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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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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시어터 멤버
現 멤버 포지션 前 멤버
존 페트루치 기타 크리스 콜린스 (보컬)
찰리 도미니치 (보컬)
케빈 무어 (키보드)
데렉 쉐리니언 (키보드)
마이크 맨지니(드럼)
존 명 베이스
제임스 라브리에 보컬
조던 루데스 키보드
마이크 포트노이 드럼

<colbgcolor=#000><colcolor=#fff> 존 명
John Myung
#!wiki-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cecabass.files.wordpress.com/big_john_myung1.jpg|width=100%]]
본명 존 로 명
John Ro Myung
출생 1967년 1월 24일 ([age(1967-01-24)]세)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버클리 음악대학(중퇴)
신체 172cm
직업 베이시스트
소속 그룹 드림 시어터
활동 시기 1984년 ~ 현재
악기 베이스 기타

1. 개요2. 상세3. 음악적 역량4. 성격5. 기타

[clearfix]

1. 개요


드림 시어터의 베이시스트로 한국계 미국인이다.[1]

2. 상세

1967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마이크 포트노이, 존 페트루치와 함께 드림 시어터 결성 원년멤버이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으며,[2] 15살 때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가 밴드의 베이시스트를 맡아 줄 것을 부탁하면서, "바이올린이나 베이스 기타나 줄이 4개니깐,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베이스 연주를 시작했다고 한다.[3] 이 즈음에 존 페트루치와 음악 취향을 공유하며[4] 함께 연주하기 시작했고 함께 버클리로 진학을 하기로 의기투합 하기에 이른다.[5] 이 시기에 두 사람이 음악에 품은 열정은 어마어마해서 새벽 4시에 존 페트루치를 밴으로 픽업해서 버클리로 통학했고 아침부터 밤까지 잼과 연습을 하는 생활을 매일 같이 이어 갔다고 한다. 버클리에 입학 한지 몇 주 쯤 후에 마이크 포트노이를 만나게 되고 열정은 그들 못지 않았던 그도 그들과의 밤샘 합주에 동참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 세 명이 잼을 하고 있으면 록과 메탈의 성향 상 소리가 엄청나게 컸는데, 보통은 재즈나 퓨전 등을 연주하던 다른 학생들이 연습실로 찾아와 소리 좀 줄이라고 불만을 터트리곤 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록과 메탈에 심취해 연주하는 밴드는 그들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그 밴드가 바로 드림 시어터의 전신인 '머제스티(Majesty)'다.

국내에서는 흔히 '존 명'이라고 부르지만, 미국인인 본인은 자신의 성씨 Myung을 [ˈmaɪ.əŋ](마이엉)이라고 발음한다.[6] My-ung으로 끊어서 읽었다고 보면 된다.[7]

팬들 사이에서는 엘라스틴 머리, 늙지 않는 사람 등으로 불리고 있다. 실제로 존 명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엘라스틴 머릿결을 가지고 있으며 젊었을 때와 지금이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인에 비해 아시아계 인종이 비교적 동안인 것은 일반적인 편이지만, 존 명은 그것을 감안해도 유별나게 동안인 편이라 서구권 팬들에게는 퍽이나 인상 깊은 듯하다. 한국 팬들에게는 1999년 트라이포트 락 페스티벌을 위해 내한했을 때 무대에 올라 머리를 푼 순간부터 지금까지 머릿결 좋은 장발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다.

여담으로 소음을 싫어한다. 2000년 한국 음악지와의 전화인터뷰에서 근황을 묻자 음악 이야기를 기대했던 인터뷰어의 의도와 달리 집 주변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고 한다. 원래는 대단히 마른 체구였으나, 6현 베이스를 연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팔굽혀펴기를 하루 50차례씩 하면서 체력을 기른 결과 악기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등발이 완성되었다.[8] 동료인 존 페트루치 역시 틈나는 대로 헬스장을 찾아 체력을 단련해 지금의 체격을 완성했다. 그냥 연주만해서 만든 체격이 아니다. 한 번의 무대에 3시간씩 연주를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영감을 주는 진보적인 베이시스트이자 철저한 기본과 루틴 반복을 강조하는 구도자로 많은 연주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프라이머스의 레스 클레이풀이나 레드 핫 칠리 페퍼스 플리같이 선구적 연주자 하면 흔히 상상하는 괴짜 이미지가 아니라 과묵한 동양인 메탈 베이시스트라는, 뭐라 형언하기 힘든 무림 고수 같은 독특함 때문에 꽤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3. 음악적 역량

▲ 연주 영상
90년대 초, 여러 장르를 집대성해서 메탈에 녹여내며 놀라운 연주를 선보인 드림 시어터가 등장했고, 그들의 성공으로 존 명 역시 주목받는 베이시스트로 떠올랐다.

보통 존 명의 연주를 연상할 때 고속 프레이즈를 쉴새 없이 쏟아 내는 테크니션의 면모를 주목하지만, 당시 메탈 씬에서 활동하는 동년배 베이시스트 중에서 돋보이는 테크닉으로 유명한 연주자들은 존 명 말고도 여럿 있었다.[9] 다만 그들과 다른 존 명만의 강점은 다양한 장르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라 할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한 다채로운 연주를 프로그레시브 메탈의 장르적 특성으로 제시하면서 다른 베이시스트들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10]

존 명 세대 이전 프로그레시브 록 필드에서 베이스의 테크닉 연구는 러쉬 게디 리 예스의 크리스 스콰이어 등이 먼저 시도했던 것이고 존 명은 그 직계라 할수 있다. 특히 존 명은 게디 리에 깊게 경도돼 있었던 만큼 그의 사운드와 테크닉은[11] 게디 리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다만 그는 프로그레시브 록에 메탈적 문법을 추가하고 더 나아가 로우 B 스트링을 쓰는 5현, 6현 베이스로 보다 육중한 사운드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선배격 뮤지션과 차이가 있다. 그는 메탈 베이스의 강력함에[12] 크로스오버적인 기교가[13] 접목된 흥미로운 스타일을 선보였다. 또한 프렛리스 베이스나 12현 채프먼 스틱 연주를 메탈 음악에 시도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드림 시어터의 음악이 연출하는 다채로운 분위기에 기여한 참신한 시도였다.[14] 현재 모던 헤비니스/프로그레시브 메탈 필드에서 온갖 기상천외한 테크닉을 과시하는 베이시스트들이 많은데, 그들은 무조건 존 명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봐도 될 만큼 선구자적 베이시스트.

거의 모든 상황에서 핑거 피킹을 사용하는 핑거 피킹 장인. 존 명이 인터뷰에서 그의 연주와 테크닉에 대한 설명할때, 그가 가장 주력하는 테크닉은 핑거 피킹이며 연주의 빠르기에 따라 투핑거, 쓰리핑거를 바꿔 가며 모두 활용한다 밝혔다. 또한 슬랩은 거의 하지 않지만 태핑, 하모닉스의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는 테크닉이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Systematic Chaos 앨범에서는 피크 피킹을 시도했고 기타의 느낌에 가까운 크런치함이 매우 매력적이었다고 했지만 그 이후에 사용하지는 않는 듯.[15]



또한 6현 베이스 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에 하나다. 초기에는 4현 뮤직맨 스팅레이, 팬더 재즈베이스를 사용했다. 그 후 5현 베이스나 여러 모델을 사용하다가 야마하에서 엔도스먼트를 받아 시그니처 6현 베이스 RBX6JM을 주로 사용했고, 2007년 부터 뮤직맨 봉고 6현을 사용하고 있다. 슬랩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는 악기들의 현 간격이 좁은 편이다. 존 명이 사용하는 봉고 6현은 기존 양산형 6현 모델[16]과는 다른 커스텀 모델이며, 6현 사이즈의 바디에 5현 사이즈의 넥을 조립하여 극단적으로 좁은 현 간격[17]을 갖고 있다. 과거에 야마하를 엔도서로 두었을때도 일반적인 6현 베이스보다 좁은 현 간격[18]의 시그니처 모델을 사용했다.

2020년에는 뮤직맨에서 존 명의 봉고 시그니처를 출시하였다. 앞서 말한 커스텀 베이스처럼 5현 넥을 사용하는 6현 베이스인지라 슬랩을 배제한 핑거피킹에 특화되었으며 존 명 특유의 다이나믹한 피킹에 어울리는 강렬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온보드 이퀄라이저를 쓰지 않기 때문에 시그니처 모델에서도 이퀄라이저는 삭제되었으며[19], 마스터 볼륨과 5단 픽업 셀렉터만 장착되어 있다.

연습덕후로 알져져 있으며 드림시어터의 전 키보디스트 데렉 쉐레니언의 말로는 무대가 끝난 후에 '웜 다운' 연습을 하는 뮤지션은 존 명이 유일하다고 한다. 또, 존 페트루치와 버클리 음대에 다니던 때, 하루에 적어도 6-8시간(...) 연습하는걸 제안했다고 한다. 프로 현직에 있는 지금까지도 그정도 연습을 하는 걸로 유명하다. 2022년 DT SNS에 멤버들과 같이 무대에서 짧막한 홍보 영상을 찍는데 그 짧은 시간 와중에 혼자만 베이스 연습을 하고 있을 정도인데, 잠시라도 손을 쉬지 않을 정도. 5집 메이킹 영상보면 다른 멤버들은 쉬는 시간에 스포츠를 하는 등 한가롭게 지내는반면 존 명만 연습하고 있다. 또한 인터뷰에서 보면 레코딩 당시 절대 트랙을 잘라서 녹음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이어서 라이브와 같이 연주하여 원테이크로 녹음을 끝내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트랙을 잘라가며 녹음하면 아무래도 원테이크보다 부자연스럽고 매끄럽지가 않다고 한다. 이는 다른 멤버들에게도 큰 영향으로 주었고 마이크 포트노이 후임으로 들어온 마이크 만지니는 이러한 방식이 처음이라 처음에 적응을 잘 못했다고 한다.

괴물같은 핑거 피킹 테크닉이 주 무기라는 점에서, 빌리 시언과 자주 비교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연주를 들어보면 '테크니션'이라는 점 외에는 공통점을 찾기가 거의 힘들다는 것을 알수 있다. 드림 시어터의 전 드러머 마이크 포트노이가 최근 빌리 시언과 자주 협연을 하고 있는데, 둘의 스타일 차이가 정말 극명하다는 걸 쉽게 느낄 수 있다. 존 명은 백 사운드를 받쳐주며 해당곡에 적절한 연주와 유려한 베이스 라인을 선보이는 편이고, 빌리 시언은 빵빵한 멜로디와 속주로 프론트에서 사운드를 잡아주는 편이다. 이는 DT의 음악 특성상 기타와 신디사이저가 리듬과 리드 역할을하고 사운드가 이 둘만으로 어느 정도 풍성하기 때문에 굳이 베이스까지 전면으로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뱃사공이 많아서 산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빌리 시언의 경우 재직했던 밴드 음악 특성상 비어있는 사운드를 채워주기 위해 전면으로 나선 점도 있고 그가 데뷔했던 당시 베이스도 빠르고 화려하게 연주해야 그나마 주목을 받을 수 있던 시기다. 락/메탈 씬에서 베이시스트만큼 알려지기 어려운 포지션은 없다. 다만 존 명은 인터뷰에서 빌리 시언의 영향도 받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오버 드라이브 톤이 멋져서 한번 따라해 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The Dance of Eternity 같은 곡에선 드라이브를 건 베이스 솔로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단히 뛰어난 작사가이기도 하다. 보통 연주 실력에 감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간혹 놓치는 점이다. 팬들은 드림시어터 최고의 가사로 그가 작사한 곡을 자주 꼽는다. 그가 작사한 곡들은 시적인 추상과 은유로 가득차 있다. 아마 그의 성격이 많이 반영된 듯 하다. 5집 이후부터 작사에 참여 하는 일이 없었다. 팬들이 아쉬워하자 마이크 포트노이는 그의 가사에 맞추기 위해 곡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작사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답변했다.[20] 그리고 11집 부터 다시 작사에 참여했다.[21] 그리고 드림시어터의 후기 명곡중 하나인 'Breaking all illusions'를 작사했고, 이 역시 아름다운 가사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4. 성격

성격은 굉장히 내성적이다. 강렬한 연주와 굉장히 대비될 정도.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 많은 곳에서는 말을 잘 안하려고하고 묵묵히 연주만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2008년 내한공연 당시 공항에 마중 나온 팬들에게 다른 멤버들은 사진도 찍어주고 싸인까지 해주는 반면 존 명은 자신들을 보러 온 팬들을 보고 당황하고 수줍어 하며 재빨리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미국 팬들 중에는 존 명이 벙어리인 줄 알고 있었다는 사람마저 존재한다.

어릴적에는 상당히 사납고 시끄러운 성격이었는데, 그래서 어머니가 내놓은 해결책이 바이올린 배우기(...). 그 결과 정말지나치게 조용해젔다.

물론 벙어리가 아닌 만큼, 교습용 DVD나 인터뷰 영상에서는 잘만 말한다.[22] 너무나 또박또박 잘 말해서 보는 사람이 당황스러워질 정도. 과거에는 레슨도 했었는데 프로페서라고 불릴 정도로 분석적인 수업으로 유명했다.

인터뷰에서 '베이스 실력이 상당한데 왜 기타나 키보드처럼 전면에 나서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음역대가 달라서 그냥 쳐도 다 들리지 않나?'같은 이야기를 할 정도로 음악적으로도 굉장히 밴드 지향적이고 내성적이다.

헌데 한번은 무대에서 갑자기 같은 멤버(제임스 라브리에)를 향해 어깨돌진을 하는 기행을 선보였다. 팬들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명이 저렇게 빡친거야?" 하고 안절부절했지만,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몇 백 달러가 걸린 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멤버들은 내기를 했다곤 하지만 내성적인 존 명이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모양. 역시 몇백 달러씩이나 되는 큰 돈이 걸리면 사람이 변하는듯. 이 충격과 공포의 돌진은 이후 '명 태클'로 불리게 된다. 이 사건 이후 라브리에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분노의 게시글(물론 장난)도 가히 압권이다. 그래서 언사이클로피디아에서는 그를 베이시스트겸 태클리스트 라고 소개한다(...).

오래된 영상이나 기행 등을 보면 젊었을 때는 마냥 수줍기만 한 성격은 아닌듯 하다. 1993년 도쿄 라이브 등을 보면 꽤 활발하게 돌아다니기도 한다.[23] 또 외국 팬 사이트 등에서 믿기 힘든 일화가 소개 되어 있다. 드림시어터의 전신인 머제스티 시절, 당시 보컬이었던 '크리스 콜린스'가 라이브 공연중에 밴드 멤버를 소개하다가 존 명을 '한국의 정글에서 왔다'며 인종차별성 발언을 하자 엄청나게 격노했고 그에게 달려들고 고함치는걸 주변에서 뜯어 말려야 했다고 한다.[24]

5. 기타




[1] 부모 다 한국인이지만 존 명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는 조금밖에 못한다고 한다. 1993년 첫 내한 때 간단한 인사말을 한국어로 나눌 수 있었다고 하며, 부모의 한국어를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스피킹은 능숙하지 못해도 리스닝은 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을 투어 스태프, 팬, 기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사실 따로 한국어 교육을 받지 않은 한인 2세들의 한국어 실력이 일반적으로 저렇다. 미국뿐만아니라 다른 나라 한인 2세도 저런 경우가 대부분. 물론 배우 공대유처럼 본인이 피나는 노력으로 교포 특유의 톤이 없는 한국어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2] 원래 성격이 매우 사나워서 어머니가 해결책으로 바이올린을 시켰다고 한다. 베이스를 연주하게 된 이후로는 전혀 치지 않았다고. [3] 당시 그가 거주했던 롱아일랜드에서는 취미 활동으로 밴드를 결성하고 연주하는 것이 청소년들 사이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동네 친구였던 존 페트루치 역시 어린 시절에 케빈 무어와 함께 밴드를 결성한 적이 있다. [4] 러쉬, 블랙 사바스, 아이언 메이든 등등. [5] 여담으로 베이스 연주와 락 음악에 심취하게 되어 베이스를 하겠다는 그의 말에 아버지는 베이스 기타를 창 밖으로 내던졌다고 한다. [6] 일단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서 한국계 외국인의 성씨 표기에 관하여 따로 규정을 두지 않아 한글 표기 시에 현지 발음을 따르든 한국어 어원을 따르든 상관없다고 보고 있다( 관련 답변). [7] 영어권 화자들은 이중모음에 익숙하지 않아 아시아인들이 이런 식으로 표기한 단어를 잘 못 읽는다. Hyundai를 현대라고 읽는 사람은 없다시피하며 헌데이 정도로 읽는게 상당히 양호한 편이고, Ryu는 롸이-우, tokyo는 토키오로 널리 통용된다. [8] 사실 드림 시어터의 최초창기인 머제스티 시절 존 명뿐만 아니라 페트루치와 포트노이 역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엄청나게 마른 체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존 명은 거의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마른 체형이었다. [9] 메탈리카 클리프 버튼은 현란한 베이스 솔로로 이름을 날렸고, 카니발 콥스의 알렉스 웹스터도 어마어마한 피킹 테크닉을 과시한 메탈 베이시스트의 예시로 들수 있다. [10] 이는 다른 드림 시어터 멤버 모두 마찬가지이며, 드림 시어터과 함께 프로그레시브 메탈의 방향을 확립한 개척자이자 거목으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11] 근음 연주를 넘어서 폭 넓은 스케일을 사용하는 스타일과 강력한 핑거 피킹 테크닉으로 구사하는 복잡하고 빠른 프레이즈 등 [12] 스래시 메탈처럼 거칠고 빠르게 달리는 ‘Pull Me Under’를 예시로 들 수 있고, ‘Under a Glass Moon’ 등의 곡에는 스티브 해리스가 연상되는 선 굵고 인상 깊은 베이스 리프가 등장한다. [13] ‘Take the Time’, ‘Metropolis part.1’ 등 재즈 록 퓨전의 특징이 강하게 드러나는 연주가 자주 등장한다. 커리어 초창기의 레슨 비디오를 보면 재즈에도 뿌리를 두고 있는 그의 음악과 테크닉의 성향을 알수 있다. ‘Erotomania’의 대위법 진행에서는 클래식 음악 기법의 영향도 드러난다. [14] 참고로 채프먼 스틱 연주와 프렛리스 베이스 연주 모두 숀 말론 시닉의 1집 Focus에서 먼저 시도한 바 있고, 아마 메탈 내에서 최초는 이쪽일 것이다. 다만 존 명이 시닉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불명이고, 일단 자코 파스토리우스나 토니 레빈(실제로 드림 씨어터와 접점도 있다) 과의 관련이 크다고 볼 수 있다. [15] 메탈 장르에서 빠른 속도와 날카로운 톤을 위해 피크 피킹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다이나믹 변화의 폭이 큰 드림 시어터의 음악에는 다양한 뉘앙스 표현이 용이한 핑거 피킹이 필수적일 것이다. [16] 브리지 기준으로 현 간격 17.5 mm [17] 14 mm [18] 16.5 mm [19] 다만 프리앰프는 그대로 내장 돼 있고 9v 배터리가 2개 들어가는 점 역시 순정 봉고 모델과 동일하다. 이퀄라이저 기능만 제거된것. [20] 곡을 수정하면 그만큼 앨범 제작 기간이 늘어나게되는데다가 다른 포지션들도 새로운 리프와 멜로디를 짜야하기 때문에 존 명이 한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마이크와 존은 성격이 극과 극이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불만과 마찰이 아주 없진 않았을 듯. [21] 공교롭게도 마이크 포트노이 탈퇴 후에 작사를 다시 시작했다. 팬들이 꽤 미묘하게 느끼는 부분이다. [22]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고 약간 가는 편. 두꺼운 편인 존 페트루치 마이크 포트노이와는 확실히 톤 차이가 있다. [23]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멤버들이 그를 유별나게 과묵하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기본적인 기질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닌듯 하고, 여느 20대와 같은 혈기가 그에게도 없지는 않았다 정도로 봐야 할듯. [24] 그는 시카고 출신의 미국 토박이다. 그리고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혈통에 대해 인식 하고있다. 자신의 미국인 정체성과 한국계 혈통을 싸잡아서 모욕한 것이니 격분할 수밖에 없다. [25] 1위로 선정된 후 인터뷰를 가졌는데 이 인터뷰를 본 해외 팬들은 "존 명이 말을 하다니!!" 하며 놀라워했다. 밈에 기반한 장난인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26] 왼쪽부터 존 명, 존 페트루치, 맥스 포트노이(포트노이 아들), 마이크 포트노이, 조던 루데스, 제임스 라브리에 [27] 미국에서 보통 동양인들을 떠올리면 공부 뒤지게 열심히 하는 것들 같은 이미지가 있다. 미국은 보통 고등학교에서 교육열이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인데 반해 한중일 세 나라 사람들은 워낙 공부에 극성인 것처럼 보여서 그런 듯. [28] 다만, 조던은 '그게 그의 방식이므로 존중한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 반면, 마이크는 '그 점이 아쉽다. 친해지기 어려운 친구.'라는 식으로 언급한 것이 차이점. 다만, 마이크 탈퇴 후에 존명과 꾸준히 연락하고 지낸다고 마이크가 언급 한적이 종종 있으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