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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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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 제14대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Stanisław II August
파일:Stanisław_II_Portrait.jpg
출생 1732년 1월 1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대공국 브제시치주 보우친
(現 벨라루스 브레스트주 카메네츠군 보우친)
사망 1798년 2월 12일 (향년 66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재위기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764년 9월 7일 ~ 1795년 11월 25일
서명
파일: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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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가문 포니아토프스키 가문
이름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Stanisław August Poniatowski)
아버지 스타니스와프 포니아토프스키
어머니 콘스탄차 차르토리스카
형제자매 카지미에시 포니아토프스키, 미하우 포니아토프스키 등
배우자 없음[1]
자녀 미하우 그라보프스키, 이자벨라 그라보프스카 등[2]
종교 로마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국왕 선출2.3. 1764년부터 1771년까지의 치세2.4. 1차 폴란드 분할(1771년 ~ 1774년)2.5. 1775년부터 1788년까지의 치세2.6. 4년 세임과 5월 3일 헌법(1789년 ~ 1791년)2.7. 러시아의 침략과 2차 폴란드 분할(1792년 ~ 1794년)2.8. 코시치우슈코 봉기(1794년 ~ 1795년)2.9. 3차 폴란드 분할과 사망(1795년 ~ 1798년)
3. 사후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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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마지막 군주(폴란드 선거제 왕조 국왕)로,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의 백부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년기

1732년 1월 1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브제시치주 보우친에서 폴란드 왕실군 연대장이자 정치가이며 작가로도 활동했던 스타니스와프 포니아토프스키와 리투아니아 재무관 카지미에시 차르토리스키의 딸인 콘스탄차 차르토리스카의 9명의 자녀 중 6번째로 태어났다. 형제로 카지미에시 포니아토프스키[3], 안제이 포니아토프스키[4], 미하우 예지 포니아토프스키[5], 알렉산드르 포니아토프스키[6] 프란시스제크 포니아토프스키[7]가 있었고, 누이로 루드비카 마리아 포니아토프스카[8], 이자벨라 포니아토프스카[9]가 있었다. 그는 폴란드의 시인이자 재무관 얀 안제이 모르슈틴의 증손자였으며, 외조모 캐서린 고든은 스튜어트 왕조와 친척 관계를 맺었고 스코틀랜드, 스페인, 프랑스의 여러 저명한 가문과도 인척 관계가 있었다.

1733년 가을부터 부모와 함께 그단스크에 거주했으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시기에 아버지가 아우구스트 3세의 편에 선 뒤 그단스크 당국이 아우구스트 3세에 대적하던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의 편에 서면서 위험해지자 키이우 주지사 유제프 포토츠키에 의해 카미아네츠 포딜스키로 옮겨져 몇달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1735년 3월에 부모에게 돌아갔고, 1739년까지 그단스크에 거주했다. 초년기에 어머니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이후에는 여러 개인 교사들에게 교육받았다. 1739년 그단스크에서 바르샤바로 이동해 테아틴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수년간 교육받았다. 그는 우수한 교육을 받으면서 폴란드어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익혔고, 라틴어 독일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이탈리아어 영어 역시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다만 또래 아이들과 제대로 놀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엄격한 교육을 받는 동안 정서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우유부단한 성향이 두드러졌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말기인 1748년, 스타니스와프는 군사 경험을 쌓고자 라인 강 전선으로 진군하는 러시아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6월 10일 아헨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전쟁이 끝나 있었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의 인맥 덕분에 여러 저명 인사들과 교류했고, 군사 숙영지와 요새를 눈여겨봤다. 이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네덜란드를 방문하면서 미술, 특히 회화에 관심을 가졌다. 9월 5일 귀국길에 올라 10월 중순에 카셀 드레스덴을 거쳐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1748년 11월부터 외삼촌이며 리투아니아 총리를 맡고 있던 프레데리크 미하우 차르토리스키의 사무실에서 근무해 정치 경험을 쌓았다. 다만 그는 회고록에서 외삼촌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가르침만 내렸으며, 자신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1749년 10월 초, 왕권을 조금이라도 강화하려는 아우구스트 3세에 맞서는 차르토리스키 당을 이끌었던 형제 카지미에시와 함께 피오트르쿠프에서 지역 의회를 이끌었다. 1750년 외삼촌의 사무실에서 나온 뒤 바르샤바에서 가정 교사로 활동했다.

1750년 봄,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스타니스와프는 독일의 저명한 의사 요한 나다나엘 리베르쿤(Johann Nathanael Lieberkühn, 1711 ~ 1756)에게 치료받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그는 회고록에서 그 도시와 융커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베를린에서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만나게 되니, 바로 영국 외교관 찰스 헨버리 윌리엄스였다. 찰스는 스타니스와프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고 수호자이자 멘토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그에게 많은 귀중한 조언을 해주었다. 스타니스와프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매사에 소극적이던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찰스를 몹시 소중한 사람으로 여겼고, 훗날 왕이 된 뒤에도 그와 친분을 이어가면서 여러 차례 조언을 청하기도 했다. 1751년 웜자 지역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752년 왕실 재무 재판소의 일원이 되었으며, 세임의 웜자 지역 의원으로 발탁되었다.

1752년 초 으로 여행가서 친구 찰스와 만나 함께 네덜란드로 갔고, 8월 말에 파리를 방문해 여러 지식인들과 두루 교류했다. 특히 프랑스 지식인들이 모이는 살롱을 운영하던 마리 테레즈 로데 조프랭(Marie Thérèse Rodet Geoffrin, 1699 ~ 1777)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10] 그러다가 큰 빚을 지는 바람에 파리 감옥에 갇혔다가 부친의 친구들이 보증을 서준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1754년 2월 말에 영국으로 간 스타니스와프는 제1대 하드윅 백작이며 당시 영국 총리를 역임하고 있던 필립 요크의 아들 찰스 요크와 친분을 맺고 영국 각지를 여행하고 서신을 교환했다. 그는 영국의 정치, 문화, 문학에 깊은 애정을 드러냈으며,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프랑스의 어떤 연극보다 우수하다는 견해를 표명하기도 했다.

1755년 조국에 귀환한 그는 빌뉴스에서 열린 리투아니아 대공국 재판소의 재심에 참석해 오스트로그 오르디나차 영지의 불법 분할 문제로 왕실과 갈등을 빛고 있던 차르토리스키 가문을 옹호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사로 부임하게 된 찰스 헨버리 윌리엄스의 개인 비서로 발탁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그해 6월 러시아 제위 계승자 표트르 황자의 아내인 예카테리나와 처음 만났고, 이내 그녀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예카테리나는 이 시기부터 그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획득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해진다. 찰스 대사는 그가 예카테리나와 심상치 않은 관계를 맺었다는 걸 눈치채고 1756년 8월 그를 보호하기 위해 폴란드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총리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베스투제프에게 폴란드 왕실이 스타니스와프를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게 할 것을 요구하도록 강요했다.

결국 1757년, 스타니스와프는 특사 자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서 예카테리나와 불륜 관계를 이어갔다. 세간에서는 예카테리나가 1757년 12월 9일에 낳은 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버지는 스타니스와프라는 소문이 돌았고, 표트르 황자 역시 안나가 자신의 소생이 아닐 거라 의심했다. 1758년 7월 6일, 스타니스와프는 표트르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가 갈리치아 출신으로 러시아군 기병대 사령관으로 복무하던 프란시스제크 크사웨리 브라니키의 구명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한편 1756년과 1758년에 리보니아 지역 의회에서 세임에 대한 리보니아 특사로 선임되었지만 실제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1762년 8월 아버지가 사망한 후 400만 플로린에 달하는 유산을 물려받았다.

1762년 7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표트르 3세가 폐위되고 스타니스와프의 연인이었던 예카테리나 2세가 러시아 여제로 등극했다. 8월 2일, 여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서신을 보냈다.
현재의 왕(아우구스트 3세)이 죽은 직후에 당신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키설링 백작을 폴란드로 보내겠어요.

1762년 10월 5일, 스타니스와프는 세임의 미엘니크 지역 의원으로 발탁되어 차르토리스키 가문을 대신해 폴란드 귀족이 아닌 이를 불법적으로 세임에 앉힌 폴란드 왕실 사령관 알로이스 프리드리히 폰 브륄을 규탄했다. 아우구스트 3세의 비호를 받으며 실질적인 통치자로 활동하던 하인리히 폰 브륄은 아들이 공격당하자 격노해 세임을 해산시켰다. 1763년, 차르토리스키 가문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아우구스트 3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서 폐위시키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이 계획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입헌군주제로 전환시키고 영국 의회 방식을 도입하겠으며, 행정권은 왕과 20명의 인사로 구성된 추밀원이 이끌 거라고 설명했다. 또한 왕실 토지를 매각하며, 모든 공무원의 급여를 재무부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변환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2세가 그 해 8월 6일 아우구스트 3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정변을 일으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기에, 계획은 중단되었다.

2.2.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국왕 선출

1763년 10월 5일, 아우구스트 3세가 드레스덴에서 사망했다. 그 후 스타니스와프는 예카테리나 2세의 지원을 받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되기 위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10월 17일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타니스와프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옹립하는 걸 돕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폴란드 왕관의 모든 후보자 중에서 그것을 얻을 가능성이 가장 적소. (중략) 따라서 그는 왕관을 받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가장 감사할 것이오.

그 후 예카테리타 2세는 스타니스와프의 국왕 등극을 막기 위해 사병대를 동원한 폴란드 대귀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대왕의 양해를 얻어낸 뒤 연인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러시아군 7,000명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영내에 진입시켰다. 1764년 4월 20일, 스타니스와프는 러시아군을 투입한 것에 대해 예카테리나 2세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그해 5월 7일에 소집된 세임은 국왕 선거 절차를 시작했다. 투표일 며칠 전, 러시아 공사관은 스타니스와프가 피아스트의 후손이므로 외국인 후보들과는 달리 폴란드만을 조국으로 삼고 폴란드와 자신의 이익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어릴 때부터 정치를 익히고 법을 익힌 만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반포했다. 9월 7일, 투표장에 모인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러시아군의 압박에 못 이겨 스타니스와프를 왕으로 선출했다. 9월 13일, 스타니스와프는 귀족들이 누리는 특권을 인정하겠다고 맹세했다.

1764년 11월 25일, 그니에즈노 대주교이자 폴란드 추기경 브와디스와프 우비엔스키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스타니스와프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로 즉위시켰다. 이때 그는 폴란드 의상이 아닌 16세기 스페인식 의상을 입고 등장해 많은 이들을 경악시켰다. 한편 러시아 특사 니콜라이 레프닌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정교회 개신교 추종자들에게 가톨릭 신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대다수가 가톨릭을 신봉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심한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적절한 때가 오면 레프닌의 주장을 받아들일 뜻을 은밀히 알렸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자신의 선출을 알리기 위해 모든 유럽 국가들에 사절을 보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은 그를 러시아의 꼭두각시로 간주해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길 꺼렸다. 이에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공동으로 스타니스와프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공동 성명을 반포했고, 폴란드 왕실 대기수인 얀 클레멘스 브라니키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왕실을 잇따라 찾아가 여러 이권을 양보할 테니 스타니스와프를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기로 결의했다.

2.3. 1764년부터 1771년까지의 치세

스타니스와프 2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일주일에 2차례 비공개 회의를 소집했으며, 스타니스와프 루보미르스키, 야체크 바르트워미에이 오그로즈키, 아우구스트 알렉산드르 차르토리스키 및 자신의 형제들로 구성된 대리 정부를 통치 첫해에 설립했으며, 야체크 바르트워미에이 오그로즈키에게 외교 업무를 전담시켰다. 이렇게 정부를 구축해 자신이 품은 비전을 실천시키려 했지만, 예카테리나 2세 덕분에 왕이 될 수 있었던 만큼 러시아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정책을 추진할 여력이 없었고, 대귀족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각지를 사실상 나눠가지고 독자적인 행정, 사법권을 행사하고 강력한 사병대를 육성한 지 오래였기에, 그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은 애초부터 희박했다.

1765년 4월, 프로이센 왕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일반 관세를 도입한 것에 대해 자국의 상업적 이익에 해롭고 기존의 조약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보복 관세를 폴란드 상품에 부과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크비진에 대포를 갖춘 포대를 설치한 뒤 그곳을 경유하여 그단스크를 오가는 모든 물품에 10~15%에 달하는 높은 관세율을 부과했다. 스타니스와프는 이에 맞서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고, 예카테리나 2세는 양국간의 갈등을 중재한 끝에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일반 관세를 폐지하는 대가로 프로이센은 크비진 포대를 해체하고 보복 관세를 철폐하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감사를 표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 일로 중요한 재정 자원을 상실했다.

1765년 3월 15일, 스타니스와프 2세는 바르샤바에 있는 카지미에조프스키 궁전에 기사 학교를 설립했다. 이곳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군대의 미래 인력을 교육하는 엘리트 군사 학교였다. 그 자신이 이 시설의 생도 군단 수장이 되었으며, 유지 관리는 왕실 재산을 통해 이뤄졌다. 그는 본인의 개인 재산에서 150만 플로린을 기사 학교에 할당했으며, 유지 관리를 위해 왕실 재무부에서 20만 플로린, 세임 재무부에서 40만 플로린을 투입하게 했다. 연간 200명의 생도가 이 시설을 통해 군사학을 교육받았다. 또한 그는 모든 주 정부에 보니 오르디니스 위원회(boni ordinis Commissions: 좋은 질서 위원회)를 설립해 폴란드-리투아니아 각지의 도시의 역량을 키우고자 했다. 이 위원회는 도시 지역의 재산권을 조직하고 지방 정부로부터 불법적으로 압수된 재산을 회수하는 일을 다루었다. 또한 강력하고 부유한 지주의 관할 하에 세금과 인력을 원천 징수하는 사유지인 주리디카(Jurydyka) 상당수를 폐지했고, 도시세 징수를 개선해 도시가 새로운 자금을 확보하도록 했다.

한편, 스타니스와프 2세는 통화 개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765년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는 동안 폐쇄되었던 조폐국이 재개통했고, 1766년 2월 10일 재무장관 테오도르 베셀의 주도하에 새로운 즐로티 환율을 도입한 주화를 발행했다. 즐로티는 4개의 은 그로제 또는 30개의 구리 그로제로 나뉘었고, 탈러는 8즐로티와 같은 가치를 지녔으며, 두카트는 16.75 즐로티였다. 또한 모든 외국 동전은 유통에서 철회되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이와 더불어 그니에즈노 대주교 이그나시 크라시츠키, 아담 카지미에시 차르토리스키와 함께 최초의 폴란드어 잡지 <모니터(Monitor: 훈계)>를 1765년 3월 21일부터 발간했다. 이 잡지는 농민들의 삶과 종교적 관용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하려는 스타니스와프의 계획은 러시아의 지속적인 간섭으로 인해 곤경에 처했다. 1765년 9월, 러시아 대사 알렉세이 레프닌은 "여제의 의지에 무제한적으로 복종하겠다고 맹세했던 걸 증명하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내 정교회 신자들에게 가톨릭 신자와 동등한 권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스타니스와프가 시기상조라며 거절하자, 레프닌은 러시아군을 그로드노로 철수하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수많은 폴란드인이 러시아를 등에 업어 왕위에 오른 그를 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비호가 사라지는 순간 폐위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1766년 여름, 스타니스와프 2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특사 프란시스제크 르제우스키를 파견해 반체제 인사들의 명단을 예카테리나 2세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르제우스키의 비서인 피오트르 모리시 글레어는 스타니스와프 2세가 비밀리에 현금을 받기를 원한다고 전했고, 예카테리나 2세의 애인이자 조언자인 니키타 파닌은 폴란드 국왕에게 50,000 루블을 개인적으로 제공했다.

1766년 10월, 차르토리스키 가문은 개신교와 정교회 신자들이 가톨릭 신자와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해주자는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세임에 올려지는 모든 안건에 적용되던 리베룸 베토를 제한하고, 이번 사안은 다수결 원리에 따라 가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의원들을 회유하기 위해 니키타 파닌으로부터 받아낸 자금을 뇌물로 대거 제공했다. 그러나 크라쿠프 주교 카예탄 소티크와 아담 스타니스와프 크라신스키 등이 이끄는 반대 세력은 이는 폴란드의 정치적 전통을 뒤엎는 폭거라며 반발했고, 가톨릭 교회의 특권적 지위를 재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급기야 리투아니아 대원수 미하우 비엘호르스키가 현 사안에 대해 리베룸 베토를 선고하자는 신청서를 제출하고, 러시아 특사 알렉세이 레프닌과 프로이센 특사 게데온 드 베누아가 리베룸 베토를 제한하고 다수결 원칙을 도입하는 개혁안이 통과되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자, 차르토리스키 가문은 결국 의견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 상황에 큰 충격을 받고, 대관식 기념일에 축하를 받을 수 없을 정도로 한동안 병마에 시달렸다.

1766년 12월 3일,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서신을 보내 현 상황에서 정교회 신자들이 동등한 대우를 받게 하는 건 불가능하며, 폴란드에 러시아군이 계속 주둔했다간 민심이 폭발할 우려가 있으니 철수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2세는 오히려 정교회 신자들을 지켜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4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군을 폴란드에 진주시켰다. 1767년 3월 20일, 러시아 대사 니콜라이 레프닌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 정교회 및 칼뱅파 귀족들을 집결시켜 슬루츠크 연맹을 결성하게 했고, 토룬에서도 개신교를 신봉하는 폴란드 귀족들이 집결한 토룬 연맹을 결성하게 했다.

러시아가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벌이자, 가톨릭을 신봉하는 폴란드 귀족 74,000명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 1767년 6월 라돔에서 연맹을 결성했다. 연맹의 원수는 카롤 스타니스와프 라지비우가 맡았고, 러시아의 폴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축소하고 싶어했던 프로이센의 지원을 받았다. 이에 레프닌은 스타니스와프 2세에게 예카테리나 2세의 의사에 따르지 않는다면 저들이 그를 폐위시키는 걸 막지 않을 거라고 위협했다. 결국 스타니스와프 2세는 레프닌의 압력에 굴복하여 정교회를 비롯한 반 체제 인사들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러시아와의 보증 조약 체결을 승인하며, 귀족들의 자유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라돔 연맹 역시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하여 예카테리나 2세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안위를 보장해달라는 요청을 한 후 해산되었다. 이후 스타니스와프 2세는 위태로운 왕위를 보장받기 위해 정부가 담배 판매를 독점하는 등 재정 정책에서도 러시아 특사의 동의를 받은 뒤에야 시행하는 등, 러시아 특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1767년 10월, 바르샤바에서 알렉세이 레프닌의 요구에 따라 세임이 소집되었다. 레프닌은 세임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에 러시아가 폴란드의 국내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규탄한 키이우 주교 유제프 안제이 잘루스키, 크라쿠프 주교 카예탄 이그나치 솔티크, 그리고 야전 원수 바츠와프 피오트르 르제우스키와 바츠와프의 아들 소웨린 르제우스키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들 4명은 러시아군에 체포된 뒤 칼루가로 끌려가 5년간 억류되었다. 이후 바르샤바에 10,000명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주둔하면서 세임에 참석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을 위협했으며, 레프닌은 막대한 뇌물을 여러 인사들에게 나눠주며 회유했다.

그 결과, 바르샤바 세임은 1768년 2월 27일에 레프닌이 제시한 법안을 '기본법'으로서 통과시켰다. 이에 따르면, 스타니스와프 2세가 1764년에 시행한 개혁 중 일부를 취소했고, 리베룸 베토, 폴란드 왕실 선거, 세임의 판결 없이 귀족을 체포할 수 없는 권리, 귀족들이 임의로 연맹을 결성할 권리 등은 어떠한 경우에도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보장되었다. 또한 정교회, 개신교 등 소수 종교인들에게 가톨릭 신자들과 동일한 지위와 권리가 인정되었고, 가톨릭 성직자들의 일부 특권은 제한되었으며, 농민 살해에 대한 형벌은 벌금에서 사형으로 강화되었고, 지방 의회에서의 리베룸 베토는 폐지되었다.

러시아의 강압으로 이같은 법안이 통과되자, 폴란드 귀족들은 이에 격분해 1768년 2월 29일 바르 연맹을 조직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독립과 가톨릭 신앙 수호를 위해 전쟁을 개시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1768년 3월 24일 상원 평의회에서 통과된 바르 연맹을 진압하기 위해 러시아군을 소집하는 결의안에 서명했다. 그해 10월,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1699년 1월 26일에 자국과 맺은 카를로비츠 조약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레프닌은 스타니스와프 2세에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가담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세임의 동의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으며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를 심화시킬 뿐이라고 변명하며 거절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군주 마리아 테레지아는 바르 연합의 반란으로 폴란드 전역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헝가리 왕국의 세페시(Szepes)주에 있던 폴란드의 월경지를 현지의 혼란을 수습해주겠다는 구실을 대며 합병했다.

1770년 1월 23일, 도브라 전투에서 패배한 뒤 생포된 500명 가량의 반란군이 옷과 신발이 벗겨진 채 바르샤바로 끌려가 스타니스와프 2세 앞에 무릎을 꿇리는 굴욕을 겪었다. 그해 2월 2일과 2월 17일, 포즈난 주교 안제이 스타니스와프 므워지예요프스키는 왕의 선하고 거룩한 의도를 감히 의심하고 바르 연합과 의견을 공유하는 자들은 종교와 조국에 대한 반역자라고 규탄하는 목회 서한을 발행했다. 하지만 반란군의 기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반란군 주도자들은 10월 13일 프레쇼프에서 스타니스와프 2세의 폐위를 선포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1771년 초, 마조프셰 주지사 파웰 미하우 모스토프스키는 헤센카셀의 백작 프리드리히 2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월 16일, 스타니스와프 2세는 폴란드 주둔 러시아군 사령관 이반 이바노비치 바이마른에게 반란군 진압을 전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반 장군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반란의 조기 진압은 요원해졌다.

1771년 10월, 반란군 지도자 미하우 얀 파크는 기병대 지휘관 카지미에시 푸와스키 대령에게 스타니스와프 2세를 납치하여 야스나고라 요새로 이송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해 11월 3일 늦은 저녁, 바르샤바의 미오도와 거리에서 마차를 타고 돌아오던 스타니스와프 2세는 카지미에시 푸와스키가 이끄는 기병대의 습격을 받아 머리에 부상을 입고 도주했다가 도시 제방 밖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바르샤바 근교 메리몬트 마을로 끌려갔다가 납치 작전에 참여했던 병사 쿠즈만이 마음을 돌이켜 프로이센 출신으로 스타니스와프 2세에게 인정받아 소장으로 진급하고 폴란드 귀족이 봉해졌던 카를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드 코체지에게 넘겼다. 코체지는 스타니스와프를 바르샤바 성채로 모셔와서 푸와스키 일행이 그의 납치를 다시 시도하지 못하게 했다.

2.4. 1차 폴란드 분할(1771년 ~ 1774년)

1771년 중반, 바르 연합의 대대적인 봉기에 직면한 러시아 정부는 폴란드를 보호령으로 남겨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등 여러 러시아 장성을 앞세워 대대적인 진압에 착수했다. 이때 예카테리나 2세는 프로이센이 반발할 것을 예상하고 주러시아 프로이센 대사이자 프리드리히 대왕의 동생인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공에게 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 일부를 합병할 것을 제안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동생으로부터 예카테리나 2세의 제안을 전해듣고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이 폴란드 영토를 분할하는 안건을 제시했다. 이후 삼국간의 협상 끝에, 1772년 2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스타니스와프 2세 납치 미수 사건을 빌미로 삼아 삼국이 반란 진압을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군대를 투입시킨 뒤 폴란드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1772년 8월 5일, 3국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식으로 폴란드 분할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러시아 제국군, 프로이센 왕국군, 오스트리아군이 동시에 폴란드-리투아니아로 군대를 파견해 빈 협정에서 정한 대로 여러 도시와 마을, 요새 등에 자국의 깃발을 꽂고 반란군을 진압했다. 9월 18일, 3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분할 사실을 통보하고 이를 승인하기 위해 세임을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1773년 4월, 아담 포닌스키가 이끄는 친 러시아파 연맹이 설립되어 폴란드 분할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이후 러시아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했고, 의원들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아먹고 폴란드 분할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돌아섰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의 다른 열강들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1773년 9월 22일, 세임은 폴란드 1차 분할안을 통과시켰다. 타데우시 레이탄을 비롯한 소수의 반대파 의원들이 격렬하게 저항했고, 스타니스와프 2세도 차마 추인하지 못하고 주저했지만, 러시아 대사 오토 마그누스 폰 스타켈베르크가 "끝까지 추인하지 않는다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완전히 파멸시키겠다"라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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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폴란드 분할.

프로이센은 1차 폴란드 분할에서 왕령 프로이센의 대부분과 그단스크 토룬을 제외한 노테츠 강 유역의 대폴란드 북부와 쿠야비 북부 일대를 확보했다. 오스트리아는 차토르와 아우슈비츠,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를 제외한 소폴란드 일부, 갈리치아 전역, 그리고 비엘리츠카 소금 광산을 확보했다. 러시아는 드비나 강, 드루트 강, 드네프르 강을 따라 그어진 경계선 동쪽의 전역과 라트갈레, 벨라루스 북동부 지역을 차지했다. 이리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전 영토의 약 30%에 해당하는 21만여 제곱 킬로미터와 전 인구의 1/3에 달하는 453만여 명을 상실했다.

이후 1773년에서 1774년까지 이어진 추가 세임에서, 러시아 대사 오토 마그누스 폰 스타켈베르크의 주도하에 여러 조치가 내려졌다. 러시아에 새로 편입된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에 있던 예수회 조직이 해산되었고, 국왕은 직위를 부여하거나 군사 진급을 부여하거나 장관과 상원의원을 임명할 권한을 상실했으며, 왕실 직할지는 경매를 통해 분할되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정부 기관인 상임위원회와 국가 교육 위원회가 창설되었는데, 두 기구 모두 복잡하고 무질서한 세임을 대신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통제하려는 러시아 당국의 의도로 세워졌다. 그는 이 일련의 상황에 절망해 한때 퇴위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왕위를 유지하며 만회할 기회를 모색하기로 마음먹었다.

2.5. 1775년부터 1788년까지의 치세

1775년, 예카테리나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존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바르샤바 주재 러시아 대사 오토 마그누스 폰 스타겔베르크를 공식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의 고문으로 인정하게 했다. 이후 스타겔베르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스타니스와프 2세의 모든 결정은 사전에 스타겔베르크와 상의하고 승인을 받아야 했으며, 공직 분배 역시 스타겔베르크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격분한 차르토리스키 가문, 포토츠키 가문, 리투아니아 원수 소웨린 르제우스키와 미하우 카지미에시 오기스키 등이 상설 위원회를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러시아군의 강압에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스타겔베르크와 함께 1776년 세임에서 의원 수를 제한하기로 하고, 3국에 분할된 영역에서 의원을 선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왕실파는 이해 선거에서 치열한 경쟁 끝에 지방 의회에 파견된 러시아군의 도움 덕분에 승리했다. 치에하누프에서는 러시아군이 집단 항의하는 귀족들을 향해 발포해 여러 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후 세임은 장관에 대한 상임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군사위원회를 폐지하고, 원수의 권한을 제한했으며, 군대에 대한 권한을 상임위원회의 군사부에 부여했으며,국가교육위원회에 교육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부여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이 세임에서 자신을 폴란드의 애국자이자 예카테리나 2세의 친구라고 선언했다. 이후 국왕의 군사 총리실이 창설되었고, 군사 계급을 수여할 권리를 돌려받으면서, 스타니스와프 2세의 권력과 지위는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1780년, 러시아 점령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러시아 대사 스타겔베르크의 영향력이 지대했기 때문에, 스타니스와프 2세는 세임에 자신의 지지자들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소금 매장지 탐사를 위한 기금 마련, 장교 연금 마련 등과 같은 사소한 변화조차 마음대로 도입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예술 후원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매주 목요일 저녁 만찬을 열어 폴란드-리투아니아 과학자, 작가 및 시인을 초대했으며, 이탈리아 화가 마르첼로 바키아렐리에게 왕실 미술 작품 관리를 맡겼다. 그가 수집한 회화는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의 작품 13점을 포함한 2,289점에 달하며, 대리석 176점을 비롯한 조각품 700점도 수집되었다. 여기에 폴란드 건축가 도미니크 멀리니는 바르샤바 성 옆에 새로운 왕실 도서관을 1779년부터 1783년까지 건축했다. 이 도서관에는 15,000~20,000점으로 추산되는 서적이 보관되었다.

1787년 5월 6일 드네프르강에 정박한 갤리선 카니우프에서, 스타니스와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와 회담을 갖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중이던 예카테리나 2세와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을 상대하는 데 45,000명에 달하는 폴란드군을 투입시킬 테니, 그 대가로 베사라비아와 흑해 항구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카테리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러시아-폴란드 동맹이 체결되는 것에는 관심을 보였다. 1788년 9월, 폴란드인들이 스웨덴과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그는 반 투르크 감정을 선동하고자 바르샤바에 얀 3세 소비에스키 기념비를 건설했다.

1788년 10월 6일,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동의를 얻어 바르샤바에서 세임을 소집했다. 그는 스타겔베르크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러시아 동맹의 초안을 제출했고, 이를 통해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자신이 왕국을 독자적으로 이끄는 것을 허락받길 희망했다. 그러나 10월 13일, 프로이센 특사 루트비히 하인리히 부흐홀츠의 폴란드-러시아 동맹을 반대하는 선언문이 세임 회의에서 낭독되었다. 부흐홀츠는 이 선언문에서, 스타니스와프 2세가 제안한 동맹안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며, 그 대신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독립을 보장하고, 국가 내부 개혁에 대한 러시아의 공식적인 동의를 표명하는 선에서 동맹이 체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2.6. 4년 세임과 5월 3일 헌법(1789년 ~ 1791년)

세임 의원들은 프로이센 대사의 선언문에 몹시 흥분하며, 프로이센의 지원을 받고 자국에 대한 러시아의 통치 수단을 청산하기로 결의했다. 러시아 대사 스타겔베르크가 예카테리나 2세가 보장한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은 여제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존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깨뜨리는 처사가 될 거라고 위협했고, 스타니스와프 2세가 러시아와 결별하면 파국이 닥칠 거라고 경고했지만, 의원들은 이를 묵살하고 밀어붙였다. 1789년 1월 19일, 세임은 상임위원회를 폐지했다. 이로 인해 스타니스와프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행정권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상실했다. 뒤이어 국왕의 장교 임명권과 외교 관리권을 박탈했고, 세임이 이를 선출하고 책임을 지기로 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군사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을 압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예카테리나 2세가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이는 걸 꺼렸기에 무산되었다. 그는 폴란드-프로이센 동맹의 체결을 방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세임은 그에게 프로이센과의 무역 조약을 체결하는 데 동의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결국 그는 다수의 의견에 동의하고 동맹의 체결을 지지했다. 그 결과 1790년 3월, 러시아에 대항하는 폴란드-프로이센 동맹이 체결되었다. 이후 그는 입장을 완전히 바꿔 애국당 진영과 화해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헌법에 대한 공동 작업을 실시했다. 그 해 9월 13일, 세임은 자신들에게 협조하기로 한 왕에게 보답하고자 국왕이 직위를 부여할 권리를 돌려주기로 결의했다.

1791년 5월 3일, 세임은 1년 2개월간의 논의 끝에 새로운 헌법, 일명 '5월 3일 헌법'을 채택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헌법 조항에 따라 권리 수호대의 수장이 되었고, 폴란드 외교와 국가의 외교 정책을 주도할 뿐만 아니라 행정 당국의 활동을 통제하게 되었다. 또한 세임은 소작농의 권리 향상, 리베룸 베토 폐지, 귀족들의 연맹 결성 금지, 종교적 관용 보장, 귀족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에게도 참정권 확장, 삼권분립 원칙 확립, 국왕 세습권 확립 등, 당시로서는 실로 혁신적인 내용을 담았다. 세임 참석자들은 이 급격한 개혁을 통해 국가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수호하고 시대에 뒤쳐진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1792년 5월 14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일부 대귀족들이 5월 3일 헌법에 반발해 타르고비차 연합을 결성하여 러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예카테리나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국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폴란드 대사 안토니 아우구스틴 데볼리가 러시아군이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예카테리나 2세를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 여겨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다.

2.7. 러시아의 침략과 2차 폴란드 분할(1792년 ~ 1794년)

1792년 5월 18일, 10만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진격했다. 4년째 개최되고 있던 세임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스타니스와프 2세에게 군대의 최고 지휘권을 위임했으며, 군자금으로 200만 폴란드 즐로티를 책정했다.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리투아니아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러시아군에 항복했지만, 폴란드군은 스타니스와프 2세의 조카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등의 탁월한 지휘에 힘입어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이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그해 6월 22일에 압도적인 적군을 상대로 분투하는 폴란드군을 독려하고자 폴란드 최고 훈장인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을 제정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여러 번의 패전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밀어붙인 데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던 프로이센이 정작 군대를 보내주지 않으면서, 상황은 점점 암울해졌다. 급기야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러시아에 폴란드를 추가 분할하는 대가로 폴란드와의 동맹을 끊겠다고 제안했고 러시아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졌다. 결국 스타니스와프 2세는 1792년 7월 23일 권리 수호대 인사들의 의견에 따라 저항을 포기하고 타르고비차 연합에 가입하기로 했다. 이보다 전, 예카테리나 2세는 그에게 타르고비차 연합에 가입하라는 제안이 담긴 서신을 보내면서, "무장 저항을 계속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지불해줬던 약 3천만 플로린에 달하는 돈을 도로 상환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학자들은 그가 타르고비차 연합에 가입하기로 한 것엔 이것이 큰 이유를 차지했으리라 추정한다.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는 왕이 타르고비차 연합에 가입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앞서 그가 자신에게 줬던 흰 독수리 훈장과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을 돌려보냈다.

스타니스와프 2세의 이같은 결정은 격렬한 반발에 부딪쳤다. 1792년 7월 24일과 25일 작센 정원에서는 부르주아들과 귀족들이 "왕 없이도 헌법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7월 25일 세임 원수 스타니스와프 마와코프스키와 카지미에르츠 네스토르 사피에하는 바르샤바 왕궁의 토지 기록에서 타르고비차 연방을 폴란드 공화국의 법적 권위로 인정한 것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에 스타니스와프 2세는 자칫했다간 폐위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졌고, 러시아 장군 미하일 카코프스키, 미하일 크레체트니코프에게 서신을 보내 가능한 한 빨리 바르샤바를 점령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8월 1일엔 러시아군과 타르고비차 연합의 진입에 대한 바르샤바 수비대의 저항이 두려워서 유스타키 에라즘 산구슈코에게 바르샤바 무기고에 모든 중무기를 가두라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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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폴란드 분할.

그 후 대폴란드 일대는 프로이센군이 진주했고, 바르샤바는 러시아군이 점거했다. 러시아 특사 야쿠브 지베르스는 분할 조약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그로드노 세임을 소집시켰다. 세임은 폴란드의 영토를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양도하는 것을 받아들였고, 폴란드의 군인 숫자에 하한선을 설정했으며, 3,300만 폴란드 즐로티로 추산되는 왕실 부채를 분할 납부하기로 했다. 1793년 11월 23일, 바르샤바 세임은 5월 3일 헌법을 포함한 모든 개혁을 파기하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에게 영토를 추가로 할양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러시아는 키이우, 브로츠와프, 포돌레, 민스크 전체와 빌뉴스, 노보그로덱, 브제시치리테프스키, 볼린 일부를 얻었다. 프로이센은 1차 분할 때 얻지 못했던 그단스크 토룬을 얻었고, 그니에즈노, 포즈난, 시에라즈, 칼리시, 프워크, 브제시치 쿠야프스키, 이노브로츠와프, 도브진 전체와 크라쿠프, 라바, 미조프셰 일부를 얻었다. 이리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는 30만 7천 제곱km의 영토와 500만이 넘는 인구를 상실했다.

1794년 1월 7일,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압력을 받고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 착용을 금지하고 훈장 소지자들에게 세임에 반환하도록 명령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가장 불행한 폴란드가 어떤 종류의 독립적인 감정으로 잠시라도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면서, "위대한 예카테리나의 보호를 받고자 사절단을 보낼 것"이라고 선언했다.

2.8. 코시치우슈코 봉기(1794년 ~ 1795년)

1794년 3월 12일, 미국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1792년 두비엔카 전투에서도 활약했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크라쿠프 광장에 나타나 외적의 침략에 맞서 폴란드를 구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키겠다고 선언했다.
"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는 나에게 맡겨진 권한을 개인적으로 억압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오직 모든 국경을 수호하고 왕국의 독립을 회복하며 보편적인 자유를 공고히 하는 데 사용할 것임을 전 폴란드 백성에게 하느님 앞에서 맹세합니다. 주 하느님, 무고한 고통을 받는 당신의 아들을 도와주소서!"

스타니스와프 2세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4월 2일에 상임위원회 법무부가 준비한 봉기 진압령에 서명하면서, 프랑스 혁명을 비난하고 국민에게 회개를 촉구했으며, 프랑스의 도움에 대한 믿음을 허망한 것으로 일축했다. 그러나 폴란드 전역에서 코시치우슈코에 호응하는 봉기가 일어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고, 급기야 1794년 4월 17~19일 바르샤바 봉기로 인해 바르샤바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점령되었을 때 스타니스와프 2세의 측근들이 러시아로부터 고정된 급여를 받았음을 증명하는 문서가 발견되면서, 그의 입지는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는 곧 반란군에 체포된 뒤 바르샤바 성에 감금되었고, 코시치우슈코는 왕이 봉기 당국에 합류할 수 없다고 결의하고 왕의 조폐국을 폐지하고 동전에서 왕의 이미지를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코시치우슈코에게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뒤 겨우 풀려났다. 그 후 1794년 5월 8일에 요새 공사를 점검하기 위해 바르샤바 근교 프라가로 갔다. 그러나 바르샤바에서 왕이 수도를 버리고 러시아와 프로이센군이 도시에 접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그는 경고를 받고 바르샤바 성으로 돌아왔지만, 들어가기 전에 성난 군중을 만났다. 몇몇 군중이 그를 향해 외쳤다.
"왕이여, 만수무강하되 도망치지 마소서!"

뒤이어 더 많은 이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배신자를 죽게 놔두어라!"

이후 누군가가 그를 향해 발포했지만 맞추지는 않았고, 스타니스와프 2세는 가까스로 바르샤바 성에 들어갔다. 이후 바르샤바 시민으로 구성된 근위병들이 그 주변에 배정되었고, 타르고비차 연합에 가담했던 인사들에게 대한 집단 처형이 5월 9일에 시행되었다. 그는 이후로 수개월간 감금되어 있다가 1794년 11월 4일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프라가를 공략하고 폴란드군 9천 명과 민간인 2만여 명을 학살하면서 코시치우슈코 봉기가 막을 내린 뒤 수보로프에게 귀순했다. 1794년 12월 1일 반란 주동자들이 과거에 재학했던 기사 학교를 폐쇄한 그는 1795년 1월 7일 러시아군의 호위를 받으며 바르샤바를 떠났고, 1월 12일에 그로드노에 도착했다.

2.9. 3차 폴란드 분할과 사망(1795년 ~ 17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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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폴란드 분할.

코시치우슈코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뒤, 반란을 주도하는 데 기여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아직까지 남아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를 최종적으로 분할했다. 러시아는 쿠를란트와 메멜 강 동부의 리투아니아 영토를 얻었고, 프로이센은 바르샤바를 포함한 바조프셰 전역과 메멜 강 서부의 리투아니아 영토를 얻었으며, 오스트리아는 크라쿠프와 소폴란드 전역을 합병했다. 이리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퇴위를 요구받은 스타니스와프 2세는 그가 대관식을 거행한 지 31주년이 되는 1795년 11월 25일에 퇴위 선언서에 서명했고, 그로드노에 연금된 채 조용히 지냈다.

1796년 11월 17일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한 후 제위에 오른 파벨 1세는 그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초대했다. 1797년 3월 10일에 도착한 스타니스와프 2세는 여름에는 카미에나 섬의 카멘노스트로프스키 궁전에서 살았고, 겨울에는 대리석 궁전에 거주했다. 그는 자신의 거주지에서 러시아 귀족, 궁정 고위 인사, 외교단 대표 및 폴란드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러다가 1798년 2월 1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갑작스러운 뇌졸중에 걸려 사망했고, 성 예카테리나 성당에 안장되었다.

3. 사후

1938년, 소련 레닌그라드 당국은 예카테리나 성당을 청산하기로 결정하고 스타니스와프 2세의 유해와 휘장이 담긴 관과 항아리 2개를 폴란드로 보냈다. 그해 7월, 그의 유해는 고향 보우친의 천주 성삼 성당에 이장되었다. 그러나 1939년 9월 나치 독일군과 함께 폴란드를 침략한 소련군은 보우친에 진입해 약탈을 자행하면서 그의 무덤을 약탈하고 석관을 파괴했다. 이후 수십년간 방치되던 그의 무덤은 1987년 그로드노 박물관의 보존 담당관들이 폐허를 청소하면서부터 세간의 관심을 다시 받게 되었고, 1988년 스타니스와프 2세의 유골 조각과 예복이 예카테리나 성당에서 수집된 뒤 다시 폴란드로 옮겨졌다. 1995년 2월 14일, 보우친 예배당에서 가져온 그의 유해가 바르샤바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4. 가족 관계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예카테리나 2세와 오랫동안 불륜 관계였고, 예카테리나 2세가 정변을 통해 보위에 올랐을 때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2세는 그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을 통보했고, 그는 오스트리아 대공비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엘리자베트와 혼사를 논의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뒤이어 개신교 신자인 스웨덴의 소피아 알베르티나 공주와 결혼 협상을 벌였지만, 누이인 루드비카 마리아 포니아토프스키와 이자벨라 포니아토프스카의 반대로 실패했다. 결국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못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폴란드 귀족 테오도르 시드워프스키의 딸이며 1789년 남편과 사별한 엘지비에타 크자토리스카와 비밀리에 결혼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스타니스와프 2세가 사망한 후에야 퍼진 데다 엘지비에타 본인에 의해 유포되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학자들은 사실이 아닐 거라고 본다.


[1] 다만 일부 역사가들은 스타니스와프 2세가 엘지비에타 크자토리스카와 결혼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2] 자녀의 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포니아토프스키의 장녀는 생물학적으로는 포니아토프스키와 예카테리나 2세 사이에서 나왔지만, 법적으로는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 사이에서 나온 딸이고, 포니아토프스키의 장남과 4남은 포니아토프스키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으며, 사실 포니아토프스키의 자녀는 5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3] 1721 ~ 1800, 폴란드 왕실 시종관 역임 [4] 1734 ~ 1773, 7년 전쟁 시기 오스트리아군 포병대 지휘관으로 목무함 [5] 1736 ~ 1794, 폴란드 추기경 역임 [6] 1725 ~ 1744, 프랑스 왕국군 장교로 복무하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도중 전사함. [7] 1723 ~ 1749, 크라쿠프 대성당 본당 신부 [8] 1728 ~ 1804, 포돌리아 주지사 얀 야쿠브 자모이스키의 아내 [9] 1730 ~ 1808, 폴란드-리투아니아 대원수 얀 클레멘스 브라니키의 아내 [10] 일설에 따르면, 그는 마리 테레즈를 '엄마'라고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