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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1858)/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이하영(1858)
1. 개요2. 성장기3. 취직과 상경4. 미국 공사관 취직5. 갑신정변6. 고종의 개인 통역관7. 미국 사절단
7.1. 고종의 밀명: 20만 미군 원병과 중국정벌 계획
8. 출세와 승승장구9. 을사늑약10. 기업인으로 새 출발11. 사망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Lee_Ha-yeong_Portrait.jpg

대한제국 법부대신 외부대신, 일제강점기 시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외교관인 이하영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성장기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직계 10대손이다. '榮'자 항렬에서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신흥무관학교 교장이자 아나키스트 이회영 선생,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과 같은 파 같은 항렬이다.[1] 경주 이씨는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그중 백사공파는 벼슬 열력에서 가장 화려하다. 특히 이회영, 이시영 형제의 직계는 대대로 정승, 판서를 지내 조선 10대 갑부에 들었다.[2] 그러나 이하영에겐 완전 남의 이야기였다.

이하영이나 이완용을 보면 삼대 안에 벼슬을 안 하면 별 볼일 없다는 점과 아무리 한 집안이라도 다 같은 양반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부의 세습이 몇대 가지 않았던 조선의 사회가 역대 어떤 한반도의 왕조보다 사회정의 관점에서 나은 나라였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하영의 어린 시절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이하영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읍 이천리 출신으로 백사공 이후 벼슬한 사람이 직계에서는 없는 한미한 집안이었다. 6대조 이이좌가 음직으로 직장을 지낸 후 5대조 이종영이 기장군으로 옮겼다. 아버지가 소작을 부쳤고 보릿고개에 입을 하나라도 줄이자고 이하영을 양산 통도사에 보냈다. 어린 그는 팔자에 없는 스님들 잔시중까지 들으며 모진 목숨을 이어갔다.

팔자에 없는 일은 무릇 오래갈 수 없는 법. 동자승으로 활동하던 그는 일이 년 못 버티고 집에 돌아와 동생과 떡 행상에 나서기도 했다. 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에 지친 가정 형편이라 가방끈이 아예 없는 게 당연했다. 한참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개화파 윤치호는 이하영을 두고 얼마나 무식하다 욕을 많이 했는지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얼굴이 좀 화끈거릴 정도. '아니 나라 녹을 먹는 인간이 한문으로 편지 한 통 못 쓰다니?' 정도가 제일 약한 표현이다.[3] 물론 친일파에 대한 증오도 담아서.

3. 취직과 상경

1875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 이듬해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이 외국인들에게 개항됐다. 이하영은 기장 본집을 나와 부산 초량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당시 일본 왜관이 있던 초량은 대일 무역 및 초창기 일본 공사관 성격의 제반 사무를 보기 시작했고, 일본인 거리가 본격 조성돼 이하영은 일본인 상점에 점원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총명한 그는 19살 때부터 10년간 일본인 밑에서 일하면서 일본어와 상술을 어깨너머로 깨쳤다.

1884년 또박또박 모은 돈으로 드디어 자기 사업을 시작한다. 일본에서 물건을 떼다가 국내에 판다는 간단한 비즈니스 모델이었지만 당시는 큰 조선 상단들조차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거래처 장사치와 동업에 나선 그는 정기 연락선 난징 호를 타고 나가사키로 함께 건너갔다. 그런데 아닌 밤에 날벼락으로 평양 출신 모 씨가 밑천을 몽땅 챙겨서 도주했다. 신고는커녕 일본에 조선 공관조차 하나 없던 시절이라 보호받을 수 있는 수단이 아무 것도 없었다.[4] 결론은 귀국.

타고 온 난징 호가 중국 상해에 갔다 되돌아오는 걸 기다려 다시 배에 올랐다.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10년 세월이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버린 줄 알았다. 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하영은 배 위에서 미국인 의료선교사 알렌과 마주친다. 알렌은 장로회 소속으로 중국 선교에 실패하고 친구의 조언 하나 믿고 조선으로 건너오는 중이었다. 알렌은 한양 주조선 미국 공사관에 가는 길이었다. 둘은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알렌은 조선인이 궁금했고 이하영은 이게 뭐라는 동물인가 싶었다. 태초의 소통 수단 손짓 발짓으로 친분을 만든 그들은 부산항에 기착했다. 이하영은 갈 곳이 없었다. 무조건 알렌을 따라나서기로 했다. 알렌은 그를 길잡이 삼아 한양으로 향했다.

4. 미국 공사관 취직

1884년 9월 20일(양력) 한양 미국 공사관(현재 덕수궁 후문 근처)에 당도한 그들은 짐을 풀었다. 미국 공사와 면담한 알렌은 선교 목적이 너무 노골적이면 신변이 위험하니 미국 공사관 직원 신분으로서 있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받았다. 알렌은 마이애미 의대 졸업장을 근거로 공사관 무급 내과의가 됐다. 영어 직분에 Physician to the Legation with No pay 라 돼있다. 이하영은 그의 요리사 자격으로 미국 공사관에서 숙식하게 됐다. 진짜 요리를 할 줄 알았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살 길은 그것뿐.

5. 갑신정변

운명의 12월 4일(양력), 한양 보신각 종에서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지금의 조계사 자리에서 우정총국 완공 축하연이 벌어졌다. 미국 공사관 직원들도 주빈 자격으로 행사에 가는 바람에 공사관은 적막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난리가 났다. 머리에서 팔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갓 쓴 사람들이 업히거나 들것에 실려 공사관에 들이닥쳤다. 공사관 주치의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됐다. 무급 의사인 알렌도 바빴다. 문제는 언어였다. 한국어를 모르니 상투 튼 환자들이 어디가 아프다 저기가 어떻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호자는 어떡할 거냐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이때 조선의 유일무이한 영어 통역이었던 윤치호 정동의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었고, 알렌은 박동(현재의 수송동)에 있던 묄렌도르프의 집[5]에서 환자를 받고 있었기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알렌은 급히 이하영을 불렀다. 이하영은 호떡집에 불난 사람 마냥 여기저기 밤새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3개월 간 알렌 옆에서 몇 마디 배운 영어라도 급했다. 게다가 간호사가 해야 될 일도 그의 차지였다. 이렇게 알렌과 이하영은 갑신정변에 휘말려 들었다.

개화파들의 삼일천하도 끝이 나고, 소란 사태는 진정됐다. 정변 가담자 색출 및 검거 선풍이 도성 내를 휩쓸었지만 미국 공사관은 치외법권이었다. 이하영은 간호를 하던 와중에 병상에 누운 환자들이 굉장히 지체 높으신 나리님들이란 걸 알게 됐다. 그중에 여흥 민씨의 총아 민영익도 부상을 입고 누워 있었다. 이하영은 알렌 및 공사관 직원들과 민영익 사이에서 간단히 통역을 하고 주요한 대화에 모두 끼었다. 전문가들 중에는 이하영의 영어 수준이 현재 대한민국 공교육으로는 초딩 수준도 안 됐을 것이라는 관측을 하고 있다. 단지 영어 몇 마디 안다는 이유로 고종 황제를 배알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민영익의 소개였다.

6. 고종의 개인 통역관

당시 고종은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분명 근대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수구파라 분류되는 인사들도 분명 청나라 양무운동 모델을 통한 서구화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정변 전에도 청나라에서 파견된 묄렌도르프 등 서양인 고문이 있었고 정부 기구는 청나라식 조직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 : 청나라의 총리 각국 사무 아문을 본뜬 1880년의 통리 기무 아문 등, 임오군란 후 통리 군국 사무 아문과 통리 통상 교섭 아문으로 개편됨) 그리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끼어 세력 각축장이 돼가는 한반도 현실에 대해 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황쭌셴의 조선책략 등도 널리 읽혀 '미국'의 존재와 힘에 대해 관심이 높았으며 미국에 접근할 목적으로 고종은 알렌을 황실 주치의에 임명했다. 아울러 이하영도 당시 서구식 관료 재교육 기관으로 고종이 설립한 육영 공원에 일본어 교사로 옮겨갔다.

당시 이하영은 일본인 사장 밑에서 어깨 너머 배운 일본어 수준과 고작 3개월 알렌 옆에서 몇마디 익힌 영어 정도로도 당시 조선에서 경쟁자가 없었다.[6] 그동안 거추장스러운 장식에 불과했던 이항복의 직계손이라는 타이틀도 빛을 발했다. 그는 육영 공원에서 시험 감독관으로서 문과에 급제한 대가집 자제들을 제자로 거느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6년 무려 고종 황제의 개인 통역관으로 발탁된다. 곧 외무 아문 주사에 특채되고 바로 주미 조선 공사관을 설치하러 미국으로 건너간다.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 동갑내기인 이완용, 그리고 아직 젊은 시절의 월남 이상재 등과 그의 필생의 은인 알렌도 함께였다.

7. 미국 사절단

1887년 12월 10일 조선 사절단은 영국 국적선 오셔닉 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출발해 하와이 경유 샌프란시스코 도착이라는 긴 스케줄을 소화했다. 황천(해군 용어)도 거쳤다고. 태평양 횡단 기간 조선 사절단에 대해 호러스 알렌이 대략 12월 26일 일기에 묘사하길, '그들은 선실 안에 틀어박혀서 모든 걸 하인이 들여보냈고, 조선 관리 복색임에도 줄담배를 피우느라 담배 쩐 내, 똥냄새, 입 냄새에 특이한 음식 냄새 때문에 내가 볼 일이 있어 선실에 들어갔다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월남 이상재 선생에 대해 '특히 더티한 남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게 재미있다.(12월 21일 하와이 호놀룰루 입항, 28일 샌프란시스코 기항의 스케줄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기항한 기쁨도 잠시, 천연두가 유행 조짐이라며 승객들을 억류시킨 미 당국 때문에 1888년 정초가 돼서야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한반도인으로서 엘리베이터를 최초로 탄 공식 기록자인 사절단 일행은, 환영 파티에 온 귀부인의 가슴 파인 옷에 '서양의 관기냐'며 차마 통역 못할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사흘 더 여독을 푼 그들은 기차로 대륙 횡단에 나섰다. 미국의 수도는 다들 알다시피 워싱턴 D.C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십리 길을 단 몇분에 주파하는 서구 문명의 속도에 이하영은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신기함을 느꼈다. 워싱턴에 도착해서도 미 정부 관계자가 올 때마다 철도에 대해 묻고 철도 모형을 구하는 등 큰 흥미를 보였다. 그치만 사절단이 철도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4년 전 민영익이 이끄는 보빙사도 그 열차를 탔고, 이미 경인선 계획도 정부 차원에서 검토 중이었다.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를 만나 국서를 교환하는 첫 만남에 한국식 큰절을 하다 만류를 당하는 등 촌극을 빚는 가운데, 혹 조선이 미국과 단독적으로 외교 조약을 맺는 것은 아닌가 상국 청나라에게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사절단이 처음 미국 공사관을 설치하러 떠나기 전 청국 정부는 '영약삼단'이라는 것을 지키라며 독단적 외교 행위를 차단하려 했다. 겨우 약속을 받고 온 거라 각종 제약이 많았다. 결국은 박정양이 청국 정부의 질책에 대해 책임을 지고 본국으로 소환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참찬관 이완용도 몸이 좋지 않아 함께 돌아갔다. 결국 공사관에 덩그러니 남은 건 이하영이었다.

7.1. 고종의 밀명: 20만 미군 원병과 중국정벌 계획

이하영은 특히 미국 출발 전 고종에게 밀명을 받았다. 원산, 인천, 부산 세 항구를 담보로 빌린 2백만 달러로 미군 20만을 빌려오라는 거였다.[7] 이하영이 1926년 신민이란 잡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고종께서는 아직 사절 일행이 여장도 꾸리기 전 내게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교첩까지 내리셨다. 내가 20만 미국 병사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환국하면, 고종께서는 쉰양강(潯陽江)[8] 건너편까지 통치하기 편하도록 평양으로 황도를 옮길 엄청난 계획을 품으셨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황금은 귀신도 지배한다는데 200만달러의 거금을 흉중에 품고 나니 호장한 용기가 아니 날 수 없었다. 나는 돈을 물 쓰듯 뿌리며 발랄한 외교를 시작했다. 낮에 여는 연회에는 문무백관을 초청하고, 밤에 여는 연회에는 상하원 의원과 기자를 초대하여 동방예의지국을 선전하기에 분주했다. 결국 20만 병사를 원병으로 조선에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하원 표결에 부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든 탑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가 왔다.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고 만 것이다.

성공을 굳게 믿은 나는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간 비탄과 함께 커다란 걱정이 일어났다. 원병을 빌릴 것을 구실로 얻은 차관 중 이미 소비한 16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어떻게 갚을까 하는 것이다. 백 가지 계책을 세워보아도 도무지 대책이 없어 파리 쫓으면서 낮잠만 자고 있노라니 하루는 외무대신(국무장관)이 관저로 나를 초청했다.

나는 안색이 붉어졌다. 이를 어찌하리오. 가나마나 차관반환을 독촉하러 부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니 갈 수도 없는지라 떨리는 다리로 초청한 장소로 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관저에는 채권자인 뉴욕은행 두취(대표이사)를 비롯하여 관련된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황공히 앉아 외상의 입만 쳐다보며 최후의 처분을 기다렸다.

외상은 이것이 꿈이 아닌가 하리만치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위로 같기도 하고 사과 같기도 하고 회유 같기도 한 어조로 자국의 정책인 먼로주의를 자세히 설명한 끝에, 귀국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유감천만이라면서 결론으로는 차관 중 이미 소비된 금액은 미국 정부에서 대신 갚을 터이니 남은 금액은 즉시 상환하여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전액을 잃을까 우려하여 남은 돈이나마 돌려 받으려는 약은꾀를 미워할 짬도 없이,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고 즉석에서 승낙했다. 나는 미국의 관대한 태도에 감복하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경할지언정 믿고 따를 나라는 못 되는 줄 깨닫게 되었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신동아

이하영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뉴욕 은행이 2백만 달러 차관을 승인해 먼저 백만 불을 인출해 줬다고 한다. 그런데 나머지 백만 불과 20만의 미군 용병은 미 상원에서의 부결로 물거품이 됐다. 이하영의 증언 말고는 달리 자료가 없어 신빙성이 의심되지만 일단 그 뒤는 이렇다. 이미 쓴 돈은 미국 정부가 뒷감당할 테니 남은 금액을 뉴욕 은행에 반환하래서 16만 불을 뺀 84만 불 정도를 반환했다고 한다. 그중 일부를 어떻게 꿍쳤는지 몰라도 주미 공관에서 그의 하루하루는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매일 사교 파티에다가 그는 미국 춤을 마스터하고 정통 서양 매너가 몸에 배 '상투 댄디'란 별명까지 얻었다고. 심지어 미국 여자와 사귀었단다. 2년이 조금 못되게 열심히 일한 그는 조선 정부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미국에 온 이완용과 바통 터치한다. 이완용은 부부 동반이었기 때문에 부인 양주 조씨는 서양에 간 최초의 조선 여성이 된다.

200만 불의 차관이 공사관 일행의 미션이었던 것 자체는 맞지만, 이 일을 주무로 맡은 것은 이하영이 아닌 알렌이었다. 그리고 원산, 인천, 부산의 세 항구를 담보로 한 것이 아니라, 세 항구에서 나오는 관세를 담보로 한 것이다. 또한 저 사실(?)을 밝힌 시점에는 나라는 망했고 고종이 저 세상 사람이었으며 순종마저 뒤따를 무렵이다.

8. 출세와 승승장구

그는 조선에 미국 정부로부터 정교한 열차 모형을 구해서 돌아왔고 곧 조선 정부는 경인선 착공에 들어갔다. 그는 곧 음서 특채들이 거치는 현감직을 돌다 외무 아문 참의(정3품)로, 한성부 관찰사(구 한성부 판윤, 즉 서울 시장), 주일 공사를 거쳐 1904년 외무 대신에 오른다. 물론 장시간의 외국 체류로 서구의 매너가 몸에 배여 예전의 송사리 이하영이 아니었다.[9] 재산도 서대문에 99칸짜리 대저택에 살 정도로 늘었다. 장장 대지 1500평에 달하는 그의 저택엔 아예 서양식 독채가 따로 있었고 하인도 수십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외무 아문에 있을 때는 일본에 충청, 황해, 평안 3도의 서해 어로권을 넘겼고 내륙 하천 항행권도 시원하게 선사했다. 일본 헌병대에 한양 치안마저... 그 때문에 우용택이라는 한 선비에게 뺨까지 얻어맞았다고.

9. 을사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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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식민지 · 강점기 · 병합
*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

을사늑약 때 조약 체결은 절대 불가라며 반대 입장으니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각부 대신들의 표결 결과 조약 체결 찬성으로 결론이 나자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찬성론에 동조했다. 조약 체결에 반대하였으므로 을사 5적에 속하지 않지만 이후 상반된 행보로 인해 비공식적으로 을사 3흉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귀족(일본 정부 지정)이 돼 자작 작위가 수여됐다. 당연히 총독부 산하 중추원에 이름이 올라있다. 천황이 주는 은사금도 챙겼다.

10. 기업인으로 새 출발

어차피 나라는 일본이 다스리는 마당에 그의 할 일은 얼굴 마담으로 총독부 주최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정도였다. 대신 그는 받은 은사금으로 공장을 차렸다. 고무신 공장이었다. 그는 '대장군 표' 고무신을 생산해 조선인 최초의 신발 회사 사장이 됐다. 회사는 크게 번창해 아예 '대륙 고무 주식 회사'라는 법인까지 만들고 사장이 됐다. 1922년 65세 나이에 조선 굴지의 대기업 사장이 된 그는 박영효, 이완용의 의붓형 이윤용 등 조선 귀족들을 주요 주주 자리에 앉혀 사업 안정을 꾀했다. 신동아 2006년 전봉관 교수의 칼럼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에 따르면 주주도 귀족이었지만 마케팅까지 귀족적이었다고.
본인이 경영한 대륙 고무가 제조한 고무화를 출시하니 이왕(순종) 전하께서 어용하심을 얻어 황감함을 금치못하며, 왕자 공주님들께서도 널리 애용하시고, 또 나인들, 일반 고객들이 각별히 애용하셔서 날로 달로 발전하여 이번에 주식회사 조직으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고무 업계의 원조로서 더욱더 매진하여 조선은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진출하겠사오니, 더욱 애용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다른 회사가 조악(粗惡)한 제품을 본사의 제품이라고 사칭하여 판매하는 경우가 많사오니 본사 상표 ‘大陸’에 주의하시옵소서. -1922년 9월 대륙 고무 주식 회사 사장 이하영(‘동아일보’ 1922년 9월 21일자 광고)

워낙 명품이다 보니 짝퉁이 난립해 영업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식민지 출신 회사로서는 황감하게 일본인 직원들까지 두고 영업했다는데, 상표권 분쟁을 법원에서 다투는 등의 노력으로 1945년 광복 후에도 한동안 최고의 고무신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11. 사망

이하영씨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부산 거리에서 찹쌀떡 행상을 하며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서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던 알렌 박사의 요리사로 일했다. 그런 다음 외부대신에 올랐고, 자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선에서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본래 그는 편지 한 장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양반가문 출신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점잔을 빼며 처신했다.
윤치호 일기, 1929년 2월 28일

이하영은 1929년 2월 27일 노환으로 사망한다. 장지는 안산 동막골 장상 저수지 윗쪽이다. 그는 살아 생전 친형 이근영을 군수로, 동생 이준영은 관찰사까지 만들어줬고 친일 행각도 함께 했다. 일각에선 동생 이준영이 국문학자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박이정 출판사에서 2005년 만든 박종덕 씨의 《경상도 방언의 모음체계 변천사》 하나뿐이었다. 작은 형 덕에 1906년 강원 관찰사가 됐지만 아파서 금방 그만두고 세상을 떴다는 설도 있다. 이준영이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크다.

이하영의 손자 이종찬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말기 태평양 전쟁에 종군해 뉴기니 등 남태평양에서 종전을 맞았다. 해방 후 6.25 전쟁 덕에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냈지만 늘 자신의 뿌리와 과거 행적을 부끄러워했다. 항상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며, 날치기 개헌을 하려고 군을 부산으로 움직이라는 이승만의 명을 거부했다가 총살될 뻔 했다. 살아있는 군인 정신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 참군인'으로 추앙된다. 결혼할 때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우리 집안에 비해 상대 집안이 너무 기운다며 어머니가 무시하고 반대하자 '우리 할아버지는 떡장수 출신 친일파' 디스로 정면 돌파한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1945년 4월 아버지 이규원이 사망하고 이종찬이 자작 작위를 세습해야 했는데, 당시 이종찬은 외국에 파병나가 있는 상태에서 아버지의 유고를 전해듣고 세습 여부를 밝히지 않으며 차일피일 미뤘고, 일본 당국 입장에서도 전쟁에 온 신경이 서 있어 이에 대해 강제로 세습 하라 마라 할 여유가 없다가 광복을 맞이한 덕분에 친일 부역자 명단에서는 제외됐다.[10]


[1] 이시영, 이회영은 백사의 2남 이정남의 후손이고 이하영은 백사의 1남 이성남의 후손이다. [2] 인구순으로는 익재공파, 국당공파, 상서공파 순인데, 원래 백사공파는 상서공파에 속한 일파로 정식 명칭은 상서공후 백사문충공파이다. [3] 특채 주제에 나대기는... 이런 느낌이다. 그나마 ' 이완용과 그 형보다는 낫다'가 윤치호가 이하영에 대해 내린 가장 나은 평가다. [4] 조선의 최초 재외 공사관인 주일 조선 공사관 설치는 1887년 5월 [5] 원래는 민겸호의 집이었으나, 임오군란으로 민겸호가 척살당한 이후 방치되던 집을 묄렌도르프에게 넘긴 것이었다. [6] 하필이면 윤치호는 이 당시 (한때나마 김옥균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과 신학문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청나라의 상하이로 유학가 있던 상태였다. [7] 당시 미국의 총 병력이 10만 남짓이었던 걸 생각하면(또한 당시엔 유럽 천하였다) 고종의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이 엄청나게 어두웠음을 알 수 있다. [8] 양쯔강의 지류 [9] 윤치호 역시 이하영이 양반이 아님에도 양반의 몸가짐이 어느새 몸에 배었다고 평가하며 놀라워하는 기록을 일기에 남겼다. [10] 만약 이때 습작했다면 이종찬은  대한민국 육군의 요직에는 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습작을 한 정도의 거물 친일파는 친일파라도 상관 없이 중용했던 이승만 측에서도 100% 실드를 쳐주기엔 무리 있는 경력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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