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존 인물 김사복
자세한 내용은 김사복 문서 참고하십시오.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김사복에 대해서 알려진 건 이름 석 자와 "힌츠페터를 도와준 한국인 택시기사"라는 2가지가 전부였기 때문에 적어도 김사복 자체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각색이다. 영화 내에 출연하는 김사복이라는 인물에 관한 오류는 굉장히 많은 편이지만 개봉 전 해당 인물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매우 한정되었기 때문에 창작으로 제작되었고, 영화가 개봉된 후 많은 관심을 얻으면서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많이 밝혀진 경우다. 이러한 점은 영화 타이타닉과 매우 비슷한 경우로, 영화가 오류를 가지고 있는게 아닌 영화의 유명세 덕분에 오류가 발견될 수 있었던, 매우 희귀한 케이스다.
영화가 개봉한 후 김사복의 큰아들인 김승필이 언론에 아버지의 사연을 제보함에 따라 실제 김사복에 대한 자세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영화 속의 인물 김사복(김만섭)과, 실제 실존인물 김사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실제 영화상에서 김사복과 가장 성격이 흡사한 인물을 찾는다면 정진영이 연기한 '이 기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아래의 내용은 장남인 김승필이 영화 개봉 이후 밝힌 내용을 근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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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복은 가명이 아니었다.
사실 실존인물 김사복에 대해 알려지기 전까지는 김사복이란 인물이 가명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이 유력했으며 영화상에서도 본명은 따로 있는데 위르겐 힌츠페터에게 김사복이란 가명을 알려주었던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실존인물 김사복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가명이 아니라 본명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약 4년후에 세상을 떠나 1980년대 후반 광주민주화운동이 복권되었을때는 이미 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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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복의 직업은 일반 택시운전사가 아니라 호텔 택시 운전사였다.
힌츠페터와 제작진들이 그동안 김사복을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김사복이 택시 운전사 조합에 등록되지 않은, 정식 택시 운전사가 아닌 호텔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영업하는 '관광호텔 택시 운전사'였기 때문이다. 단, 1980년대 당시 호텔 택시 운전사 역시 정식 택시 운전 면허로 취급받았으므로 영화의 제목인 '택시 운전사'가 틀린 표현은 아니다. 김사복씨는 파레스 호텔에서 관광택시를 운영했으며 취재 당일에는 조선호텔에서 힌츠페터와 루모어를 만나 광주에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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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복은 딸 대신 20대의 아들 두 명이 있었다.
영화상에서 김만섭이 아내를 잃고 어린 딸을 혼자 키우는 것은 영화적 각색이다. 실제로는 80년 당시 20대에 접어든 아들 둘이 있었으며 아내 역시 생존해 있었다. (2017년 시점에도 생존이 확인되었다.) 말수가 많지는 않지만 자식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으며, 장남 김승필 씨가 군 입대를 앞두기 전까지 술자리에서 광주의 이야기를 여러 번 꺼냈다고 한다. 힌츠페터에게 독일 과자를 선물받아 자식들에게 선물한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또한 영화상에서 만섭은 21세기까지 택시 영업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김사복은 힌츠페터를 만난 지 4년 후인 1984년,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했다. 광주민주화 운동이 복권된 이후에 힌츠페터 기자가 한국에 찾아와 김사복 씨를 찾았음에도 만나지 못했던 건 본인을 숨긴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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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복이 몰았던 차는
기아 브리사가 아닌 최고급 오펠, 포드 세단이다.[1]
영화상 김사복의 곤궁한 가정 형편은 순전히 창작된 것이다. 실제로는 호텔 택시 2대와 개인 차량 1대, 도합 3대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 상당한 부자였다.[2] 일반 택시와 다르게 호텔 택시는 현재의 카카오 블랙 택시처럼 번호판만 다를 뿐 캡이 없어 외관상으론 일반 자동차와 전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군인들이 힌츠페터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간 이유가 있었던 것. 차 역시 기아 브리사가 아닌 당시 엄청난 고급차였던 새한 레코드였고 이는 '외국계 중역이 타고 있다'는 거짓말에 더욱 신빙성을 주었다.[3] 즉, 당시 새한 레코드는 회장님들이나 타고 다니는 고급차였으므로 오히려 속지 않는 쪽이 이상하다. 또한 위르겐 힌츠페터 본인도 그가 탔던 택시는 오펠 차였다고 회고한다. 이 점을 볼 때, 힌츠페터가 탔던 택시는 한국에서 조립한 오펠의 세단이었던 새한 레코드(좀 더 정확히 말하면 GM 코리아 레코드)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2003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목격자>의 영상 속에 등장한 사진을 참고하면, 실제 당시 GM코리아의 생산 차량인 검은색 새한 레코드(D형)의 후측면 검문 장면이 등장한다. 2번째 취재차 광주에 재방문했을 때 기사에 등장한 '오펠', 즉 검은색 레코드를 이때 타고 간 것으로, 실제 다큐멘터리에도 검은색 레코드가 몇 차례 등장한다. 실제와 달리 새한 레코드가 아닌 기아 브리사로 설정한 것은, 극중 곤궁한 처지인 김만섭의 캐릭터를 위해 설정된 것이라고 봐야한다. 그 시절 소형차에 불과했던 기아 브리사와는 달리[4] 새한 레코드는 최고급 중형~준대형 차량이었기 때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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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복은 평소 신념이 강한 인권주의자였다.
영화상에선 김만섭이 돈에 울고 웃는 속물 기질이 있는, 그러면서도 정이 많고 속은 깊은 평범한 소시민으로 나오지만 실존인물 김사복은 평소 사상계 등의 잡지를 즐겨읽고 민중운동가 함석헌 선생과 사진을 찍는 등, 민중운동과 인권에 관심이 많은 진중한 학자형 인물이었다. 극중 김만섭이 아무 사정도 모르고 남의 예약을 가로챈 것과 달리, 실제론 김사복이 비상계엄 상황에 대해 힌츠페터와 루모어에게 직접 브리핑해주었다. 힌츠페터 회고록의 "As we drove, Kim briefed us on the situation"라는 대목에서 확인되는 부분. 심지어 실제 김사복은 필름을 한 번 일본에 보낸 뒤에도 다시 힌츠페터에게 연락해 두 번이나 목숨을 걸고 연속해서 광주로 향하는 등,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힌츠페터의 영문 수기에 의하면, 택시 기사 김사복은 그의 23~27일 광주 2차 취재 때도 동행하였다. 이 내용은 국내에 알려진 그의 취재기 5.18 특파원 리포트 - 17년 만에 공개된 내외신 기자들의 광주 5월민중항쟁취재수첩, 도서출판 풀빛 1997에 없으나, 2000년 출판된 영문판 The Kwangju Uprising: Eyewitness Press Accounts of Korea's Tiananmen (Pacific Basin Institute Book, 2000)에 내용이 나온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후, 서울에서 5월 23일 오전 10시 30분경 김사복과 함께 다시 광주로 향한다. 이 부분은 장남인 김승필이 직접 아쉬운 부분이라고 한 부분이다. 영화는 어느정도 입체적인 캐릭터를 위해 김사복을 평범한 사람으로 그렸다지만, 사실은 분야는 다르지만 전형필을 보는 듯한 영웅적인 인물이였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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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김사복은 유창한 영어가 가능했다.
영화에선 상당히 낮은 수준의 영어 실력 때문에 아주 기초적인 의사소통만 주고받을 수 있고 통역사가 따로 있다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존인물인 김사복은 원래 일본어나 영어 등 유창한 외국어가 가능해서 외국 기자들과 큰 무리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1.1. 김사복 발견
영화가 상영된 후 김사복에 대한 근황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영화 개봉 3일 후 김사복의 큰아들임을 자처하는 사람인 김승필이 나타나 언론 인터뷰를 했고, 2달 뒤에는 마침내 실존인물 김사복의 정체가 확인되었다.그리고 9월 5일, 김승필이 CBS 노컷뉴스에 공개한 사진 중 김사복 씨와 힌츠페터가 같이 있는 사진이 당시 동료 특파원이었던 피터 크레입스에게 확인되어서 최종 확정. 김승필 씨의 주장은 사실로 드러났다. 김승필 씨에 따르면 외신 기자랑 자주 동행하면서 재야의 인사들과 만날 기회도 자주 가졌고, 평소 사상계도 자주 읽었다고 한다. 실제로 같이 공개된 사진 중에는 민중운동가 함석헌과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리고 9월 6일, 최종적으로 본 영화의 제작사인 더램프 측에서 힌츠페터의 아내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타트 여사에게 사진을 보내 '남편이 맞다'는 확답을 받았고, 공식적으로 김사복 씨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기사
2. 실화와 차이점
- 녹음 담당 기자인 헤닝 루모어가 안 나온다. 원래는 힌츠페터는 촬영, 루모어가 녹음을 담당해서 2명이 광주로 간 것인데, 촬영 담당인 위르겐 힌츠페터만 등장하고 무비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만 나온다.[6] 영화 제작 과정 중 자료조사를 당연히 했을 것이고, 검색만 해봐도 나오는 기본적 사실을 틀린 걸로 봐서는 캐릭터가 현실에 맞게 3명이 되면 그만큼 버디 무비로서의 스토리 짜기가 곤란해질 수 있어 의도적으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힌츠페터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알린 루모어에겐 꽤나 미안한 일이다.
- 실제로 힌츠페터와 루모어가 카메라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담은 내용은 21일 저녁 나리타 공항에서 독일로 보내졌고, 22일 저녁 ARD가 서독 전역에 동시 송출하던 북부독일방송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타게스샤우를 통해 즉시 보도되었다. 그리고 23일 잠입해서 찍은 필름까지 보태서 그해 9월에는 《기로에 선 한국》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방송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가톨릭 신부들이 번역해서 국내로 들여온 이후, 언론통제하의 제5공화국 시절에 비디오로 복제되어서 은밀하게 재야에 유입되었고 성당과 대학가 등에서 상영되었는데, 비 공식적으로 80년 초반부터 전라북도 남부권과 전라남도 북부권에서 알음알음 방영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당시 힌츠페터가 촬영한 영상과 다른 외신기자들이 촬영한 영상들을 짜깁기 해서 약 3~40분 내외의 분량으로 방영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7년 5월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최초(본격적)로 상영되었는데, 이 상영을 주도한 부산의 인권 변호사들이 바로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노무현과 문재인이었다. 전국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소속 신부들이 이 테이프를 몰래 녹화하여 각 소속 성당에서 몰래 상영해주었다. 주로 외부 침입이 어려운 성당 지하나 구석진 곳에 모든 조명을 소등하고 커튼까지 닫아 몇 명이 조를 짜서 침입에 대비하여 보초를 서기도 했다.[7] 그래서, 특히 가톨릭 신자들의 상당수가 이 비디오를 많이 기억하고 있다. 5.18의 참상이 세상에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하기 전부터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으나 그들도 언제 끌려갈지 몰라 모르쇠로 일관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성당에서 본 비디오를 본 신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선 "우리가 본 비디오를 생각하면 이 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정도로 광주 비디오는 정말 살벌해서 처음엔 충격받아 아무 말도 못 했고 무서웠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 영화상에서는 김재규 재판 때문에 광주에 있는 외신기자가 힌츠페터뿐인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AP통신, 뉴욕 타임스, 르몽드 등 다양한 매체에 소속된 외신기자 여럿이 광주에서 취재하고 있었다. 작중 진행을 위해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 5.18 특파원 리포트 - 17년 만에 공개된 내외신 기자들의 광주 5월민중항쟁취재수첩, 도서출판 풀빛 1997의 내외신 기자들의 증언을 보면, 군인들이 기자들의 취재 자체를 막지는 않았다. 다만 광주로 들어가는 택시, 버스 등의 교통과 통신이 통제되어, 대부분의 국내외 기자들이 걷거나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 광주에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기에, 취재 내용을 제때에 송출할 수 없었다. 5월 21일 뉴욕 타임스 주재원이었던 심재훈이 광주시에서 순천시의 관광호텔까지 가서 전화로 기사를 송고하였고, 이것이 뉴욕 타임스와 르몽드의 1면 특종 기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후 해외 특파원들이 광주로 몰려들었고 광주 내에서 취재하였다. 힌츠페터는 이 내용이 담긴 영문신문을 5월 23일 2차 취재시, 광주시민지휘부에 전달하였다.
- 영화에서는 광주로 들어가는 걸 군인에게 제지당하자 샛길을 찾아 잠입한 것으로 나오며, 실제로도 그렇다.[8] 다만 이때 검문 중인 군인을 속이기 위해서 한 말의 내용이 약간 다른데, 영화 상에서는 "사업상 '중요한 서류'를 가지고 나오기 위해 광주로 들어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피터 본인 신분을 '외국회사 주재원'이라 속이고 "광주에 남아 있는 주재원을 빼내 오겠다"고 하여 광주로 들어갔다. 이는 상기한 녹음 담당 기자 '헤닝 루모어'와 동행하여 2명이 광주로 들어간 실화와 달리, 작중에서는 '피터' 혼자 광주로 잠입하기 때문에 각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실제로는 항쟁기간 동안 광주에 두 번 들어갔고 첫번째(샛길)와 두번째 때(주재원을 빼내오겠다고 주장) 잠입 방법이 각각 다른데, 영화에서는 한 번만 가기 때문에 두 가지 방법을 한꺼번에 쓴 것으로 나온다.
- 트럭에 탄 대학생들과 금남로 집회에서 광주 시민들이 "광주시민 함께하라 좋다 좋다/무릎꿇고 살기보단 서서 죽길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라는 가사의 훌라송을 부르는데, 실제 시위 당시를 재현한 것이다. 링크된 문서의 영상을 보면 서울과 광주 집회 모두에서 민중가요로 불리었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흔히 알려진 님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항쟁 후에 추모곡으로 만들어진 노래라 현장에선 불릴 수 없었다. 워낙 시위자가 많고 구성이 다양해 모두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드물다보니 애국가는 물론이고 진짜 사나이 같은 군가도 불렀다고 한다.
- 작중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힌츠페터를 안내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한국에 머물며 봉사하느라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 여러 명이 힌츠페터를 통역하고 안내하며 도왔다. 그들의 이름은 바로 평화봉사단 소속의 팀 원버그, 폴 코트라이트, 데이비드 돌린저, 쥬디 체임벌린 등이다. 관련 기사
- 작중에서 1980년 5월 20일 밤의 광주MBC 전소 사건이 다뤄진다. 작중에서도 날짜와 장소가 자막으로 언급된다. 힌츠페터가 황태술의 집에서 저녁밥을 얻어먹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형성하다가 밖에서 느닷없이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려 모두가 얼어붙는데, 이게 그 소리였던 것이다. 이 부분이 개봉 이전에는 같은 날 밤의 첫 집단 발포를 묘사하는 부분이라고 추측되기도 했다.[9] 다만 작중에서 화재가 왜 났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원인에 대해서는 '계속되는 왜곡보도에 분노가 폭발한 시민들이 방화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시민들이 항의하러 갔던 참에 갑자기 화재가 났다는 상반되는 증언도 있고 보안사 측에서 여론조작을 위해 저지른 일이라 보는 시각도 있기 때문. 또한 시민들이 방화하는 장면을 묘사하면, 자칫 시민들이 악역처럼 묘사될 수 있으므로 일부러 생략한 것.
- 만섭 일행이 황태술의 집에서 저녁밥을 얻어먹고 나서 텔레비전 수상기에 나오는 뉴스 화면은 실제 당시 KBS 뉴스 9 보도영상을 내보낸것인데. 작중 시점인 5월 20일 밤은 아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날인 5월 27일자 뉴스 화면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utfdTTh3khU 당대의 방송자료들이 테이프 돌려쓰기 관행으로 인해 보존상태가 부실했기 때문에 MBC 뉴스데스크는 물론이고 KBS 9시 뉴스 자료들도 별로 남아있지 않아서 어쩔수없이 5월 27일자 보도자료를 내보낸듯하다. 위르겐 힌츠페터를 다룬 KBS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자료화면. 뉴스를 읽는 배우( 손종환)의 어나운싱이 1980년대 당시와 다르고, 결정적으로 뉴스 화면에 나오는 슬라이드에 '광주장악 계엄군'이라고 나온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오류인 셈. 영화 후반에 나오는 타게스샤우 역시 당시 영상을 재현했다. 리포팅 장면만 찍었으며, 뒤이어 나온 현장 영상은 힌츠페터가 광주에서 실제로 촬영한 영상이다.
- 광주 지역 언론사인 전남매일신문 기자인 최 기자 일행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는 신문을 발간하려다, 발간 직전에 신문사 간부들이 들이닥쳐 윤전기의 판을 엎어버리고 윤전기를 돌린 기자들을 끌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광주 항쟁 당시 전남매일신문사 기자들이 계엄군의 학살을 알리려는 신문을 발간하려 했으나, 조판을 다 끝내고 윤전기를 돌리기 직전에 신문사 간부들이 들이닥쳐 조판을 엎어 버린 사건이 있었다. 이 다음 날 기자 일동이 사측에게 합동으로 제출한 사직서의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라는 문구가 유명하다.[10] 덧붙히자면, 이를 주도한 박화강 기자는 윤상원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의 피헌정자인 박기순의 친오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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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 택시운전사들이 힘을 모아 총맞은 시민들을 구출해 내는 장면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오히려 소품 차량 문제 때문에 실화보다 축소된 장면이다. 도청 집단발포 장면에서 택시 5~6대와 시민군 군용 트럭 1대가 총격을 막고 거리에 쓰러진 사람들을 호송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실제로도 택시가 와서 사상자를 호송했다고 한다. 이는 영화상에서도 묘사한 5월 21일에 실제로 있던 일이며, 이때 부상자들을 구출하러 택시를 몰고 들어온 기사들까지 영화에서처럼[11] 계엄군에게 사살당했다.
그 전날인 5월 20일에는 오후 6시에 광주 시내의 버스와 택시 기사들이 버스와 택시를 합쳐 200여 대 가량을 모아 금남로 차량 시위를 전개했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 장면을 정확하게 반영하여 방영한 적이 있다. 이 방향으로 제작하는 것이 꽤 크고 상징적인 장면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예산과 실제 남아있는 차량 등의 문제로 버스 4대 및 소수의 차량들 정도로 축소한 듯.
- 마지막 검문 장면에서 군인이 서울택시인 걸 알고도 보내준 건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화라고 한다.
- 영화 결말 부분 힌츠페터가 탄 택시가 광주를 빠져나올 때 다른 택시들이 등장하여 도와주었다는 부분은 창작된 부분이다. 애당초 당시 검문이 워낙 심했고 힌츠페터가 탄 택시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다른 택시들조차 그렇게 쉽게 빠져나왔다는 건 현실성이 없는 내용이다. 실제로 평론가들과 많은 관객들도 "이 자동차 추격전을 굳이 넣을 필요가 있었느냐"는 비판이 많았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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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자의 증언을 보면 광주에서 서울까지 택시 편도요금이 10~20만 원을 호가하였다.
일본인 기자 카자마 코이치(風間公一)의 증언은 이렇다.
오전 7시, 나는 AP기자와 함께 광주시내에서 전세 낸 덜덜거리는 고물차에 몸을 싣고 나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택시를 대절해서 서울로 갈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전에 모여 있는 운전기사들은 '20만 원을 주어야만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원래는 5만 원이면 되는 차삯이라고 듣고 있었는데 20만 원은 너무했다. 그렇다면, 사진 원고를 미국의 텔레비전 촬영반들에게 탁송시키는 편이 차라리 나을 듯도 해서 다시 부랴부랴 광주 도청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들마저도 광주를 떠난 뒤였다. 나는 다시 허둥지둥 송정리역까지 되돌아 되돌아 나와서는 '12만 원에 서울까지 가겠다'는 노운전사를 만났다. 그 길로 서울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길가에서 행해지는 검문 검색은 일찍이 못 보던 엄격한 검문으로 바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차는 언제 서울에 도착할지 예상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겨우겨우 장성까지 왔을 때였다. 우연히도 서울에서 같이 왔던 AP 카메라기자와 마주쳤다. 그는 나의 사진 원고를 받아 가지고 급히 서울로 떠나 주었고, 나는 또 다시 광주 시내로 되돌아왔다. 도청 앞 광장에는 6대의 전차가 남아 있었으며, 약 2백 명의 군인들이 땅바닥에 앉아서 용맹스런 가락의 군가를 한국어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 군인들을, 시민 약 2백 명이 늘어서서 군인들 대열 앞까지 바싹 다가서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3. 시대상
3.1. 차량
- 김만섭의 택시 모델은 기아 브리사로, 당시 택시 중에서 현대 포니만큼 많이 보이던 택시였다. 지금으로 치면 쏘나타, K5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것도 《 화려한 휴가》 때처럼 외국에서 수입해왔다. 사실 오래된 차들을 렌트해 주는 앤틱카 대여 업체가 여러 군데 있고 대한민국 안에 자력주행이 가능한 브리사가 최소 20여대 정도 알려져 있긴 한데, 자가용 모델을 개조하기가 다소 난감했는지 베이스 모델인 마쓰다 패밀리아를 들여왔다고 한다. 기사. 총 3대를 가져왔고, 워낙 오래된 차라 대부분의 부품을 교체했으며, 앤틱카 대여 업체 중 하나인 금호상사에서 모든 작업을 진행했다. 장거리 이동 시에는 견인차로 운반했다고. 출처. 차내 장면을 찍기 위해서 조수석 문짝을 떼고 발판을 덧댄 마개조를 단행, 카메라를 설치했다. 심지어는 도무지 굴러갈 상태가 아닌 것도 있어, 차체를 아반떼의 차대에 얹은 것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영화 개봉 후에 밝혀진 대로 김만섭의 모델이 된 김사복의 실제 사정은 호텔의 고급 택시기사였고, 오펠 레코드( 새한 레코드)를 광주로 갈 때 이용하였다.[13]
- 작중 나오는 차량 대다수는 배우들이 연기하면서 직접 운전했다. 카메라와 조명 때문에 좁고 열악한 상황에서 운전과 연기를 병행해냈다. 게다가 송강호가 몬 브리사의 경우 송강호가 수동변속기 차량을 운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제작진 측에서 자동변속기로 개조했고, 수동변속기 기어봉은 촬영용으로 따로 남겨두었다고. 출처. 때문에 영화에서 수동기어 소리가 아니고 자동 변속기 소리가 난다. 공교롭게도 개조에 쓰인 엔진과 변속기는 바로 위에 언급된 레코드 로얄의 후속 모델인 대우 프린스의 것이다. 실제로 포니와는 달리 브리사에는 자동변속기가 없다.[14]
- 태술의 차를 비롯한 광주 택시와 만섭에게 손님을 뺏긴 기사의 택시는 현대 포니로, 일부는 포니 2를 외관을 개조해 포니 1에 가깝게 만들었다. 다만 일부 차량들은 파손 장면을 찍기 위해 레플리카로 제작했다고 한다,
- 일본 장면에서 피터가 프레스센터까지 타고 온 택시는 4세대 토요타 크라운이다.
- 순천 버스터미널과 금남로에서 나오는 버스는 89년식 BF105.[15][16] 참고로 순천 시내 장면에선 BS106 하이파워 모델이 등장하는데, BS106 자체가 1991년 출시된 모델이라 역시 오류.
- 보안사의 순찰차로 나오는 검은색 거화 코란도는 93년식 이노베이션 코란도로[17] 당시에 맞지도 않고[18], 심지어 일부 차량은 깡통휠도 아닌 이노베이션 코란도 휠을 그대로 장착하고 있다.[19]
- 2003년, 나이든 만섭의 택시는 현대 뉴 EF 쏘나타다. 2003년 당시에는 출시한지 2년된 나름대로 신형 모델이었다.
3.2. 군대
- 검문소 장면 군인들의 어깨의 사단 마크는 광주 전남 지역 향토사단인 제31보병사단의 구 마크에서 한반도를 뜻하는 부분의 노란색 부분만 태극 문양의 청적 2가지 색으로 바꾼 것으로 형태는 동일하다. 당시 제31보병사단은 향토사단이었기에 사단본부 및 관련 부대들은 광주에 주둔하고, 나머지 예하 부대들이 향토 방위 및 해안 경계를 위해 전라남도 전 지역에 연대, 대대 단위로 분산되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주둔 부대의 방위병들이 초동 충정 작전에 참여하였고, 광주와 인접한 행정지역 군 소재 대대 병력들(역시 방위병들)이 도로, 목진지에서 시민군이 시외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물론 영화에서처럼 외지에서 그들이 말하는 불순세력들[20]이 광주로 들어오는 것도 막기 위해) 검문검색을 수행했으며, 이때 투입된 광주 외곽 군 소재 대대 병력들은 당시 여느 후방 부대들처럼 M1 카빈 소총과 M1919 브라우닝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이 부분도 영화에서 잘 반영되었다. 실제로 5.18 당시 광주 시외로 나가려는 시민군과 이 병력들 간에 교전 상황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M1 철모 역시 베트남 전쟁 시기부터 보급되었던 리프 패턴 위장무늬 커버가 씌인 철모의 형태이다.
- 시대 배경에 알맞게 고속도로 검문소에서 길을 막고있던 탱크는 M48 패튼[21]이다. 중반부에 공수부대원들이 단체로 이동 중일 때 몰던 군용 지프는 K111이며, 금남로 애국가 장면에서는 KM900 장갑차도 잠깐 보인다. 다만 군용트럭 중 한대가 CCKW(G508)이다.[22] CCKW는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 국군에 공여된 차량으로, 70년 이전에 이미 군에서 퇴역한 차량이라 80년 육군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차량이다.[23] 그 밖에 대부분의 차량은 M35 트럭이다.
- 막둥이가 금남로 장면에서 몰고온 차량은 광주 진입 고속도로에서 나온 G508을 도색만 바꿔 사용하였다. CCKW는 당시 기준으로 이미 퇴역해 민수용으로 많은 차량이 뿌려졌었다. 여담으로, 초반에 나온 트럭은 히노 사의 TE-11 차량이라고.
- 금남로 장면에서 나오는 M35 트럭은 모두 CG이며, 후륜 휠을 복륜이 아닌 일반 단륜휠로 구현해두었다.
- 공수부대의 경우 1970년대부터 도입되어 1980년까지 입었던 얼룩무늬 위장복인 충정복과 구형 부사관 계급장, 시위 진압용 방석망이 달리고 마찬가지로 리프 패턴 위장무늬 커버가 씌인 방탄모, 서스펜더(X반도)에 걸려 있는 미제 군용 M7A2(혹은 M7A3) 최루탄, M16A1 소총 등 사료에서 볼 수 있던 모습을 그대로 가져왔다. 영화 내 공수부대는 육군특수전사령부의 독수리 부대마크를 부착하고 있다.
3.3. 기타
-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그대로 염색을 하고 나왔다. 80년대 당시에는 지금처럼 염색이 자연스럽지도 대중적이지도 않던 시기이므로 전원이 흑발을 하고 있는 것이 맞다. 자잘한 옥에 티.
- 오프닝 시퀀스에서 조용필의 ' 단발머리'가 등장하고, 극중 재식과 만섭이 각각 샌드패블즈의 '나 어떡해', 혜은이의 ' 제3한강교'를 흥얼거리는 등 당시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장치들이 극중에서 등장한다. 특히 '제3한강교'는 군사독재 시절에 검열로 수정된 가사로 불렀다.[25] 이 중 '단발머리'에 대한 에피소드는 상위 문서 '기타' 문단에 서술. 구재식의 패션이나 밴드 포지션(기타) 등은 당시 인기를 끌던 대학밴드 활주로의 기타리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 광주 택시 기사인 황태술과 신 기사는 개인택시 기사여서 사복을 입고, 초반부 만섭에게 피터를 뺏긴 서울 기사와 다른 광주기사인 차 기사, 류기사는 회사, 즉 법인택시를 몰고 있어 유니폼 와이셔츠를 입은 반면 김만섭은 개인택시임에도 불구하고 포스터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란 유니폼을 입고 있다. 미장센상으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고, 사실 만섭의 유니폼은 당시 베테랑 택시기사이던 ' 모범운전자'가 입던 복장이다. 왼쪽 팔뚝에 '개인택시' 마크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1988 서울 올림픽 이후에는 이것이 3색 신호등을 형상화한 구형 '모범운전자회' 마크로 바뀐다.[26] 1971년부터 시행된 이 제도는 당시 경찰력이 부족하여 택시기사 사업자 중 10년 이상 무사고 운전[27]을 한 사람은 경찰 관변단체인 모범운전자연합회로 위촉(가입)하고 이들이 간단한 거리 수신호 등 경찰을 대신해 교통정리를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물론 범칙금 등 형벌이나 행정벌의 부과는 당연히 할 수 없다. 최근에는 모범운전자 제도가 화물차 운전자 등으로 확대되었는데, 저 당시와는 달리 유니폼이 밝은 청색 와이셔츠다. 이 교통정리는 현대에도 교통정리 자원봉사의 형태로 남아 있다. 한편 부산 지역 등 일부 개인택시 운전자들은 자비로 유니폼을 맞춰 입는 경우가 있었으며, 이 경우에는 가쿠란에서 딱 차이나칼라만 제거한 듯한 모양새로, 동료나 지인의 장례식 등 공식적인 자리에 갈 일이 있을 때 정장 대신 입기도 했다. 나이 드신 철도기관사 분들이나 공작소에서 기계 만지던 고참 엔지니어 분들도 회사 유니폼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다들 은퇴하셨겠지만...
- 김만섭은 개인택시 기사임에도 외동딸과 셋방살이를 하면서 사글세 10만 원어치를 밀린 신세로 나오는데, 그 시절 서민이 노력으로 쌓아올린 부의 중간 정류장격이던 개인택시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시대 상황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 그렇다는 이야기이며, 극중 만섭은 아내가 중병에 걸려 사우디아라비아 근로자 생활도 접고 귀국해야 했으며, 병원비로 벌어놓은 돈을 거의 날리다 마지막 남은 목돈을 죽어가던 아내의 간청으로 택시 하나 했다고 황태술의 집에서 만섭 본인 입으로 언급한다.[28] 집주인도 돈 빌려달라는 만섭에게 "너 빚은 다 갚았잖아?"라고 말했으니, 만섭은 아내의 치료 때문에 막대한 빚을 져서 넉넉하지 못하고, 그래도 그걸 몇 년 만에 갚을 정도로 벌이가 되었다는 걸 시사한다. 즉 반영 문제라기보다는 영화 시나리오 상의 만섭이라는 인물의 특이한 상황으로 볼 수 있다.[29] 실제로 고창석이 분한 그의 동료 택시 기사 집주인은 반지하 사글세 주는 양옥 단독주택에 살고 있다. 화강석 양옥인 것으로 보아 70년대 신축한 집으로 보인다. 지금이야 택시 과잉공급으로 개인택시도 수입이 줄어 쪼들리는 신세지만, 당시에는 자가용은 잘사는 사람이나 가지는 사치품이라 버스는 콩나물시루 소리 나올 정도로 만원에 전철망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30] 대리운전도 당연히 없었기에, 택시 수송분담률이 2010년대보다 훨씬 높았다. 그로 인해 합승, 웃돈 요구 등도 겹쳐져, 사납금이 없는 개인택시를 몰면 그야말로 떼돈을 벌 수 있었던 시대였다.[31] 1979년 당시의 기록을 보면 개인택시 월 평균 수입이 대기업 부장 수준이었다는 기록이 나오며, 면허 가격은 1천만 원으로 당시 서울시내 15평 신축 아파트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 영화에서 위르겐 힌츠페터 역을 맡은 토마스 크레치만이 작중에 쓴 선글라스는 실제 힌츠페터의 유품이며, 5.18 광주민주화운동 취재 당시 착용했던 선글라스다. 유족이 특별히 대여했다고 한다.
- 만섭이 노모의 아들을 찾아주려다 피터 일행과 재회하고, 다음날 재식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병원은 실제 5.18 민주화 운동 당시에 부상자를 치료해주고 희생자들을 안치하였던 광주 적십자 병원이며, 세트장이 아닌 실제 건물을 배경으로 촬영하였다. 이 병원은 녹십자 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나중에는 서남대학교 산하 병원이 되었다가 이런저런 문제가 생긴 후에 운영을 중단하였다. 공교롭게도, 서울 장면에서 임산부 부부의 목적지였던 종합병원 역시 운영이 중단된 서남대학교 남광병원이다.
- 주요 운전자들이 안전벨트를 매지 않는다. 사실 1985년까지는 안전벨트라는 게 "일단 차량 출고 시 붙어 있기는 한데 귀찮아서 안 매는 것", "사내 남자가 무슨 안전벨트냐?", 등 메는 게 엄청 쪽팔리는 수준의 인식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 덕분에 당대의 드라마나 영화에는 교통사고 장면이 상당히 나오며,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 느릿느릿 다녔는데도 교통사고 사망률 1위를 심심하면 찍는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이러던 것이 1985년 MBC에서 '안전벨트를 맵시다'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점차 안전벨트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으며,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맞물려 서울 지역에서는 안전벨트 체결 비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0년대 양심냉장고 관련하여 '정지선 지키기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안전벨트 등 다른 교통법규 준수율도 덩달아 높아졌다고 하며, 안전벨트를 법령으로 강제력을 강화한 것은 2000년대부터다.[32][33] 때문에 그 이전에는 안전벨트 착용률이 매우 낮았는데, 시대를 생각하면 적절한 부분이다. 2003년 장면의 만섭 같은 경우엔 출발하기 직전 안전벨트를 매는 모습이 나온다.
- 영화 후반, 검문대에서 검문소 중사( 엄태구 분)가 서울 택시 번호판을 발견했음에도 눈 감아주고 보내준 것은 종종 있는 드라마틱한 레파토리이기에 완전한 허구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위르겐 힌츠페터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실화라고 한다. 1, 2, 3
-
피터와 만섭, 그리고 이 기자가 최초로 만나는 장면의 배경이 된
국도극장은
을지로에
1999년까지 실존하였던 극장으로, 현재 이 자리에는 국도 호텔이 세워져 있다. 또한, 포스터로 붙어있던
춘자는 못말려 역시 실제로 이 당시에 개봉하였던 영화다. 영화 홍보를 위해
포스터를 붙인 상자를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던 당시 극장 직원들의 모습까지 재현하였다.
- 극 중 만섭이 착용한 시계는 지금은 사라진 독일 브랜드 'DUX'의 수동식 태엽시계이며, 피터가 착용한 시계는 지금도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는 오메가 컨스틸레이션 모델의 1970년식이다. 둘 다 소품이 아닌 실제 골동품 시계이다.
- 피터가 카메라 필름을 담은 버터쿠키는 로얄 단스크(Royal Dansk) 사의 제품으로, 이 당시에도 존재하였던 제품이며, 실제 힌츠페터 기자가 필름을 위장해서 가져갔던 방법이다.
4. 탐구
- 당시의 한남대교를 강남에서 강북으로 갈 때 외국인 아파트가 남산 중턱에 들어서 있었으나,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1994년 11월 20일에 철거했다.
- 김만섭이 타고 다니는 브리사 택시의 휠이 쉐보레 스파크 L 모델에 쓰이는 스틸 휠[34]이다. 다른 광주 기사들의 현대 포니 택시들은 과거에 쓰이던 그냥 검은색/양은색 깡통 스틸 휠을 쓰고 있는데, 이 택시만 그런 건 조금 아쉬운 부분.[35]
- 1980년은 아직 냉전 시대였던 만큼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독일'보다 '서독'이 더 자주,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용되었다. '독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면 '독일어' 처럼 문화를 나타낸 경우, 나치독일 처럼 2차대전 상황을 나타낸 경우(독일군 등) '독일연방공화국'처럼 정식 명칭으로 불렀을 때나 사용되었으며 당시 언론 및 사회는 냉전의 영향으로 서독과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을 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36] 물론 영화 등 창작물에서 관객들의 이해를 위해 고의로 고증오류를 범한 예는 많다.[37]
- 영화 곳곳에 현대 포니 2가 제법 눈에 띄는데, 포니 2는 1982년부터 생산됐다. 포니 2를 전부 포니 1으로 개조할 수는 없었던 모양. 대표적인 장면이 김만섭이 광주에 도착해서 피터와 청년 시위대를 버리고 가다가 할머니와 만나 병원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진압 과정으로써 반파된 택시가 등장하는 장면. 포니 2 특유의 사이드 미러 위치, 해치백 도어와 후미등이 보인다. 그 밖에도 금남로 바리케이드 장면에서 만섭 바로 뒤에 오던 택시는 앞은 포니 1인데 뒤가 포니 2다.
- 영화상에서 경찰 가스차( 페퍼포그)가 다연발차로 나오는데, 실제 다연발 가스차(6호, 일명 지랄탄차)는 1986년에야 보급되었다.
- 김포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와 이륙하는 비행기가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잘 보면 비행기는 각각 A340과 A330이다. 이 당시는 1980년이므로 1992년에 처음으로 비행한 A340과 1994년에 인도된 A330이 있을 리가 없다. 추가로 A340의 경우, 아시아권에서는 발주 자체가 상당히 드문 기종이다. 굳이 따져보면 필리핀 항공 정도? 아마도 A300이나 보잉 747-200을 섭외하기 어려워서 A340과 A330으로 대체한 듯 하다. 비슷한 예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스토리로 한 영화 마유미도 마찬가지로, 실제 비행기인 보잉 707 대신은 에어버스 A300이 등장했다. 다만, 이는 보잉 측에서 제작에 협조를 거부해서였다. 이 영화에서도 마유미의 사례처럼 보잉과의 협조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는 상세히 밝혀진 바가 없다.[38] 이와 관련하여 공항 이착륙이나 활주로 관련한 면에도 지적될 만한 사항이 있다. 반영 오류와는 거리가 좀 멀지만, 항공기가 이착륙하는 장면에서는 꼭 김포공항 주 건물이 보이는데, 실제로 주 건물은 활주로 32에 더 가까이 치우쳐져 있고, 영화 속 항공기의 이착륙 방향은 그 반대편인 14이다. 이륙은 상황상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무리 3 km 넘은 A급 활주로래도 영화 속에서처럼 착륙하면 100%로 활주로 이탈사고 직행이다.
- 현실적인 문제로 인한 사실 반영의 한계겠지만, 택시 기사의 이야기이다 보니 도로나 거리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광주시내를 세트로 재현한 부분을 제외하면 21세기 풍경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 또한, 작중의 만섭 일행을 쫓아온 공수부대원이 K1 방독면을 쓰고 나오는데, 실제 5.18 당시의 공수부대는 미국제 M17 방독면이나 미국제 M9A1 방독면 또는 한국 버전인 KM9A1(밝은 색의 M9A1과는 달리 검은색)을 사용했고, 위의 K1 방독면은 1983년의 국내에 수입되었다.
- 광주로 진입하는 고속도로는 6차선이며, 구배나 굴곡 없이 아주 시원하게 뚫려 있다.[39] 1980년 5월 당시의 대한민국에 8차선 고속도로는 존재하지 않았고, 경부고속도로는 전 구간 4차선이었으며, 호남고속도로는 2차선이었다.[40] 만섭 일행이 광주에서 벗어날 때 종반부에 등장하는 2차선 고갯길이 당시 2차선 고속도로급쯤 된다.[41]
- 광주 시내로 진입하는 장면에서 당시 통닭집 간판에 " 양념통닭"이 적혀있는데, < 양념치킨>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최초의 양념통닭이 나온 건 5.18 5년 뒤인 1985년의 대구에서 창립된 맥시칸치킨이다. 즉, 당시에는 없던 음식이다.
- 영화 초반에는 VFX 작업을 좀 덜 한 게 보인다. 타이틀 씬에서는 한남대교 상공에 21세기에 볼 수 있는 현수식 표지판이 대놓고 등장하며, 독립문고가차도 옆으로는 90년대 판상형 아파트가 보인다.[42] 광주 진입 고속도로 표지판은 그 나름 시대 분위기를 살리려 했지만 영화 미술팀이 제작한 티가 난다.
- 정비소에서 주인공 만섭이 도시락을 먹을 때, 고창석 (상구 아빠 역)이 들어오는 장면에서 "쌍용자동차 순정오일" 드럼통이 보인다. 80년 5월 당시엔 쌍용자동차가 아닌, "동아자동차공업 주식회사" 또는 "신진자동차 주식회사"였다. 신진자동차의 경우는 상호는 81년 "(주)거화"로 변경되었다가 1984년 연말에 동아자동차에 인수합병되었고, 동아자동차는 1986년에 쌍용그룹에 인수되면서 1988년에 쌍용자동차로 상호가 변경됐다.
- 광주로 들어가는 샛길이나 광주 근교로 설정된 시골이 몇 번 등장하는데, 다리는 강철파이프 난간이 달려 있고, 길에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당시의 시골에 흔한 '공굴다리'는 그 이름을 보듯 콘크리트 박스로 지반공사와 교량을 일체형 구조물로 놓거나, 또는 교각 자체하중으로 지탱하는 구조로[43], 콘크리트 난간이라도 달려 있으면 다행이고, 다리 양쪽의 경계석조차도 아예 없는 것이 상당수였다. 국도나 지방도급에서 작중과 같은 모습의 다리와 아스팔트 포장길이 등장하는 것 또한 상술한 것처럼 88올림픽 연간이며, 우마차로는 IMF 직전쯤 되어 포장공사가 얼추 완료됐다.
- 영화 배경으로 나오는 집의 지붕들은 렉산( 폴리카보네이트)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 1980년은 렉산이 사용되기 전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가장 흔하게 사용되던 건축자재는 석면. 이 때문에 2017년 현재진행형으로 피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당시는 석면 슬레이트가 그렇게 위험한 줄 전혀 몰랐으니. 석면 이용이 금지되어 재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전남매일신문 인쇄 장면에 등장하는 신문도, 미술팀이 현대에 컴퓨터로 조판한 듯한 모양새가 나온다. 일단 당시 신문치고 헤드라인에 한글이 너무 많다. 신문 조판에서 국한문 혼용이 한글 전용으로 바뀐 것은 1970년의 서울신문이 정치적 이유로 실험삼아 진행한 것을 제외하면 1988년 한겨레신문이 최초이며, 조선일보가 가장 늦은 1999년에 한글전용 가로쓰기로 바꾸게 됐다. 1980년 당시에는 조사와 영문 이니셜을 제외하면 한문투성이다. 제대로 반영했으면, 예를 들어 '軍, 光州에서 人間사냥을 恣行하다[한글]' 같은 식이어야 했을 것이다. 몇 달 후에 개봉한 1987이 한자 가득한 신문을 그대로 반영하고 한글 자막을 띄우는 방식으로 만든 것을 보면 이렇게 할 수도 있었음 알 수 있다. 아쉬운 부분. 조판의 경우도 지금처럼 컴퓨터 디자인을 안 했기 때문에 외려 글자 뒤를 동심원이나 빗금 등으로 꾸미거나 하는 일도 많았으며, 무엇보다도 활자 크기가 컴퓨터 시대인 현재와 같이 길쭉길쭉하다.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신문 조판 활자는 가로로 꽉 눌러진 듯한 모양새였다.[45] 옛날 신문 편집자들은 '그렇게 납작하게 쓰면 같은 지면에 더 많은 글자가 우겨들어간다'고 주장하지만.
- 만섭의 택시 번호판도 사실에서 어긋났다. 1980년 당시의 택시 등의 영업용 차량은 "바 ~ 하" 총 9개 문자만을 사용했는데, 만섭의 택시 번호판은 "서울 3 구 3151"이다. 그리고 번호판에 맞지 않게 택시에는 '가'가 적혀있다. 또한 태술의 도움으로 바꿔 단 번호판인 "전남 2 나 0310"도 문제가 있는데, 당시에는 1000~9999 사이에서 차량 번호를 할당했으므로 0으로 시작한 번호는 나올 수 없다. 0으로 시작하는 차량 번호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2015년부터이다. 자세한 것은 < 차량 번호판> 문서 참조.[46] 물론, 번호판의 경우, 실제 번호판을 사용하거나 사용하던 사람이 피해하는 것을 막고자 일부러 불가능한 조합으로 소품을 만드는 일이 많다.
- 2003년에 김만섭이 운전 중인 장면에서 중간에 나오는 서울 거리를 보면 LF쏘나타 택시와 기아 K5, 그랜저 HG(셋 다 2010년대에 출시) 택시가 돌아다닌다. 버스는 현대 뉴 슈퍼 에어로시티 저상버스(2005년부터 판매)가 돌아다니는가 하면, 2004년 7월 이후의 버스 개편으로 등장한 서울 간선버스(파란색 도색)와 지선버스(초록색 도색)가 떡하니 나온다. 물론 저 때가 개편 과도기였던지라 해당 도색을 하고 다니던 차량이 종종 있긴 했지만, 차량 후면의 파란색 145번 BLU는 확실한 개편 이후 모습.
-
서울의 종합 병원과 중반부 광주 적십자 병원 모두
기아 봉고 코치 구급차가 있는데, 봉고 코치는 1981년에 출시되었다. 이 시대를 반영하려면
현대 HD1000을 써야겠지만, 아쉽게도 해당 차량이 국내엔 남아있는 게 없고 해외에 극소수만이 남아 있어서, 그나마 그 시절 차 가운데 구하기 쉬운 봉고 코치로 때운 듯 하다. HD1000을 워낙 구하기 어려운지라,
화려한 휴가에서
하이 베스타로 대체했고,
응답하라 1988 같은 경우는 아예 외관이 그나마 유사한 일본제 승합차량을 갖다쓰기도 했다(사실 완전히 유사하지도 않다. 헤드라이트가 둥근형 4개인 점만 같다).
이게 다 전두환 때문이다.[47]그리고 그 법으로 인해 봉고 코치가 나왔다.]
- 1980년, 송강호가 서울에 있는 딸아이에게 다이얼 전화기로 전화를 걸자 바로 받았다. 하지만 그때는 시외전화는 전화교환원이 있었기에, 중간에 교환원이 받고 연결해 준다. 극중에서 전화를 거는 곳은 전남 순천이고 받는 쪽은 서울이고 시외전화이기에 엄청 오래 걸리는데 그 부분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시외전화를 포함한 전국 전화 자동화가 완성된 것은 1987년 7월이다. 물론 그렇게 따지면 당시 도로 상황이나 군인 검문이나 전화 다이얼 시간이나 이런 걸 다 따져야 되는데, 이런 걸 굳이 현실적으로 다 집어넣으면 장면이 지루해질 것이다.
- 2003년 장면에서 신호등에 파란 도로명 표지판이 있다. 2003년에는 녹색 바탕에 고딕체로 쓰여진 도로명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 이외의 도시 지역에서는 당시에도 파란색 바탕이 삽입된 도로명 표지판을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위에서 나온 오류와 더불어 2003년 장면은 제작비 절감차원에서 김만섭의 택시 형태만 재현하고 기타 배경은 편집없이 그대로 둔 것으로 보인다.
- 서울에서 광주로 향하던 도중의 도로표지판 폰트가 배달의민족 도현체이다. 그 외에도 아시아폰트 a옛날목욕탕 등, 2000~2010년대에 제작된 복고풍 폰트가 많다. 아시아폰트의 a블랙, 윤디자인의 윤명조도 보인다.
- 순천시 터미널 유리문에 당시엔 사용되지 않던 '버스정류장' 문구 스티커가 보인다.
- 샛길을 통해 광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검문소에 주둔한 군인들이 국방색 런닝셔츠를 입고 있는데, 80년대에는 국방색이 아닌 흰색의 런닝셔츠가 보급됐었다.
- 5월 20일 저녁 8시 시점에서 김만섭이 "집에 딸이 혼자 있다"면서 전화를 찾으니 광주 시민들이 "시외전화가 끊겼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로부터 약 6시간 후인 5월 21일 오전 2시 18분에 시외전화가 끊겼다. 관객의 몰입을 위해 각색한 것일 수 있다.
- 초반부 미러를 수리하는 장면에서 수리비로 내놓는 천 원 지폐가 파란색 신권이다. 당시 기준으론 2010년대 기준 구권이라 불리는 4차도 아닌 3차 개정판 지폐가 나와야 한다. 피터가 10만 원 줄 때는 제대로 그 당시 지폐였기에 아쉬운 부분.
- 횡단보도 옆에 당시엔 없던 빨간 자전거 도로가 보이는 장면이 있다.
- 영화 초반부 이 기자가 피터에게 수첩을 건네줄 때 광주의 알파벳 표기가 Gwang Ju로 되어 있는데, 광주로 내려가는 길가의 표지판은 Kwang Ju로 표시되어 있어서 오류가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굳이 따지자면 한국에서는 Gwangju가 맞다. Kwangju는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따른 것인데 주로 해외에서 사용했고, 당시 한국은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1980년의 한국에서는 Gwangju가 옳은 표기가 되는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 Kwangju라는 표기를 쓰는 것은 1984년 고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의 채택 이후의 일이며 2000년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에 다시 로마자 표기법으로 환원되었다.
- 장면 초반에 택시가 서울-부산간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장면에서 도로표지판 지명인 부산(Pusan), 대전(Taejeon)이 나오는데 실제 지명 영어명은 각각 Busan, Daejeon이 올바른 표현이다. 사유는 위와 동일.
- 피터의 귀국 항공권 봉투를 보면 일본항공 로고가 있는데 80년대나 2010년대 이후로 쓰인 둥근 두루미(쓰루마루) 로고가 아니라 태양의 호(Arc of Sun)라 불리는 2000년대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1980년대 일본항공 로고하고 2010년대 이후의 일본 항공 로고가 거의 같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 후반의 광주 탈출 중 검문 장면에서 부사관(박중사)의 명찰아래에 'park'라고 영문 성이 표기되어 있다. 당시에는 병과 부사관 모두 명찰 아래에 군번을 표기하였다.
4.1. 옥에 티
- 초반에 김만섭의 팔에 있는 택시기사 마크에 SEOUL이라는 글자가 표시되어 있는데, 중반부터 보이지 않는다. 극중 옷 갈아입는 장면은 없는 걸로 보아 옥에 티. 촬영 시기가 한여름이여서 더위로 땀에 젖는 통에 송강호가 옷을 여러 벌 갈아입었다는데, 그 과정에서 생긴 문제로 보인다.
- 병원 장면에 나오는 의료용 산소통을 잘 보면, 충전기한이 2010년으로 쓰여 있다.
- 김포국제공항 장면에서 광주 기자가 메고 있는 카메라 가방의 니콘 로고가 현재 로고랑 똑같다. 정작 그 기자가 가지고 있던 카메라의 니콘 로고는 옛날 것이었다.
- 서울로 가는 교차로 장면에서 만섭의 뒤에 있는 흑색 포니 승용차를 자세히 보면 후면 트렁크 커버에 택시 표시(개인, 가)의 굴곡을 볼 수 있다. 차량 돌려쓰기를 하면서 재 도색시에 벗겨내지 않고 덮어 칠하는 실수를 한 모양이다. 맨 뒤의 갈색 차량은 순천 시내 장면과 함께 등장하는 "대우 맵시-나"로, 1983년 모델이므로 오류.[49]
- 만섭이 택시를 타고 다시 광주로 돌아와 병원으로 돌아가 힌츠페터를 보기 약 10초 전 부분에, 2005년도쯤에 팔렸을 듯한 삼성 슬림형 데스크탑과 LCD 모니터가 보인다.
- 신 기사(신담수)가 자신의 택시로 보안사 코란도를 들이받은 뒤 낙오되는 과정에서 차량 앞유리는 파손되지 않았지만, 신 기사가 중상을 입은 것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 있다. 또한 보안사 코란도 역시 장면에 따라 넘어져있는 상태가 다르게 나온다.
- 영화 초반 한남대교에서 잠깐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 에필로그 장면은 2003년 시점인데 만섭의 택시가 달리는 주변 도로 풍경으로 2010년대에 출시된 차들이 다수 나온다.
5. 관련 문서
[1]
GM코리아, 이후의
새한자동차에서
오펠 레코드를 들여와 판매했었다.
[2]
지금이야 일반 가정도 차 2-3대 즘 보유한 집은 많지만 그 당시 가장 싼값이던 포니조차도 서민들의 1-2년치 연봉이었다. 중산층 정도나 차를 사는 수준이었고, 그마저도 포니나 브리사, 돈 좀 있다 하면 스텔라였다. 1가구 1차가 실현된 때는 1990년대에 들어서나 가능했다.
[3]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닌게, 당시 국내의 대중차였던 브리사가 985CC/1,272CC였고,
현대 포니가 1,238CC/1,439CC였던걸 보면, 레코드의 1,900CC는 그야말로 고급차였던 셈.
[4]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택시는 소형차들이었다.
1988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택시 고급화 정책이 시행되면서야 비로소 중형택시들이 등장했고, 이것들이 오늘날 국내 택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5]
다만 그렇다고 해서 김사복 씨가 소위 '손에 물 묻혀 본 적 없는 사람'인 것은 절대 아니다. 애초에 김사복 씨는 함경남도 원산시 신풍리(현 북한 강원도 원산시) 출신의
실향민으로써, 초등학생 나이에 월남하다 선박 전복사고로 부모님을 잃는 등, 유년기부터 인생이 험했던 인물이었다(다행히 고모댁에 의탁됨). 장성해 결혼한 이후에 원단공장을 시작했으나 그마저 망한 이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운전대를 잡아서 성공했던, 소위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와
자수성가한 케이스인 셈이다.
자수성가와
노블리스 오블리제, 대단한 지식을 모두 겸비한 무시무시한 인물이였던 것. 따라서 영화의 김만섭의 모습은 서울 상경 이후 형편이 어려웠던 (5.18 시점의) 과거 김사복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6]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영상의 촬영과 저장, 음성의 기록 기능이 일체화된
ENG 카메라가 있기는 했으나 보편적으로 쓰일 정도로 보급되지는 않았다. 모양도 요즘 같은 일체형이 아니라 테이프 데크와 배터리 팩은 별도의 일체형 박스로 분리되어 있었고 카메라와는 케이블로 연결하는 방식이었으며 배터리 사용 시간도 그다지 길지 못했다. 그리고 이 박스의 무게도 상당해서 20kg 정도나 했다. 그리고 이 당시 ENG 카메라를 썼던 건 주로 일본과 미국의 방송사들이었고 유럽의 방송사들은 필름 카메라를 주로 사용했다. 따라서 영상을 취재하며
동시녹음을 하기 위해서는 필히 카메라와 분리된 별도의 녹음 장비를 이용해야만 했다. 오늘날 뉴스 취재 과정에서 촬영기자를 보조하는 역할을 '오디오맨'이라고 하는데, 과거 녹음을 담당했던 일에서 유래했다. 루모어 역시 오디오맨의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7]
심지어 공기관인 시, 도청에서도 몰래 봤다는 말이 있다.
[8]
KBS 일요스페셜
푸른 눈의 목격자 참고.
[9]
'
광주 학살' 하면 5월 21일 낮 금남로에서
애국가 제창 직후 이루어진 집단발포가 가장 유명하지만, — 《
제5공화국》, 《
화려한 휴가》에서도 참혹하게 재현된 장면이다. — 실제로 처음으로 총기 발포가 이루어진 것은 그 전날 밤이었다. 그 애국가 제창 직후 집단발포한 사건은 영화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데 군인들이 다짜고짜 발포했다"는 대사로 등장한다. 이 영화에선 독일인 기자와 택시운전사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부분은 과감히 생략했다.
[10]
이 집단사직으로 인해 지역신문의 편집은 중단되었고, 전국신문은 계엄군의 차단으로 인해 광주가 고립됨으로 인해 20일 이후로 들어오지 않게 되었으며 방송사는 시위대의 분노로 인해 불타거나 기재가 파괴당하면서 광주에는 항쟁기간 동안 사실상 언론이라는 것이 없게 되었다(유일하게 방송을 계속한 KBS라디오는 시종일관 계엄군 입장을 대변하는 선무방송만 하여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윤상원(
임을 위한 행진곡의 피헌정자)을 비롯한 재야 민주화 활동가들은 대안언론격인 '
투사회보'를 발행하며 소식을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다.
[11]
영화에서는 1명만 피격되는 장면이 나왔다.
[12]
다만 외국인을 태운 것도 아니고 서울 택시는 더더욱 아닌 만큼, 적당히 둘러대면 한두 대쯤 검문을 통과하는 것 자체는 문제되지 않는다. 줄줄이 그 길을 따라 추격하러 온 것은 설명되지 않지만.
[13]
다만, 이후 레코드택시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인근 업체에서 포니를 빌려와 잠입 재방문을 시도하였다.
[14]
브리사는 수동만 나왔다.
[15]
4개의 사각 테일램프를 장착한 BF105는 1989년도에 페이스 리프트된 차량이다. 영화 속 일부 차량은 같은 BF105이지만, 헤드라이트만 원형램프로 복원이 되어 나왔다.
[16]
당시에 맞추려면 이전 모델인 BF101이 나와야 하지만, 현재 국내에는 남아있는 개체가 영화 촬영시 기준 아예 없어서 그나마 개체가 있는 BF105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2022년 기준 미얀마에서 역수입 해온 차량 복원한 것이 있긴 한데, 그 차량은 그대로 안산산업박물관으로 갔다.
[17]
헤드라이트 아래가 아닌, 휠하우스 양쪽에 사각램프로 돌출된 외관은 이노베이션 코란도부터 적용된 특징.
[18]
당시에 맞추려면 93년식 이노베이션 버전이 아닌, 신진 지프 2기형 버전이 니와야한다.
[19]
다만 일부 장면에도 신진 지프도 나왔으며 추격씬에만 해당 코란도를 사용해 해당 씬에서 파손되었다.
[20]
광주로 이동해 시민군과 합세할 가능성이 있는 외지인들.
[21]
실차는 아니고,
화려한 휴가에서 등장하였던 것과 같은 모조품 탱크다.
[22]
다만, 보닛의 길이가 짧고, 적재함 구조로 보아, 미군 M계열 트럭을 6.25 배경의 영화에 쓰기 위해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23]
89년까지 운용했던 J603(!)은 광주에 투입된 사진자료가 존재한다
[24]
다만 1911은 라이선스 생산, 타 회사의 민간시장용 제품, 불법 카피본 등이 많아서 콜트 순정품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부산진 조병창에서 생산한 기록도 있으니 더더욱.
[25]
젊음은 갈 곳을 모르는 채(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 / 이름 모를 거리로 떠나갈 거예요(행복 어린 거리로 떠나갈 거예요).
[26]
현재는 새로운 모범운전자회 휘장이 쓰이고 있는데,
모범운전자 문서 참조.
[27]
지금은 5년으로 완화되었다. 또한 여기에서 만섭의 경력을 대충 유추해볼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 회사 택시를 몰다 중동 건설 붐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넘어갔고 중도 귀국한 후 아내가 타계, 개인택시 면허와 함께 모범운전자 자격을 취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8]
물론 한국어를 모르던 피터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겠지만, 감정만은 그대로 전해져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29]
또한 초반에 만섭은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란 기사를 보고 "또 손님 끊기는 거 아냐?"라고 투덜거리는데, 이로 보아
10.26 사태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된 후 손님이 많이 줄어 작중 시점으로부터 최근 몇 달간 수입이 많이 줄었을 거라고도 추측할 수 있다.
[30]
1980년 5월 당시에 서울 지하철 노선은
꼴랑 1개 정도였다.
서울 지하철 2호선 1차 구간이 개통된 것이 1980년 10월 31일이다. 부산이나 인천, 대구, 대전, 광주 도시철도는 아예 없었다. 계획만 있었거나 계획이 세워지기도 전이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근간 노선이라 할 수 있는
경인선과
중앙선(
용산역-
청량리역) 일부 구간,
경원선 일부 구간(청량리역-
광운대역),
경부선(
서울역-
수원역 구간) 일부 구간은 이 시점에 이미 전철화되어 있었지만, 그 이외 노선은 종로선을 제외하면 아예 없었다.
[31]
사납금 제도가 생긴 이유가 그 당시에는 법인택시 기사들에게도 월급제보다 훨씬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32]
1990년대에도 강제력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속도위반, 신호위반 등과 함께 교통경찰 범칙금 단골 셔틀 수준으로 인식이 저조했다. 2010년대 들어 출시된 차량들은 그것도 모자라 운전석에서 안전벨트를 매지 않으면 경고음이 계속 나오도록 되어있다.
[33]
보통 좌석에 무게가 감지되면 안전벨트 차라고 경고음이 나오는데, 혼자 운전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놈의 경고음 때문에 조수석에 가방 올려놓을 때도 가방 다치지 말라고 벨트 채워줘야 할 정도로 죽어라 울린다.
[34]
바깥쪽은 알루미늄 덮개 처리.
[35]
영화에 등장한 브리사는 유지관리의 용이함을 위해 프린스의 구동계를 이식한 것으로 인한 문제가 겹쳐져 있기에 휠의 단순교체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영화 속 차량은 프린스의 구동계를 이식한 것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프린스의 구동계를 이식하는 과정에서 허브와 너클까지 모두 이식한 것으로 추측되고, 57.1사이즈인 프린스 허브에 맞춰서 스파크 14인치 휠의 허브(56.5) 내경을 깎아서 장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스파크의 13인치 휠도 있으나 14인치 휠을 적용한 것은 캘리퍼의 간섭으로 인한 문제로 14인치 휠을 장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포니와 스텔라가 공용하던 휠의 pcd는 108로서 현대자동차의 옛 생산제품인 포드 코티나의 사양을 가져온 것이다.
[36]
하물며 당시 세상에 딱 넷 있던 분단국가가 독일, 한국, 예멘, 중국이다. 키프로스는 1980년 이후 분단되었고, 동독에 대한 국민감정은 북한이나 일본 수준으로 안좋았다. 전국민이 분단이 뭔지 자기네가 왜 쪼개져 있는지 설명 안해도 다 아는 실로 드문 곳에 왔다는 걸, 그가 모를 리가 없건만 이 부분을 반영하지 않은 것은 약간 아쉬운 부분. 다만 실존인물인 김사복은 영어가 유창했지만 이 영화 설정상 김만섭의 영어는 워낙 짧으니 영어로 서독이라는 단어는 모르고 독일만 알아서 그랬다고 변명할 여지는 있겠다.
[37]
2017년 기준으로 '서독' 이라는 단어는 고연령층 외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단어가 된 상태라서 대다수 관객들에게는 낮선 단어다. 여담으로 고의 고증오류의 가장 큰 경우가 비 영어권의 사건을 다루는 영화에서 화자들이 영어로 대화 하는것. 더빙이 아니라 원래 작품이 그렇다. 고증을 충실히 한다면 해당 언어로 대화하고 자막 처리하는 것이 맞으나 자막 읽기를 싫어하는 미국인 관객을 위해 영어로 제작한다. 대표적으로
작전명 발키리,
마지막 황제.
[38]
추측상으로 <마유미>처럼 비행기 테러와 관련된 영화가 아니니 보잉과 상표권의 가격 협상이 잘 안 됐거나 포커 27이나 보잉 727의 CG나 영상이 적어서 비교적은 흔한 에어버스기로 대체한 것으로 추정된다.
[39]
구 호남고속도로 장성 나들목 남단에 있는
못재육교 밑 폐도에서 해당 장면을 촬영하였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한국도로공사에서 설치한 기점표시판이 보인다. 이 도로는 직선화 및
못재터널 신설로 2012년에 폐도되었다.
[40]
1980년 당시 4차선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밖에 없었으며, 호남,
남해,
영동,
동해,
구마선 모두 2차선이었다. 호남고속도로는 1985년
대전-
전주, 1986년 전주-
광주, 1988년 광주-
담양 구간이 확장되었다. 나머지 구간이 완전 확장된 것은 1996년. 영동고속도로가 확장된 것은
1994년~
2001년사이였으며,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88올림픽고속도로도 구 도로가 일반도로로 강등되고
산꼭대기에 교각 놓고 직진하는 시원한 선형으로 바뀌었으며, 극히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2차선 고속도로는 이제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41]
다만 호남고속이 2차선이라고는 해도 명색이 고속도로인지라, 곡선 반경은 영화에서 나오는 고갯길보단 완만하다.
[42]
그나마 적절히 아웃포커싱되기는 했다.
[43]
설계상으로는 수표교나 진천
농다리 같이 옛날 돌다리의 하중구조와 똑같다. 이 때문에 집중호우만 오면 시골 다리가 끊기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자체하중으로 눌러 지탱하는지라 거센 물살에 교각이 순간적으로 떴다가 중심이 무너진 채로 내려앉으면 다리가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레고처럼 끼워놓은 구조가 아니고 블록쌓기처럼 얹어만 놓은 형태인 것.
[한글]
군, 광주에서 인간사냥을 자행하다
[45]
지금의 조선일보명조체를 0.9:1 비율 혹은 포토샵에서 span 140%로 찌그러뜨리면 비슷하다.
[46]
이는 송강호가
10년 앞서 출연한 영화에서 등장한 여주인공의 차량 번호도 마찬가지이다.
[47]
취소선을 쳐놨지만 사실
이 사람이 정한 법 때문에 멀쩡히 잘 팔리던 해당 차량이
단종된 탓이다.
[48]
단, 일본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기관은 역사성을 과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구자체를 쓰는 경우가 있으며, 배경인 1980년에는 지금보다 그런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지금도
요미우리 신문,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사회(
제국대학 학부 졸업생들의 동문회. 초창기 일본의 학사 학위는 제국대학에서만 수여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 등 역사가 오래된 몇몇 단체는 명칭을 구자체로 표기하며 현행 헌법도 구자체 표준 시절에 제정되어 여전히 구자체로 적혀 있다.
번체자라는 말은 중화권식 표현이고 일본어에서는 구자체라고 한다.
[49]
대우가 새한자동차이던 시절 1982년 출시한 "맵시"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