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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0:36:26

고등학생운동

1. 개요2. 배경3. 활동과 내용4.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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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7년에 일어난 6월 항쟁을 계기로 학내민주화와 교육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고등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벌인 사회 운동. 전교조 교사 해직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1990년대 중반까지 전개되었으며 당시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던 운동권과 구별하기 위해 고등학생운동이라고 불린다.

2. 배경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변혁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사회 각계에 자리잡고 있던 독재잔재들을 청산하기 위한 행동이 시작되었다. 노동계에서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으며 1989년에는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참교육을 구호로 내세우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 대통령 직선제로의 정치체제의 변화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학생회장을 직선제로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가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1519명의 교사를 파면, 해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고등학생들이 집단행동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고등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 활동과 내용

전교조 교사들의 대규모 해임이 일어난 후 고교생들은 전국에서 집단행동을 일으켰다. 전국 250여개 학교에서 항의 시위가 발발하였으며 참여한 고등학생들은 무려 47만명이나 된다는 통계도 존재한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집단행동을 계기로 고등학생 활동가들은 학내에서 비밀모임들을 조직하였으며 각종 서적들을 학습하고 토론을 벌였으며 학내민주화와 교육민주화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작성하고 배포하였다. 고등학생운동은 학생회의 직선제 선출, 두발 자유화[1], 사학비리 척결, 자율학습 폐지, 전교조 합법화 등을 목표로 내세웠고 일부 학생들은 외부에서 벌어지던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하였다.[출처]

당시 정부와 학교에서는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을 색출하고 처벌과 징계를 가하였다. 전교조 학생사업국의 통계에 따르면 1989년 1년간 고등학생 5명이 구속기소, 10명이 불구속 기소, 7명이 퇴학, 28명이 무기정학, 40명이 유기정학, 72명이 근신징계를 당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징계를 받아야 했으며 전교조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교사들로부터 폭행과 폭언을 당해 학생이 투신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어서 충청북도에서 한 고등학생이 참교육을 요구하며 분신자살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출처]

1991년 연쇄 분신 파동 당시에도 고등학생운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명지대학교 강경대 학생이 경찰에 의해 쇠파이프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고등학생들은 조직적인 거리시위를 벌였다. 노태우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분신자살한 대학생들 중에서 3명은 고등학생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철수도 노태우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서 분신자살을 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정부와 학교의 탄압은 더욱 강해졌으며 고등학생운동도 힘을 잃기 시작하였다.[출처]

4. 결말

김지하 시인과 박홍 루카 신부의 죽음의 굿판 발언에 이어 정원식 계란세례 사건이 발발하면서 분신정국은 끝나고 말았다. 한국외대 학생들이 정원식 국무총리에게 계란세례를 퍼붓는 등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학생운동은 국민의 반감을 사 서서히 몰락했고 고등학생운동도 일련의 사태로 인해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1994년 고등학생들이 주사파 조직을 결성했다는 이른바 청소년단체 '샘' 사건으로 인해 결국 고등학생운동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1] 1982년에 전두환 정부에서 두발자유화를 시행했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도 학교장 재량에 맡겨놓았기 때문에 학교별로 두발규정이 천차만별이었던데다가, 1985년 교복자율화 보완 조치에 의해 두발규정을 스포츠 형 및 단발로 강화한 학교가 늘어났다. [출처] 열병같던 '고등학생 운동'의 추억 - 시사인 [출처]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