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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09:32:45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

달걀독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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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세 번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는 이탈리아군의 전투력[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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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아드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실 근위대와 오로모족 기병. 해당 전투의 패배로 이탈리아는 제국주의 열강 최초로 아프리카 국가에게 패전하고 마는 굴욕을 겪는다.[4]
이 밈을 상징하는 영상. 베니토 무솔리니의 연설로 웅장하게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기세등등했던 연설이 무색하게 이후 " 무솔리니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힙니다."라는 간결하고도 김빠지는 나레이션이 압권이다.[5]
1. 개요2. 유래3. 전쟁사4. 일화5. 어록6. 원인
6.1. 지나치게 잦은 전쟁6.2. 대전략의 부재6.3. 내부 분열6.4. 기타
7. 과장된 사례
7.1. 전장에서 파스타를 먹었다는 오해
7.1.1. 삶아먹었을까?
8. 분전 사례9. 본의 아닌 효과10.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용병과 비교11. 여담
11.1.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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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talian Military Jokes

이탈리아군이 열강이라 불림에도 19세기~ 20세기의 여러 주요 전쟁에서 어처구니없는 졸전을 보인 경우가 많음을 조롱하는 전 세계구급의 이다. 대개 제2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 왕국군)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2. 유래

꽤나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인식인데, Know Your Meme에 따르면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부터 이탈리아군과 싸운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 사이에 이탈리아군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조롱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knowyourmeme: italian military jokes 1943년 미국에서 나온 영화에도 전쟁과는 맞지 않는 무능한 이탈리아군 장교의 스테레오타입이 나온다고 한다. 이탈리아제 전차는 후진 기어가 6개, 전진 기어가 1개라는 등 이탈리아군을 조롱하는 조크도 많이 있다.

그러던 것이 일본에도 전파되어 ' 이탈리아군 전설(イタリア軍伝説)', ' 헤타리아'(ヘタリア) 등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2006년 9월쯤 한국에 건너와 '이탈리아군의 전설'이나 '이탈리아군의 위력' 등의 제목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아래 내용들로 검색해 보면 이 내용들이 이곳저곳 퍼져 있다.

다만 그 이전 시기인 1970년대 고우영 삼국지에서도 황건적에게 깨져나가는 동탁군을 2대전 이탈리아 군대에 비유하는 장면이 유머코드로 나오는데 일제강점기와 2차대전을 겪었던 세대는, 최소한 신문을 구독할 만한 지식인 계층은 2차대전 시기 일제의 동맹국인 이탈리아군의 졸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군 전설로 정리되어 인터넷을 통해 대중에게 퍼져나간 것은 2000년대겠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동맹국의 식민지의 지식인 계층이 인식하고 있었을 정도로 이탈리아군이 졸전으로 유명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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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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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록

한 나라와 다른 한 나라가 동맹을 맺어 마이너스가 된 경우는 이 경우(이탈리아)가 유일하다.
폴 케네디, 《강대국의 흥망》 에서.
이곳에서 몸의 사지인 개개인들에게는 탁월한 역량이 잠재해 있는데, 머리인 지도자들은 이러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결투나 적은 수의 사람들이 싸울 때, 이탈리아인들의 힘, 능력 및 재주가 얼마나 탁월한가를 보십시오. 그러나 일단 군대라는 형태로 싸우는 일에서는 결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도자의 유약함에서 비롯됩니다. 유능한 사람에게는 추종자가 없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다른 지도자들로 하여금 우월성을 인정하게 할 정도로 자신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할 만한 충분한 역량이나 행운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 곧 지난 20년 동안 싸운 모든 전쟁에서 오직 이탈리아인 병사만으로 구성된 군대는 항상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타로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카푸아, 제노바, 바일라, 볼로냐 및 메스트리의 전투들은 모두 이 판단의 타당성을 입증합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 군주론》 26장 <야만족의 지배로부터 이탈리아의 해방을 위한 호소>에서.
"빌어먹을 이탈리아 놈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전차들마다 백기가 준비되어 있다."[6]
"이탈리아가 독일 남부를 공격한다면, 독일소녀연합이나 킴제 호수의 늙은 농부들만으로도 퇴치할 수 있다."
"그런 놈들이 로마의 후예들이라니.... 로마인들은 창과 방패만 가지고도 그놈들보다는 잘 싸웠을 겁니다!"[7]
영국에 포로로 잡힌 나치 독일 병사, 장교들의 도청 내용 중.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 민음사, 390~391페이지.[8]
"저 독일놈들은 인간적인 영혼이 없어서 그리 괴물같이 싸우는거요.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반대로 성품이 유럽 백인들한테만 관대하고, 사실 누구를 제대로 증오하는 법도 잘 몰라. 우리나라 사람들 마인드가 그래서 전쟁은 좀 잘 못해요. 전쟁을 잘하려면 증오를 해야 하거든."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9]
여기 우리 군대는 그냥 약탈자 무리로 전락했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군의 장교란 새끼들은 전부 다 총살해야 한다... 사령부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우린 이 새끼들을 전부 군사재판에 넘기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다. 위아래 계급도 없이 어찌나 장교나 병사나 개판인지, 정말 치욕적이다. 이탈리아군인 치고 우리 군의 부정부패와 조직력 부재에 대해 나랑 똑같은 말 안할 사람 아무도 없다. 차라리 당신네 영국군이나 소련군이 우리나라 국군이었으면 좋겠다...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 같은 페이지, 튀니지에서 사로잡은 이탈리아군 중위 포로의 한탄

6. 원인

국방TV의 제2차 대전 결정적 하루에서 다룬 이탈리아군 졸전의 원인.

6.1. 지나치게 잦은 전쟁

이탈리아는 전신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시절부터 1848년 혁명과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 1866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치렀고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는 1895년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1900년 의화단 운동 참전 →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1920년대 내내 이어진 리비아 반란 → 1935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1936년 스페인 내전 개입→ 1939년 알바니아 침공으로 인해 19세기 중반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까지 평시에 군비를 모으며 기술 개발, 군제 개혁, 장교단 양성 등 현대전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예산과 인프라를 꾸준히 제대로 갈고 닦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역시 1935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감안하면 이미 다른 국가보다 3년이나 일찍 전쟁을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실전 경험은 군대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만, 이는 물리적 기반이 갖춰졌을 때의 일이다.

이런 대외정책은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파시즘 체제에서 더욱 악화되었다.[10] 실익은 전혀 없는 공허한 '승리'만 거두며 돈과 인력을 더럽게 낭비한 게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전간기 대외정책의 결과였다. 원래 싸움을 못하는 민족성인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든지간에 이렇게 소모적이면서도 무의미한 전초전만 잔뜩 치르다가 갑자기 본게임에 뛰어들면 졸전 일색에 사기가 바닥을 치는 게 당연하다.[11] 2차 대전 역시 무솔리니는 리비아, 에티오피아, 스페인에서 까먹은 전력을 회복, 재구축하는데 투자는 커녕 바로 프랑스 침공에 끼어들고, 발칸 반도, 북아프리카에서 삽질하다 그리스 침공에서 이 졸전의 전설에 백미를 찍었다. 동맹국 독일 눈치 탓도 할 수 없는 게, 그리스 침공만 하더라도 오히려 히틀러는 어울리지 않게 온건책을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뜯어 말릴 정도였다. 2차 세계대전 직전 이탈리아는 경제 발전 및 군비 강화에 써야 할 돈을 에티오피아 정복과 스페인 내전 개입으로 소모하는 바람에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군의 평시 필요 탄약과 연료를 구입할 돈도 없는 상태였다.

완성도나 품질의 일관성에 대해선 말이 많아도 우리 주변엔 분명히 나름 유명한 이탈리아산 공업 브랜드도 있는 편이고, 개별 분야에서 보면 분명 나름 선진국 열강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데 막상 국가 차원에서 전쟁이랍시고 조직적으로 나라 내 동원 가능한 기술과 인력을 모아 놓은 결과가 저 따위인 이유가 바로 이거다. 애초에 그리 제대로 된 총력전을 치를만한 준비를 할 짬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즉,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무능은 단순한 군사적 차원 '따위'가 아니라 미완의 통일 민족 국가로서 근현대 역사상 계속 자국내 정치적 불안정을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모면하려다가 그것도 제대로 감당 못해 총체적인 기술, 조직 적체를 초래한 근현대 이탈리아의 정치적 지도부 자체의 무능을 추궁해야 한다.

스페인 내전에서도 독일군이 소수의 장교와 기술진, 조종사를 파견해 어디까지나 전술 개선 획득 및 신무기 검증이라는 일차적 목표와 스페인 내 독일의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이차적 목표를 달성한 반면, 이탈리아는 남의 나라 내전에 완전 무장한 78,500명의 병력, 6,800대의 차량, 항공기 760대, 1,800문의 포를 무상으로 투입하고 얻은 실익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이탈리아 연간 예산의 15~20%를 잡아먹어 경제에 부담을 가중시켰고, 시급한 현대화 사업도 뒷전으로 미뤄 2차 세계 대전즈음 이미 이탈리아군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허덕이는 상태였다.[12]

스페인 내전 대규모 개입 이전에는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소중한 예산과 인력을 다 까먹고 있었고, 그 이전엔 1920년대-30년대 초반 거진 10년 가까이 이탈리아령 리비아 키레나이카 식민지에서 오마르 무크타르가 이끄는 현지 반란군 상대로 지리멸렬한 토벌전에 시달렸다. 즉, 2차대전시 이탈리아의 졸전을 그 자체로만 보면 그래도 나름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자였던 열강이 왜 그리 못 싸웠는지 미스터리지만 이걸 1920, 30년대 전반부터 거진 10년 넘게 이어진 일련의 외교, 군사적 삽질의 거대한 스노우볼링의 결과물로 보면 더 이해가 쉽다. 독일하고 비교해보면 독일은 1934년부터 지속적으로 재무장을 위해 실업자를 비롯한 국가 역량을 군수산업에 집중시켰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초급장교로 복무했던 장교들이 일선 사단장과 군단장으로 부임하고 이들의 이론을 히틀러가 수용했다. 이래도 독일은 폴란드 침공까지는 여전히 초보적인 모습을 보였고 이때의 전훈을 되살려 독일군은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을 대표하는 기갑부대 및 기동전술 도입과 빡센 훈련, 국민들의 높은 전쟁 지지도를 활용하고 나서야 프랑스 침공에서 그 노력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유럽의 대표적인 군국주의 국가였던 독일이 20년간의 공백을 극복하는데 무려 6년이 걸렸다. 이들만 못한 역량의 이탈리아는 오죽하랴.

6.2. 대전략의 부재

무솔리니의 호전적인 표현들은 부분적으로는 영국과 프랑스를 위협, 그들로부터 이득을 얻어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사실 이탈리아 군대는 경제와 마찬가지로 현대식 전쟁을 수행할 만한 아무런 준비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장비와 훈련 모두가 부족한 상태였다. 전쟁에 대한 수많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 정권은 진지한 전략을 수립하지 못했다. 그리고 해군은 전투함대와 잠수함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정작 항공모함은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1939년 군대는 단지 1천5백 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은 경무장 탱크였다.(무솔리니는 이러한 탱크들이 이탈리아의 특성에 보다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군은 충분한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지 못했고 전투기들의 속도는 상당히 느렸다. 운송수단들도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와 같이 이탈리아는 자신이 시작하려는 전쟁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아무런 계획, 심지어 지중해에서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어떠한 대책도 수립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군사력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도력의 부재였다. 대부분 보수적이고 나이가 지긋했던 지휘관들은 성공의 열쇠가 기술력이 아니라 군대의 사기라고 믿고 있었다. 또 다른 문제는 육군, 해군, 공군간의 심각한 경쟁관계였다. 이는 3군의 협력관계가 왜 이루어지지 못했는지, 이탈리아에 왜 항공모함이 없었는지, 대공방어망이 왜 부적절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였다.
...
1939년 8월 외무부장관이자 무솔리니의 사위인 치아노(Ciano) 백작은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두려웠다. 이탈리아는 지난 5월의 협정에 따라 군사적으로 독일의 보호를 받게 되어 있었지만, 전쟁이 시작될 경우 심각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불행하게도 히틀러는 무솔리니와 회담을 갖던 중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을 것이고 무솔리니 자신도 그 계획에 동의한다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무솔리니는 자신의 독일어 실력을 과신해 통역관을 대동하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독일이 조달하기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기차 1만7천 량 분량의 군수품을 즉시 보낸다면 참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9월에 전쟁이 발발하자 무솔리니는 자신이 말한 것에 자족하면서 이탈리아는 '전혀 호전적이지 않은' 국가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에 이어 프랑스까지 침공을 당하자, 무솔리니는 참전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39년 봄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장악한 것에 대한 대가로 알바니아(사실상 몇 십 년 동안 이탈리아의 보호령이었다)를 병합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지중해에서 더 많은 실질적인 대가를 바라고 있었다. 1940년 6월 10일 무솔리니는 열광적이라기보다는 당혹스러워하는 대중들에게 이탈리아가 참전하게 되었음을 발표했다. 며칠 후 그는 군대에게 프랑스 쪽의 알프스 산맥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와 같은 단기간의 전투에서 드러난 이탈리아 군대의 어설픈 모습은 전쟁 준비가 미흡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체계적인 계획의 부재를 드러냈다. 그러나 무솔리는 이러한 적대행위들이 곧 종식될 것이며 이탈리아가 지중해에서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가장 중대한 실수였다.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얼떨결에 전쟁에 휘말려든 꼴이었다. 이후 3년 동안 이탈리아의 군대는 연이은 군사적 참패를 경험했다.
크리스토퍼 듀건,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334~336p
다른 모든 문제점을 합친 것보다 더 큰 문제점. 무솔리니와 그의 파시스트 부하들은 대전략적 사고가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즉 무솔리니는 자기가 처한 전략적 현실을 파악하고 그에 기반한 장기적인 대전략을 수립하고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대신 이탈리아의 국력을 과신하고 단기적이고 사소한 이익에 눈이 멀어 즉흥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개입했을 뿐이다. 현실적으로 무솔리니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처럼 중립을 지키며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서 이득을 보는 것이었는데, 막상 무솔리니는 독일보다 약한 주제에 전선은 한꺼번에 몇개를 벌려놔 하나같이 처참한 결과를 얻었다. 정작 그 독일도 소련을 치기 전까진 양면전선 형성을 극구 지양했다.

당장 이탈리아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전쟁 준비가 하나도 안 된 것을 알고 있었으며 군수장관 카를로 파바그로사(Carlo Favagrossa)는 적어도 1942년이 되어야 대규모 작전을 할 수 있다고 무솔리니에게 직언을 했고 무솔리니도 제정신이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강철 조약을 맺고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우리가 나서지 않겠다고 하면 독일도 기다리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비웃듯 독일이 폴란드를 쳐 무너뜨리고 프랑스까지 빠르게 무너뜨리기 시작하자 조급한 마음에 무솔리니도 준비가 부족한 줄 알면서도 전쟁에 뛰어들었고 그 대가는 병사들이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6.3. 내부 분열

거기에 이탈리아의 내부 문제 역시 이탈리아군이 백년 평화 시기부터 시작해서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오합지졸 군대의 대명사로 꼽히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이탈리아의 통일 자체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무력통일에 가까웠던 만큼 이탈리아 통일 전까지 양시칠리아 왕국 사람이었던 남부 이탈리아 주민들 입장에서는 이탈리아의 통일은 곧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병합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한 마디로,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통일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식민지민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13] 이런 상황 속에서 이탈리아 정부가 이탈리아 왕국군을 편성하고 남부 사람들을 징병하려고 하니 당연히 이 지역 사람들의 반발은 극심해졌고[14], 자연스럽게 이탈리아군 내부에서는 중앙정부의 주류를 차지하는 북부 사람들과 그렇지 않았던 남부 사람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으며 이는 곧 군 내부의 사기와 전투력 저하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인들은 전쟁을 일으킨 목적도 뚜렷하지 않고 이룬 것도 없고, 맨날 마을의 젊은이들을 끌고가던 지도자는 마음에 안 드는데, 전쟁에 억지로 내몰린 것에 가까운지라[15]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향해가자 곳곳에서 연합군을 환영했고, 자발적으로 반무솔리니 레지스탕스가 되어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 전쟁 막바지에 들어서야 순식간에 불어났고 그 전공도 실제보다 과장되었던 프랑스 레지스탕스[16] 개개인 중심의 점조직 네트워크에 그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반나치 집단들과 달리, 이탈리아 빨치산은 1930년대 부터 스페인 내전에 국제여단으로 참가하고, 1943년 3월에는 밀라노, 토리노, 리보르노 같은 좌파 세력의 영향력이 강했던 북부의 산업도시들에서 10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한 거대 파업을 유도하는 등 무솔리니 정권 시기에도 활동을 지속하며 반파시스트 투쟁을 지속했다.

나치 독일 본토가 패망할 때까지 유지됐던 중부와 북부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점령지는 연합군의 진격이 안 닿은 곳에서도 지속적으로 빨치산 부대들과 전쟁을 벌여야했고, 비록 몇개월 만에 독일군의 직접적인 공격으로 진압당하긴 했지만 북부 이탈리아 농촌 여러 곳에서 1944년 가을~겨울 중에 빨치산 해방 구역이 세워졌다.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달리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 집권기 중에도 대중적인 기반을 두고 체제에 반대하여 지하에서 투쟁을 벌였던 '다른 이탈리아'의 세력이 상당히 컸던 것이다. 이렇게 이탈리아 내에서 파시즘에 반대하고, 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연합군이 진주하니 실제로 군대라고 부를만한 규모와 전력의 동맹 세력을 형성했던 반대파가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다른 추축국인 일본, 독일보다 먼저 국제 사회로 신속히 재편입될 수 있었다. 전후 파시즘 정권이 무너진 이후의 동독과 서독, 일본 정부의 경우 파시즘 정권 하에서도 존속했던 기존의 정부를 완전히 해체하고 재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치스, 제국 군부와 공식적으로 협력한 전과가 없는 개인들을 발굴하여 기존 정부 부서의 고위직에 임명하는 정도에 그친 반면, 이탈리아는 어쨌든 이미 하나의 정부를 구성할 만큼의 내부적 역량을 유지했던 반체제 집단 들이 있었다.

그렇게 반파시스트 집단들 위주로 만들어진 전후 이탈리아 정부는 서독, 프랑스, 영국 등지의 재건 과정에서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이 함부로 서유럽에 공세를 펼치지 못 하도록 하는 방패가 되어주었다.

6.4. 기타

1차 에티오피아 침공 때 창칼로 무장한[17] 에티오피아군에 진 것은 군사적 외의 영역에서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남아공 줄루 제국은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영국군을 이겼음에도 타 부족들이 영국군의 편을 들어버려 결국 제국이 멸망했는데, 영국과 달리 이탈리아는 이런 부족들을 회유하는 방법을 그리 쓰지 않았다.

7. 과장된 사례

이 이탈리아의 졸전 기록 중에 과장되거나 오해인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군이 구식 화승총과 창칼 든 에티오피아군에게 졌다는 루머가 있다. 위 각주에서도 보듯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부족들 중 창과 칼을 들고 싸운 경우도 있긴 했으나 중앙 군대는 현대적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18]

사실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졸전을 한번씩은 보여주기는 했다. 미군의 경우 본격적으로 참전한 북아프리카 전역의 후반기 때에는 카세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1사단이 이탈리아군에게 개박살이 나는 등 추태를 보여서 이 때는 이탈리아군도 미군을 무시하고 영국도 미군을 '연합군의 이탈리아군'이라고 조소한 적도 있었다.[19] 물론 미군은 초창기에는 이런 해이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이후로는 전략전술면에서 대활약을 보이며 결과적으로 2차대전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지만 이탈리아군은 끝까지 한심한 모습을 보였다.

7.1. 전장에서 파스타를 먹었다는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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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복원된 이탈리아군 전투식량. 이것이 그 사막에서 데쳐 먹었다는 파스타의 진실이다.
주요 일화 중 북아프리카 전역 사막에서 파스타를 삶아먹는 이탈리아군 이야기의 경우, 그 파스타는 짬밥의 개념으로 보급된 파스타이다. 결론적으로는 먹기는 먹었지만 이탈리아에서 파스타는 평범하게 먹는 일상식 가운데 하나다. 물론 파스타라고 해도 송로버섯이나 고급 올리브유처럼 비싼 식재료를 쓰면 얼마든지 비싸지지만, 그건 어느 음식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탈리아군이 전장에서 허세 부리며 고급 요리를 먹었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한국군으로 치자면 떡을 사먹거나 국수, 라면을 끓여먹은 것 뿐이다. 더군다나 주둔지용 파스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파스타가 맞지만, 전투식량용 파스타는 캔 처리된 조리 파스타였다. 즉, 식당에서 파는 파스타처럼 삶고 난 뒤 물을 버리고 소스에 버무려서 맛있게 먹은 게 아니라 캔에 들어간 통통 불어터진 파스타를 끓인 것이다. 이탈리아군은 전투식량용 파스타와 주둔지용 파스타를 달리 사용했는데, 이탈리아군의 주둔지 식단에서는 단순히 파스타 뿐만 아니라 싱싱한 야채, 과일, 고기 샌드위치, 스튜, 등을 지급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정작 북아프리카 전역의 독일군은 캔 파스타고 나발이고 사령관인 에르빈 롬멜조차 제대로 먹질 못해서 황달을 비롯한 위장병에 시달리고 있었다.[20] 북아프리카 군단이 아프리카에 파병될 때 초기에 꽤 식량 문제가 있었다. 이탈리아군에게서도 뜯어먹은 경우가 많다. 기존의 독일군용 관급빵 등이 사막 기후에서 쉽게 상했기 때문.

정작 이 파스타 일화와 비슷한 사례라면 같은 동맹군인 일본군이 가지고 있었다. 일일이 쌀과 냄비를 들고 다니고 밥 짓느라 식수는 식수대로 필요했으며[21] 태평양 전쟁 초기 코레히도르 전투의 경우처럼 밥 짓는 연기 때문에 미군에게 포격을 맞은 사례도 있다. 국내에서는 일본군이 이탈리아군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것도 재미있는 점. 물론 일본군이 다른 추축국에 비해서 문제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도 까인다는 점에서 유사한데, 가령 정규군과의 싸움에서는 이긴 적이 없다거나,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카미카제로 엘리트들을 날려먹었다는 등의 내용. 카미카제는 전쟁 전반이 아니라 후반에 나온 거고 그 이전에 소모전을 치르면서 싹 날려먹은 거라 사실과는 다르다. 당장 위의 밥짓는 이야기도 일본군이 주둔지용으로 밥을 했을 뿐 실제 전투식량은 따로 존재했다.

사실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의 전투식량은 맛있기로 유명한 현대 이탈리아군의 전투식량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고 한다.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송된 한 다큐멘터리에는 당시 이탈리아군 전투식량이 영국요리보다 맛없기로 유명했고 이탈리아군 전투식량을 노획한 영국군들이 한입 먹고 그 끔찍한 맛과 식감에 모두 폐기 처분할 정도였으며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전투식량을 복원한 제품을 시식하게 해주자 먹은 사람들이 "고기는 누린내 나는 똥이요, 진흙덩어리 빵은 시멘트"라고 평하는 내용이 나온다. 맛이 없지만 이것 말고는 먹을게 변변치 않아서 억지로 꾸역꾸역 먹던 음식이라는 얘기다.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선에서 이탈리아군과 함께 싸운 독일군도 이탈리아군의 음식은 끔찍하다고 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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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탈리아군에서도 장교들에게 추진된 식사의 수준은 아주 훌륭했다고 한다. 일단 식기세트만 봐도 전채(antipasto), 제1메인(primo piatto), 제2메인(secondo piatto), 사이드디쉬(contorno), 치즈(formaggio), 디저트(dolce), 와인(vino), 탄산수(acqua frizzante)까지 완벽하게 갖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군의 식량배급은 장교와 사병의 차별이 아주 극심하여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한 어떤 이탈리아 사병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실컷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모래먼지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반해, 장교들의 식사는 글에 나오는 그것과 비슷했다고 한다. 전장에서 여유와 미식을 즐긴 이탈리아군 이미지는 이러한 것에 의해서였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장교용 식사는 병사용 식사들과 크게 다른 게 다수다.

그래서 이탈리아군은 이 주둔지 식단이 마음에 안 든다고 점령지 현지인의 집에 쳐들어가 제 값을 지불하고 현지 음식을 구입해 사먹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민폐같기도 하고 민폐같지 않기도 하고[22]

7.1.1. 삶아먹었을까?

사실 군용 전투식량이 고급요리가 아니란 건 쉽게 알 수 있으므로 이 속설의 요점은 이탈리아군이 파스타를 사막에서 삶았느냐 아니냐이다. 만약 이탈리아군이 정말로 파스타를 삶아 먹었다면 엄청난 삽질인데 파스타를 삶기 위해서는 대량의 물이 필요하다. 파스타 200g을 삶기 위해서는 물2리터가 필요하며 북아프리카 전선은 사막이 무대이므로 당연히 물도 트럭으로 수송해야한다. 즉, 이탈리아군에겐 무기나 탄약 수송은 뒷전이고 사막에서 파스타 삶는 물 수송이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농담거리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실제로 이탈리아군이 전승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대리석을 수송한 적 있으므로, 파스타 삶는 물을 수송한 것도 있을만하다는 식으로 사실처럼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 속설은 세계에서 가장 플레이 타임이 길다고 알려진 보드게임 The Campaign for North Africa가 기원이다.[23] 이 게임에서 이탈리아군은 The Italian pasta rule이 적용되어 파스타를 삶기 위해 추가 물보급이 필요하다. 참고 이 게임은 워게임이며 군사 시뮬레이션에 가까울 정도로 사실적인 게임이라 여기서 실제 이탈리아군이 파스타를 사막에서 삶아 먹었다는 식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물론 실제 이탈리아군은 사막에서 파스타를 삶아 먹은 게 아니라 조리된 통조림 파스타를 먹었던 것 뿐이다. 나중에 작가인 Richard Berg도 정말로 이탈리아군이 파스타를 삶은 건 아니라고 인정한 바 있다. 출처

8. 분전 사례

사실 이탈리아군이라고 항상 완전 약체였던 것만은 아니고 정예부대는 열약한 무기체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정예부대 못지 않게 용감하게 싸웠다.

특히 용맹을 상징하는 검은 뇌조의 깃털을 헬멧에 달고 다닌 베르살리에리 부대의 경우 튀니지 전투에서 최후까지 교전하며 그 감투정신을 증명했고, 폴고레 공수사단의 부대원들은 10월 23일 시작된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의 라이트 풋(Light Foot) 작전에서 영국군 7기갑사단, 44, 50보병사단, 자유 프랑스 제1사단 및 그리스 여단 등을 7개 대대 3,500명의 병력으로 막아냈다. 사실 이 정도면 사단이 아니라 여단급의 병력. 기가 질린 영국군은 3일 후 퇴각했으나, 사실상 폴고레 사단은 고립되었고 결국 폴고레 사단은 물도, 탄약도, 차량도 없이 염천의 사막을 걸어서 후퇴해야 했다. 그나마 살아남아 항복한 사람은 고작 295명이고, 그들은 항복할 때 백기를 들지 않았으며, 심지어 손도 들지 않았다고 전한다.

44사단장 허기스 장군은 폴고레 사단을 가리켜 "나는 내 남은 생애에 두번 다시 폴고레 사단과 같은 적을 만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라고 말했으며, 런던 라디오는 육군 보고서를 인용하며 "폴고레 사단은 현재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저항하고 있다."고 했다. 윈스턴 처칠마저도 "우리는 사자와 같던 폴고레 사단의 생존자들을 위하여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라고 하지만 처칠이 이런 연설을 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는 게 정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부 해외 자료가 처칠이 1942년 11월 2일 하원 연설에서 이런 언급을 했다고 주장하나, 공식 기록을 살펴보면 당일 하원은 소집된 바 없다. 다만 폴고레 사단 장병들의 분투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이탈리아 육군 제132 아리에테 기갑사단은 롬멜이 다른 독일 사단보다도 신뢰한 사단이었다. 이후 독일군 제21기갑사단과 마찬가지로 연료가 떨어지면서 후퇴가 불가능해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립되어 분전하다가 전멸했다. 롬멜은 아리에테 사단이 전멸하자 일기에 비통한 어조로 이 사실을 기록했다.
아리에테 사단과 더불어 노장의 이탈리아 전우들을 잃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형편없는 장비로써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계속 요구했다.
게다가 아리에테 사단은 전멸당하기 전까지 토브룩이나 심지어는 독일군의 기나긴 패주 때도 선봉을 맡아 영국군을 개발살내던 정예부대였다. 결국은 독일군의 제공권 장악 실패와 보급의 부재로 어쩔 수 없이 전멸당하긴 했지만 그건 당시 나머지 독일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니, 아리에테 사단이 그만큼 싸워주었기에 독일군의 후퇴가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무엇보다 롬멜이 그렇게 징징거렸던 보급 역시 독일 공군의 비협조라는[24] 악조건에서도 이탈리아 해군이 지중해 최종보스인 영국 지중해 함대와 몰타 섬의 공군 병력에게 그야말로 몸이 찢어 발겨지면서 악착같이 보급했다. 그리고 영국이 지중해의 제해권을 항상 장악한 것은 아니라서 한때 이탈리아군의 기습으로 전함 2척이 큰 타격을 입으면서 안그래도 상황이 안 좋던 영국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피해 다니는 추태를 보이게 만든 적도 있다. 다만 나중에 여기에 미 해군까지 끼어들면서 이탈리아 해군은 더더욱 나서기 어렵게 된다. 물론 미 해군의 주력은 태평양에 몰려 있었지만 한 고비 넘기면서 사우스다코타급 전함과 같은 신예 전력들도 대서양과 지중해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정부의 지휘 아래 싸운 정규군은 아니었지만, 위에 언급했듯이 스페인 내전 당시 이탈리아 출신 지원병들로 구성된 주세페 가리발디 대대는 출신 성분 자체가 전 세계의 헌신적인 좌익 운동가들이나 모험과 위험을 일부러 찾아 온 사람들이니 맹렬한 전의로 명성이 자자했던 국제 여단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사기가 높았던 부대 중 하나로 이름을 떨쳤다. 국제 여단이 맹활약한 마드리드 공방전, 하라마 전투, 과달라하라 전투, 에브로 공세 등 굵직한 전투에 모두 참여해 그 때마다 국제 여단 전력의 주축을 구성했다. 특히 스페인 공화국이 1936년 여름의 쿠데타로 끝나버리지 않고 기나긴 3년간의 내전 동안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국가군 상대로 전쟁을 치를 수 있게 한 마드리드 공방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벌여졌던 장소 중 하나가 지금도 전설로 화자되는 스페인 유수의 국립 대학, 마드리드 꼼플루텐세 대학 캠퍼스를 둘러싼 전투였는데, 문자 그대로 대학 건물 하나 하나를 두고 국가군과 국제 여단원들이 피 말리는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결국 공화파가 캠퍼스 전체를 장악하고 이를 기점으로 마드리드 시 전체에서 결국 국가군을 몰아내는데 기점이 된 중앙 도서관과 약대 건물 점령전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한 게 가리발디 대대였다.

본 목록에 나와있는 전간기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전적 중 거물급 사건인 스페인 내전 당시 37년 봄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증원온 공화인민군이 역포위된 이탈리아군을 쌈싸먹을 수 있게 인근 마을들에서 방어전을 펼치며 버텼던게 이 12 국제여단 소속 가리발디 대대였다. 프랑코군에 증원된 이탈리아군이 5만명 규모의 군단급 대규모 파병이었다면, 공화파 측에서 싸운 이탈리아인들도 3천명 가량으로 단일 국적으론 프랑스 다음으로 많은 수의 의용병들이 투신했다. 특히 이탈리아나 독일 출신의 국제 여단원들은 조국이 이미 무솔리니, 히틀러의 파시스트들에게 넘어가버려 돌아갈 곳이 없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더 치열한 투지를 발휘했다. 이탈리아군 본문에서도 나오지만 이 항목의 다른 정예 부대와 마찬가지로 동기 부여가 명확한 경우 오히려 이탈리아인들의 투지는 오히려 다른 군부대를 초월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안전하게 돌아갈 조국도 남아 있지 않았던 이탈리아 출신 국제여단원들은 공화국 패망과 더불어 대부분 남프랑스 국경쪽의 구르 수용소 (Camp de Gurs) 같은 난민수용소에 있다가 2차대전 발발과 함께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으로 노르웨이 전역 같은 곳에서 총알받이로 굴려졌거나, 프랑스 함락 이후 나치, 비시 당국에 의해 본국이나 나치 독일의 수용소로 송환되어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거나, 수용소 신세에서 어찌 탈주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인원들은 자국이나 나치 점령하 프랑스 같은 곳에서 파르티잔 형성의 주축이 되었다.

8.1. 이탈리아 해군

이탈리아 해군의 경우, 1차 대전 종전 직전 숙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신생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연합국[25]에 자국의 테게토프급 전함 유고슬라비아함[26]을 포함한 군함 및 해군 시설 전부를 양도하자[27], 인계가 끝난 지 수 시간 만에 단 두 명의 요원을 인간어뢰[28]를 통해 풀라 항에 잠입시켜 유고슬라비아함 하부에 폭탄을 설치해서 폭침시켰던 적이 있다.[29] 또한 2차 대전 당시에는 데치마 플로틸리아 MAS라는 부대가 유명한데 이들은 어뢰를 개조한 특수잠항정 3기를 이용해 어뢰 1기당 2명씩 총 6명의 대원을 영국 해군의 주요 군항인 알렉산드리아 군항에 침투시켜 35,000톤급의 전함 2대와 유조선 1대를 수중폭파시킴으로써 해군 특수전의 역사를 처음 쓰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영국 지중해 함대에 사용가능한 전함이 남아있지 않아서 영국 함대가 적 대형 함선과의 교전을 꺼리는 상황이 발생하고, 폭파된 전함을 긴급수리하는 한편 외부에는 해당 전함들이 멀쩡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국기 게양식을 하고 의장대를 사열하며 수병들을 주기적으로 이동시키는 연극까지 감행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이 부대는 이탈리아가 항복하는 43년까지 어뢰정과 특수장비만으로 20만톤의 함선들을 격침했고 그 전과는 서쪽의 지브롤터에서 동쪽으로는 소련의 세바스토폴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와 흑해를 넘나 들었다. 이 사건으로 "이탈리아 해군의 용기는 타는 배의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농담도 나오게 되었다.

잠수함 부대에서는 유능한 선임장교였던 해군 중장 안젤로 파로나 제독을 독일 해군에 파견, 당시 U보트 부대 지휘관으로 용명을 떨치던 카를 되니츠 제독과 더불어 지중해상의 세력 판도를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독일에 파견된 이탈리아 함장 중 두 명은 각각 16척 86,438톤, 11척 96,601톤을 격침시켜, 1939년 제정 기사 철십자 훈장을 거머쥐었다. 기사 철십자 훈장은 2급, 1급 철십자 훈장과 격을 달리한다. 2차대전 중 독일군과 그 동맹국 군대의 수많은 장병 중 수훈자가 7,300여명뿐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철십자 훈장 항목 참조. 되니츠 제독은 훗날 출판된 자신의 전쟁 회고록 <10년 20일>에서 이탈리아 잠수함 부대원들의 감투정신을 격찬했다. 또한 프랑스에 파견되어 BETASOM이라는 기지에서 활약한 이탈리아 해군의 경우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약 59만톤의 연합군 상선을 격침시켰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의 격침 톤수 전체인 72만톤중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의 앞마당인 지중해의 경우 오히려 영국의 잠수함대가 대활약했고 영국이 작정하고 대잠 작전을 수행해서 타격이 컸다.

이탈리아 잠수함은 독일 유보트보다 전반적인 성능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대형이었기에 머나먼 일본과의 교류 수단을 강구했던 독일 해군의 눈에 띄게 된다. 이에 따라 유보트와 교환 파견 형식으로 몇 척의 이탈리아 해군 잠수함들이 승조원째로 독일 해군에 파견되어 인도양/태평양 등지에서 활약하며 독일과 일본 간의 기술 교류를 돕는다. 이들이 있었기에 일본이 독일의 기술을 받아 4식 분진포 등의 물건이나마 만들 수 있었고, 독일이 일본의 항모 기술을 받아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을 건조 시도나마 할 수 있었으니 결코 작은 활약이 아닌 것이다. 덤으로 연합군 상선들도 적지 않게 격침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잠수함들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는데,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독일 해군에 억류되어 독일 승조원들을 태우고 작전하다가 독일이 항복하자 일본 해군에게 억류되어 일본 해군 소속으로 싸우게 되었다... 물론 이미 전황이 엉망인지라 일본군 소속으로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8.2. 기타

제1차 세계 대전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동맹국과의 싸움에서 어느 정도 분전했다. 물론 카포레토 전투같이 대패한 전투도 있지만, 직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50만의 피해를 입혔고(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동수의 러시아 제국군은 물론 세르비아에게도 장렬하게 얻어터지던 약체였음도 감안해야 한다) 이탈리아 전선의 대표적인 격전지였던 그라파 산 전투[30]에서는 독일군을 비롯한 동맹군들의 진격을 연거푸 좌절시키면서 끝내 지켜냈던 전적이 있다.

위에 언급된 글 중간에도 포로수용소에서 미 해병대와 주먹다짐으로 싸워 이겼다는 부분도 있고, 북아프리카 원주민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든 영국군을 수색할 때 독일군이 온갖 노력을 해도 찾지 못하던 것을 "님들아 영국 병사 한명당 설탕 5봉지 + 밀가루 5봉지 콜?"이란 제안으로 전원 잡아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포위당한 적군이 변장하고 빠져나가려 했을 때, 다른 군대의 보초병은 다 속여도 이탈리아군의 눈만은 결코 속일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계가 투철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변장의 어색한 부분이 이탈리아군의 패셔니스트 감각에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롬멜에게 이탈리아군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롬멜의 대답인즉 병사 개개인은 사자, 장교들은 소시지, 참모본부는 퇴비더미라고 한 적도 있었다.

9. 본의 아닌 효과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이탈리아군의 악명이 퍼지지 않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물론 전쟁범죄는 타 지역을 군사력으로 장악한 뒤에 많이 일어나므로 패전이 많았던 이탈리아는 전쟁범죄를 일으킬 만한 상황이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탈리아군 역시 전쟁범죄를 일으킬 수 있을 만한 상황에서는 전쟁범죄를 많이 저질렀다. 이를테면 스페인 내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바르셀로나 폭격은 나치 독일 루프트바페 게르니카 폭격을 능가하는 규모였지만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으로 크게 알려진 게르니카에 비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본토의 국토 회복 운동과 직결된 지방인 현대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일대와 에티오피아 같은 곳에서는 나치 독일과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을만큼 전쟁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련의 에피소드들 때문에 이탈리아군은 너무도 무능해서 악행도 제대로 못한 집단이란 이미지가 붙어 알려지지 않은 점도 크다.

가령 이탈리아가 식민지로 삼았던 이탈리아령 리비아에서는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원주민의 땅을 빼앗고, 본국인들을 정착시켰으며 이에 반대하는 베두인들을 사막을 가로지르게 한 후 강제수용소에 편입시켰고, 1933년 9월 폐쇄될 때까지 4000명 이상의 베두인들이 사망했다. 또한 리비아인 저항세력의 구심적 역할을 하던 오마르 무크타르(Umar Al-Mukhtār)에 협력하는 현지인들에게는 잔인한 보복을 가했으며, 키레나이카의 경우 해방까지 8만 명의 리비아인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된다.[31] 이 시절 리비아인의 투쟁을 그린 영화가 바로 앤소니 퀸 주연의 명작 <사막의 라이온(Lion Of The Desert)>이다.

1930년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때는 독가스 사용을 금지한 1923년 서명한 제네바 의정서[32]에 참가했음에도, 전황이 좋지 않자 이를 상큼하게 씹고, 기어코 핵무기 급으로 국제사회에서 비난을 받는 독가스를 사용했으며[33], 점령 후에는 로돌포 그라치아니 총독 지휘하에 조직적인 파괴, 학살이 일어났다. 이 외 발칸반도에 이탈리아가 참가한 전역, 점령지에서도 전쟁범죄 행위가 일어났지만 이탈리아 정부의 빠른 항복과 이후 냉전의 정치적 논리, 그리고 상술한 이탈리아군의 졸전 이미지에 따라 이탈리아의 전쟁범죄는 상대적으로 묻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자신의 전쟁범죄보다 졸전 이미지가 널리 알려진 게 다행스러울 지도 모른다. 또한 해당 나라들 반발과 같이 이 나라들에서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영향력이 개털만큼도 남지 않았다. 오히려 북아프리카 해당 나라 불체자들이나 난민들이 이탈리아로 와서 이런 과거사를 이야기하며 까는 게 수두룩하다.

물론, 이탈리아도 이런 혜택만 받은(?) 건 아닌데, 프랑스군이 이탈리아 곳곳에서 북아프리카 용병 구미에에게 마음껏 약탈과 학살, 강간을 시간제한을 두고 허락한 몬테카시노 전투 같은 자신들이 당한 전쟁범죄들도 같이 묻혀졌다. 가령 유고슬라비아 곳곳에서 이주시킨 이탈리아인들이 세르비아 및 현지인들에게 마구잡이로 학살당한 포이베 학살사건도 인지도가 거의 없다. 이탈리아인들이 이런 걸 언급하면 "더하면 더한 학살과 약탈. 탄압을 벌인 주제에"라는 소리가 꼭 따라붙고, 덤으로 "졸전을 벌이던 이탈리아 자국 병신 군대부터 비난해야지?"라는 비아냥까지 곁들여 올 때도 있다.

독일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이탈리아에 돌리기 위해서 이 밈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

10.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용병과 비교

르네상스 시기에 이탈리아인 용병 대장들은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하들이 죽으면 손실이 생기고 돈에 따라 고용되는 용병이기 때문에 지금 적이 나중엔 자기편이 될 수도 있으니까.[34] 게다가 이탈리아인 용병대장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고 심지어 친구이기도 해서 서로 전투를 하는둥 마는둥 했다고 한다. 이들은 전쟁을 전쟁으로 안보고 아예 경마나 예술이나 마찬가지로 보았다고 한다. 어찌나 제대로 싸우지 않았는지, 근대 정치학의 시조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다보면 용병을 믿지 말라는 말이 지겹게 나온다. 강한 군대는 국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닌 셈.

결국 당대의 이탈리아 용병은 외부의 침입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했고,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프랑스군과 신성로마제국군에게 개작살났다. 용병끼리의 싸움에 익숙해 있던 이탈리아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파괴와 약탈이, 프랑스군의 입장에서는 전쟁 때면 으레 하는 일이었다. 오늘날에야 ‘성격이 전혀 달랐다’ 라고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인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는데, 1494년에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편이었던 밀라노가 전쟁 1년만에 편을 바꾸어 베네치아와 교황령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결성한 반(反)프랑스 동맹에 가담할 정도.

사실 민족의 개념은 단순한 언어적, 풍토적 차이 정도로만 인식했고, 근대적 의미에서 '국적'이란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르네상스의 사례를 여기에 끼워 맞추어 해석하려는건 무리가 있다. 당장 상술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군대들을 작살냈다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의 군대들도 동맹 성향의 이탈리아 장군, 부대가 지휘, 싸우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군대들이 전적으로 무능했다기보다는 르네상스 시기에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국가적 인프라 자체는 선진적이었으나 체급의 차이로 밀렸다 보는 게 맞다. 게다가 이것은 육군에 한정된 이야기로 해군의 경우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은 이탈리아의 특수성 운운할것도 없이 그냥 질적인 측면에선 지중해 최강이었던 강대한 해군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는 이런 막강한 해군력 덕분에 야전에서 여러번 패배하고도 적절한 외교와 사활을 건 돈풀이, 청야전술로 근세 시대 유일하게 이탈리아의 네이티브 열강 세력으로 독립뿐만 아니라 위세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건 어느 정도 마키아벨리의 편견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같은 이탈리아에서도 베네치아의 경우 용병대장을 유력자의 딸과 결혼시켜 지배층에 편입시키거나 서로 앙숙인 용병대장끼리 경쟁을 붙혀서 매우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애초에 그 양반은 학자였지 군인이 아니었다. 피렌체 국민군은 용병에 비해 효율적인 전투를 하지 못했으며 결국 다시 용병제로 회귀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안기아리 전투에서 1명이 말에서 떨어져 죽었을뿐이라고 했지만 실제 안기아리 전투는 1,0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한 격렬한 전투였다. 나아가 베네치아는 용병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캉브레 동맹을 저지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용병대장이 도시의 지배권을 강탈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용병대를 낮게 평가했지만 중세부터 이미 이탈리아 용병들은 인기있는 수출품이었고, 이러한 구조는 후에 16, 17세기의 유럽에서도 통용되었다. 특히 16, 17세기 유럽을 호령했던 스페인 군대 중 두번째로 강한 군대로 평가받았던 것이 바로 이탈리아 테르시오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용병대에 대해 치를 떤 것은 피렌체 공화국의 충성스러운 공직자였던 마키아벨리의 입장에서 피렌체가 고용한 용병대가 피렌체의 이해관계가 걸린 전쟁에서 성실하게 싸워주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인데, 이 점에서는 실제로 이탈리아 용병대들의 경우 이탈리아 내의 분쟁에서는 그다지 열심히 싸우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많기는 했다. 이를 '동족간의 싸움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정미 넘치는 모습'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근세 이탈리아인들의 동족의식이 그렇게까지 강했다고 보기는 사실 어렵고, 그보다는 당시 이탈리아의 정세에서는 각각의 용병대들도 정치적으로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체들이었던 탓이 크다. 프랑스나 스페인의 왕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쯤 되면 슈퍼 갑이니 이들에게 고용된 이탈리아 용병대로써는 다음 고용 기회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동맹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사력을 다해 싸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소국들은 자신이 고용한 용병대에 그만큼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오히려 같은 이탈리아 소국의 군주가 직접 용병대장으로 나서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으며 가끔 고용한 용병대에게 오히려 나라를 빼앗기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로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거의 대등한 파워게임의 구성원들이었기에 용병대가 다른 생각을 품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 당시 피렌체의 군사적 숙원사업중 하나는 피사의 재탈환이었다. 하지만 내륙도시이면서도 부유한 피렌체가 항구도시, 그것도 한때는 중세 이탈리아 4대 해상세력중 하나였을만큼 유망했던 항구도시를 완전히 장악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것은 주변의 다른 이탈리아 소국들 입장에서는 크게 탐탁지 않은 일이었고, 따라서 자신들 스스로가 이탈리아 파워게임의 일부였던 용병대들이 피렌체를 위한 전쟁에 미온적인 태도로 임한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인 것이다. 이 점은 용병대를 통한 피사 공격이 수차례 실패한 뒤, 마키아벨리의 제안에 따라 시민군을 모집하여 진행한 피사 공격이 단번에 성공했다는 점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결국 당시의 피사는 용병보다 전력이 약한 시민군으로도 충분히 점령이 가능할 정도로 약체화된 상태였지만, 피렌체 공화국이 고용한 용병대들이 굳이 피렌체공화국을 위해 열심히 싸워주지 않았던 것.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마키아벨리의 군사적 식견과 정치적 식견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의 용병 무용론(용병 유해론)과 시민군 선호는 군사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에 걸쳐 있는 문제인데, 마키아벨리는 징집된 시민군에게는 용병과 같은 높은 수준의 전투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음을 경시할 정도로 군사적 식견이 부족했지만 당대 이탈리아의 정세에서 용병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충성심을 시민군에게는 기대할 수 있고, 제복과 같은 도구를 통해 시민군의 소속감을 고취할 수 있다는 발상을 해낼 정도로 정치적 통찰력은 뛰어났던 것이다. (반면 시민군을 유지하는 어려움은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으니 행정가, 특히 군사행정가로써의 역량은 정치가나 사상가로써의 역량에 비해 또 모자랐다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주장들은 대부분 피렌체 공화국의 공직자로써 '수많은 도시국가 수준의 소국들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반도(특히 북중부)의 정세와 상황'를 전제와 기준으로 삼아 논한 것인데 이에 대해 도시국가들과는 비할 수 없는 대국인 스페인, 프랑스, 신롬의 사례를 들어 반론하는 것이 의미있는 반론이라 보기는 어렵다. 당장 이탈리아 도시국가중에서 그나마 용병을 제대로 통제했다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례만 보더라도 다른 도시국가들에 비해 안정된 정치체제와 (이탈리아 해양세력 최후의 승자로써) 충분한 자금력을 가지고 갑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기에 용병들에 대한 통제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결국 마키아벨리의 용병 무용론 및 근세 이탈리아의 용병 문제를 근대~현대 이탈리아군의 졸전 문제와 연관하여 해석한다면, 이탈리아군 졸전의 주요 원인중 하나로 손꼽히는 국민 국가 이탈리아에 대한 소속감이 없음이라는 현상의 맹아가 이 시기부터 이미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통일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고, 이는 국민군(시민군)에 대한 그의 선호와 함께 그를 근대국가를 꿈꾼 선구적 사상가 중 하나로 손꼽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통일과 근대국가 형성이 늦어 근대국가로써의 결속도 느슨했던 이탈리아는 아니나다를까 그러한 근대국가간의 본격적 각축이 벌어지는 시대에도 약체의 면모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마키아벨리는 '동맹군'을 '용병보다는 낫지만 시민군만은 못한 것'으로 평가했는데, 근대국가로써의 결속이 느슨했던 이탈리아의 군대는 어떤 면에서는 '동맹군의 모임이 시민군으로 발전해가는 중간단계'정도에 있었다고 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당시로써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 사회에 적용이 불가능했던 것이지만, 그의 주장대로 국민군이 대세가 된 근대국가의 시대에는 결속이 강한 국민군이 강한 군대이고, 그렇지 못한 군대는 약한 군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베네치아군도 해군 전통을 육군에 억지로 대입시키는 병크를 저지르기도 했다. 뱃사람들에게 있어 선장의 권한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육군 부대에서도 '선장의 권한'을 그대로 대입해, 1개 부대에 1개 대장을 두고 나머지 하급 지휘관을 싹 없애버렸다. 대장 1명 빼고 다 같은 병사로 통일해버리는 장렬한 삽질은 헝가리 왕국군에게 육전에서 패배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역시 베네치아 정부가 정말 멍청해서 의미없는 병크를 저질렀다기 보다는, 이탈리아 도시국가치고는 세력이 있지만 다른 대국들에 비하면 약소한 베네치아로써는 어떻게든 자신들이 고용한 용병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규모 용병대를 통째로 고용하는 대신 소규모 부대 단위로 분할하여 계약하고 운용하면서 자신들에게 익숙한 해군식 체계를 응용하여 조직을 관리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11. 여담

11.1. 매체에서


[1] 첫 번째는 보오전쟁, 두 번째는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세 번째는 그리스 침공이며 독일은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나치 독일이다. 반면 이탈리아는 전부 이탈리아 왕국. [2] 보오전쟁 당시 독일(프로이센)과 이탈리아 왕국은 각자 독일 통일과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오스트리아에 맞섰고,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둘은 삼국동맹의 일원이었다. [3] 짝사랑 수준으로 무솔리니를 추종하던 히틀러는 안슐루스 도중 독일의 개입을 허락한 무솔리니에게 "죽어도 죽어도 이 은혜를 갚고야 말 것이며 세상 모두가 등지더라도 나만큼은 당신에게 달려가 도와줄 것입니다." 라는 말을 했고, 실제로도 무솔리니가 해임당하고 감옥에 감금당하자 독일군을 이용해 이탈리아 북부를 장악하고 무솔리니를 구했다. [4] 하지만, 항목에서 보듯이 이미 에티오피아 제국은 총기와 대포,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를 견제하던 프랑스를 비롯한 나라들이 무기를 지원했기에 그저 창칼로 무장한 야만인 군대에 졌다는 헛소리 일화로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오스트리아도 1860년대에는 여전히 무시못할 군사강국이었고, 반대로 이탈리아야말로 통일 이탈리아 왕국으로서 이뤄진지 오래되지 않은 신흥국이었기에 오스트리아에게 졌다는 것도 뭔 졸전이니 굴욕이니 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스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5] 원본 영상에서도 그 뒤엔 나치 독일의 행보가 나오며 이탈리아는 프랑스가 항복하고 그리스 침공을 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6] 이에 대한 유머가 있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기 사용법'이란 유머로 좌우의 색깔이 있는 부분을 자르고, 흰색인 부분을 적한테 흔들라는 유머다(...) [7] 실제로 창과 방패가 이기긴 했다. 에티오피아야 말로 진정한 로마라는 증거다. [8] 출처의 같은 부분에 타국 병사들에 대한 나치 독일군 포로들의 평가도 들어있는데, 영국군은 자기들 독일군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존중할만한 전사들로, 미군은 물질적 우위에만 의존한 나약한 군대로 묘사한다. 한편 최대의 적수라고 할 수 있는 소련군의 경우엔 '죽음을 모르고 짐승처럼 싸우는 무시무시한 전사들'이라고 굉장히 후하게 평가해주었다. 그 외에도 자신들의 동맹이었던 루마니아군과 스페인의 청색사단에 대해서도 용감하다고 호평했으나, 헝가리군에 대해서는 소련군 앞에서 도망치기만 했다면서 혹평했다. [9]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탈리아군의 원수였던 조반니 메세가 튀니지에서 포위당한 이후 연합군에게 항복한 이후 포로 심문 중 한 발언이다. 물론 동맹인 독일군에 대해 말이 거친 건 이 사람이 전쟁 이전엔 파시스트 정권과 별로 친하지 않았고, 무솔리니가 실각하자마자 1초도 고민하지 않은채 바로 연합군 소속 이탈리아 왕국군 사령관에 부임했을 만큼 반독 성향이었던 점도 있었다. 뭐 다른 사람이 한 말 같으면 그냥 졸장의 한심한 자기 변명 같지만 조반니 메세는 대전 이전 제2차 에티오피아 침공, 대전기 초반 그리스 침공과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그나마 이탈리아에서 유능한 명장 소리를 듣던 양반이란 게 더 어이가 없어지는 점이다. 말하자면 적어도 제2차 세계 대전기의 이탈리아군은 스스로의 무능함, 총체적인 조직력 부재를 쿨하게 인정하며 패배주의가 위아래로 골고루 흘렀다는 것이다. [10] 그리고 어디까지나 악회되었을 뿐 그 이전부터도 이 꼴인걸 잊지 말자. 이미 움베르토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때부터 식민지 먹겠다고 설쳐댔고 에리트리아와 리비아를 차지하는 등의 성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투자 대비 실적은 좋지 않았고 오히려 아프리카 국가인 에티오피아와 전쟁했다가 패배하고 유럽의 환자인 오스만 제국에게도 쩔쩔매서 영프의 비호와 발칸 전쟁빨로 겨우 이기는 등 굴욕만 당했다. [11] 당장 영국의 묵인 아래 꾸준히 군사력을 증강해왔던 독일군도 폴란드 침공 중 폴란드 군과 민간인들의 지독한 저항에 현장 지휘관들이 기가 죽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전술에 고착되는 현상이 발생하자 야전의 고참 부사관, 엘리트 초급장교들이 지휘관 명령 때문에 최상의 타이밍을 놓치고 뒷목 잡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12] 웃긴 건 스페인 내전에서 그렇게 프랑코를 열심히 밀어줬건만, 정작 이후에 이탈리아가 얻은 실익은 거의 없었다. 독일처럼 전략물자를 확보하거나 광산, 보급항구를 획득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스페인군은 이탈리아를 경계한답시고 1940년, 탕헤르를 강점해버렸다. 자선사업가인가...이 분들 대체 정체가 유럽 대륙의 만력제나 다름없다 정치적으로도 '누가 지중해와 국제 파시즘의 대빵인지 가르쳐준다'는 목적도 저렇게 중간 과정에서 터진 군사적 삽질로 인한 오명 때문에 하나도 달성 못했다. [13] 다만 명심해야 할 건 "같은 민족이니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의식"이 남부에는 아예 없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남부에도 이탈리아 통일에 찬성하는 사람은 많았다. 만약 남부가 진짜로 북부와 통일하기가 싫었더라면 주세페 가리발디의 남이탈리아 점령 직후 압도적인 찬성표로 사르데냐-피에몬테와의 통합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 아니라 진짜 죽기살기로 사르데냐-피에몬테에 저항했을 것이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남북 문제의 원인은 단순히 정치적 이유보다는 경제적 이유가 더 크다. [14] 이탈리아 통일 이후, 남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15]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러시아군의 졸전상태와 비슷하다. [16] 부역자들이 승세가 기우는것을 보고 편을 바꾸었거나 관심없던 사람들이 파이나 뜯어먹을수 있을까 싶어서, 즉 나도 가담해서 훈장이나 하나 달아보려고 막판에 지원한 사람들이 있었다. [17] 아주 이게 틀린 말은 아니다. 에티오피아 제국군은 이미 수만여 정의 총기로 무장했으나 제국에게 따르지 않은 부족들이 무장을 지원받지 못해 창칼이나 화살로 싸웠기 때문이다. 이는 후술하는 것처럼 부족들이 서구 열강을 지지할 위험성을 회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오해하면 안 될 것이, 이미 서구식 총기로 무장한 황제 직속 중앙군만 해도 이탈리아군을 압도할 만큼 많았다. 이들의 기량은 서구 열강의 일류급 부대와 비한다면 조금 모자라겠지만, 결코 서구 군대와 교전을 벌이기에 크게 모자라지는 않으며, 후에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울만큼 강력한 부대였다. [18] 심지어 6.25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에티오피아군이 창칼 들고 참전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6.25 당시 파병된 에티오피아 황실 친위대 칵뉴 부대는 미제 무기를 사용했다. [19] 그래서 이런 꼬락서니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 조지 패튼. [20] 오죽하면 미군과의 전투가 끝나고 전리품을 회수하던 중 한 병사의 생일 날짜에 맞춰 보내진 초콜릿 케이크를 보고 싸울 의지를 잃었다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다. [21] 특히 습한 동남아에서는 물을 함부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생수를 그대로 마셔도 큰 문제가 안 생기는 일본이나 한국과 달리 동남아에서는 풍토병을 막기 위해서 여러 사전작업이 필요했다. [22] 객관적으로는 민폐가 맞을 것이다. 그 병사 한 명만 사먹은 게 아니라 이탈리아군의 일원인 그 병사가 사먹은 것이기 때문에, 점령지의 가정집에서 제대로 된 끼니를 사먹었다는 소문이 그 병사가 소속된 부대에 퍼지거나, 운이 없어서 저 가정집 밥이 맛있다더라이탈리아군이 인정한 맛집는 소문이 퍼져버리면, 다른 병사들도 줄줄이 사먹으러 갈 가능성이 높고 개중에는 종종 그냥 무전취식을 하고 가는 양아치도 있을 테니... [23] 1978년 작품이며, 게임을 완료하는데 최소 1,500시간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유명한 보드게임 작가인 Richard Berg의 작품으로, 이 보드게임은 미국 드라마 빅뱅 이론(시트콤)에서도 플레이 하는 장면이 나온적 있다. [24] 이탈리아 공군의 상태가 말이 아닌지라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막상 전투에 들어갔을 때 약속한 독일기는 나타나지도 않았다거나(마타판 해전 등)... [25] 전쟁 막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남슬라브족이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직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수립될 때까지 존재했던 미승인 임시정부. [26] 원래 함명은 비리부스 우니티스.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표어다. [27] 전쟁에서 지면서 배상으로 협상국에 군함을 빼앗길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적국에게 귀중한 군사 자산을 넘겨주느니 일부러 신생 임시정부에게 모두 줘버린 것이다. [28] 다만 이탈리아 인간어뢰는 자살돌격을 하는 가이텐과는 다르게 어뢰 탄두를 폭파 대상에 설치하고 남은 어뢰로 탈출하는, 정석적인 침투공작 방식이며, 현재 대한민국과 미국의 UDT 특수부대들이 비슷하게 쓸 정도로 유용한 방법이다. [29] 다만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임시정부에게 함선을 넘겨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30] 배틀필드 1에 나오는 그라파 산이 맞다. [31] The Dark Side of Democracy: Explaining Ethnic Cleansing. p309 [32] 정식 명칭은 “질식성, 독성 또는 기타 가스 및 세균적 전쟁 수단의 전시 사용 금지에 관한 의정서” [33] 히틀러조차도 패전 직전까지 안쓴게 독가스이다 [34] 참고로 동시대 스위스와 독일의 용병들은 같은 이유로 죽자살자 싸웠다... [35] 보통 엘랑 비탈에서 따온 엘랑스라고 부른다. 혹은 대항해시대에서 비롯된 밈으로 패랑스(패배+프랑스)가 있다. [36] 카를로 2세는 아예 사보이아 공국의 90% 이상을 빼앗겨 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생캉탱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이끌고 프랑스군과 싸워 이긴 후에야 겨우 되찾아왔고, 나폴레옹 전쟁때는 본토인 피에몬테, 사보이아, 발레다오스타, 니차를 빼앗기고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사르데냐로 몽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토리노 공방전이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아시에타 전투처럼 외부의 지원을 받는다면 그럭저럭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37] 안정도 -10%, 항복 한계치 -50%. 사실상 파리 함락 시 프랑스가 바로 항복하게 만드는 디버프다. [38] 중국( 244+50+34+13+12+12+7+4M)/중화제국(500M), 인도(313M), 소련(161M), 미국(122M), 동인도(60M) 등. [39] 함선 숫자는 그래도 7대 열강답게 나름 되는 편이지만 문제는 자주 만날 상대가 인게임 해군 1위인 영국과 2위 3위를 순서대로 가져가는 미국과 프랑스라는 것... 지브롤터 틀어막지 못하면 그대로 본토 앞바다까지 제해권이 뻘개지고 수송선 짤리는 걸 볼 수 있다. 덤으로 아군으로 만날 독일은 수상함 해군이 없다시피한 상황. [40] 원수에 이게 붙어 있다면 1차대전 시기 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꼰대라는 뜻이다. 보수파 특성은 참호 보너스가 살짝 있지만 꼰대답게 렙업에 필요한 획득 경험치를 미친듯이 날려먹는다. 그래서 프랑스처럼 모든 원수가 보수파 달린 나라가 아닌 이상 차라리 보수파 없는 장군을 진급시켜 원수로 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