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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8:17:57

잊음을 논함


1. 개요2. 특징3. 전문(全文)4. 여담

1. 개요

1770년에 유한준(兪漢雋)이 조카인 김이홍(金履弘)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쓴 수필. 한문 원제는 忘解(망해)이다.

2. 특징

자신의 건망증을 토로한 조카에게 유교적 관점에서 그것은 오히려 좋은 일일 수 있다며 독특한 답변을 건넨다.

역설 이중부정 등을 빈번하게 사용해 기초적인 문학, 논리학에 익숙하지 않으면 독해하기 난감할 수 있다.

3. 전문(全文)

===# 원문 #===
余有姊之子曰金履弘
弘病忘甚對物則九遺遇事則十失
朝之所爲夕已迷昨之所行今不記
弘之言曰吾之忘其殆病矣夫
夫使吾小不能以治事而大不能以御物而言有所或失行有所或闕者
凡皆以忘爲之祟也
苟有能醫吾之忘者吾復何惜千金吾將千里不遠焉
余解之曰女睹忘之能病女而不忘之能益女矣不睹不忘之將爲女患而忘之將爲女福矣
吾願女不必醫忘非惟不醫忘又益忘至於遂大忘也
苟女以千金求天下之醫忘者而醫之則吾將左掣女肘而右挽女臂令不得醫焉
弘瞠而曰何謂也
余曰女病女之忘乎夫忘之非病也
女求女之不忘乎夫不忘之非非病也
夫不忘之所以爲病而忘之所以爲非病者
何也由於可忘而不忘也
夫可忘而不忘而謂之忘是病也
則是將以不可忘而忘之而謂之忘非病也而可乎
天下之患何興乎
興於不忘其所可忘而忘其所不可忘
目不能忘色耳不能忘聲口不能忘美味居不能忘廣室
身賤矣不能忘勢家貧矣不能忘利
貴不能忘驕富不能忘吝
物不能忘非義之取名不能忘無實之獲
而至於不可忘而忘者則親焉而忘孝君焉而忘忠
喪而忘哀祭而忘愨取與忘義進退忘禮
處下位忘分臨利害忘守
遠忘近新忘舊言發於口忘可擇行出於身忘可則
內之忘故外不能以忘外不能以忘故內以益忘
是故天不能忘或降之罰人不能忘或贈之嫉鬼神不能忘或享之孽
故夫知可以忘知可以不忘者能易之於內外
易之於內外者忘乎在人者之可忘不忘乎在己者之不可忘
弘性狷而心淸志端而行方其不可忘者弘雖寤寐不忘也
其可忘者吾願女忘不願女不忘
吾恐女所謂病女者之或不深而吾所謂福女者之或不豊也
又何必懷千金之寶涉千里之遠而醫忘爲哉
弘乎其忘之矣
兪漢雋, 「忘解」
===# 번역 #===
내 누님에게는 김이홍이라 하는 아들이 있다.

이홍은 잊어버리는 것이 아주 심했으니 어떤 물건을 보고선 열에 아홉을 잊어버렸고 일을 하게 되면 열에 열을 잊어버리곤 했다.

아침에 한 일이라도 저녁이면 벌써 혼미해졌고 어제 한 일이라도 오늘이면 기억하지 못했다.

이홍은 나에게 하소연했다.
"제 건망증은 아무래도 병인가 봅니다. 제게 있어 작게는 어떤 일을 하지도 못하게 하고 크게는 남을 거느리지도 못하게 하며, 말을 실수하게 만들기도 하고 행동을 하더라도 무언가를 빠뜨리고는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건망증이 빌미가 되더군요. 제 건망증을 고칠 사람이 있다면 제가 천금인들 아끼겠습니까? 저는 천리 길도 멀다 하지 않고 찾아갈 것입니다."

이에 나는 타이르며 말했다.
"너는 잊는 것이 네게 병이 되고 잊지 않는 것이 네게 도움을 주는 것만 볼 뿐이고 잊지 않는 것이 네게 걱정을 끼치고 잊는 것이 네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보지 못하는구나. 나는 네가 건망증을 굳이 고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잊어서 드디어 크게 잊는 지경에 이르기를 바란다. 정녕 네가 천금을 걸고서 천하의 건망증 치료사를 찾아 치료하고자 한다면 나는 왼손으로는 네 팔꿈치를 잡아당기고 오른손으로는 네 팔뚝을 붙잡아 치료를 막겠다.

그러자 이홍은 휘둥그레하며 말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잊는 것이 병이라고 생각하느냐? 잊는 것은 병이 아니다. 너는 잊지 않기를 바라느냐? 잊지 않는 것이 병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잊지 않는 것이 병이 되고, 잊는 것이 도리어 병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근거로 할까?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데서 연유한다.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말이 옳을까?

천하의 걱정거리는 어디에서 나오겠느냐? 잊어도 좋을 것은 잊지 못하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는 데서 나온다. 눈은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고, 귀는 좋은 소리를 잊지 못하며, 입은 맛난 음식을 잊지 못하고, 사는 곳은 크고 화려한 집을 잊지 못한다. 천한 신분인데도 큰 세력을 얻으려는 생각을 잊지 못하고, 집안이 가난하건만 재물을 잊지 못하며, 고귀한데도 교만한 짓을 잊지 못하고, 부유한데도 인색한 짓을 잊지 못한다. 의롭지 않은 물건을 취하려는 마음을 잊지 못하고, 실상과 어긋난 이름을 얻으려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는 자가 되면, 어버이에게는 효심을 잊어버리고, 임금에게는 충성심을 잊어버리며, 부모를 잃고서는 슬픔을 잊어버리고, 제사를 지내면서 정성스러운 마음을 잊어버린다. 물건을 주고받을 때 의로움을 잊고, 나아가고 물러날 때 예의를 잊으며,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제 분수를 잊고, 이해의 갈림길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잊는다.

먼 것을 보고 나면 가까운 것을 잊고, 새것을 보고 나면 옛것을 잊는다. 입에서 말이 나올 때 가릴 줄을 잊고, 몸에서 행동이 나올 때 본받을 것을 잊는다. 내적인 것을 잊기 때문에 외적인 것을 잊을 수 없게 되고, 외적인 것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내적인 것을 더더욱 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잊지 못해 벌을 내리기도 하고, 남들이 잊지 못해 질시의 눈길을 보내며, 귀신이 잊지 못해 재앙을 내린다. 그러므로 잊어도 좋을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서로 바꿀 능력이 있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서로 바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잊어도 좋을 것은 잊고 자신의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지 않는다.

이홍, 너는 성품이 강직하고 마음이 맑으며 뜻이 단정하고 행실이 방정하다. 그렇기에 잊어서는 안 될 일을, 너는 잠을 자든 깨어있든 잊지 않는다. 잊어도 좋은 것이라면 네가 잊기를 바랄 뿐이고 네가 잊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너를 병들게 한다고 말한 건망증이 심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고 네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 건망증이 풍성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다. 천금의 보물을 싸들고 천리 먼 곳을 찾아다니며 굳이 건망증을 치료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홍아! 차라리 잊어버려라!"
유한준, 「잊음을 논함」

4. 여담

파일:잊잊잊.png
"너는 잊는 것이 병이라고 생각하느냐? 잊는 것은 병이 아니다. 너는 잊지 않기를 바라느냐? 잊지 않는 것이 병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잊지 않는 것이 병이 되고, 잊는 것이 도리어 병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근거로 할까?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데서 연유한다.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말이 옳을까?"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 22~27번 (다) 지문의 일부[1]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에 출제되었으며 박태원 소설가의 <골목 안>과 함께 수능의 난이도를 불질러버린 가장 큰 원흉으로 꼽힌다. 그 가운데 위의 문단이 난해하고 기이한 문장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으며 일부 내용을 바꿔 패러디하기도 쉬워 금세 인터넷 밈으로 인기를 끌었다.[2]
한편 당해 수능이 불수능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해당 수필 원제가 하필 ‘망해’라는 점도 이야깃거리가 되었다.[3]
[1] 원문: 余曰女病女之忘乎?夫忘之非病也。女求女之不忘乎?夫,不忘之非非病也。夫,不忘之所以爲病,而忘之所以爲非病者,何也?由於可忘而不忘也。夫,可忘而不忘而謂之忘是病也。則是將以不可忘而忘之而謂之忘非病也。而可乎? [2] 이 문제가 엮인 27번의 답이 5번(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는것)이었는데, 선지를 "(다)는 '예의'나 '분수'를 잊지 않아야 함에 주목해 '잊지 않는 것이 병이 아닌 것은 아니' 라는 깨달음을 드러내는군." 이라고 한 번 더 꼬아서 내는 악랄함을 보여줬다(..). 예의나 분수는 잊지 않아야 할 대상이므로 잊지 않는게 병이 아닌게 아닌게 아니라 잊지 않는게 병이 아닌게 맞다. 예의나 분수는 잊으면 안되는데 잊지 않는게 병이라는게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3] 수능 1교시라는 상황에 놓인 수험생들에게 '망해'라는 제목의 작품을 차마 내놓을 수 없어 제목을 한글로 풀어써서까지 출제한 집요함이 더욱 돋보인다는 평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