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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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봉의 장수. 고려의 한찬, 도항사령(都航司令). 궁예가 거병할 때에 휘하 장수 중 한 명이었다.2. 생애
처음에 궁예는 북원(北原)의 적 양길의 휘하에 있으면서 강원도 일대를 공략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궁예가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를 근거지로 하여 주천(酒泉)ㆍ나성(奈城 : 지금의 경상북도 봉화) 등을 치고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도 강릉)로 진출하여 갔을 때, 궁예의 무리가 3,500명에 이르게 되자 궁예는 이를 14개의 대(隊)로 나누었다. 그리고 금대(金大)ㆍ검모(黔毛)ㆍ흔장(昕張)ㆍ귀평(貴平)ㆍ장일(張一)을 사상(舍上, 부장의 다른 말)으로 삼았다고 한다.[1]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으나, 왕건이 즉위한 이후, 무인 원년(918) 여름 6월 (신유일에) 한찬 귀평(歸評)이 도항사령(都航司令)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2]
944년 건립된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문에 배열된 사람들 중에 '貴平一吉干' 이라고 언급이 된다.
삼국사기에 궁예에 의해 사상으로 임명되었을 때와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문에 나온 한자표기가 같고, 왕건의 즉위 이후 도항사령으로 임명되었을 때의 한자표기가 다른데,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궁예가 명주에 있을 때 부하로 이름이 기록되었고, 왕건의 즉위 이후 한찬의 관등에 도항사령의 벼슬을 맡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당대의 이름 있는 장수였을 가능성이 있다.
[1]
혹은 김대검(金大黔), 모흔(毛昕),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과 김대검, 모흔장(毛昕長), 귀평(貴平), 장일(張一)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고, 실제로 역사학자에 따라서 의견이 분분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사서에서 이 당시의 인물을 표기할 때는 앞에서 언급한 인물이 성과 이름을 붙혀 기록했으면, 그 뒤에 언급되는 경우에는 성을 생략하고, 이름을 표기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학자의 관점에 따라서 김대검, 모흔, 장귀평, 장일과 금대, 검모, 흔장, 귀평, 장일 또는 김대검, 모흔장, 귀평, 장일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고려사(高麗史)』 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