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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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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이행
李行
시호 문절(文節)
본관 여주 이씨
주도(周道)
기우자(騎牛子)
백암거사(白巖居士)
일가도인(一可道人)
출생 1351년
사망 1432년 9월 2일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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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에 경연참찬관, 예문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관리다.

2. 생애

2.1. 우왕, 창왕 시기

1386년 7월 전의부정으로서 대호군 진여의와 탐라에 파견된다. 당시 탐라는 고려에서 목사가 파견되기도 하고 원나라의 직할령( 탐라총관부)을 거치는 등 행정 체계에 혼란이 있었으니 지역 주민의 반란이 빈번했다. 이행 등은 탐라성주 고신걸과 그 아들 고봉례를 데리고 이듬해 4월에 개경으로 돌아오니 탐라는 이때부터 비로소 고려에 귀순한다.

1388년 7월 상소를 올려 사전(私田)의 폐단을 지적하며 사전 혁파를 주장한다. 이행의 상소는 조준을 시작으로 한 여말선초의 토지 개혁 운동의 연장선에 있으며, 그 결과로 과전법이 시행된다. 상소문을 분석하면 이행이 지적하는 사전의 폐단이란 권세가의 토지 겸병에 따라 국가의 재정이 부족해지고, 국고 충당을 위해 가혹해진 조세가 백성을 힘들게 하며, 민생이 피폐해져 서로를 향한 고소가 끊이지 않는 혼란에 이른 일련의 과정이다. 이행은 이어 사전을 혁파하기 어려운 점과 각각의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사전을 폐지하면 부자와 강자는 자기 이익을 잃으니 원망하고 비방할테지만 일을 공정하게 해 인심에 맞으면 기뻐하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 사족은 생업을 의지하던 사전을 잃게 되는데, 이는 직(職)이 없는 사람에게는 토지를 지급해 직접 농사짓게 하고, 직이 있는 사람은 녹봉으로 대신하게 할 수 있다. 조사해야 할 토지가 너무 넓고 토지 문서 또한 번잡한데다, 아전들이 문서를 숨길 수도 있음다는 점도 지적한다. 이행은 안렴사와 수령으로 성실하고 청렴한 이를 뽑으면 수령이 각 읍(邑)을 조사하고 안렴사는 도(道) 전체를 살피며 수령을 적절하게 제어할테니, 토지와 문서의 조사에 더해 아전들이 숨기는 것들도 살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곡물을 보관하기가 어려운 점은 창부(倉府)를 설치함으로 보완하고, 조운에 따르는 비용이 균등하지 않은 문제는 화물의 경중, 개경까지의 거리에 따라 비용을 지급함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 평미레[1]로 양을 헤아릴 때에는 공평하게 하고 그 문서를 명확하게 함으로 곡식 출납시의 손실을 줄일 수 있다고도 한다.

같은 해 8월에는 상소를 올려 관료를 발탁함에 있어 공사를 구분하고 관제를 개혁할 것을 주장한다. 더 높은 관직에 오르려는 출세 경쟁이 만연하고 늘어난 첨설직(添設職)에 실제 업무 없이도 관직을 유지하는 배경을 제시하면서 여러 창고에도 전처럼 관직을 둘 것을 제안했는데, 창왕이 이를 수용해 도평의사사에 전달한다.

10월 우부대언 이행에게 겸 상서윤이 더해지고 이듬해 1389년 9월 밀직사의 정3품 벼슬인 지신사(知申事)에 오른다. 지신사에 올라서는 이종학의 청에 따라 과거에 급제한 권세가 자제를 삼관(三館,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에 배속하지 않는다. 10월 이색이 장단의 별업으로 돌아가는데, 이행은 왕명을 받고 이색을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나 이색의 마음을 돌리는데 실패한다.

2.2. 공양왕 시기

공양왕이 옹립될 때 지신사 이행은 국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1389년 사재부령 윤회종이 상소해 우왕, 창왕을 죽일 것을 아뢰고 이성계가 왕에게 상소에 따를 것을 권하니 왕도 동의의 뜻을 밝힌다. 이행은 둘을 죽이라는 교지를 받들었고 정장문학 서균형이 강릉에서 우왕을, 예문관대제학 유구가 강화에서 창왕을 죽인다.

1390년 1월 공양왕 즉위 후 처음으로 경연이 열렸는데 이행은 참찬관(叅贊官)을 맡는다. 공양왕 즉위에 공이 있었기에 공신호도 받는다.

2월 판문하부사 이색이 좌사의 오사충, 문하사인 조박 등의 탄핵을 받는다. 이색이 신씨인 우왕, 창왕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으니 왕씨의 대를 끊으려는 것이고, 그마저도 두 왕을 다 배신했으니 왕망을 좇은 유학자 장우(張禹)보다 더하다는 것이었다. 이인임을 도와 우왕을 세우고, 우왕의 잘못은 간하지 않았으며, 사전 혁파에 주저한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결국 이색은 옥에 갇혀 국문을 받고 관직이 삭탈된 뒤 유배되기에 이른다.

이 문서에 이색의 행적을 밝히는 것은 이행이 이색의 문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색의 다른 문생 좌상시 윤소종은 이색을 파직하라는 상소문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일이 있는데, 이행 또한 이색의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색이 함창(咸昌)으로 유배된 뒤 대간이 또 죄를 논하는데, 보다 못한 이행은 "대간이 논한 것이 공신(이색)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리 있겠습니까?"[2]라고 반박하는데, 공양왕은 대간이 올린 상소문 끝에 '지신사는 이색을 좌주로 생각한다.'[3]라는 구절을 적는다.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에도 공양왕은 이미 유배된 이색 등에게는 벌을 더 주지 않을 것임을 확고히 한다. 대간들이 항의의 뜻에서 사직하니 모두가 좌천돼 지방 수령으로 보내진다. 이행은 4월에 파직되며 청주(淸州)로 유배된다.

이행이 개경으로 돌아온 것은 1391년 1월이다. 국대비의 생일을 맞아 앞서 이색의 죄를 논하던 대간 등과 함께 사면됐으며, 1392년 4월에 조인옥과 함께 이조판서, 6월에 왕강과 함께 예문관제학에 임명된다.

2.3. 태조 시기

이성계가 왕이 된 뒤인 1393년 1월 이행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는다. 지신사로 사관 수찬을 맡던 이행이 쓴 사초가 드러났는데, 이색과 정몽주를 옹호하며 이성계를 비판하는 내용이 적혀있던 것이다. 이성계는 무진년(1388) 이후의 사초를 가져오게 해 이행이 쓴 내용을 들여다보니 실제로 우왕, 창왕이 죄 없이 죽었다고 기록한 정황이 드러난다.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아들이라고 하기 때문에 신씨였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왕씨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었으니, 이행은 사헌부의 국문을 받는다. 태조실록에서는 "이행이 공양왕의 근신이 돼 사건의 본말을 '사실대로' 곧이 적지 않았으니 고로 이에 이른 것이다."[4]라고 서술하고 있다.

태조는 고려 말의 사초를 찾아볼 정도로 자신의 기록에 신경썼고, 나중에는 이행의 예를 들며 감예문춘추관사 조준에게 명해 본인의 사초까지도 열람한다. 이행은 태조가 보기 싫었던 사실을 그대로 적었기에 처벌된 것이었는데, 태종, 세종 시기를 지나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이행의 사례는 직필(直筆)의 상징이 된다.

이행은 3월에 장 100대를 맞고 가산은 적몰되며, 울진으로 귀양보내진다. 1394년 태조의 생일을 기념한 사면에서 이행은 유배에서 풀려난다.

2.4. 정종, 태종 시기

1400년에 계림윤, 1402년에는 조전절제사에 임명된다. 1404년 1월 전라도 도관찰사로 있다가 경상도 도관찰사 남재와 함께 병으로 사직을 청하나 6월에 개성유후로 임명된다.

1405년 5월 예문관대제학에 오르고 명나라에 가서 공험진 이남을 조선에서 맡아 관리하도록 상주한다. 이 해 3월에 명에서 천호 왕교화적을 보내 조선에 조공하던 동맹가첩목아를 회유하려 한다. 태종은 따로 사람을 보내 그가 명 사신의 말을 듣고 따라가지 말도록 말을 맞추게 했고, 맹가첩목아는 명 사신 앞에서는 20년 조선을 섬겼으니 따로 명나라를 섬기지는 않겠다고 밝힌다. 이행이 명에 간 것은 삼자간에 합의된 외교 관계를 확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맹가첩목아는 명과 조선을 저울질하며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고, 몰래 명으로 떠날 행장을 꾸리고는 왕교화적을 따라 명 조정에 입조한다. 조선에서는 동맹가첩목아를 떠나지 못하게 해줄 것을 요청할까 논의해보기도 했지만 결론은 황제가 이를 윤허하지 않으면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나는 처음부터 이행을 사신으로 보내서 아뢰려고 하지 않았다. 황제가 이미 동북면 10처[5]의 인민을 바라니 무슨 낯으로 이 일을 다시 청하겠는가?"[6]라며 탄식한다. 명 관원들의 질문 공세에 이행 등은 맹가첩목아는 조선의 백성이 아닌 황제의 백성임을 인정하게 되며, 천추절을 지나 9월 천추사 윤목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온다.

9월 22일 판한성부사에 임명된다. 1407년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1412년 다시 예문관대제학에 올랐다가 1413년 완산부윤으로 부임한다. 1414년에는 『 고려사』의 문제가 다시 화두에 오르며 잠깐 이행의 이름이 언급된다. 고려실록 편찬에 참여한 대부분 사관이 잘 보이기 위해 사초를 고쳐 썼는데 이행만 혼자 그대로 냈기에 수금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태종은 영춘추관사 하륜을 불러 고려사를 다시 편찬하게 한다.

12월에는 왕명을 받고 검상관 곽존중과 함께 원대의 서적 『농상집요』를 번역해 반포한다. 1415년 개성유후사 유후로 부임한다.

2.5. 세종 시기

1419년 이행의 아들 이적(李迹)이 의금부에 하옥된다. 이행의 사위 김훈은 인덕궁의 궁인 소매향과 남몰래 만난 적 있는데, 이행은 집안에 화가 될까 두려워 이적을 시켜 조정에 고발하게 한 일이 있었다. 본래 사형당해야 마땅했으나 상왕(태종)이 용서하고 장을 맞고 유배되는 것에 그쳤다. 그런데 이적은 매부 김선이 공을 세우면 죄를 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종무에게 그를 추천해 경상도에서 종군하게끔 했다. 세종 때 대간이 이를 밝혀냈고 이적, 이종무 등 여럿이 엮인 인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여기에 더해 세종의 명으로 손자 이자가 양녕대군의 딸과 결혼하니 이행은 1429년 8월 15일 79세의 나이에 은퇴를 청하고 화를 피해 한양을 떠나 부모의 묘가 있는 강음(江陰, 황해도 금천군)에서 머무른다. 1432년 8월 이조판서 허조가 고적(古跡)의 자문을 위해 이행을 한양에 머무르게 할 것을 청하니 다시 돌아왔다가 9월 2일에 죽는다. 10월 세종이 제문을 내려 문절(文節)의 시호를 하사한다.

3. 가족관계

3.1. 조상


이천백은 고려에서 충주목사를 지낸다.

3.2. 자녀


이행 사후 손자 이자, 아들 이적(李迹), 이몽가 사이에서 재산 분쟁이 벌어져 의금부에서 이를 조사한다. 이행은 둘째 아들 이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장손 이자와 얼자 이몽가에게만 재산을 나누겠다는 문서를 남겼는데, 이적이 이행이 남긴 다른 문서가 있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행의 자손들의 분쟁을 근거로 이행에게 하사했던 시호를 박탈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나 세종이 윤허하지 않는다.


[1] 곡식의 양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도구. [2] 臺諫之論, 安知非功臣意耶? [3] 依申, 以穡爲座主. [4] 行爲恭讓之近臣, 不直書事之本末, 故及。 [5] 두만강 내외의 땅을 가리키는데, 1404년 조선에서 자신들이 10처의 인원을 관할할 것을 요청하고 명에서는 이를 인정한 바 있다. [6] 予初不欲使李行計稟。 帝已許東北面十處人民矣, 何顔更請此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