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에르 이루레타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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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클럽 | ||||
45대 |
93대 |
스페인의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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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하비에르 이루레타 Javier Irure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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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하비에르 이루레타고예나 아미아노 Javier Iruretagoyena Amia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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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8년
4월 1일 ([age(1948-04-01)]세) 스페인 기푸스코아 주 이룬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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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스페인|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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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6cm | |
직업 |
축구선수 (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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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레알 우니온 (1965~196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67~1975) 아틀레틱 클루브 (1975~1980) |
감독 |
세스타오 스포르트 클루브 (1984~1988) CD 로그로뇨 (1988~1989) 레알 오비에도 (1989~1993) 바스크 대표팀 (1993) 라싱 산탄데르 (1993~1994) 아틀레틱 클루브 (1994~1995) 레알 소시에다드 (1995~1997) RC 셀타 데 비고 (1997~1998)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98~2005)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2006) 레알 사라고사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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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6경기 ( 스페인 / 1972~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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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前 축구 선수 및 감독이다. 선수 시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꽤 이름을 날린 선수였다.선수 은퇴 후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초창기엔 선수 시절 쌓은 커리어 덕에 감독직을 연명하는 수준으로 특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셀타 비고에서 마침내 능력을 인정받았고 데포르티보를 맡아 명장으로 떠올랐다. 이루레타는 당시로선 매우 생소했던 원톱 기반의 4-2-3-1 포메이션을 선보였고 프리메라 리가 그리고 유럽 축구계에 길이 남을 돌풍을 일으켰다. 참고로 90년대 후반까지 원톱 기반의 전술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장된 시스템이었다. 쉽게 말해 이루레타는 많은 트로피를 들진 못했지만 축구 전술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말년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데포르티보의 재정난, 해외 자본 유입으로 인한 미친 이적료 시대의 시작으로 세대 교체에 실패했기 때문.[1]
이후 데포르티보를 떠나 레알 베티스와 레알 사라고사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큰 실패를 맛보았고 이후 감독직에 복귀하지 않고 있다. 특히 사라고사 시절 실패가 너무나 컸는데 4-2-3-1 포메이션에 특화된 파블로 아이마르부터 리그 정상급 공격수 디에고 밀리토를 비롯 정상급 내지 B+ 정도의 선수들이 다수 포진한 스쿼드를 가지고도 실패했기 때문. 당시 이루레타는 4연패를 당했는데 이는 그의 감독 커리어에 있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틀레틱 클루브의 유소년 총괄 직책을 잠시 맡았으나 이제는 건강 문제로 쉬고 있다. 이젠 70대에 접어든 것도 있고 사실상 축구계에서 은퇴한 상황이다.
2. 선수 경력
이루레타는 1948년 4월 1일 바스크 지역의 기푸스코야 주 이룬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5년 지역팀인 레알 유니온에 입단했고 2년 동안 48경기 14골을 기록하며 팀이 2부리그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레알 유니온은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해 승격이 좌절되었고 이루레타는 얼마 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했다.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절 이루레타.
이후 이루레타는 마드리드에서 1967년부터 1975년까지 8시즌 동안 활동하며 통산 208경기 48골을 기록했으며 리그 우승 2회, 코파 델레이 우승 1위를 달성했다. 또한 1974년에는 유럽 축구 최대의 대회인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바이에른 뮌헨에게 통한의 패배를 당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이루레타는 마드리드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다가 1975년 고향으로 돌아가 아틀레틱 클루브에 입단했다. 그는 빌바오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선보여 1976-77 시즌에 유로파 컵 준우승과 코파 델레이 준우승을 이루었다. 그는 1980년에 32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한편 그는 스페인 국가대표로서 6경기에 출전했지만 친선 경기에 나왔을 뿐 중요한 대회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못했다. 또한 바스크 축구 대표팀에 딱 한 번 출전한 적도 있었다.
3. 감독 경력
3.1. CD 로그로뇨
1984년, 이루레타는 빌바오의 지역팀인 세스타오 스포르트 클루브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스페인 3부리그인 세군다 디비전 B에 소속된 이 팀을 맡자마자 우승을 달성해 세군다 디비전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1988년까지 세 시즌 동안 10위, 6위, 10위를 기록하며 안정적인 성적을 유지하던 그는 1988년 스페인 라 리가 소속 클럽인 CD 로그로뇨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루레타는 1988년 9월 3일에 로그로뇨 감독으로서 첫번째 경기를 치렀는데, 상대는 얄궂게도 선수 시절 전성기를 보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였고 경기 결과는 로그로뇨의 1:0 승리였다. 하지만 로그로뇨는 이후 지지부진한 끝에 강등권으로 추락하고 말았고 결국 이루레타는 1989년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경질되고 말았다.3.2. 레알 오비에도
이루레타는 1989년 레알 오비에도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1990-91 시즌에 리그 6위를 기록하며 레알 오비에도 역사상 처음으로 유로파 컵 대회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오비에도는 갈수록 경기력이 나빠졌고 결국 1993년에 강등권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이루레타는 감독을 맡은 지 4년만에 경질 통보를 받았다.3.3. 방랑기
이루레타는 1993년 라싱 산탄데르의 감독으로 부임해 1993-94 시즌에 리그 8위를 기록했다. 그후 아틀레틱 클루브 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1994-95 시즌에 11위라는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찍다가 시즌이 끝나기 전에 사임했다. 1995-96 시즌 중반에 레알 소시에다드 감독으로 부임해 팀 성적을 7위로 끌어올렸고 1996-97 시즌엔 8위를 찍었다.1997년 여름, 셀타 비고 감독으로 부임해 6위를 기록하며 셀타 비고에게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대항전을 선사했다. 하지만 셀타 비고와의 재계약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셀타 비고의 최대 라이벌 데포르티보였다.
3.4.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선수 시절 꽤 이름을 날린 공격수였지만 감독으로서는 이렇다할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이루레타는 1998년 데포르티보에서 부임한 이래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당시 데포르티보는 1990년대 초반 베베투, 마우로 실바, 미로슬라프 주키치, 파코 리아뇨, 하비에르 만하린, 히바우두 등의 활약을 앞세워 리그 준우승 2회,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 UEFA 위너스컵 4강까지 진출했던 신흥 강호였다. 그러나 바르셀로나가 그 유명한 히바우두 사건을 일으킨 후 잠시 침체기에 빠져있었다.
이루레타는 감독 부임 후 데포르티보를 젊고 패기 넘치는 팀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빅토르 산체스, 마누엘 파블로, 엔리케 로메로, 로이 마카이 같은 재능들을 영입했다. 우선 그는 첫 시즌에 프리메라리가 6위를 찍으며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99/00 시즌 자우밍야를 필두로 한 4-2-3-1 포메이션으로 데포르티보 역사상 최초의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선사했다.
우승 이후 데포르티보는 스타 플레이어 영입에 올인하기 보단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 위주로 영입하며 스쿼드의 깊이를 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 영입된 선수로는 조안 카프데빌라, 호세 아마비스카, 프란시스코 몰리나, 세르히오 곤살레스, 엑토르 베렌게르, 세사르 마르틴 등 이들은 훗날 스페인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01/02 시즌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격파하고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일궈내며 이루레타는 당대 스페인 최고의 명장으로 군림했다. 이 경기의 상징성은 매우 컸는데 '코파 델 레이 결승은 제 3의 구장에서 열려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한 채 레알의 홈에서 강행되었기 때문. 또한 결승 날짜도 4월 중순 혹은 시즌 말이 아닌 3월 26일로 정해졌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배경이라면 2002년 3월 26일은 레알 마드리드가 창단된 지 정확히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스페인 축협과 레알 마드리드의 흑역사이자 가장 최악이었던 결승전. 이루레타는 레알 마드리드의 100주년 기념 파티에 제대로 찬물을 끼얹었다.
2000년과 2002년에 수페르코파를 우승한 것을 비롯 국제대회에서도 승승장구해 00/01 시즌에 리그 준우승과 챔피언스리그 8강을 달성했고 다음 시즌에도 리그 준우승, 챔피언스리그 8강을 기록했다. 02-03 시즌까진 챔피언스 리그 16강도 32강처럼 조별 예선이었기에 지금의 8강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 2003-04 시즌엔 데포르티보의 재정이 악화되어 긴축 정책이 실행되는 바람에 로이 미카이가 뮌헨으로 이적하는 악재가 있었지만 리아소르의 기적을 달성하는 등 여전히 강력한 면모를 보이며 팀 역사상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데포르티보는 이 황금시대 동안 지나치게 많은 돈을 선수 영입에 투자했는데 이를 상쇄하기 위해선 적어도 리그 우승 내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트로피는 없었고 부채가 심각해지는 바람에 파산 직전에 몰리고 말았다. 결국 2004-05 시즌 전력 누수가 심각해진 데포르티보는 8위로 추락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모나코, 리버풀, 올림피아코스가 들어간 조에서 2무 4패를 기록하며 조별 예선에서 최하위로 광탈하고 말았다. 그후 이루레타는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3.5.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2006년 6월, 이루레타는 레알 베티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베티스는 2006-07 시즌 극도의 부진을 겪으며 일찌감치 강등권으로 추락하고 말았고 결국 이루레타는 12월 21일 경질되었다.3.6. 레알 사라고사
베티스에서 경질된 후, 이루레타는 볼턴 원더러스 FC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고 레알 소시에다드의 감독으로 부임할 거라는 예측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두 팀 모두 가지 않았고 2008년 1월 레알 사라고사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부임 직후 4연패를 당해 거센 비난을 받은 끝에 2008년 3월 3일, 부임한지 30일을 겨우 넘긴 상황에서 경질되고 말았다.4. 대회 기록
4.1. 선수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67~1975)
4.2. 감독
-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98~2005)
- 라리가: 1999-00
- 코파 델 레이: 2001-02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0, 2002
5. 평가
2019년 기준으로 너무나 예전 일이기에 언급은 덜 되지만 하비에르 이루레타는 전술적으로 축구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90년대 후반까지 축구계에선 투톱 내지 쓰리톱 기반의 포메이션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어졌다. 4-2-3-1 포메이션은 물론 원톱 기반 전술은 당시로선 매우 상식에 어긋나는, 성립할 수 없는 공식과도 같았다. 당시 축구인들의 생각은 공격수가 1명인데 효율적인 공격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중앙 수비수가 두 명 혹은 세 명이 있을텐데 공격수 수를 줄이면 그만큼 공격수가 수비수들의 협력수비에 쉽게 무력화될 것이라는 것이 당대의 일반적인 축구 지론이었다.물론 투톱 중 1명을 쳐진 위치에 두거나[2], 쓰리톱의 양날개를 아래로 배치시키며 4-2-3-1 비슷한 구도[3]를 내긴 했다. 다만 이 때는 주로 미드필더에서 공격수 쪽으로의 패스 줄기 형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로인해 공격수가 1.5선에서 볼을 잡고 공격을 풀어간다는 것은 데니스 베르캄프와 같이 공격수이면서도 볼을 잘 다루는 특이한 공격수가 있을 때에나 시도해 보는 전술 취급을 받았다.[4]
그러나 엄연히 플레이메이커 내지 공격형 미드필더를 둔다는 점, 애초에 공격수를 1명 두는 것부터 큰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이루레타는 그가 떠오르기 전부터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루레타는 당시 축구계에 4-2-3-1 내지 원톱이라는 새로운 전술적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는 2톱 내지 3톱 기반 전술의 구조적 문제점을 아주 잘 파악했고 이를 플레이메이커를 통해 매우 잘 공략했다. 미드필더에서 공격수 사이 간격의 문제로 공이 잘 연결되지 않으면 공격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을 인식해서, 미드필더와 공격수 사이에서 공을 연결해주는 중간 배달부로서의 공격형 미드필더 개념을 전술에 접목시켰다. 쉽게 말해 꼭 공격수가 많아야 공격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던 것. 펩 과르디올라가 티키타카를 비롯 전방 압박 및 후방 빌드업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선보인 것처럼 말이다.
이루레타의 철학은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데포르티보 뿐만 아니라 스페인 대표팀을 비롯 여러 스페인 구단들도 4-2-3-1 포메이션으로 무장한 후 대내외적으로 우수한 성적을 냈다. 발렌시아는 리그 우승 2회, UEFA 컵 우승 1회를 비롯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2번이나 올랐다. 레알 마드리드도 여러번의 리그 우승을 물론 02/03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후발 주자인 라파 베니테스가 리버풀에서도 4-2-3-1을 선보였는데 이를 계기로 프리미어 리그 구단들도 하나둘씩 원톱 전술을 택하기 시작했다.
비록 커리어가 스페인 그리고 데포르티보에 한정되지만 그의 전술적 접근은 펩 과르디올라 만큼이나 현대 축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임엔 틀림없는 사실이다.
[1]
마우로 실바의 대체자로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를 비롯해 공격진 보강을 위해 안드레스 달레산드로, 히카루드 콰레스마, 카를로스 테베스 등등 당대 최고의 유망주들과 이적설이 떴지만 자금력 부족으로 모두 실패했다.
[2]
알렉스 퍼거슨과 아르센 벵거
[3]
거스 히딩크
[4]
하지만 데니스 베르캄프도 당대 최고 리그인 세리에 A에서 처참히 실패하며 한 수 아래 리그던 프리미어 리그로 이적한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