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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1:03:06

헬라 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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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대중 매체4. 같이 보기

1. 개요

헬라(HeLa) 세포는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 1920 ~ 1951)라는 자궁경부암 환자에게서 1951년 2월 8일에 채취한 세포로, 죽지 않는 불멸의 세포로 유명하다.

2. 상세

헬라 세포 발견 이전의 생물학 연구에서는 암세포라고 해도 세포 증식 한계가 존재하여 체외 배양 시 세포가 며칠을 못 넘기고 전멸했기에 연구에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헬라 세포는 영양만 공급하면 세포 증식 한계를 무시하고 무한히 증식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헬라 세포의 등장으로 인해 연구소에서 매 실험마다 일일히 검체를 채취해야하는 번거로움을 덜어준 것은 물론 실험 환경이 세포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암세포가 지금까지도 모든 종류의 생물학 연구에서 널리 사용되는 헬라 세포주(HeLa cell line)의 조상이며, 이 헬라 세포는 소아마비 백신의 발명, 최초의 복제세포 개발, 체외수정(시험관 아기) 시술법, 암 연구, 유전자 지도(게놈) 연구, 독성검사 등 세기적 발명/발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2019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 퍼진 양만 해도 약 20톤에 이른다. 각종 치료제의 임상실험에서 살아 있는 원숭이 대신 이용되기도 했으며 우주개발과 핵실험 등에도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사용되었다.

파일:헨리에타랙스.jpg

헨리에타 랙스의 생전의 모습.

헬라 세포의 본래 숙주인 헨리에타는 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Roanoke)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으로, 19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자궁경부암에 걸렸다. 처음에는 여섯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고 생각했지만 임신이 아니라 암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1950년대 미국에 남아있던 인종차별 분위기 때문에 지역에서 유일하게 흑인 환자를 치료해 주던 존스 홉킨스 대학교 병원까지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방사선 치료에도 불구하고 암세포가 전이되어 결국 1951년 병원에서 사망했다. 당시에는 연구윤리가 제대로 정립된 시절이 아니었던지라, 흑인인 헨리에타에게는 채취 당시 조직의 기증 의사를 묻는 등 아주 기본적인 조치도 행해지지 않았다.

이후 그 암세포들은 이전의 다른 세포와 달리 체외에서 배양했을 경우에도 죽지 않고 끊임없이 분열하는 특성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유족들에게 이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헬라 세포가 연구수단으로 널리 전파되는 동안 헨리에타의 암세포가 연구/상업적 목적으로 유용한 수단이 된 줄도 모른 채, 제대로 된 보상 한번 받지 못하고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환자의 가족은 환자의 암세포가 따로 보관되었다는 사실을 약 20년간 전혀 알지 못했다.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레베카 스쿨루트 저)에 따르면, 남편 데이비드 랙스와 자녀 4명을 비롯한 유족들은 헬라 세포가 비교적 자유롭게 배포되고, 그 세포들이 의학적 연구뿐 아니라 온갖 기괴한 목적으로도 쓰이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는 상당히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이러한 존스 홉킨스 병원 관계자들의 행위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연구 윤리라는 게 대체로 그 정도 수준이었다.

전술된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은 레베카 스쿨루트가 1인칭 시점에서 유족, 연구시설 등을 인터뷰하며 쓴 책으로, 유족들과 헨리에타 랙스를 인간으로서 집중해서 바라본다. 헬라 세포와 헨리에타 랙스에 대해서 알기에 아주 좋은 자료다. 이 책에서 흑인 영어 서남 방언으로 번역했는데, 번역 팀에서 전문가까지 모셔 번역을 한 덕에 그 질이 매우 찰지다.[1]

이후 헨리에타 랙스의 기념관을 세우려는 노력도 했지만 무산되었다.[2] 하지만 2020년 8월 지인들이 헨리에타 랙스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설립하고 기념사업을 시작했다.

70여 년만에 후손들에 대한 보상이 시작되었다. # 하지만 헬라 세포를 이용해 이익을 챙겼던 미국 메사추세츠 주 기반 바이오기업인 써모피셔 사이언티픽은 불복했고, 랙스의 유족과 소송전에 돌입했다. 이후 2023년 8월 1일 써모피셔 사이언티픽 측과 랙스 유족 간 합의가 이루어져, 마침내 도둑맞은 세포의 보상을 받게 되었다. #

헨리에타 랙스의 손자 알프레드 랙스 카터는 네이처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과학자들이 잘못된 방법을 썼지만,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라고 말했다 한다.

네이처와 미국의사협회지(JAMA) 등 권위 있는 학술지들이 기고로 그를 기렸고, WHO에선 2021년 헨리에타 랙스 기념 행사를 열어 랙스가 당한 착취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이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랙스는 신체가 과학에 남용된 수많은 유색인종 여성 중 하나로 착취를 당했다고 지적했다.[3] 세계 최대 의학 연구기관 미국 국립보건원 원장이 검사 채취와 관련된 연구윤리 정책의 변경을 시사하기도 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학명을 명명하고 새로운 종으로 분류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무산되었다고 한다.

2022년에는 미국 상원에서 랙스에게 황금 훈장을 수여하기 위한 특별법(Henrietta Lacks Congressional Gold Medal Act)이 발의되었다.

3. 대중 매체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486회, KBS 스펀지 49회 방송분과 지식채널 도둑맞은 세포 편에서 소개됐다. 서프라이즈의 헬라 세포 편은 고증이 잘 되어 있기에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서프라이즈에서 다룬 내용 스펀지 49회

유튜브 등에서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헨리에타 랙스를 어린 소녀로 설명하는 잘못된 자료가 돌아다니고 있다. 실제로는 자궁경부암으로 죽었을 당시 31세의 어엿한 성인으로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담배농장에서 일했던 사회인이었다. 그 말은 세포만 남긴 게 아니라 정상적으로 낳은 자녀도 있다는 소리다. 당장 본 문서에도 기재되어 있다시피 당사자의 손자가 헬라 세포 사건에 대한 평가를 남긴 바도 있다. 오히려 이 점은 서프라이즈에서 제대로 반영했을 정도.

4. 같이 보기



[1] 미국 흑인 영어를 서남 방언으로 번역한 것이 적절했는지 지적하는 의대 교수의 기고가 있었으며, 이후 번역자 중 한 명인 의대 교수가 이를 반박하는 기고를 하였다. [2] 거주지였던 미국 버지니아주 클로버에 추모비가 있다. [3] 랙스가 흑인 여자라서 당했다기보다는 1950년대 당시 연구윤리가 그 수준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후 1955년에 사망한, 세계적인 존경을 받았던 백인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헨리에타와 비슷하게 그 어떤 사전동의도 없이 그의 뇌가 척출되어 해부 및 연구에 이용되어 많은 비난을 받았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유명한 과학자라 비난 여론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었고 이마저도 얼마 안 가 사그라들어 21세기가 된 현재까지 그 어떤 보상이나 사과 없이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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