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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14:21:28

전병현

왕삼덕에서 넘어옴

성명 전병현(全秉鉉)
이명 왕삼덕(王三德)
생몰 1878년 ~ ?
출생지 평안남도 순천군 용화군 용화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애국계몽운동2.3. 서간도에서의 활동2.4. 대한민국 임시정부2.5. 이후의 행적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전병현은 1878년경 평안남도 순천군 용화군 용화리에서 태어났다. 김구 백범일지에 따르면, 그는 1899년 마곡사(麻谷寺)에서 승려로 지내던 중 우연히 평양의 한 여관에서 전효순을 만나게 되었는데, 전효순은 그에게 자신의 자녀들과 손자들의 스승이 되어주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김구는 이를 허락하고 영천암에서 전효순의 아들들을 가르쳤는데, 그 중엔 전병현도 있었다고 한다. 승정원일기 고종 27년 11월 20일자 기사에 따르면, 전효순은 영관(領官)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승정원일기 고종 39년 4월 15일자 기사에 따르면, 전효순은 개천군수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전효순은 조선 말의 관료였으며, 전병현은 이러한 관료 집안에서 성장했고 김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동아일보 1925년 3월 29일자 기사 〈환락(歡樂)도 일장춘몽(一場春夢)〉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지난 이십일경에 평양경찰서에는 창뎐리(倉田里) 삼십팔번디에 기숙하는 전태헌(全台憲)(四二)라는 자를 절도죄로 검거하고 엄중히 취조한 후 이십칠일에 검사국으로 넘기엇는데 그자는 본래 서조선디방에서 돈만코 세력조키로 당대에 일훔이 떨치엇던 전 개천군수(前价川郡守) 전효순(全孝舜)씨의 외아들로서 거금십칠팔년전 자긔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 수백만원에 달하는 막대한 유산의 상속을 바더가지고 당시 평양의 일류부호로 자처하야 날마다 부랑자들과 함께 기생들과 세월을 보내며 한편으로는 아편빨기와 도박들으로 일을 삼아 오다가 약 칠팔년전에 그 재산을 전부 탕진하고 (중략) 그의 처자들은 지금 순천군(順川郡) 어느 곳에서 간구한 살림을 하고 잇는 중이라더라.

이에 따르면, 전효순은 관서 일대에서 돈이 많고 세력이 좋기 로 유명했으며, 아들 전태헌에게 수백만 원의 유산을 상속했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즉 전효순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그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또한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10월 30일자 기사에 따르면, 전병현은 평안남도 관찰부주사에 임명되었다고 하며, 승정원일기 고종 40년 7월 13일자 기사에 따르면 중추관 의관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부친처럼 관직 생활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2.2. 애국계몽운동

전병현은 1905년 11월 상동교회에서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문 작성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와 뜻을 함께 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인맥을 형성했다. 1906년 7월엔 국민교육회에서 설립한 국민사범학교(國民師範學校)를 1회로 졸업했으며, 이후엔 교사로서 자격을 갖춘 뒤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 교편을 잡았다. 그는 황해도 재령군의 양원학교(養元學校)에서 교사로 활동했으며, 이와 동시에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도인권(都寅權)과 함께 충일학교(忠壹學校)를 설립해 교육계에 종사했다. 한편, 그는 1906년 10월 15일에 설립된 서우학회에 가입하여 교육진흥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07년 1월 1일 잡지 〈서우〉 제2호에 글을 기고하여 그는 농사에는 다 시기가 있는 것인데, 그 시기를 어기는 것은 좋지 않고 봄에는 밭을 갈고 여름에는 김을 매며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 저장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혹여 봄에 밭을 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아 때가 늦어지면 옥토비답이어도 수확을 기대할 수 없고 가을에 해야 할 일을 끝내지 않고 게을리 하면 곡식을 저장할 수 없으니 굶주리게 될 것을 우려했다. 또한 농작예학의 비료방법과 토양생리를 시험하고 가르치고 이끌어 모두가 협력하여 부지런히 배우고 일하여서 농사를 짓자고 하면서 농사와 농업과 관련한 학업도 열심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전병현은 1907년 9월 1일 〈서우〉 10회에서도 '하부유취신(賀腐儒就新)'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해 신교육과 학업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백성들이 오랑캐를 따르는 안타까운 상황임을 개탄하면서 높고 낮음을 구분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하고, 학교 설립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현재 ‘보잘것없는 선비’들이 깨달음을 얻어야 하며, 그들이 신교육을 향해 가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는 〈서우〉의 내용이 민권론을 기반으로 하는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후 서우학회는 서북학회와 통합되었고, 서북학회는 신민회로 이어졌는데, 전병현 또한 이러한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신민회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1913년 이동휘가 안창호에 보낸 편지에는 '서간도 이동녕, 김필순, 전병현 각 동지 열심중이오니'라는 문단이 있는데, 이로 볼 때 전병현은 서간도로 이동하여 이동녕, 김필순 등과 함께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서간도에 갔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신민회 탄압이 가속되었을 때 국내를 탈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2.3. 서간도에서의 활동

전병현은 서간도로 망명한 뒤 이름을 왕삼덕(王三德)으로 개명하고 경학사에서 활동했다. 이후 경학사가 해체되자 경학사의 중심 인물들과 함께 공리회(共理會)를 조직했고, 이후 부민단 활동을 함께 했다. 또한 그는 신흥교유단과도 교류했으며, 1913년 9월 신흥교우단에서 발간한 〈신흥교유보〉에 축사를 기고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포 동포야 만주뜰에서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나의 혈족 동포야 (중략) 장래의 좋은 기회를 타서 (중략) 압록강을 뛰어 건너 원수의 두겁을 간협을 베여놓고 개선가 군악대로 우리 국혼을 일으키면 신성한 국혼이 빛난 독립을 낳고 공중에서 춤을 추리니 만추에 흩어진 나의 동포야 오늘을 당하여 눈물로 기념치 말고 정신으로 기념할지이다.

그가 신흥교유단의 기관지에 축사를 기고하게 된 경위는 기록이 미비해 자세히 알 수 없고, 신흥무관학교나 신흥교우단 회원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가 축사를 기고했다는 것은 그가 신흥무관학교 및 신흥교우단과 일정한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며, 서간도 일대에서 이미 명망있는 인물로 알려졌음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공리회는 1년간 존속하다가 1914년 7월 부민단으로 통합되었다. 전병현은 부민단 제2구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이후에는 의사부장, 교섭원 등을 맡았다. 이후 1919년 부민단이 해체되고 한족회가 조직되자, 그는 한족회에서도 얼마간 활동했다. 한편, 전병현은 1916년 삼원포 만리구의 정리학교(正理學校)에서 교장을 맡았다.

2.4.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8월, 전병현은 길림군정사를 대표하여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군정사의 강령과 활동사항에 대한 보고문을 제출했다. 이후 1919년 9월, 그는 손정도를 의장으로 하고 이춘숙(李春塾)을 부의장으로 하는 임시의정원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자주 안창호를 찾아가서 서간도 지역의 동향에 대해 보고했다. 그는 서간도에 소재한 여러 단체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서간도의 각 단체들이 서로 협력하여 임시정부 명령 하에 행동하려 한다고 보고하고, 곤란한 상황에 있는 단체들을 지원해줄 것을 제안했다.

1920년 4월 17일, 전병현은 윤기섭, 이진산(李震山)과 함께 서간도 독립운동단체 중 한족회 및 서로군정서에 대한 재정지원 등의 요구사항을 제출했다. 그들은 임시정부에서 서로군정서에 임시정부 인물을 보내고, 평안남북도의 공채 발매권을 서로군정서로 넘겨주며, 군사회의를 조속히 열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안창호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요구는 들어줄 수 있지만, 두 번째 요구인 평안남북도의 공채 발매권을 서로군정서에 넘겨주는 것은 동의하지 않았다. 이는 서로군정서의 재정확보를 위한 제안이었지만 평안남북도의 공채 발매권은 임시정부에서도 양보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한 자금 공급처이자 안창호 개인적인 정치적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전병현은 임시정부 외곽단체인 구국모험단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박희숙, 나우와 함께 폭발 실험을 하던 중 폭탄이 폭발하여 프랑스 경청에 체포되었다. 이에 여운형과 황진남이 프랑스 경무관과 교섭한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1920년 5월 9일 임시정부 국무원으로부터 서간도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서간도로 파견되었다. 그는 간도에 도착한 뒤 안정근과 함께 1920년 5월 25일 연합회 논의석사에 참석하여 여러 독립운동단체에게 "이번 연합회에 가입하지 않는 단체는 단체의 여하를 막론하고 진압하여 우리 독립군의 안정을 통일하는 것이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이라고 알렸다. 이후 7월 1일에 대한군정서를 제외한 국민회, 군정서, 광복단, 의군단, 신민단, 의만단의 6개 단체의 대표자와 국민의사회와 한민회 대표자 등 100여 명이 왕청현 알하하 장동에 모여 자신들의 조직과 명칭을 포기하고 민사, 군사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기본 원칙에 합의했다.

1920년 7월 7일, 전병현과 안정근은 각 단체 대표자회의를 주관하여 북간도 독립단체들의 통합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간도 지방 각 기관의 통일이 꼭 필요함을 설파했다. 그러나 여러단체가 참여하다보니 회의 방식에서부터 의견이 좁혀지지 못했고 여러차례 회의가 지속되었다. 7월 13일 회의에서는 왕삼덕과 이용(李鏞)이 “간도에 대한민단(大韓民團)을 조직할 것, 종래 각 단의 무장 모연대(募捐隊)는 이를 폐지하고 그 임무를 대한민단에 이임할 것, 간도 각 무력단체의 통일을 계획하여 일단(一團)으로 하고 사령관(司令官)의 지휘 하에 군사행동을 할 것, 사령관은 대한민국의 지휘 감독 하에 임무를 수행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은 7월 20일에 북간도 독립단체들이 모두 참가한 3번째 대표자회의에서 받아들여졌으며, 간도에 행정과 군사 양 기관을 특설하되, 행정기관은 대한민단으로, 군무기관은 동도군정서 및 동도독립군서로 칭하기로 하였다.

전병현과 안정근은 7월 27일부터 28일까지 명월구에서 다시 각 단체의 연합대회를 개최하고 "명월구 지방에 군사교육기관을 설립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착수하여 교관으로서 장춘에 거주하는 김정(金貞)을 채용하고 주건(朱建)은 학생 모집에 종사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회의가 없는 때에는 각 독립운동단체를 순방하면서 임시정부 산하로 통일할 것과 회의에서 본인들이 내놓았던 제안에 대해 설득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동로사령관 이용은 안정근과 전병헌이 북간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회를 무시하고 있다며 반발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렇듯 통합이 쉽지 않았지만, 전병현은 각 독립운동단체를 순방하면서 단체의 소재지, 활동내용, 간부, 단원 수, 무기 보유 여부, 재정 수입을 꼼꼼히 조사하고 기록하여 임시정부로 전달했다.

또한 전병현은 임시정부 특파원으로서 청산리 전투에 대한 정보를 임시정부로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상하이로 돌아가서 북간도 독립군의 전투 상황을 직접 보고했고, 안정근은 북간도에 계속 남아 활동하기로 했다. 이후 그는 다시 간도로 가서 안정근과 재회한 뒤 러시아로 특파원 활동을 위해 떠났다. 그는 중, 러 연합선전부에 가담하여 간도지부를 조직하고 선전지부장과 위원장을 맡았으며, 무력으로 친일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해 재정적으로 어려운 임시정부를 지원하려 노력했다. 이 단체는 공산주의 선전 단체였는데,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어떤 이유에서 이 단체에 가담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임시정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의 지원을 끌여들이려고 이러한 역할을 자처한 것으로 보인다.

1921년 초 임시정부 특파원 활동을 마치고 상하이로 돌아온 전병현은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무능과 분열을 비판하고 근본적인 개혁으로 독립운동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민의를 집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임시정부를 탈퇴한 그는 같은 시기 총리 직을 사임한 이동휘 등과 함께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독립공산당정부(朝鮮獨立共産黨政府)를 세우는 데 합의했다. 이후 1921년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상하이 고려공산당 대회에서, 그는 중국령 대표로 참여했다. 이어 1922년 10월 19일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통일대회에서 새로운 중앙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중앙위원회 중앙간부에 이동휘, 윤자영, 제1비서부(북간도) 장기영, 제2비서부(서간도)에 전병현이 선출되었다.

1923년 1월에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그는 고려공산당 대표로서 임정 개조론을 주장했다. 그는 국민대표회의에서 재정과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3월 15일에 참석한 회의에서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과거 5년간 善, 不善을 논하지 않았다. 각자 역사가 있음은 사실이다. 또 현시국의 현안인데 사실이라면 토론은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뜻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것을 주장하던 창조파가 국민위원회를 조직한 것이다. 이에 전병현은 1923년 6월 3일 성명서를 발표해 반대를 표명하고 국민대표회의에서 탈퇴했다. 이후 그는 소련이 고려공산당을 별개의 독립한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국제공산당 내의 고려부로 칭한다고 통보하자 이에 분노하여 공산당과 고나계를 단절하겠다며 고려공산당을 탈퇴했다. 이후 그는 상하이를 떠나 길림으로 돌아갔다.

2.5. 이후의 행적

전병현은 1924년 3월 전만주통일의회주비 발기회에 참가해 주비회의 선전원(宣傳員)으로서 이 회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여러 독립운동단체를 방문하여 회의에 참가해 줄 것을 호소했다. 또한 그는 길림에서 손정도, 양기탁과 함께 동우회 조직에 참여했다. 동우회는 재만 한인의 교육진흥과 산업 및 저축의 장려에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1924년 11월 전만주통일의회의 결과로 정의부가 조직되면서 동우회의 교육진흥과 산업의 장려 기능은 정의부로 이관되었다. 동우회는 정의부의 보조단체로 언론활동 위주로 활동방향을 전환한다.

이후 그는 길림에서 개최된 각종 기념사를 하는 등의 활동을 보였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고, 1926년 12월 11일 길림에서 안창호가 연사로 나선 강연에 참석한 것을 끝으로 행적을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전병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