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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호 | 순백(舜伯) / 만포(晩圃)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53년 |
경상도
의성현 점곡면 서변동 (현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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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0년 4월 3일[3] |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명고리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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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53년 경상도 의성현 점곡면 서변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에서 아버지 권철(權澈, 1818 ~ 1869. 10. 23)과 어머니 용궁 전씨(龍宮 全氏, ? ~ ?. 8. 18)[4]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896년 김상종(金象鍾)과 함께 의성군을 중심으로 의병진을 조직하고 중군장(中軍將)에 선임되었다. 그 밖에 소모장에 김수욱(金壽旭), 선봉장에 김수담(金壽聃), 관향장에 김수협(金壽莢) 등이 선임되었다. 그는 중군장으로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의성 의병진은 김도화(金道和)를 중심으로 결성된 안동 의병진을 비롯한 경상북도의 여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늦은 시기에 창의했는데, 안동 의병진에서는 이를 의성군수 김낙기(金洛耆)의 농간으로 보고 그해 3월 13일 의성군수를 처단하고자 했다. #
이에 김상종 의병진에서는 우선적으로 권대직과 이돈유를 보내 의성군수의 구출을 시도하는 한편, 3월 25일 본격적으로 봉기하여 의성군 옥산면 금학동 황학산(黃鶴山)을 점거하여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해 3월 29일 대구군· 군위군 소속 관군과 이에 합세한 일본군과의 접전 끝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분패했고, 이때 선봉장 김수담과 관향장 김수협, 권휘연, 서상부(徐相孚) 등 27명의 의병이 전사, 순국했다.
그 뒤 을미의병이 종결되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김상종 등과 함께 영남 각지 유림들에게 통문을 보내는 등 재궐기를 도모하기도 했으나 이마저도 시원치 않아 결국 향리로 돌아와 은거했고, 1930년 4월 3일 별세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