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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우메하라 헤이쇼(梅原炳昌) |
이명 |
강철(姜徹, 姜澈), 강현철 계학, 정한, 박윤세(朴允世) |
본관 | 진주 강씨 |
출생 | 1898년 7월 23일[1] |
경상남도
진주군 설매곡면 설매리 665번지 (현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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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3년 9월 20일 |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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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병창은 1898년 7월 23일 경상남도 진주군 설매곡면 설매리 665번지(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서 설악(雪嶽) 강수환(姜璲桓, 1876 ~ 1929)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우당(至愚堂) 강내운(姜來運)의 7대손으로, 아래로 자맹 강병관(姜炳觀, 1901 ~ 1949), '학생ㄱ당 사건' 등으로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 강병도(姜炳度, 1908. 7. 5 ~ ?) 등 남동생이 있었다.아버지 강수환은 파리장서 운동[3]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면우 곽종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같은 문하생 선배인 독립운동가 회봉 하겸진과 평생 절친하게 지냈다. 또한 평소 성품이 너그럽고 후해서 인망이 있던 인물이었다.[4] 남동생 강병관은 회봉(晦峯) 하겸진의 문인으로, 또다른 남동생 강병도는 상경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 중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기소유예로 석방 (동아일보 1926. 6. 17.)된 것을 계기로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하였다.
한편 그는 대대로 유학자 집안의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마을 관내 서소대[5]에서 마을 사람들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상경하여 중동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니혼대학 경제과에 입학하였다.[6]
1922년 여름, 일본 도쿄에서 조선노동동맹회 결성에 참여하여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일월회(一月會) 회원 및 정우회 상무집행위원으로 민족 계몽과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였다. 당시 일월회는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통일을 주장하면서, 그 활동 범위를 국내로 넓혀 나가고 있었다. 이때 그는 일본에서 조선공산당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4월에는 도쿄에서 조선공산당 일본부를 조직하고 검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필명 강철(姜徹)로 같은 해 8월 『이론투쟁(理論國爭)』에「‘사회주의활살(活殺)론’을 논살(論殺)함」이라는 글을 기고했으며, 그해 9월에는 도쿄에서 조선총독부 폭압정치반대 관동지방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같은 해 말 귀국했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사이 동생 강병도 또한 이른바 '학생ㄱ당 사건'으로 인해 체포되었고, 1930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 강병창 또한 4달 뒤인 그해 8월 30일에 경성지방법원 제3호 법정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명목으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하고, 1932년 7월 9일 만기 출옥하였다. 이 사이 1929년 아버지 강수환이 별세했다.
1930년 9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출옥한 후에는 한동안 진주읍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며, 1933년 3월 5일에는 경상남도 사천군에서 이기택(李起澤)·정희영(鄭禧泳) 등과 만나 조선 내 각 지방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 중인 조직체를 통일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1934년 10월 30일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동생 강병도가 출옥하였다.
한편,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비밀문서 중 《 용의조선인명부》에 '강철(姜澈), 한국인, 이명 朴允世, ML파 조선공산당 및 서울파 공산당사건 관계자. 도주.'로 수배되었던 기록이 있는데, 강병창이 강철이라는 필명을 쓴 적이 있고, 일전에 ML파 계열의 일월회 회원으로 활동했었기 때문에 동일인으로 보인다. 강철 자체가 가명이므로 당시에 주소지가 적발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1935년부터는 하겸진의 일족인 하영진(河泳珍)[7]이 설립한 광신상회(廣信商會)[8]에서 취체역으로 활동했다.[9][10]
1937년에는 아버지 강수환이 남긴 글과 시를 모아 문집인 설악집(雪嶽集)[11] 4권을 발행하였다. 때마침 1937년 2월 10일 동생 강병도가 진주읍내 영정(현 진주시 대안동)에 있던 진주합동인쇄(晋州合同印刷)에서 취체역으로 등기되어 활동한 기록이 있는데, 이곳에서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
入統營(입통영)
雪嶽 姜燧桓(설악 강수환)
地是保障七十州 (지시보장칠십주)
遊人筇屐際淸秋 (유인공극제청추)
悠悠千載元戎恨 (유유천재원융한)
城上歸雲結不流 (성상귀운결불유)
바다의 칠십 고을을 보호했던 이곳(통영)에서
나그네의 지팡이와 신발, 맑은 가을과 만났네.
아득한 천년동안 원융(元戎:군사들의 우두머리, 최고사령관)의 한이,
성 위에 휘감는 구름 되어 흩어지지 않는구나
설악집에 실려 있는 위 입통영 이라는 한시는 2012. 6. 4. 통영지역신문인 한산일보에 일제강점기 국가를 걱정하는 한시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雪嶽 姜燧桓(설악 강수환)
地是保障七十州 (지시보장칠십주)
遊人筇屐際淸秋 (유인공극제청추)
悠悠千載元戎恨 (유유천재원융한)
城上歸雲結不流 (성상귀운결불유)
바다의 칠십 고을을 보호했던 이곳(통영)에서
나그네의 지팡이와 신발, 맑은 가을과 만났네.
아득한 천년동안 원융(元戎:군사들의 우두머리, 최고사령관)의 한이,
성 위에 휘감는 구름 되어 흩어지지 않는구나
1937년 8월 17일 동아일보 진주기획기사에 글을 기고했다.[12]
1938년 6월 15일 강병창은 강병도와 함께 합천군 합천면 합천동(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에 있던 합천약주제조(陜川藥酒製造) 주식회사[13]를 인수하고, 각각 대표취체역, 지배인으로 등기하였다.
강병창과 합천군의 연관성은, 일전에 강병도와 적색노조 사건으로 같이 체포되었던 강두석(姜斗錫)이 합천면 영창리 이경진의 집에서 진주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었다는 1932년 7월1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1932년 7월1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이때 강두석 외에 김점봉(金點鳳), 김상필(金相弼), 장호관(張虎觀) 등과 함께 강병창의 동생 강병관도 검거되어 극비리에 취조를 받았다. 강병관은 취조 후 석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를 지내고 일찍이 강병창과 일월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정규(金正奎)가 1938년 6월 23일 설립된 합천양조(陜川釀造) 주식회사의 이사로 있었고,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에서 태어나 곽종석의 문인으로 청년회연합회와 신간회에서 활동했던 박운표(朴運杓)도 있었다.
그러다가 1939년 4월 강병도가 합천약주제조 지배인에서 해임되었고, 같은 해 12월 진주합동인쇄 지배인 직위를 사임했는데, 어떤 사유인지는 알 수 없다.
이어 1941년 5월 2일 강병창은 회사를 양도하였는데, 구창회(具昌會, 1897년생)[14]가 와서 지배인으로 5월 2일 등기한 뒤 같은 날에 천도교 신자로 창녕군 사람 하상석(河翔錫)에게 재차 양도하였다. 구창회는 화요회, 신간회 회원이고 독립운동으로 복역한 사람이다. 강병창 본인이 회사를 정리하지 않고, 알 수 없는 사정으로 구창회가 지배인 등기 후 당일 하상석에 양도한 것으로 보인다. 지배인은 대표 부재시 회사의 운명을 법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리이다.
1945년 진주에서 8.15 광복을 맞았으며, 강병도는 당시 경성부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해 1945년 10월 경남 인민위원회 산업부장에 선임되었고, 11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경남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6년 1월 27일 부산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대표단 환영대회에 참석하여 미소공동위원회 대표단에 보내는 성명서를 낭독하였다. 1월 31일 조직된 민전부산시위원회의 선전부를 담당하였다. 1948년에는 강병도와 함께 이석태(李錫台)의 사회과학대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해체 후 진주지방법원의 모든 기록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동생 강병도는 해방 후 해방일보 편집위원회에서 근무했으며, 1946년 7월 21일부터 같은 달 25일까지 독립신보사에 「조선 파시즘의 해부」라는 글을 기고했다. 1946년 문우인서관에서 발행한 민주주의12강에 정리되어 있다.
그 뒤 행방은 알 수 없으며, 다만 1953년 9월 20일로 사망신고가 되었다.
[1]
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7월 13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2]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3]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대표는 137명이지만 면우 곽종석은 이 일이 발각되어 유림대표로 서명한 이들이 고초를 겪을 경우 후일을 도모해야 하기에 50세 이하 유림은 서명에서 제외시켰다.
[4]
1924년 6월 5일자 시대일보 기사에 관후(寬厚)한 지주로 소작농을 위해 선행을 베푼 것이 소개되기도 했다.
[5]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 700-9번지에 있었다.
[6]
당시 주소지는
도쿄부 시타바시정(下橋町) 1793.
[7]
하겸진의 일족이자 하겸진의 문인이다. 하겸진의 사위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형인 이병각이고, 하영진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의 손위 처남이다, 당시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대지주 중 한 사람이었으며
파리장서 운동 때 거금을 지원했었다.
[8]
진주읍내 본정(현
진주시
중성동)에 있었다.
[9]
문학 박사로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1925 ~ 2017)이 찬한 우천하공 묘갈명(友泉河公墓碣銘)에 기록되어 있다.
[10]
진양은 영남의 거읍으로 세족고가가 많은데 수곡의 하씨가 가장 문O으로 일컬어진다. 우성(佑成)이 소시에 어른들로부터 지금 하씨에 문학에 회봉(晦峯)이 있고 부(富)에 우천(友泉)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대개 회봉 선생은 유림의 원로로서 동남의 의표이었고 우천공은 락선호의(樂善好義)하여 종방(宗邦)을 돌보며 동포(同胞)에 마음을 두어 흥학육영에 전력하였기 때문이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된 얼마 후에 진양에 갔었는데 회봉옹은 그때 이미 OO후이었고 우천공은 마침 출타하여 그 문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뒤 삼십 년을 지나 우천공의 후사인 석근(錫根)과 서울에서 알게 되어 곧 벗을 삼았고 이어 공의 비문을 부탁받으니 우성이 어찌 불문하다 하여 사양(辭讓) 할 수 있으리오.
공의 휘는 영진이오 자는 여옥이며 우천은 그 호이다. 시조 휘 공진은 고려 충신으로 그 활력이 역사에 빛나며 중고에 송정 선생 휘 수일은 남명에 사숙하고 대각서원에 배향되니 곧 공의 십이대조이다. 고조는 휘 철현이고 호는 묵화이며 증조는 휘 성운이며 호는 인재이며 조는 휘 재억이오 선공가감역이었고 고는 휘 세진이오 성균진사를 지냈는데 역대로 모두 후덕과 인문이 있었다. 비는 해주정씨 충공문중의 후(後)이오 감찰환교의 따님이며 부덕의 O범이 있었다.
공이 1896년 고종 병신에 출생하여 십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였으며 모부인의 명으로 회봉옹에게 수학하였다. 1919년 기미인산날에 동향 허공 (許公)만정 (萬正)과 한성에서 만세운동을 몸소 겪고 곧 더불어 독립 OO의 방도를 강구한 끝에 시세를 헤아려 우선 인재 양성보다 마땅함이 없다고 판단되므로 돌아와 창의모재하여 고등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외인의 O제때문에 여학교로 만들고 해온 (解慍) 백남훈 (白南薰)을 맞아 교장으로 삼았다. 지금 진주여자고교가 곧 그것이다. 또한 그 뒤에 당시 부호(富豪) 이종만 (李鍾萬)과 협력하여 한성에 남우학원 (南友學院) 을 세워 이를 확장육성 (擴張育成)해 오던 중 후일 매부(妹夫) 조공 (趙公) 홍제 (洪濟) 에게 맡겨 터전을 크게 넓히니 곧 지금의 배명 (培明) 고교이다. 이보다 앞서 심산 (心山) 김창숙(金昌淑)옹이 유림의 장서를 OO 하고 기미 평화회의에 나아가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그 비용이 거대하여 공이 거금을 내어 이를 도우고도 일찍이 일을 타인에게 자랑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더욱 공을 높이 보았다. 광복 후 시사일변함을 보고 서울의 우거(寓居)에서 OO하여 고장(故庄)으로 돌아온 후 다시 육이오의 난을 겪게 되어 크게 지친 공은 O생의 사업으로 심열을 기울인 학교에서마저 손을 떼고 종래 원림에 은거하는 몸이 되었다. 이어 존조보본에 전념하여 선묘를 개수하고 석의를 갖추며 또한 재종족과 논의하여 진양성중에 충의당과 경충사를 지어 선조를 모시니 이것이 공의 평생의 대업이다.
1966년 병오 8월 19일에 몰하니 향년 칠십일이오 대천 구태동산 경자원에 장사하였다. 배는 광주이씨 상용의 따님이오 숭덕재 윤경의 후이며 O순정O하여 군자의 배필로서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묘는 사곡뒤 서록해좌이다. 일자 석근은 훌륭히 가업을 잇고 밀양박씨 낙촌충원의 후인 태식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병길, 병훈, 병환, 병O를 두었고 병길은 일남일녀, 병훈은 이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하여 가로대 우석을 벗하였으니 부하면서 청하여도다. 일생에 선을 행하면서 이름을 구하지 않았도다. 살아서 순하였으니 돌아가서도 평안하리라.
성균관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여주 이우성 찬
무술년 2월 17일 [11] 문집의 서문은 회봉(晦峯) 하겸진이, 발문은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썼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해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경상국립대학교 도서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서 소장 중에 있다. [12] 전문 : 먼저 도서관 설치 – 강병창씨 담(談)
우리는 흔히 사회적 교육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 교육이란 결코 학교 교육보다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란 것은 학교의 연장인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든지 그 사람의 인격과 식(?)견이 최후적으로 성숙되고 결정되는 것은 사회적 교육에 의하여서만 가능하고, 그리고 이 사회란 결국 그 사람들의 활동에 의하여 운(?)행되는 것이니 사회 교육의 정체는 이 사회 발전의 정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 교육을 운위할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도서관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도서관이란 그 기관 자체가 종합적인 동시에 대중적이란 의미에 있어서 사회 교육기관으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삼만여의 인구를 포옹(?)하고 매년 수백 명의 졸업생을 내는 우리의 대(大) 진주가 아직까지 도서관 한 개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확(?)실히 중대한 사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주란 곳은 다른 의미로 보아 도서관의 필요가 특히 강조되는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나온 청년들이나 시민중00층의 대부분은 갈 곳이 없다는 그러한 단순한 이유로 주사(酒肆)와 기가(妓家) 출입을 사회 교육으로서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갈 곳을 몰라서 향락가에 방황하는 청년에게 갈 곳을 지시하고, 사고(思考)의 대상이 없어서 0념망상을 일삼는 인사에게 사고 재료를 제공하고 우(愚?)0의 정화를 희구하나 견문은 모두 이취(泥醉) 00뿐인 자에게 진정한 예술을 보여준다면 이 어찌 위대한 사업이 아니겠는가? 환락가의 한복판에 학술의 전당이 0존하여 만당한 학구의 사(士)가 학리를 연구(?)하고 대예술을 제작하고 세계적 저술을 구(?)상하고 있다는 거룩한 사실 그것이 벌써 환락가에 대한 커다란 위협적 존재가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진주의 뜻있는 인사여! 퇴폐의 0으로 전락되려는 이 고을을 구하기 위하여 분기하라! [13] 이 회사는 김진수(金鎭壽)가 대표취체역으로 1937년 8월 11일 설립, 1937년 11월 17일 등기한 회사이다. 1937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일본군에게 헌금한 내역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진수는 친일 관련 인사로 보인다. [14] 1919년 3.1 운동 당시 괴산면 면서기로 있다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내 장날 홍명희가 만세운동을 벌인 후 다음 장날인 3월 24일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洪性憙), 소수면 서기 김인수(金仁洙) 등과 의논하고 2차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일제의 재판기록에는 "홍성희와 구창회는 공모하여 3월 24일 괴산 장날에 한국 독립만세를 불러 독립운동을 하자고 군중을 선동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라고 판결하였다. 구창회는 그해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았고, 1920년 출옥 후 시대일보 판매부 직원으로 근무했다. 1924년 화요회에 가입했고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시대일보사 내에 조직된 경성부 제4야체이카, 언론기관 프랙션 등에 배속되었다가, 그해 7월 체포되어 1928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29년 3월 17일 출옥하였다.
그러므로 같은 시기 경성부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한 강병도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강병창 등과 이미 면식이 있던 사이로 보인다.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 참고.
공의 휘는 영진이오 자는 여옥이며 우천은 그 호이다. 시조 휘 공진은 고려 충신으로 그 활력이 역사에 빛나며 중고에 송정 선생 휘 수일은 남명에 사숙하고 대각서원에 배향되니 곧 공의 십이대조이다. 고조는 휘 철현이고 호는 묵화이며 증조는 휘 성운이며 호는 인재이며 조는 휘 재억이오 선공가감역이었고 고는 휘 세진이오 성균진사를 지냈는데 역대로 모두 후덕과 인문이 있었다. 비는 해주정씨 충공문중의 후(後)이오 감찰환교의 따님이며 부덕의 O범이 있었다.
공이 1896년 고종 병신에 출생하여 십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였으며 모부인의 명으로 회봉옹에게 수학하였다. 1919년 기미인산날에 동향 허공 (許公)만정 (萬正)과 한성에서 만세운동을 몸소 겪고 곧 더불어 독립 OO의 방도를 강구한 끝에 시세를 헤아려 우선 인재 양성보다 마땅함이 없다고 판단되므로 돌아와 창의모재하여 고등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외인의 O제때문에 여학교로 만들고 해온 (解慍) 백남훈 (白南薰)을 맞아 교장으로 삼았다. 지금 진주여자고교가 곧 그것이다. 또한 그 뒤에 당시 부호(富豪) 이종만 (李鍾萬)과 협력하여 한성에 남우학원 (南友學院) 을 세워 이를 확장육성 (擴張育成)해 오던 중 후일 매부(妹夫) 조공 (趙公) 홍제 (洪濟) 에게 맡겨 터전을 크게 넓히니 곧 지금의 배명 (培明) 고교이다. 이보다 앞서 심산 (心山) 김창숙(金昌淑)옹이 유림의 장서를 OO 하고 기미 평화회의에 나아가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그 비용이 거대하여 공이 거금을 내어 이를 도우고도 일찍이 일을 타인에게 자랑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더욱 공을 높이 보았다. 광복 후 시사일변함을 보고 서울의 우거(寓居)에서 OO하여 고장(故庄)으로 돌아온 후 다시 육이오의 난을 겪게 되어 크게 지친 공은 O생의 사업으로 심열을 기울인 학교에서마저 손을 떼고 종래 원림에 은거하는 몸이 되었다. 이어 존조보본에 전념하여 선묘를 개수하고 석의를 갖추며 또한 재종족과 논의하여 진양성중에 충의당과 경충사를 지어 선조를 모시니 이것이 공의 평생의 대업이다.
1966년 병오 8월 19일에 몰하니 향년 칠십일이오 대천 구태동산 경자원에 장사하였다. 배는 광주이씨 상용의 따님이오 숭덕재 윤경의 후이며 O순정O하여 군자의 배필로서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묘는 사곡뒤 서록해좌이다. 일자 석근은 훌륭히 가업을 잇고 밀양박씨 낙촌충원의 후인 태식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병길, 병훈, 병환, 병O를 두었고 병길은 일남일녀, 병훈은 이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하여 가로대 우석을 벗하였으니 부하면서 청하여도다. 일생에 선을 행하면서 이름을 구하지 않았도다. 살아서 순하였으니 돌아가서도 평안하리라.
성균관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여주 이우성 찬
무술년 2월 17일 [11] 문집의 서문은 회봉(晦峯) 하겸진이, 발문은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썼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해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경상국립대학교 도서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서 소장 중에 있다. [12] 전문 : 먼저 도서관 설치 – 강병창씨 담(談)
우리는 흔히 사회적 교육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 교육이란 결코 학교 교육보다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란 것은 학교의 연장인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든지 그 사람의 인격과 식(?)견이 최후적으로 성숙되고 결정되는 것은 사회적 교육에 의하여서만 가능하고, 그리고 이 사회란 결국 그 사람들의 활동에 의하여 운(?)행되는 것이니 사회 교육의 정체는 이 사회 발전의 정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 교육을 운위할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도서관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도서관이란 그 기관 자체가 종합적인 동시에 대중적이란 의미에 있어서 사회 교육기관으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삼만여의 인구를 포옹(?)하고 매년 수백 명의 졸업생을 내는 우리의 대(大) 진주가 아직까지 도서관 한 개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확(?)실히 중대한 사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주란 곳은 다른 의미로 보아 도서관의 필요가 특히 강조되는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나온 청년들이나 시민중00층의 대부분은 갈 곳이 없다는 그러한 단순한 이유로 주사(酒肆)와 기가(妓家) 출입을 사회 교육으로서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갈 곳을 몰라서 향락가에 방황하는 청년에게 갈 곳을 지시하고, 사고(思考)의 대상이 없어서 0념망상을 일삼는 인사에게 사고 재료를 제공하고 우(愚?)0의 정화를 희구하나 견문은 모두 이취(泥醉) 00뿐인 자에게 진정한 예술을 보여준다면 이 어찌 위대한 사업이 아니겠는가? 환락가의 한복판에 학술의 전당이 0존하여 만당한 학구의 사(士)가 학리를 연구(?)하고 대예술을 제작하고 세계적 저술을 구(?)상하고 있다는 거룩한 사실 그것이 벌써 환락가에 대한 커다란 위협적 존재가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진주의 뜻있는 인사여! 퇴폐의 0으로 전락되려는 이 고을을 구하기 위하여 분기하라! [13] 이 회사는 김진수(金鎭壽)가 대표취체역으로 1937년 8월 11일 설립, 1937년 11월 17일 등기한 회사이다. 1937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일본군에게 헌금한 내역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진수는 친일 관련 인사로 보인다. [14] 1919년 3.1 운동 당시 괴산면 면서기로 있다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내 장날 홍명희가 만세운동을 벌인 후 다음 장날인 3월 24일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洪性憙), 소수면 서기 김인수(金仁洙) 등과 의논하고 2차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일제의 재판기록에는 "홍성희와 구창회는 공모하여 3월 24일 괴산 장날에 한국 독립만세를 불러 독립운동을 하자고 군중을 선동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라고 판결하였다. 구창회는 그해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았고, 1920년 출옥 후 시대일보 판매부 직원으로 근무했다. 1924년 화요회에 가입했고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시대일보사 내에 조직된 경성부 제4야체이카, 언론기관 프랙션 등에 배속되었다가, 그해 7월 체포되어 1928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29년 3월 17일 출옥하였다.
그러므로 같은 시기 경성부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한 강병도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강병창 등과 이미 면식이 있던 사이로 보인다.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