마침내 최종 모습에 다다랐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폐렴으로 사망한다. 라파엘로 사후 며칠 동안 그의 머리맡에 '그리스도의 변용'이 놓여있었으며 1주 후 바티칸에서 전시되었다. 1972-76년에 그림을 복원할 때 확인된 사실은 그림의 대부분을 라파엘로가 완성했으며 왼쪽 아래의 일부만 제자들의 손길이 닿은 것으로 판정되었다.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이 그림을 너무 마음에 들어해서 본래 목적지였던 나르본으로 보내지 않았고 자신이 소장하기로 했다. 추기경은 조반니 바릴레에게 액자를 조각하게 하여 그림을 보관했다.[3] 그리고 교황이 되자 로마의 몬토리오에 있는 산 피에트로 성당 제단에 그림을 옮겨 걸었다.[4] 그리고 그림의 사본은 라파엘로의 제자 조반 프란체스코 페니에게 명하여 나폴리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림은 1774년에 스테파노 포치에 의해 모자이크로도 만들어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왼쪽 끝 복도 회랑 제대에 걸려 있다. 세바스티아노의 '라자로의 부활'은 예정대로 나르본으로 갔다.

1797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바티칸에서 예술품을 압수해 파리로 가져가기로 했다. 1799년 2월에는 교황 비오 6세와 조약도 체결하여[5] 압수를 공식화한다. 전문가 위원회는 당시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여겨진 라파엘로의 가능한 모든 그림을 수집품에 포함시켰고 '그리스도의 변용'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여겨졌다. 1797년 그림은 루브르로 옮겨져 전시된다. 위원회를 이끌던 장 바티스트 위카(Jean-Baptiste Wicar)는 신고전주의 화가였으며 다른 위원인 장 그로는 자크루이 다비드의 제자였다. 1801년에 루브르의 그랑 갤러리에서 대규모의 라파엘로 전시회를 열어 라파엘로의 그림 20여 점이 전시된다. 1810년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의 결혼식을 묘사한 벤자민 직스의 그림에도 '그리스도의 변용'이 보인다.
파일:zix_wedding_napoleon_marie_louise.jpg

그림이 대중에 공개되며 프랑스와 영국의 화가들은 라파엘로의 그림을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다비드와 그로, 앵그르는 프랑스의 예술적 이상을 라파엘로의 그림에 두며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영국의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그림을 보고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로서의 첫번째 강의의 주제를 '그리스도의 변용'으로 잡았다. 화가 조셉 패링턴은 일기에 이 그림을 보자 다른 1급으로 평가 받는 그림들이 힘과 활력이 부족해보인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1815년에 그림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원래 위치했던 산 피에트로 성당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로마 사도 궁전에 있다가 결국 피타코테카로 이동하여 현재에 이른다. '폴리뇨의 성모', '오디 제단화'를 옆에 거느리고 전시되어 있으며 라파엘로 태피스트리도 함께 있다. 피타코테카의 이 거대한 방은 라파엘로의 독무대다.

3. 그림 자체에 대해서

그림은 위 아래로 나뉜 듯 하지만 전체적으로 큰 삼각형 구도를 이루어 안정적이다. 그림 꼭지점에 위치한 그리스도는 환하게 빛나며 강한 신성을 보여주며 그의 초자연적인 광휘는 우측 멀리 보이는 동틀 무렵의 빛과, 아랫부분의 달빛과 대조를 이룬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여성을 포함한 전경의 인물들의 키아로스쿠로는 제자들의 몸짓과 표정을 강조하며, 신과 인간, 평온과 당혹이 대비되어 더욱 신이 강조되고 있다. 공중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림 최종단계까지 수많은 라파엘로의 숙고 끝에 결정된 것이다.[6] 그림의 구도, 광선, 채색, 입체감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그림의 윗부분은 마태오의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기적 중 하나인 변용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 우측의 인물은 선지자 모세이며, 좌측은 엘리야이다. 이들을 대동한 그리스도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앞에 나타났다. 아랫부분은 사도들이 악마에 사로잡힌(간질 발작) 한 소년을 고치지 못하던 중 그리스도의 기적으로 치료되는 모습이다. 엎드렸던 소년이 일어나 입을 벌리며 악마가 떠나는 모습을 그린다.

라파엘로는 사라센의 반복적인 공격에서 나르본 시가 구원 받은 것을 그리스도의 변용과 소년의 치유로 묘사했다. 그림 왼쪽 아래의 물에 비친 달빛은 전통적으로 악마에 사로잡힌 것, 간질과 동일시 된다. 그림 하단의 인물들의 양식화되고 뒤틀린 포즈는 라파엘로가 자신이 완성한 하이 르네상스의 절정을 무너뜨리고 매너리즘의 효시가 된 예시중 하나다. 또한 그림의 긴장감과 빛을 활용한 강한 명암 대비는 바로크 회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 기법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는데, 그 당시의 라파엘로는 빛과 어두움의 강한 대조보다는 조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라파엘로의 이런 변형된 자신만의 스푸마토는 우니오네(unione)라고 부른다. 조금씩 점점 변화해간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변용'에서 레오나르도보다 더 강렬한 키아로스쿠로를 구사하고 있어 훗날의 루벤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라파엘로의 방' 초기작인 '성체논의', '아테네 학당'처럼 교회와 그리스 철학이 중심에 놓인 것이 아닌 보통 사람들을 전면에 배치하면서 이상적 세계의 구현을 추구한 과거와도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7]

바사리는 이 그림을 묘사하며 이런 말을 했다. '흰 눈과 같이 하얀 옷을 입은 그리스도는 고개를 든 채 양팔을 벌리고 있으며 삼위일체의 위계를 묘사함으로써 라파엘로 예술의 완벽함을 보여준다. 라파엘로는 전력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묘사한 듯 하다. 결국 이 작품이 자신의 절필이 되고 말 것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변용'은 명화가 가져야만 할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
[1] 160 x 110 인치 [2] 세바스티아노가 미켈란젤로에게 쓴 편지에 그런 내용이 적혀있다. [3] 액자는 현재 소실되었다. [4] 이 성당에는 브라만테가 디자인한 걸작품 템피에토(The Tempietto; 순교자 무덤)가 있다. [5] 말이 조약이지 사실은 강탈이다. [6] 많은 디자인의 드로잉이 전한다. [7] 내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