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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율사 생애 영상 |
1. 개요
眞表(718 ~ ?)[1]
8세기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 승려이다.
2. 생애
자세한 기록은 부족하나 주로 경덕왕 대에 활동했다. 보통 진표율사(眞表律師)로 불리는데, 여기서 율사(律師)란 불교의 계율을 자세히 공부한 승려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진표전간〉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의 내용을 종합하면 완산주 벽골군(碧骨郡) 도나산현(都那山縣)[2] 대정리(大井里) 출신으로 속성은 '정씨(井氏)'라 한다. '진표전간'에선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내말(乃末)'은 5두품 직책인 ' 나마'의 이칭으로 해석되는데, 아버지가 '진씨(眞氏)' 성을 가진 나마인 점과 진표의 출신 지역이 옛 백제 지역이라는 점을 통해 그의 가문이 백제의 귀족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11세가 되던 어느 날 진표는 사냥하다 논둑에서 쉬던 중 개구리 30여 마리를 잡은 다음 구워 먹으려고 버들가지에 꿰어 물속에 담가 두었는데, 산에 가서 사슴 사냥을 하고 나자 그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이듬해 봄에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논둑에 다시 가 보니 개구리들이 꿰인 채로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에 진표는 "괴롭구나, 어찌 내 입과 배를 채우자고 저들로 하여금 한 해가 지나도록 고통받게 했단 말인가!"라며 뉘우치고는 버들가지를 조심스레 끊어 개구리들을 풀어 주었다.
깨달음을 얻은 진표는 산속에 들어가 머리를 깎은 뒤 출가하여 금산사로 향했고, 그곳에서 만난 스승 순제법사(順濟法師)의 조언에 따라 변산의 부사의방장으로 갔다. 변산에 진표가 수행한 부사의방장이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는데,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을 만한 절벽에 붙은 바위덩이다. 여기서 3년 동안 망신참법[3]으로 수행한다.
수행 끝에 미륵불로부터 점찰경 2권, 증과간자 189개를 받고 득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766년 금산사를 중창하고 신라 5교 9산 중 법상종(法相宗)의 시조가 되었다. 진표와 법상종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보는 의견도 있으며, 보충하자면 오히려 원측의 유식 불교와 관련 있는 종파가 법상종인데, 진표는 유식 불교와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원측의 제자인 순경과 태현을 시조로 보기도 한다.
제자로는 영심(永深), 보종(普宗), 신방(信芳), 체진(體珍), 진해(珍海), 진선(眞善), 석충(釋忠) 등이 있는데, 모두 산문(山門)의 조사가 되었다고 한다. 미륵신앙을 중시한 승려로 종파에 따라서는 진표를 한반도 미륵신앙의 시조로 보기도 한다. 미륵신앙은 삼국시대에 신라 승려가 공주의 신원사에 미륵사상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갔다는 일화 등을 통해 먼저 백제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침 진표가 출생하고 수행한 곳도 백제의 고지에 해당하므로 그 풍토를 이어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3. 외부 링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국사관논총 제78집: 김남윤(1997) - 진표의 전기 자료 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