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
||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클리프 배스틴 Cliff Bastin |
|
본명 |
클리퍼드 시드니 배스틴 Clifford Sydney Bastin |
|
출생 |
1912년
3월 14일 잉글랜드 데본 주 엑서터 |
|
사망 |
1991년
12월 4일(79세) 잉글랜드 데본 주 엑서터 |
|
국적 | 영국 ( 잉글랜드 ) | |
직업 | 축구선수 (공격수 / 은퇴) | |
소속팀 |
엑서터 시티 FC (1928~1929) 아스날 FC (1929~1947) |
|
국가대표 | 21경기 12골 ( 잉글랜드 / 1931~1938) |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의 축구인. 이안 라이트, 티에리 앙리 이전 아스날 최고의 골잡이로 별명은 'The Boy(꼬마)'.2. 일생
1912년 데본 주 엑서터에서 태어나 1928년에 16세 때 고향팀 엑서터 시티에 입단하여 레프트윙어로써 발군의 활약을 선보였다. 그러다가 1929년에 왓포드전을 관전한 허버트 채프먼은 눈길이 배스틴에게 끌린 나머지 아스날 입단을 제안했고, 그는 제안을 수락한다.그는 아스날에 입단하자마자 1군에 바로 투입되어 채프먼 감독이 구상해낸 'WM 포메이션'에서 배스틴은 중요한 역할을 해냈고, 1930년에 불과 18세 43일의 나이로 허더즈필드 타운과의 FA컵 결승전에 나서서 FA컵 역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다. 이후 리그 우승을 거둔 1932/33 시즌에는 라이트윙어 조 흄과 53골을 합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잉글랜드 국대에서 21경기에 출장해 12골을 넣었고, 특히 1934년 11월에 하이버리에서 열린 이탈리아전에서 아스날 동료 6명과 함께 선발되어 이탈리아를 치열한 혈투 속에서 쓰러뜨렸다. 훗날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크레타섬에서 배스틴을 생포했다고 선전하였다고 한다.[1]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배스틴은 재능이 꽃피워가는 사이 제2차 세계 대전을 맞는 불운을 맞았고, 전쟁이 끝난 뒤 얼마 뛰지 않은 시점에서 전쟁 중 경기에서 입은 다리 부상으로 인해 1947년에 불운하게도 은퇴하게 된다. 그가 아스날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기록한 178골은 한동안 깨지지 않았으나, 1997년 9월 13일에 이안 라이트가 볼턴 원더러스를 상대로 통산 179골을 기록하면서 이 기록은 깨졌고, 2005년에는 티에리 앙리마저 라이트의 기록을 갱신하였다.
은퇴 이후 고향인 엑서터에서 술집을 운영하며 여생을 보내다 1991년에 79세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사후 그가 뛰었던 엑서터 시티는 고향이 낳은 훌륭한 선수를 기리기 위해 홈구장인 세인트 제임스 파크 관중석의 일부분을 '클리프 배스틴 스태드'라고 명명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2009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
정작 그는 선천적인 청각장애로 하이버리에서 공습 대비를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