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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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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169E1> 조(趙)씨 가문 6대 종주
성자
成子
영(嬴)
조(趙)
최(衰)[1]
자여(子餘)
아버지 공맹(共孟)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22년
재임 기간 음력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2년

1. 개요2. 생애
2.1. 진문공을 따라 유랑하다2.2. 유랑 이후

[clearfix]

1. 개요

조씨 가문의 6대 종주. 진문공(晉文公)의 모사. 진(晉)나라의 대부. 진문공이 19년 동안 유랑할 때 그를 따랐으며, 진문공이 진(晉)나라의 군주가 되자 그를 상경에 봉하고 그에게 봉토를 내렸다. 조최가 죽고 그 아들인 조돈(趙盾)이 뒤를 이었다. 자는 자여(子餘).

2. 생애

2.1. 진문공을 따라 유랑하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초기에 그는 진헌공(晉獻公)과 여러 공자들 중 누구를 섬기는게 길한지 점을 쳤는데, 오로지 공자 중이(훗날 진문공)를 섬기는 것이 길하다고 나와 그를 섬겼다고 한다.

진헌공 21년(기원전 656년), 그는 공자 중이가 여희의 무리 때문에 몸을 피하자 그를 따라 유랑을 마다하지 않았다. 중이를 같이 따른 인물은 호언(狐偃), 호모(狐毛)[2], 가타(賈佗), 위주(魏犨), 서신(胥臣), 개자추(介子推) 등이었다.

진헌공 22년(기원전 655년), 공자 중이와 함께 적(翟)나라[3] 땅에 이르러 결혼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조돈을 낳았다고 한다.

진혜공 7년(기원전 644년), 진혜공(晉惠公)은 자신이 공자 중이만 못하다가 여겨 발제를 보내[4] 공자 중이를 척살하려 했다. 이에 조최가 제(齊)나라로 달아나자고 제안했다. 공자 중이는 그 말에 동의해 제나라로 가니 원체 대범하기로 이름난 제환공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고, 그 딸을 아내로 주었다. 공자 중이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해 행복하게 살면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조최는 호언 등 참모진 및 제강(齊姜)과 짜고 공자 중이를 취하게 해서 그를 떠나게 하려 했다.

공자 중이 일행은 송(宋)나라에 머물다가 송양공(宋襄公)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초(楚)나라로 갔다. 가서 초나라의 왕인 초성왕(楚成王)에게 몸을 의탁했다.

진혜공 14년(기원전 637년), 가을 조최는 공자 중이에게 진(秦)나라에 가자고 하여, 거기에 가서 진목공에게 의지했다. 진 목공은 공자 중이를 회영(懷嬴)과 혼인시키고, 그 친분을 바탕으로 진(晉)나라의 후작으로 삼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진회공 2년(기원전 636년), 진목공은 공자 중이와 함께 진회공(晉懷公)을 몰아냈다. 그리고 공자 중이가 진후가 되니 그가 바로 진문공이다.

2.2. 유랑 이후

진문공 원년(기원전 635년), 조최가 진문공에게 패자가 되기 위해 주(周)나라 왕실을 보좌하라고 했다. 4월에 진 문공이 주양왕(周襄王)의 아우 왕자 대(王子帶)를 죽이는 공로를 세우자 주 양왕은 진 문공에게 하내와 양읍 땅을 하사했다.

진문공 3년(기원전 633년), 진문공이 삼군을 편성하자 조최가 극곡(郤縠)을 중군 원수로 추대했고, 극진(郤臻)에게 그를 보좌하게 했다. 호모를 상군장, 호언을 상군좌[5], 난지(欒枝)는 하군장, 선진은 하군좌로 임명했다. 그리고 순림보(荀林父)가 융거를 몰고, 위주는 융우가 되었다. 이듬해 조(曹)나라 위(衛)나라를 정벌했다.

진문공 4년(기원전 632년), 진문공은 조최와 함께 천토의 회맹에 참여했다.

진문공 7년(기원전 629년), 진문공은 신상군, 신하군을 두어 조최를 신하군장으로 임명했다.

진문공 8년(기원전 628년), 호언이 죽자 그를 대신해 상군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 진문공이 서거했다.

진양공 원년(기원전 627년), 중군 원수 선진이 전사해 선저거(先且居)가 원수가 되었고, 조최는 중군좌가 되었다.

진양공 3년(기원전 625년), 조최는 선저거와 함께 팽어 전투에 참여했다.

진양공 6년(기원전 622년), 조최가 죽고 성계(成季)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조돈이 후계를 이었다.

[1] 최로 읽어야한다. [2] 호모와 호언은 중이의 외삼촌들이다. [3] 북적의 일종이라고 한다. [4] 진헌공 때 공자 중이를 죽이려 든 사람이다. 진문공 전문 킬러 [5] 호언을 상군장, 호모를 상군좌로 임명하려 했으나 호언이 호모가 연장자이기에 그를 상군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양보해서 둘의 직위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