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0:00:43

이케가미 료이치

1. 개요2. 생애3. 특징4. 작화5. 여담


池上遼一.
1944년 5월 29일 ~
파일:external/decadeview.ocnk.net/205-4.jpg 파일:external/cdn-ak.f.st-hatena.com/20140215172605.jpg
크라잉 프리맨 시절의 그림체 최근작 히트의 그림체[1]

1. 개요

일본 극화 만화가. 후쿠이현 타케후시(現 에치젠시) 태생.

2. 생애

중학교를 졸업한 후, 오사카로 가서 간판집에서 일하면서 만화를 그리다, 1962년 대본소 만화 출판사 히노마루 문고의 단편집 <마상(魔像)>에 단편이 실리고 대본소 만화가로 데뷔. 대본소 만화가의 어시스턴트를 하면서 틈틈이 만화를 그렸지만 생활고로 좌절했다. 이때 동료 3인과 결성한 만화창작집단은 3개월간 월세가 밀려 쫓겨나면서 해산, 다시 간판을 그리는 곳에서 조수로 일하지만 3평짜리 방 한 칸에서 7~8명이 자야하는 등 힘든 생활을 했다. 다시 간판집의 조수로 일을 하면서 투고한 단편 <죄의식>이 1966년 가로 9월호에 실리고, 이것을 본 < 게게게의 키타로>의 작가 미즈키 시게루가 그를 어시스턴트로 고용하고 싶다고 가로의 편집부에 연락해서 그의 제자가 된다. 막상 어시스턴트가 되기로 마음먹었는데도 오사카에서 도쿄로 갈 차비가 없어서 곤란해하자, 미즈키 시게루가 교통비를 부담해주었다는 후일담이 있다.[2]

파일:external/www.asahi-net.or.jp/garo6609C1.jpg

1966년 만화 잡지 < 가로>에 실린 단편 '죄의식'.

미즈키 시게루의 어시스턴트로 2년 반 정도를 일하면서, 몇 개의 단편을 발표하고, 1970년에는 소년 매거진에 일본풍으로 어레인지한 < 스파이더맨>을 연재했다. 아메리칸 코믹과는 다른 일본인의 정서가 담긴 괴작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마블 코믹스본사에서 스파이더버스 등지로 최소한이나마 언급하는것으로 보아 정사격 평행세계로 취급해주긴 하는 모양

이후 1974년 주간 소년 선데이에서 신인인 카리야 테츠가 글을 쓰고 이케가미 료이치가 그림을 그린 < 오토코구미>(남조;男組)가 크게 히트하였고, 둘 다 유명 작가가 된다. 1979년까지 연재되면서 만화책으로 20권이 넘게 나왔고 영화로도 몇 편이 만들어 졌다. 이노우에 다케히코도 좋아하는 만화로 꼽고, 같은 이름의 남성 아이돌 그룹도 존재하는 등 주변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돌격 남자훈련소 시끌별 녀석들 멘도 슈타로, 돌격 크로마티 고교 호쿠토 타케시 등 많은 패러디를 낳았다. 여담이지만 카리야 테츠 맛의 달인의 작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잘 매치가 안된다. 다만 오토코구미 역시 좌익적인 분위기의 작품으로, 일본의 현 상황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맛의 달인과의 공통점은 있다.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진 < 크라잉 프리맨>, <상처를 쫓는 자>, <붉은 비둘기>, < 생츄어리> 등 많은 히트작을 만들었다. 이후 북두의 권으로 유명한 부론손과 손을 잡고 < 히트>, <신삼국지 覇-LORD-(원제는 覇-LORD-)>[3], <유월초> 등을 작업하고 있다.

2023년 앙굴렘 국제만화제에서 특별 영예상을 수상했다.

3. 특징

만화계에서 50년이 넘게 활약해오면서 수많은 작품들을 그려왔으며 좀 유명한 작품들만 잡아도 20여개가 넘는다. 그의 만화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마초이즘으로 고독하지만 강한 한 남자가 세상의 폭력들을 이기고 부와 명예, 사랑을 모두 얻는 인생의 승리자가 된다는 내용이 많다.

70년대부터 폭력 만화의 주류를 이끌었으며 초기작은 주로 학원 폭력물이 많았다. 그 내용들은 대부분 김화백의 < 럭키짱>을 연상시키는 황당하고 엽기적인 폭력물이었으며, 대한민국 국내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느슨한 일본의 만화 심의기준 덕분에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었다.

SF 사무라이 시대극 등등 여러 장르를 장르를 섭렵하지만 내용은 기본적으로 여전히 폭력을 소재로 한 성장물이었으며, 중국 암살단의 국제 범죄첩보물이었던 < 크라잉 프리맨>의 큰 성공 이후 < 상처를 쫓는 자>, <스트레인> 등등 전세계로 스케일을 넓힌 폭력물을 만들어 나간다.

마초적이고 선이 굵은 그의 작품 내용전개도 후세대의 일본 만화들, 특히 하드보일드 폭력물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거의 모든 작품이 스토리작가와의 협업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직접적으로 '이케가미 료이치의 영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참고로 이케가미 료이치가 직접 스토리를 쓰지않는 이유는 가로 출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나치게 어두운 내용만 쓰게되기 때문이라고.

이후 중요한 작품인 <빛과 그림자>(생츄어리:성역)를 만드는데 정치와 폭력계를 둘다 건드리는 이 작품에서 일본 정치계의 실상을 꽤 밀도 있게 까발려 정치계에서 연재를 중단해달라는 압력을 받았다고도 한다.

2010년대 들어 환갑도 지나 벌써 칠순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그런 성실한 작품활동으로 후배 만화가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으며 귀감이 되고있다. "우리 세대가 현역이었을땐 수일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마감을 지켰는데, 현재의 만화가들은 툭하면 휴재나 연기를 한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4]

국내에서는 대부분 르와르 폭력물만 그리는 일본판 김성모라는 오명이 있었지만, 스토리작가를 적극 수용하고 놀랍게도 최신 IT기업이 성공하는 비즈니스 물인 트릴리온 게임을 연재하면서 발전을 멈추지 않는 작가로 평가가 반전되기도 했다. 물론 스토리 작가의 덕이 큰편이지만 칠순의 작가가 젊은 작가랑 일하는 것 자체가 대단하긴 하다.

4. 작화

마치 사진처럼 정교하게 대상을 모사하는 그의 사실적인 그림체는 극화를 그리는 동북아의 후배 만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홍콩, 대만 중국계 무협, 폭력물 만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여전히 많은 중국계 작가들이 그의 그림체를 본받아 작품을 그리고 있다. 예를들면 홍콩에서 연재한 스트리트 파이터 만화인 가두쟁패전도 료이치삘나는 그림체다. 80~90년대의 한국에서도 만화가들이나 문하생들 사이에서 '교본'으로써 통용되던 작가.[5] 특히, 머리카락의 표현을 펜이 아니라 붓으로 그리는 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했는데 이것은 이현세도 영향을 받았다. 심령소녀 마이(Mai, the Psychic Girl)는 쿠도 카즈야가 글을 쓰고 이케가미 료이치가 그림을 그린 초능력자 소재의 만화인데 여기서 주인공의 눈알에서 쏘아지는 공격을 이현세가 아마겟돈에서 그대로 베꼈다.

2000년대의 경우 김성모 럭키짱 이후 자신의 그림체를 이 사람의 그림체와 비슷하게 바꿔버리기도 했다. 그림체를 바꾸고 낸 작품들이 바로 용주골 시리즈와 대털이다.

5. 여담

파일:external/pbs.twimg.com/Bv40hIGIYAEV2zG.jpg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c511c8c0.jpg

[1] 조금 더 선이 굵고 강렬해졌으며 딱 보면 알겠지만 김성모 대털 그림체의 모티브이다. [2] 함께 어시를 한 사람이 <나사식>을 그린 츠게 요시하루. 미즈키 시게루는 자신의 제자인 이케카미 료이치를 그린 단편 '만화광의 시 이케가미 료이치전(漫画狂の詩 池上遼一伝)'을 남기기도 했다. 엄청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회상했다. [3] 2004년 9월부터 2011년 2월까지 연재. 단행본 총 25권. 후속작 SOUL 覇 第2章(2011년 6월부터 2013년 3월까지 총3권 연재)까지 총 25권. 한국엔 1부의 13권까지 번역되었다. 번역가는 김완. 이게 왜 중요하냐면, 작화는 최고인데 내용은 완전 이고깽 양판소식 고증파괴이기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주인공이 야마토국에서 중국까지 건너가 개 쓰레기인 유비를 죽이고(...) 대신 유비행세를 하는데다가 조운이 여자라던지, 관평이 조운과 여포의 자식이라던지... 미쳐나간다. [4] 이는 '만화 그 자체로 승부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세대의 만화가들과 '애니메이션 등의 2차 저작물을 통한 부가수익이 더 많은' 세대의 만화가들의 차이이기도 하다. [5] 김성모 역시 성인 극화 그림체로 넘어갈 때, 이케가미 료이치의 화풍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대털에 패러디까지 있다. [6] 그림 실력이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지상유일"이라고 잘못 알고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7] 여기서 말하는 '성인물'이란건 일반적인 국내 인식이 그렇듯 '음란물'이나 '폭력물' 즉 '아동유해매체'을 이야기한다. [8] 키는 180cm 이상에 맨손으로 벽돌을 부수는 등 엄청난 전투력을 소유하고 있다. [9] 이 책 내용에서 이런 식의 비판은 이케가미 료이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개그만화를 표절한 것으로 확신하는 개그만화를 싣고 직접 비교하며 자신의 것보다 수준이 떨어짐을 비판하였고, 고르고13의 경우 얼굴 표정이 모두 같아서 복사기로 얼굴만 복사해 붙여넣기만 해도 완성할 수 있다는 식의 시연을 펼쳐보이며 조롱을 했다. [10] 단 특별한 얼굴의 캐릭터일 경우 한정으로, 주역급에 쓰이는 마스크는 전반적으로 동일하다. 작가 스스로 말하길, 아무리 현실의 얼굴형이 무궁무진하더라도 독자들에게 '미형(호감형)'으로 받아들여질수있는 범위가 좁기 때문이라고... [11] 인쇄 기술의 발달하고 만화책의 종이질이 좋아짐에 따라 원본원고에 가까운 출판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고, 혹은 애초에 종이질 자체에 관계없이 디지털환경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가능한 요즘에는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지만.. 만화의 그림체는 인쇄기술이나 매체, 즉 종이의 질과 역사를 함께한다. 아무리 정밀한 그림을 '빨리' 그릴 수 있다고 해도, 원본에서 저하되는 것이 '필연'인 출판만화 환경에서는 그림이 뭉게지거나 더욱 알아보기 힘든 그림이 될뿐이기 때문이다. 즉, 과거의 만화가들은 평소 세밀한 표현을 할 줄 알아도, 향후 인쇄돼 나올 출판본의 한계에 맞춰서 그림체를 조절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었다. [12] 단, <남조>와 <남대공>의 경우 소년만화이기 때문에 그림체를 바꾼 경우이기도 하다. [13] '극화'는 그림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방식에 대한 구분이다. [14] 사실 이케가미 료이치의 경우에는 어쩌다보니 '창작물(복원도)'을 도용하게된 특이케이스이지만, 카와구치 카이치 역시 침묵의 함대서 참고한 밀리터리 화보집이 문제가 됐던 적이 있고 이노우에 타케히코 역시 슬램덩크의 농구포즈에 NBA카드를 참고해 문제가 됐던 적이 있다. 그림 자체가 '실사풍'과는 거리가 있는 고르고13의 사이토 타카오 같은 극화 작가들은 이런 경우가 드물다. [15] 이케가미 료이치 특유의 화풍에서 눈코입 비율을 좀 더 얼굴의 중심 쪽으로 몰아놓으면 노나카 에이지의 그림과 비슷해진다. [16]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지 간단히 알 수 있는 증거가 바로 지금도 일본이 러시아한테 돌려달라고 애걸하는 쿠릴열도 4개 섬이다. 2차 대전 말기에 일본은 사할린섬 남부와 쿠릴열도 4개 섬을 소련군한테 빼앗겼고, 소련이 망한 이후에도 여태까지 계속 러시아 영토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