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북군동의 폐고분에서 출토된 6세기~7세기 경 신라시대의 기와집형 토기 1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경주 북군동의 한 신라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6~7세기 경의 가형토기로, 연구 결과 원래는 사망한 자의 뼈를 담은 유골함의 역할을 한 것이다. 죽은 이의 영혼이 아늑한 집에서 영원히 평안히 지내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유물 앞부분에 문짝을 달았던 고리 흔적이 남아있어 원래는 대문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문짝과 그 안에 들어 있었을 뼈단지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지붕의 합각(合角)부분과 벽면에는 인화문(印花文)이 있고, 벽의 아랫면에는 융기문(隆起文)으로 축대를 표현하였으며, 또한 나무 한 그루를 가는 침선으로 표현하여, 당시 이 집에 딸려있었을 정원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신라의 고위 귀족들은 주로 경주 황남동, 황오동, 황성동, 계림로, 월성로(월성동) 등에 모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대적으로 북군동은 대형, 중형 고분이 많지 않아 상기의 지역보다는 위세가 떨어지는 귀족이나 평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 집모양 토기 또한 당시 경주의 하급귀족 또는 평민의 집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세기 경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가형 토기들의 모습.
이러한 가형토기, 즉 집모양 토기들은 오직 옛 신라지역과 가야지역, 즉 현재의 경상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형태의 토기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집토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상형토기 동시기 백제에서는 생활용품을 묘사한 이러한 토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고구려 지역에서는 (상단에 나와있는) 집모양 토기 1점이 알려지긴 했지만, 이 '전(傳) 평양 집모양 토기'는 사실 도굴품이라 출토지가 확실치 않고 그냥 평양 일대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고 추측만 하고 있는 상태이다.
당시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는 총 17만 8936호(戶)에 이르는 인구가 밀집되어 살고 있었으며, 도성 안에는 초가집이 단 1채도 없이 온 집안을 황금으로 도배한 금입택 또는 기와집만 있었으며, 노래와 음악 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고 모두가 땔나무 대신 숯으로 밥을 지었다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와집모양 토기는 신라시대 당시 서라벌의 집 형태를 잘 보여주는 자료 중 하나다.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 집모양 토기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신라의 기와집모양 토기로, 당시의 기와 형태와 건축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하게 사용된다.
한겨레 : 신라시대 20㎏짜리 초대형 기와의 미스터리
훗날 2010년 경에 현 남한산성 부지에서 400여점에 달하는 대규모 신라 기와군이 발견되어 본 유물과 함께 신라의 건축공법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연구 결과 문무왕 시기에 만들어진 기와들로, 후대왕조인 조선시대에 발견된 가장 큰 기와가 3.98㎏인 반면 이 신라기와들은 18.94㎏로 수배 이상 컸다. 강도는 552kg. 70kg의 성인 8명이 올라가도 끄떡없었고, 2000cc 중형차가 그 위를 지나가도 버텨냈다.
이에 자연스럽게 의문은 "저런 기와를 무더기로 지붕에 올려놓았을 때 건물이 그것을 버텨낼 재간이 있었겠는가"로 모아진다. 물론 이런 기와가 사용된 건물지는 규모가 장대하다. 길이 53m에 폭 17.5m에 이르기 때문이다. 황룡사 금당 치미 등의 발굴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삼국시대 건물지 중에서 길이 기준으로 이보다 더 긴 사례도 경주에서 두어 군데 보고된 적이 있기는 하다. 다만 폭은 훨씬 좁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규모로 보아 남한산성 건물지가 현재까지는 최대임은 분명하다. 다만 막상 발굴조사 결과 기단을 드러낸 건물지는 거대한 크기나 초대형 기와지붕이라는 구조물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토대는 허약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