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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강정순(康貞順) |
출생 | 1904년 3월 27일 |
평안남도 대동군 | |
본적 |
평안남도
평양부 융흥면 하수구동[1] (現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 |
사망 | 1979년 10월 16일 (향년 75세) |
가족 |
아버지 강병담 동생 5명 |
서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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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4년 3월 27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목사 강병담(康秉談)[2]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 이후 평안남도 평양부 융흥면 하수구동(현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으며, 3살 때 전라남도 돌산군(현 여수시) 남면 우학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이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로 이주하여 수피아여학교에 진학하였다.
수피아여학교에 재학하던 1919년 3월 10일 오후 2시경, 김복현(金福鉉)· 김강(金剛)· 서정희 등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것을 시작으로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3]에서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일반 시민과 기독교인은 물론 광주농업학교·수피아여학교· 숭일학교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때 강화선은 수피아여학교 학생으로서 교사 박애순(朴愛順)과 학생 홍승애(洪承愛)의 지휘 아래 2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들 시위대가 우편국 앞으로 행진을 시작하자 일제는 기마헌병대·소방대·재향군인회까지 동원하여 탄압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참여자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 일로 강화선도 곧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 1개월을 선고받아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그녀는 전라남도 여수군과 광주군 지역에서 국민 계몽 운동과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으며, 8.15 광복 후에는 전라남도애국부인회 회장 및 대한부인회 전남지부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후 1979년 10월 16일 사망하였다.
2018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