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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2-19 05:47:28

견적아

大隋
반란 지도자 · 할거정권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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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겸 장천 이문상 장천특 주비도
곽자화 조무철 종라후 종리속 동경진
풍앙 장선안 고담성 위도아 여숭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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甄翟兒
(? ~ 616년)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4. 관련문서5. 둘러보기

1. 개요

수말당초(隋末唐初)의 기의군(起義軍)의 영수(領袖)로 농민군 수장 위도아(魏刀兒)의 별장(別將).

2. 생애

616년 4월 7일, 견적아가 군중(軍衆) 10만명을 거느리고 태원군(太原郡)을 공격했고, 수나라 장수(將帥) 반장문(潘长文)과의 전투에서 적장(敵將) 반장문을 참했다. 수양제는 우효위장군(右骁卫将军) 겸 당국공(唐国公) 이연(李渊)을 태원의 유수(留守)를 맡게 했다. 이로써 총사령관 이연을 필두로 호분랑장(虎贲郎将) 왕위(王威)와 호아랑장(虎牙郎將) 고군아(高君雅), 그리고 이연의 아들 이건성(李建成)과 이세민(李世民)을 보내 견적아를 토벌하게 했다.

이연과 견적아는 서하군(西河郡) 영안현(永安縣) 작서곡(雀鼠谷)에서 서로 맞닥뜨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견적아의 군사는 2만이나 달했던 것에 불과해 이연의 군대는 이에 4분의 1인 5000 ~ 6000명에 불과했다. 군사수로 당해내지 못할 것을 안 이연은 부대를 둘로 나누고 노쇠하거나 허약한 병사들을 부대 가운데에 배치했다. 많은 기치를 세우고 치중(置重)은 모조리 뒤에서 정기와 고각(鼓角)을 따르게 하여 적군 견적아군에게 병사가 많아 보이게 했다. 당태종평전(唐太宗評傳)에 따르면 이 작전은 많은 깃발과 북으로 적을 현혹해 병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전술과 너무나도 비슷하여 이것이 이세민이 건의한 전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연 부자가 통달한 전술 가운데에 하나일 것이라고 서술했다. 견적아의 군에 겁을 준 이연은 견적아의 군대에 정예 기병 수백 기를 거느리고 이세민과 협력해 견적아군의 포위를 돌파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끝내 2만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이연의 아들 이세민은 이때 부친 이연을 따라 견적아의 반란군을 진압하여 용감하고 기지가 넘치는 군사적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구당서 태종기에 따르면
태종은 날랜 기병으로 포위를 뚫고 달려나가 활을 쏘았다. 향하는 곳마다 모두 바람에 쓸리듯 쓰러져 고조를 수많은 적병 속에서 수행했다. 마침 보병이 이르자 고조와 태종은 다시 힘껏 공격해 대파했다.
구당서(舊唐書)』「태종기(太宗紀)」 상(上)
이 기록에 자오커야오는 이렇게 말했다.
『구당서(舊唐書)』는 이세민의 용맹과 뛰어남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이세민이 기마와 궁술에 뛰어나고 “향하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쓰러뜨리는” 대담한 기백을 가졌으며 이연과 마찬가지로 기병 전술을 잘 활용해 소수의 병사로 다수의 적병을 이긴 것도 사실이다. 귀족의 자제인 이세민이 농민 반란군을 진압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것은 평생의 경력 가운데 남은 한 오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그는 진압하지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함을 깨닫고 일찍이 부친 이연에게 “지금 도적이 날로 번성해 천하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아버님깨서는 도착을 받들어 적을 토벌하고 있지만 도적을 다 없앨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결국은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은 이세민이 후일 기병 밀모에 참여하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이세민은 태원에서 1년 가까이 머물렀는데 나중에 당시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짐은 소싯적 태원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과 모여 노름하길 좋아했다.” 라고했다. “많은 사람들과 모여 노름하는” 가운데 이세민은 호걸들과 사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장인 장손성의 족제인 장손순덕 요동 전역에서 도피해 태원에 숨어 있었는데 이세민은 그와 친하게 지냈다. 유홍기(劉弘基)는 “어려서 몰락해 날랜 협객들과 사귀고 생업에 힘쓰지 않았던” 사람으로 본적지에서 도망쳐 태원에 와 있었는데 전에 이세민과 충돌한 적이 있어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한 그에게 이세민은 마음을 트고 예의로 대해 침실에 드나들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세민의 명성은 진양 현령 유문정의 주목을 끌었다. 그들은 서로 방문하며 정세를 논했는데 그야말로 의기투합했다. 이제 머잖아 스무 살이 되는 이세민은 정치적으로 점차 성숙해졌으며 수나라가 바야흐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은밀히 천하를 평정할 뜻을 품고서 초야의 선비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재물을 뿌려 빈객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환심을 몽땅 얻었다” 한 가닥 새로운 길이 이미 그의 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자오커야오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5. 둘러보기

수말이아(隋末二兒)
견적아 위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