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덕무(德懋) / 동애(東厓)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49년 4월 20일 |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초면 송천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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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5년 10월 27일 |
경상북도 영덕군 | |
묘소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아곡리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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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49년 4월 20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초면 송천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에서 아버지 권영규(權永奎)와 어머니 영양 남씨 남유용(南有鏞)의 딸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본래 영해도호부 읍내면 괴시동(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관어대 부근에 거주했는데, 8대조 권득여(權得輿) 대에 병곡면 송천리로 이주하여 현재도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송천(松川)이라는 마을 이름 또한 권득여가 마을의 지형이 특이하다 여겨 언덕에 소나무를 심고 스스로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권득여의 호 또한 송천자(松川子)이다. #[3]1895년 8월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영덕 지방에서는 1896년 1월 22일 조직된 집강소(執綱所)[4]의 도집강(都執綱)을 맡고 있던 이수악(李壽岳)을 그 해 2월 11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고, 그 구성원들로써 의진을 구성하여 의병부대로 전환, 영해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권진모는 백중술(白重述)[5]과 함께 부장(副將)을 맡았고, 외조부 남유용(南有鏞)은 구의장(舊義將)을, 박재명(朴載明)은 중군장, 14촌 지간의 족제 권준모(權濬模)는 좌익장, 이현을(李鉉乙)은 우익장을 맡아 을미의병의 한 축을 맡았다.
이들은 이수악의 지휘에 따라 경상북도 안동군에 집결하던 도중, 고종의 의병 해산 조칙이 내려지자 이에 따라 해산하였고, 그 또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고향에 은거하며 지내다가 1915년 10월 27일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