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프 사미티에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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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클럽 | ||||
17대 |
16대 |
5대 리카르도 사모라 |
6대 주제프 사미티에르 |
7대 루이스 바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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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1938년 | 1938년~1939년 | 1945년~1946년 |
FC 바르셀로나 역대 주장 | ||||
파울리노 알칸타라 (1920~1927) |
→ |
주제프 사미티에르 (1927~1933) |
→ |
후안 호세 노녜스 (1933~1942) |
스페인의 前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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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주제프 사미티에르 Josep Samit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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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주제프 사미티에르 비랄타 Josep Samitier Vilal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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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2년
2월 2일 스페인 왕국 바르셀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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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2년
5월 4일 (향년 70세) 스페인국 바르셀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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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스페인|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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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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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FC 바르셀로나 (1919~1933) 레알 마드리드 CF (1933~1935) OGC 니스 (1936~1939) |
감독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36) OGC 니스 (1942) FC 바르셀로나 (1944~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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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21경기 2골 ( 스페인 / 1920~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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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축구인으로, 1944년부터 1947년까지 FC 바르셀로나 감독을 맡았다.별명은 '마법사(El Mag)', '메뚜기(Home Llagosta)', '페페(Pepe)'.[1]
2. 선수 시절
1902년에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지역 유소년 팀인 FC 인테르나시오날에서 축구를 시작하여 17세에 1919년에 바르사와 프로 계약을 맺었다. 그가 활동할 시절 같이 뛴 리카르도 사모라가 골대를 확실히 지켜주었다면 사미티에르는 무지막지한 득점력을 과시했다. 그는 바르사에서 뛴 14년 동안 무려 333골[2]을 넣었고, 코파 델 레이에서만 65골을 넣어 대회 역사상 최다 득점 타이틀을 현재까지 유지중이다. 공식 경기 기록과 코파 델 레이 득점 기록만 따지면 팀의 최초 스타 파울리노 알칸타라를 뛰어넘는 기록이다. 게다가 그는 1929년 라리가 우승을 이끌어냈으며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에서 스페인 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따기도 했다. 한편 그는 1925년에 경이로운 오버헤드킥 하나로 인기 스타가 되었다.이와 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바르사가 그를 잃은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다. 당시 사미티에르는 바르사와의 재계약 과정에서 급여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바르사가 자신의 실력에 맞지 않는 연봉을 제시했기 때문에 레알의 유혹을 못 이겼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미티에르는 바르사 팬들로부터 철새, 배신자라는 지탄을 들었고, 레알-바르사 간의 사이가 틀어진 계기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1933년 1월에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서 1932/33 시즌에 팀의 2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전년도에 엘 클라시코에서 바르사를 위해 골을 넣은 그는 1933년 1월에 엘 클라시코에서 바르사 팬들의 야유를 받으며 1:1 무승부를 이끌기도 했다.
이후 그해 3월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 사미티에르가 홀로 2골을 넣어 3:1로 경기를 이끌어 또 바르사 팬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도 했다. 또 1934년 엘 클라시코 때 득점에 성공해 4:0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그 해에 레알 마드리드를 코파 델 레이 우승까지 이끌며 기대에 부응했다.
이후 스페인 내전 중인 1935년에 프랑스로 망명한 사미티에르는 OGC 니스로 이적하면서 바르사 식구였던 사모라와 재결합해서 활약하다 1939년에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3. 은퇴 이후
1936년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잠깐 일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사미티에르는 1942년에 니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잠깐 일하다가 1944년에 친정팀인 바르사의 감독으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1944/45 시즌 라리가 우승과 1945년 '코파 데 오로 아르헨티나'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수페르코파에서 코파 델 레이 우승팀인 아틀레틱 클루브를 이겨 고향 팬들을 달래기도 했다.1947년에 감독직을 내려놓은 뒤 바르사의 스카우트 담당 이사로 일하면서 1951년에 라슬로 쿠발라를 스카우트하는 데 기여한 뒤 1959년에 레알 마드리드 이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62년에 바르사에서 맹활약한 브라질의 스타 공격수 에바리스투를 레알로 이적시키면서 또 바르사 팬들에 분노를 안겼다. 그러나 이후에도 바르사에 또 돌아와 이사직으로 친정에 돌아온 형태가 되었다. 이처럼 바르셀로나 선수 - 레알 선수 - 바르셀로나 스태프 - 레알 스태프 - 바르셀로나 이사로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를 오갔던 그의 행적 때문에 왕복 비행기라는 별명이 붙었다.
1972년에 고향인 바르셀로나에서 향년 70세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