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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11 13:37:58

공영부


1. 개요2. 생애

1. 개요

孔靈符
(? ~ 465년)

남북조시대 유송의 관리로 공정의 아들이다.

2. 생애

문제 원가(元嘉) 연간 말에 사공(司空) 남초왕(南譙王) 유의선의 장사, 남군태수가 되었고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郞)을 역임하였다. 효무제 대명(大明) 연간 초에 시중(侍中)에서 보국장군(輔國將軍), 영주자사(郢州刺史)가 되었고, 입조하여 단양윤(丹陽尹)이 되었다.

공영부는 산음현(山陰縣)은 땅이 협소하고 백성이 많지만 밭이 적다고 생각해서 표문을 올려 재산이 없는 백성들을 여요현(餘姚顯), 은현(鄞縣), 무현(鄮縣)의 경례로 옮겨서 호전(湖田)을 개간할 것을 건의했다. 공영부의 건의는 많은 대신들의 반발에 직면했지만 효무제의 강한 지지를 받아서 결국 실행에 옮겨졌고 결과적으로 성과도 나왔다.

공영부는 이후 회계태수로 전출되었고 뒤이어 예장왕(豫章王) 유자상의 장사가 더해졌다. 공영부는 집안이 본래 풍부했고 밭도 넓었으며, 또한 영흥현에 농막을 세웠는데, 사방이 33리에 달했고 2개의 산을 포함하여 265경의 토지를 소유하였고 과수원도 9곳이나 있었다. 결국 어사의 탄핵을 받았는데, 공영부는 효무제에게 용서를 받았으나 대답이 부실해서 면직되었다. 뒤에 복직하여 다시 심양왕(尋陽王) 유자방의 장사가 되었고 태수는 예전과 같이 받았다.

소박하고 재간이 있었으며, 꾸밈이 없었고 관직에 임할 때마다 치적을 세웠다. 그러나 전폐제 경화(景和) 연간에 전폐제의 측근들과 대립하다가 참소를 당했고 채찍질을 당하다가 죽었으며, 공영부의 두 아들인 공담지(孔湛之)와 공연지(孔淵之)도 사사되었다. 명제가 즉위한 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