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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00:49:49

고려개국공신 4기장

고려개국공신 4기장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

1. 개요

왕건을 보필하여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운 4명의 장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 건국 후 개국공신들에 대한 포상에서 1등에 오른 공신들인데 4명 모두 기병대장에 해당하는 마군장군(馬軍將軍) 직책을 역임하였기에 개국공신 4기장, 혹은 왕건의 4기장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들은 모두 태봉의 장수들이었는데 궁예의 학정을 보다 못해 쿠데타를 모의했고 궁예를 대신할 군주로서 왕건을 추대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918년 7월, 밤중에 왕건의 집을 찾아가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고, 왕건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고려가 건국 되었다.

2. 인물 설명

2.1. 신숭겸

평산 신씨의 시조로 곡성 출신이지만 춘천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초명은 능산이었으나 왕건으로부터 신숭겸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궁술과 기마술에 능하여 사냥 중에 왕건이 마침 무리지어 날고 있던 기러기 떼를 보며 "앞에서 세번째 기러기를 쏘아보라"고 명하자 활로 그 기러기를 맞추었고 이에 감탄한 왕건이 기러기가 떨어진 곳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고 한다.

역성혁명 권유 외에도 훗날 왕건이 친정을 떠났던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의 매복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한고제를 살리기 위해 미끼가 되어 죽은 기신의 고사를 들며 자신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빌려 입고 미끼가 되어 후백제군을 유인한 후 전사했으며, 왕건은 일반 군졸의 옷을 입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2.2. 홍유

남양 홍씨의 시조로 의성부 사람이다. 초명은 홍술이었으나 왕건으로부터 홍유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918년 개국 직후 청주에서 반란의 기미가 보이자 왕건의 명으로 유금필과 함께 진천에 주둔하며 호족들을 견제하였다.
919년에는 오산성(烏山城)을 예산현(禮山縣)으로 개칭하고 대상 애선안(哀宣安)과 함께 유랑민 500여 호를 모아 들이는 공을 세웠다.
929년 공산 탈환시 왕건이 의견을 묻자 공훤과 함께 죽령의 퇴로부터 확보하자는 신중론을 폈으나 유금필의 진격론에 밀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35년에는 나주 탈환 작전을 지휘하고자 하였으나 백성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그리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 하여 유금필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는 우익의 기병을 이끌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태조의 제26비 의성부원부인 홍씨가 그의 딸이며 의성부원대군을 낳았다.

2.3. 배현경

경주 배씨의 중시조[1]로 경주 사람이다. 초명은 백옥삼이었으나 왕건으로부터 배현경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본래 궁예의 부하로서 병사로 시작하여 마군장군(馬軍將軍)이 되었다.

배현경은 태조가 사방을 정벌하는데 크게 전공을 세웠다. 담력이 보통 사람보다 특출하였으며 병졸 출신으로 누차 승진하여 벼슬이 대광(大匡)까지 이르렀다. 사서에 구체적은 전공은 없으나 태조가 동서를 정벌할 때 활약했다는 기록과, 병졸에서 장군까지 승진한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무예가 남다른 돌격대장 타입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무예가 출중할 뿐 아니라 그 성격에 강단이 있어 태조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태조 역시 배현경이 직언을 하면 숙고했다는 기록이 다수 있다.

918년(태조 1년)에 철원의 민심이 흉흉하고 고려에 대한 반감이 심해 왕권에 위협이 되리라며 송악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다.
919년(태조 2년)에 도읍지를 송악으로 옮길 때 개주도찰사로서 새 도읍을 건설하였고,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워 대상행이조상서 겸 순군부령도총 병마대장(大相行吏曹尙書兼徇軍部令都統兵馬大將)에 이르렀다.
또한 태조가 청주 사람 현률(玄律)을 순군 낭중(徇軍郞中)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일전에 군권을 가진 요직을 주었더니 반란을 일으킨 임춘길의 예를 들며 신숭겸과 함께 반대하였고 태조도 이 의견을 옳게 여기고 현률을 병부 낭중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후삼국 쟁패기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는데 936년(태조 19년) 병이 위독하니 태조가 그의 집으로 가서 손을 잡고 “아! 천명이로구나! 그대의 자손이 있으니 내 어찌 감히 잊겠느냐!”라고 말한 후 태조가 문을 나가자마자 배현경이 운명하였다. 그래서 왕은 행차를 멈추고 관비로써 장사를 치를 것을 명령한 후에 환궁하였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아들(子)은 은우(殷祐)이다.

2.4. 복지겸

면천 복씨(沔川卜氏)의 시조로, 초명은 복사귀(卜沙貴) 또는 복사괴(卜砂瑰)이다.
면천 복씨 족보에 따르면 면천 복씨의 기원은 복학사라는 인물인데 중국에서 학사 벼슬을 하다가 전란으로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신라말에 배를 타고 한반도로 넘어와 서해안의 당진에 정착했다고 한다.

복지겸이 어떻게 태봉에 복속하게 되었는지는 불명이나, 고려사에 따르면 태봉의 마군 장군으로 있다가 궁예가 민심을 잃자 이에 불만을 품고, 918년 배현경 등과 함께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개창하는데 앞장서서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918년 왕건이 왕위에 오른 후, 환선길(桓宣吉)이 역모를 일으키려 하자, 이를 왕건에게 알려 죽이게 하였으며, 임춘길의 역모를 평정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앞선 세 기장들과는 달리 전공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반란 음모를 사전에 알아내 진압한 공들이 많아 전선에 직접 참전하기보단 첩보전, 정보전에 능한 장수였으리란 추측이 있다.

생몰년도는 불명이며 당진 지역에는 그의 딸 복영랑의 영랑사 건립, 면천두견주 제조와 관련한 민간 전승들이 남아있다.
훗날 994년(성종 13년) 태사(太師)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무공(武恭)이다.
[1] 시조는 배지타(!)라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