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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3:22:15

야마다 아사에몬


山田浅右衛門

1. 개요2. 기원3. 직업과 수입4. 의외의 모습5. 메이지 시대 이후6. 아사에몬이 베지 못했던 유일한 사형수7. 대중매체에서8. 같이보기

1. 개요

일본 에도시대 타메시기리(시험베기), 참수형 집행, 도검 감정 등에 종사하였던 야마다(山田) 가문 당주에게 전해지던 세습명이다. 똑같이 '아사에몬'이라고 읽지만 한자가 다른 '朝右衛門'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목베기 아사에몬(首切り浅右衛門), 살인자 아사에몬(人斬り浅右衛門)이라는 멸칭으로도 불렸다.

2. 기원

전국시대 에도시대 초기에는 타니 모리요시(谷衛好), 모리토모(衛友) 부자나 모리토모의 제자 나카가와 시게요시(中川重良) 등이 타메시기리의 명인들로 알려져 있었다. 타메시기리을 전문으로 하는 것은 시게요시의 제자 야마노 나가히사(山野永久) 때 부터였고. 나가히사의 아들 칸쥬로 히사히데(勘十郎久英)는 1685년에 오타메시고요(御様御用)의 직함을 받고 정식으로 막부의 신하가 된다. 이후 야마다 가의 후계자의 기량이 미숙하였기 때문에 몇몇 제자들이 오타메시고요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야마다 아사에몬 사다타케(山田浅右衛門貞武)에 이르러서는 오타메시고요의 직함을 야마다 가문에서 상속하게 되었다.[1]

3. 직업과 수입

요물봉행[腰物奉行] 밑에서 일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하타모토[旗本] 고케닌[御家人]이 아닌 낭인이었다. 그 때문에 정식으로 급료를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막부로부터 헌금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겸업인 참수형 집행으로도 돈을 벌었다. 또한 참수형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사형수의 목을 베는 일은 고난이도의 기술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전문가인 야마다 아사에몬에게 일이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주 수입원은 그게 아니었다.

야마다 아사에몬의 주 수입원은 시체였다! 사형을 집행하고 일반적으로는 시신을 사형수 가족에게 찾아가도록 하지만 간혹 죄질이 매우 나쁘거나[5] 가족이 인수를 거부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사형수의 시체를 넘겨받는 일이 있었는데, 이 시체를 가지고 타메시기리[6]를 했던 것. 당시 타메시기리의 용도로는 사람의 시체가 최고로 평가받았는데, 사형집행인의 일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시체를 공급받게 되고 이 시체로 타메시기리를 하면서 일본도를 감정하여 돈을 벌었다. 또한 많은 사무라이들이 직접 시체로 타메시기리를 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많은 의뢰가 들어왔다. 아무리 사형 집행인이라지만 사형수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시체 한 구를 가지고 여러번 타메시기리를 했다고 한다. 가끔은 직접 타메시기리를 하고 싶어하는 무사들에게 시체를 팔기도 했다.

5대 야마다 아사에몬인 요시무츠(吉睦)는 그동안의 타메시기리 경력을 토대로 잘 드는 일본도( 와자모노)의 등급을 나눈 <회보검척>(懐宝剣尺)을 저술하여 수익을 얻기도 했다. 다만, 신뢰성이 떨어질 수도 있는게 뇌물을 받고 몇몇 일본도의 등급을 올려주기도 했다고.

부업으로 약장사도 했다. 그가 파는 약은 야마다 환(山田丸), 아사에몬 환(浅右衛門丸) 등의 이름이 붙은 결핵 특효약이었다고 하는데 원료가 무려 사형수의 간, 뇌, 쓸개, 담즙이었다고 한다. 흠좀무. 그리고 유녀들에게 시체의 새끼손가락을 팔기도 했다. 당시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할 때 새끼손가락을 잘라서 건네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가짜 새끼손가락으로 많이 쓰였다고.

이러저러한 수입을 통해 야마다 아사에몬은 3~4만석 급의 다이묘와 필적하는 부를 쌓아올렸다고 한다.

4. 의외의 모습

그러나 야마다 아사에몬은 일반적으로 쉽게 생각되는 망나니는 아니었다. 자신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은 자들을 위령하기 위해 을 아끼지 않았다.[7] 그리고 사형수의 사세구를 이해하기 위해 3대 야마다 아사에몬부터는 하이쿠도 공부하여 하이고(俳号, 하이쿠 시인의 필명)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걸 가지고 순수하게 선의로 사형수를 배려했다고 보긴 힘들고 사형수를 직접 참하는데다 위에 나오듯 시신을 가지고 시험베기 부터 시신을 이용해서 약까지 만드는 등의 소위 죽은사람 가지고 몹쓸짓을 했으니 귀신, 요괴, 원혼 등의 미신이 당연시 되던 당시 시대를 생각해 보면 후환이 걱정되지 않으면 이상할 수 밖에. 당연히 자신과 가문의 안녕을 위해서도 위령을 당연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국가의 사형 집행인들 역시 이러한 사형수들의 원혼의 가능성이나 사형집행인으로서의 괴로움을 줄이려는 노력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5. 메이지 시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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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야마다 아사에몬 (9대) 요시스케(吉亮)의 사진. 메이지 36년으로 추정. 출처는 위키미디어 커먼즈

막부 해체 후, 각각 8대 와 9대 야마다 아사에몬인 요시토요(吉豊), 요시스케(吉亮) 형제는 고토부수인괘참역(東京府囚獄掛斬役)에 임명되어 참수형을 계속 담당하였다. 메이지 3년(1870년)에는 시체를 사용한 타메시기리가 금지되어 주요한 수입을 잃었다. 참수형을 교수형으로 대체하는 법이 1880년 제정되어 1882년 시행되자 야마다 아사에몬의 역할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9대 야마다 아사에몬인 요시스케는 1881년부터 이치가야 감옥 서기로 일하다 이듬해 퇴직하였다.

1873년에는 야마다 아사에몬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코류 카게미츠[8]가 덴노가에 헌상되었고, 메이지 덴노의 패도로 사용된다.

6. 아사에몬이 베지 못했던 유일한 사형수

1818년 경, 금화 10량 이상의 거금을 훔친 도둑이 체포된다. 이 당시 형법으로는 10량[9] 이상의 돈을 절도하면 참수형에 처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도둑은 참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참수형 집행 당일, 야마다 아사에몬이 목을 치려 했는데 이 사형수의 뒷덜미부터 견갑골 사이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호[神號]인 '동조대권현(東照大権現)'이 문신되어 있었다. 이에야스의 신호에 칼을 댔다간 다음 행사로 자기 목에 칼날을 시험하는 자리가 마련될 테니 뇌옥봉행(교도소장) 이시데 타테와키(石出帯刀)[11][12]에게 이를 보고하고 어떻게 해야될 지 명령을 부탁하지만 이시데도 별 방법이 없어서 결국 이 사형수는 무기유배형[13]으로 감형되어 하치조 섬으로 유배처분된다. 앗싸 럭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지자 에도의 불량배들은 참수형을 피하려고 앞다투어 뒷덜미에 동조대권현의 문신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후일 또 동조대권현의 문신을 한 사형수가 들어왔는데, 하지만 그 사이 아사에몬은 이미 대처법을 강구해놓은 상태였다. 바로 칼로 문신 있는 부위의 가죽을 과일 껍질마냥 벗겨내 제거한 뒤(제거한 가죽은 땅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참수하는 것이었다. 후덜덜 문신을 새겨봤자 참수도 못 피하고 고통스런 박피 절차가 있다는 사실이 퍼지자 이미 문신을 한 불량배들은 문신 위에 다른 문신을 추가해 바꾸는 고생을 했다고 한다. 첫번째 참수 실패 후 아사에몬이 이시데한테 "차후 또 문신한 놈이 들어오면 어쩌시렵니까?" 하고 묻자 "뭘 어떻게 하냐 또 섬에 처박아야지…"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하자[14] 충격을 받고 열심히 잠도 안 자고 궁리해 나온 공략법(?)이다.

7. 대중매체에서

70년대에 일본에서 연재된 코이케 카즈오의 만화 고독한 참수자(首斬り朝)가 이 야마다 아사에몬들의 일화와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참수집행인의 삶을 그려냈다.[15] 상술된 동조대권현 사건도 이 만화에 나오는데 상술된 내용과는 다르게 사형수는 연쇄강간살인마라는 극악인이고, 아사에몬도 간지나게 단칼에 문신 가죽을 잘라내 문신방어를 격파한다.

무한의 주인에서는 야마다 아사에몬 요시히로가 등장하는데, 동명의 야마다 아사에몬인 4대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은혼에 등장하는 이케다 야에몬 이케다 아사에몬 역시 야마다 아사에몬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 만화 지옥락의 핵심 등장인물로 야마다 가문의 참수인들이 나온다. 위에 언급되었듯이 타메기시리기나 참수 등 검에 그 누구보다 실력이 띄어나기 때문에 설정상 무사들보다 더 검술이 뛰어난 존재들로 언급이된다. 야마다 아사에몬들 중 문과 타입인 범생이 아사에몬도 상급무사들 저리가라할 정도의 실력이다.

일본 만화 진 일기당천에서도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일본 만화 켄간 아슈라에서 과거 에도시대에 열렸던 권원시합에 출전하는 선수들 중 한 명으로 출전한다.

8. 같이보기


[1] 친자식이 사형집행인 일을 물려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대개는 자손이 아닌 제자들 가운데 뛰어난 자가 야마다 아사에몬의 이름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다. [腰物奉行] 코시모노부교. 쇼군의 도검, 장신구, 헌상 및 하사되는 도검류를 관리하던 막부의 직책 [旗本] 고쿠다카(石高, 영지의 한 해 쌀의 생산량)가 1만석 미만이고 주군을 직접 알현할 자격이 되는 무사 [御家人] 시대별로 의미가 달라지나, 에도시대에는 하타모토보다 격이 낮은 무사를 가리킨다. 주군을 직접 알현할 자격이 없었다 [5] 에도시대에 서민에게 가해지던 처형법은 6종류가 있었고, 이 중 3종이 참수형이었다. 이 중 가장 가벼운 형인 게슈닌(下手人, げしゅにん)은 참수형만으로 끝났지만 시자이(死罪, しざい)와 고쿠몬(獄門, ごくもん)은 반드시 남은 몸체를 타메시기리에 쓰게 했고, 특히 고쿠몬은 여기에 더해 참수된 머리를 효수하는 것까지 포함되었다. [6] 날붙이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물체를 베어보는 행위. [7] 현재 도쿄 이케부쿠로에 있는 쇼운지(祥雲寺)에는 6대 야마다 아사에몬이 세운 위령탑이 남아있다. 후일 마지막 야마다 아사에몬의 자손들과 연구자들이 세운 야마다 아사에몬의 비(碑)도 남아있다. [8] 무려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차고 다녔다는 칼이다. [9] 이 당시 물가로 20량이면 에도 시내의 정원 딸린 집 한 채 가격이다. [神號] 사후 신(神)으로 추서되면서 받는 이름 [11] 뇌옥봉행은 세습직이라서 봉행이 되는 후손은 세습명으로 이시데 타테와키의 이름을 받았다. 1612년 초대 타테와키(이름은 요시후카)는 일본사에 이름을 남긴 네임드 인물인데, 감옥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자 죄수들을 타죽게 방치하긴 뭣해서 일단 밖에 풀어놓은 뒤 "자진복귀하면 전원 한 등급씩 죄를 감해주겠으나 안 돌아오는 놈은 끝까지 쫓아가 일족을 몰살한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진짜로 죄수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자진복귀하자 타테와키는 조정에 감형 상소를 올려서 감형의 약속을 지켰다. [12] 여담으로 이런 식의 천재지변의 경우 형무소장 직권으로 죄수들을 특정 기한 한정으로 풀어주는 것을 키리하나치(切り放ち)라고 해서 초대 다테와키 이후로 키리하나치로 풀려났다가 기한 내에 돌아온 죄수들에 대해서는 모두 그 죄를 감형해주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 되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제정된 헌법에 명문화되어 현대 일본법에까지 해당 조항이 남아 있다. 관동대지진이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도 이런 식으로 키리하나치가 행해졌다고. [13] 말 그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섬 밖으로 못 나오는 형벌. 만약 탈출했다가 체포되면 얄짤 없이 참수형이다. 이는 다른 유기유배형도 마찬가지다. [14] 이시데 타테와키는 초대부터 마지막까지 피 보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 건지 살인죄가 아닌 사형수를 처형할 때 어떤 이유로 집행에 지장이 생기면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섬에 짱박자'를 시전해서 목숨 건진 사형수가 은근히 많다. 그 때마다 일그러지는 아사에몬의 표정은 덤 [15] 한국에 알려진 번역본에는 주인공 이름이 야마다 아사유에몬으로 되어있는데 한자를 그대로 읽어 혼란이 생긴듯. 아사에몬이 맞는 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