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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6:58:34

조 프레이저

파일:조프레이저 프사.jpg
이름 조셉 윌리엄 프레이저
(Joseph William Frazier)
출생 1944년 1월 12일
출생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뷰퍼트
사망 2011년 11월 7일 (향년 67세)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신체 181cm / 92kg / 185cm
링네임 Smokin' Joe
복싱 전적 37전 32승 (27KO) 4패 1무 [1]
체급 헤비급
아마추어 경력 1964 도쿄 올림픽 헤비급 금메달

1. 개요2. 어린 시절과 아마추어 커리어3. 프로시절4. 말년5.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6. 여담

1. 개요

"훌륭한 병사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 묵묵히 승리를 향해 매진한다."
"프레이저를 때리다 지쳐 죽음의 공포까지 느꼈다. 그는 마치 짐승 같았다"[2]
무하마드 알리

미국의 前 권투선수.

2. 어린 시절과 아마추어 커리어

1944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12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조 프레이저는 필라델피아로 이사한 후 본격적으로 복싱을 하기 시작했다. 1964년에 도쿄 올림픽에 예비선수로 참가했다가 주전선수가 부상을 당해 대신 출전해 금메달을 따냈는데, 프레이저의 남다른 정신력과 목적의식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이때 사실 대체 선수로 나간 첫 시합에 왼손의 엄지가 부러졌던 것. 주 무기인 왼손 훅을 거의 봉인해야 했지만 프레이저는 평소 자신보다 잘 나가던 주전 선수는 못해낼 금메달을 따겠다는 생각으로 왼손 훅을 던지는 대신 오른손으로 볼륨펀칭을 하여[3] 왼손의 공백을 보충했고, 3대2 판정승으로 당대 올림픽 복싱에서 미국 유일의 금메달을 따냈다.

아마추어에서는 본인이 대체해서 출전했던 주전 선수 매티스를 제외하고는 패배하지 않았으며, 결국 매티스를 제치고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며 성공적인 아마추어 커리어를 마무리, 이듬해 프로로 전향한다.

3. 프로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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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알리와의 1차전.

프로데뷔 3년 만에 세계 정상의 위치에 오른 프레이저는 지미 엘리스를 상대로 5회 KO승을 거두며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그 후 29전 29승 26전 KO 및, 3번의 챔피언 방어전 중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라 불렸던 무하마드 알리에게 판정승을 거두는 등 승승장구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최강의 복서로 인식되고 있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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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포먼 과의 대결(왼쪽이 프레이저, 오른쪽이 포먼이다.)

1973년 1월 22일 자메이카에서 둘이 붙을 당시 도박사들은 포먼의 펀치력은 막강하지만 수비나 테크닉이 밀리기 때문에 프레이저가 이길 거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스포츠는 해 봐야 아는 것. 조 프레이저는 조지 포먼에게 6번의 다운을 당한 끝에 2라운드 TKO로 무너지고 만다.[5]

프레이저는 당시 헤비급 권투선수치고는 작은 신장 때문에 인파이팅으로 상대방에게 밀착공격을 해 사정없이 펀치공격을 하는 방식으로 이겼고, 이때 상체를 너무 숙이고 돌진하는 문제가 있었다.[6] 포먼은 신장도 프레이저보다 더 우월해 프레이저에게 밀착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대쉬하는 프레이저를 두손으로 밀어낸 뒤 상체를 숙이는 타이밍에 자신의 주무기인 강력한 라이트 어퍼컷을 먹여 프레이저를 다운시켰던 것. 프레이저 역시 초반부터 제법 많은 공격을 가드 사이로 꽂아넣었지만, 포먼이 똥맷집으로 버텨냈다. 그 후 무하마드 알리와의 2번의 재대결에서 전부 패하고, 1976년 조지 포먼에게 두 번째로 패배한 후 은퇴를 선언한다.

4.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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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말년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무하마드 알리와 화해하고, 함께 앉아있는 장면이 포착되는 등 원만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은퇴 후 프레이저는 고향인 필라델피아에서 권투체육관을 열고 말년까지 후배선수를 키워냈으며. 2011년 11월 7일 간암으로 인해 사망했다. 향년 67세였다.

5.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

조 프레이저의 커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권투황제 무하마드 알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알리 입장에서도 이는 마찬가지. 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알리는 많은 적수를 상대했지만, 최고의 라이벌을 한 명만 꼽아보라면 단연 조 프레이저이다. 그만큼 이 둘의 대결은 당대에 스포츠계를 뜨겁게 달궜던 복싱 사상 최고의 라이벌리 중 하나였다.

1971년 3월 8일 미국 뉴욕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무하마드 알리와의 경기 때 15라운드까지 간 끝에 판정승으로 알리에게 첫 패배를 안긴 이 경기는 복싱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설의 매치로 기록되었다.


그 뒤 74년 1월 28일 2차전에서 알리가 프레이저를 판정승으로 이겨 둘의 전적은 1승 1패가 되었다.

그리고 1975년 10월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일명 마닐라의 전율이라 불리는 둘의 마지막 시합이 열렸다.

파일:attachment/조 프레이저/pe.jpg


두 사람의 살벌한 싸움은 섭씨 38도의 더위 속에서 14라운드까지 진행됐다. 알리는 초반에 승세를 보였으나, 중반에 프레이저가 반격을 했고 알리는 ‘정글의 혈전’에 활용한 ‘로프 기대기’로 프레이저의 강공을 피했다. 후반 라운드에서는 알리가 주도권을 잡고 프레이저를 제압해 마지막 15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으나 프레이저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트레이너 에디 퍼치는 프레이저의 두 눈가가 크게 부풀어 올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을 보고 경기를 중단시켰고 알리는 프레이저의 3차전에서 이긴다. 승리한 알리 역시 링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 역시 탈진했던 것이다. 경기 이후 알리는 "프레이저를 때리다 지쳐 죽음의 공포까지 느꼈다. 그는 마치 짐승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둘은 링 밖에서도 서로를 디스하는 관계였지만 알리와의 1차전 승리 40주년 파티에서 그는 알리를 용서한다고 말했다. 알리 또한 프레이저의 말기 간암 투병 소식을 듣고 그의 회복을 기원하는 등 말년에는 서로 화해했다.[7][8]

6. 여담



[1] 이 4번의 패배는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에게만 2번씩 당한 거다. [2] 화해하기 전까지 사이가 안 좋았으나 알리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건 프레이저의 실력은 인정하며 자신의 최대의 적이자 라이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3] 앞손에 비해 뒷손은 체력 소모가 큼은 물론이요, 거리잡기도 훨씬 어려운데 왼손 한 번 던질 타이밍에 뒷손을 몇 차례씩이나 던져 거리를 잡았다는 점에서 프레이저의 미친 체력을 알 수 있다. [4] 참고로 이게 무하마드 알리의 생애 첫 패배였다. [5] 주목할 점은 무려 6번의 다운을 당하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일어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를 KO로 이긴건 조지포먼이 유일한데, 프레이저는 포먼과 두번 싸워서 모두 패했지만 쓰러진 상태로 KO 당한게 아닌 심판의 판단으로 시합을 중지시킨 TKO 였다. 그러니까 역대 최강의 하드펀쳐를 상대로 엄청난 펀치를 수없이 맞고도 끝까지 일어나 서 있었다는 거다. 실제로 맷집으로는 무하마드 알리와 1,2위를 다툴 정도로 강철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6] 마이크 타이슨은 86년도에 조의 아들 마비스 프레이저와 경기를 치르게 되는데, 상체를 숙이는 버릇을 그대로 닮은 마비스에게 다가가 어퍼컷만 줄창 먹여서 30초만에 KO승을 따냈다. [7] 사실 둘은 원래는 그렇게 나쁜 사이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알리가 경기전에 하는 특유의 입담으로 프레이저에게 "너무 멍청하게 생겼다.", "너무 못생겼다. 적어도 챔피언이 되려면 나 정도는 생겨야지.", "멍청한 백인의 장난감."이라고 하는 등의 도발을 너무 심하게 걸었고 프레이저가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둘의 사이가 나빠진 것이었다. [8] 프레이저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에서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의 최종 점화자로 알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성화대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알리를 밀어 떨어뜨리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