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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9-21 22:56:57

고도화

<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고도화
古刀化|高陶化 | 高刀化
성명 여진: 고도화(古刀化, 高陶化, 高刀化)
고려: 손보새(孫保塞)
출생 불명
사망 불명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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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세기 동여진의 추장.

2. 행적

1032년( 고려 덕종 원년) 원보 고도화는 동여진의 정조 가이로, 회화장군 야반, 귀덕장군 개로 등과 함께 91인을 거느리고 고려에 가서 토산물(土物)을 바쳤다. 1035년( 고려 정종 원년)에는 대완 고도화만 30인을 거느리고 고려에 입조했다.

1038년에는 고도화가 다른 여진 추장을 죽여 이 소식이 고려 동계병마사를 통해 고려 조정에 전해지기도 했다. 동계병마사의 보고에 따르면 고도화는 구둔과 함께, 도령장군 개로와 재물을 두고 다퉜다. 그러다 개로가 술에 취하자 그를 때려 죽인 것이다. 이웃의 어른(老長)이 본속법(本俗法)에 따라 사건을 중재해, 고도화와 구둔은 자신들의 재물을 개로의 집에 보냄으로 죄를 씻었다. 한편 고려 조정에서는 고도화 등이 고려에 귀화해 번리(藩籬) 안에 있는 이들이라고 해서 고려에서 또 처벌해야 할지를 논의했다. 문하시중 서눌 등은 방헌(邦憲, 국법)에 따라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내사시랑 황주량 등은 율문(律文)을 인용[1]하며 본속법에 따라 처리한 문제를 다시 논할 수 없다고 주장해 이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영새장군(寧塞將軍) 고도화는 1045년(고려 정종 11년)에 또 70인을 거느리고 토산물을 바쳤다. 1073년( 고려 문종 27년) 동여진 귀순주(歸順州) 도령(都領) 대상(大常) 고도화 등은 여러 주의 도령과 장군, 번장들과 함께 고려에 내부해 군현으로 편입되기를 요청했다. 고도화는 손보새라는 고려 이름을 받고 귀순주 부도령 고사(고려명 장서충)와 함께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에 임명됐다.


[1] 여러 화외인 동류가 서로 죄를 범한 것은, 각자 본속법에 의거한다.(諸化外人同類自相犯者, 各依本俗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