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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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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2. 군사3. 인재 기용4. 음흉한 인물이라는 의혹
4.1. 반론4.2. 결론
5. 정략6. 성격7. 무력8. 조조의 숙적9. 인덕과 매력10. 당대와 후대의 평가
10.1. 당대10.2. 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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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임금과 신하의 관계)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무제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진수

진수가 "임기응변과 재략이 조조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평한 것을 보면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조조보다 아래라 보는 듯하나, 그의 입장에서 유비는 망국의 군주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전근대의 역사서는 그 사료가 만들어진 국가 왕실의 정통성을 위해 정통성이 이어져있는 군주들은 미화하고, 그렇지 않은 군주들은 반역자로 폄하하는게 일반적이다.[1] 삼국지는 진나라에서 저술되었고 당시 진나라의 공식 입장은 "후한의 헌제가 조조의 공을 인정해 그 아들인 조비에게 국체를 선양했고, 그 조위가 진나라 사마씨에게 선양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비는 진나라의 그 정통성 계보와는 무관하게 제멋대로 칭제한 반역자에 불과하다.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면 유비를 훨씬 더 폄하하는게 진수의 신변에 안전한 서술일터인데, 그러지 않고 유비가 나름의 정통성과 인덕도 있고, 조조에 비견될만한 능력까지 있었던 영웅이었다고 서술한건 정치적 부담을 감내하고 매우 소신있게 고평가한 것이다.

또한 군사적 재능이라는 측면에서 조조와 비견할만 한 인물은 당대에 없었기에 조조보다 군사적 능력이 못 했다는건 딱히 비하하는 것도 아니다. 후에 유송을 건국한 인간흉기, 항우의 재림 급인 유유가 역사에 등장하기까지 약 2백여 년의 세월 동안 조조의 군사적 재능을 확실하게 능가한다는 평을 받은 인물은 없었다. 반동탁 연합이 끝난 직후에는 변변한 영지조차 없었던 떠돌이 신세에서 20년 만에 중국통일 직전까지 일궈낸 조조의 군사적 역량이 매우 뛰어났단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 즉 초세지걸이라 불리며 당대에 최고로 칭송받던 조조와 비교 대상으로 서술된 것만으로도 유비도 매우 대단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한고조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을지를 고려해보면 답이 나온다. 사실상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2] 한나라의 건국자 한고조 중국인들에게, 특히 한나라가 멸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후속 왕조들이 모두 한나라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천명하던 당시의 중국인들에게는 타고난 임금의 표본이자 나라의 시조와 같이 존경받는 존재였다.[3] 진수는 적국의 군주인 유비를 매우 높게 평가한 것으로, 군주의 그릇과 풍도를 평할 때 유비를 가장 전설적인 군주 한고조와 견줄 정도로 그 역량을 동시대 인물들 중 최고로 친 셈이다.[4]

유비劉備:인의와 간흉의 간극에 선 입지立志의 지도자[5]
조조가 유명한 학자인 배잠[6]에게 형주에서 유비와 함께 지냈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재주를 평가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배잠이 말했다.
그를 중원에 있게 하면 사람들을 소란스럽게는 할 수 있겠지만 다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틈을 타서 변방의 요충지를 지킨다면 한 쪽의 군주는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정사 삼국지 배잠전, 세설신어 <식감中>

이 말을 "유비 그 인간은 지방 군주감 정도밖에 안 돼요"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으나 조조 앞에서 "유비님 능력은 너님보다 대단함"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굳이 변방 군주로 충분하다고 한 것은, 변방은 군웅할거 이후의 난리 때문에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적었고 유표는 너무 늙은데다 아들인 유기, 유종, 유장은 그릇이 작으니 오너 기질이 다분하며 이래저래 굴러다니느라 잔뼈가 굵은 유비가 변방에서 자리를 얻으면 그곳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후일 오나라의 신하 화핵이 술회하기로 "촉나라는 토지가 험하고 견고하며 유비의 통치 방법을 이었으므로 그들의 수비는 오랜 시간을 지탱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하루 아침에 전복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라고 했을 정도다.

이광지(李光地)는 '유비는 익주를 얻고 자신을 반대하거나 원망했던 자들도 기꺼이 등용해 인재들의 기량과 재능을 다하게 했다. 이에 뜻이 있는 선비는 서로 다퉈 권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써 익주의 백성은 매우 화목해졌다' 는 자치통감의 문장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런) 규범(規範)이 어찌 한고제(高帝), 광무제(光武帝)보다 못하랴.

2. 군사

유비는 촉을 정복하기 이전까지 대다수의 시간동안 유랑하는 전사 집단의 우두머리였으며, 이러한 특성상 그가 참여한 교전 상당수는 소규모의 국지전이었다.

이렇게 정치적 혼란기에 자신을 따르는 전사 집단을 이끌며 군공을 세워 입지전적하려는 인물들, 거칠고 기회주의적인 우두머리 전사는 유비 외에도 드물지 않았으며, 군사적 능력에서 두각을 보인 인물로서는 손견, 공손찬, 여포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유비는 최초로 군공을 세워 받은 직위가 현령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앞선 성공담에 걸맞는 특출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케이스는 아니었다.

이렇듯 '특별하지 않던' 유비가 최초로 군사적인 특별함을 손에 넣은 시점은 자신의 동향이자 학연인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공손찬의 병력을 넘겨받은 이후로서, 당시 공손찬의 병력이 중국에서 서량주의 기병과 쌍벽을 이루는 하북 기병대(돌기)를 핵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유비는 이렇게 주어진 고급 군사력을 통해 초기 대 조조전에서 소기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준 것으로 추정되나, 전해의 부장격 지위였음을 감안하면 그 규모는 크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이 과정에서도 유비 본인의 군사적 재능보다 별부사마인 관우, 장비가 만인지적으로 부각되는 모습을 볼 때, 초기의 군사적 성취에서도 본인의 지휘력이 아니라 관우, 장비의 개인 무용과 기병에의 의존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정치적 고려를 거쳐 서주를 양도받은 뒤에는 조조에게 군사적으로 시종일관 압도당했던 원술군과 일진일퇴를 반복하였으며,[7] 특별히 군사적으로 유/무능을 논할만한 특징적인 전과는 나타나지 않고, 이는 조조군의 일부 분견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가 조조의 깃발을 보고 달아난 관도대전 때까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분명히 무능하지는 않았으나, 반면 군사적 유불리를 뒤엎을 정도로 유능하지도 않았으며, 일개 군세 단위를 넘어, 대규모 군사 작전을 지휘할 능력은 전혀 검증되지 않은 상태였다.

유비가 처음으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주도적으로 지휘하게 된 것은 이후로도 꽤 시간이 지난 후, 입촉에서 유비는 특히나 내부 호응자인 법정, 이엄의 도움 하에 나쁘지 않은 지휘력을 보여주었다. 뒤이은 한중공방전에서는 법정 황권의 계책 하에, 이 사건 전후로 촉에서 보기 드문 과감한 돌격을 시행해(돌격을 맡은 장수는 황충) 조조군의 서방 경계 책임자인 하후연을 잡아내었다. 뒤이은 조조 본대의 공격에도 유비는 자연경계인 한중 분지 남부의 구릉지대에 의존하여, 군사적으로 우월하지만 보급으로 인한 공세종말점 문제가 닥친 조조군을 상대로 지구전을 강요하여 판정승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촉을 보전하는데 기여한 한중방어작계를 구상, 실행하였다.[8]

그러나 이후 법정이 죽고, 관우의 사후 벌어진 이릉대전에서는 조비에게 비웃음을 받을 정도의 무리한 장사진을 펼쳐 군대의 분산을 초래하였고, 현지보급이 불가능한 남군 일대를 상대로 수백 km의 보급선을 유지하며, 황권의 건의를 무시하고 총지휘관인 자신이 본대를 이끌고 전선 바로 근처인 효정에 주둔하는 등 많은 상식 외의 실수를 저질렀으며, 그 결과로 패퇴하여 유비 사후 촉에 큰 부담을 안겼다.

이상을 보면 알 수 있듯, 유비의 군사 커리어에서 고점은 참모인 법정과 함께 하였을 무렵이다. 괜찮은 참모진이 있을 때에 유비는 참모진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휘에 반영하는 좋은 지휘관의 자질을 보였으나, 그 자신의 능력은 평이하고 무난한 편이며, 최후엔 감정에 휩싸여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고 1년간 이를 유지하는 나쁜 지휘관의 모습을 보이는 등, 유비 군사적 실질은 무난함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참모의 조언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엄연한 지휘관의 덕목이며, 당대 최고의 지휘관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조조 또한 전쟁에서는 항상 순욱, 순유, 가후 등의 참모들과 동행했고 그들의 조언을 받았다.

유비의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특기할만한 그 자신의 능력은 생존력이다. 이 시대의 많은 지휘관들은 실패한 후에 결코 이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망한데 반해, 유비는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측근들의 목숨을 부지하는데 대체로 성공하여 다시 기회를 얻고는 했다. 이것은 이 시대의 다른 인물에게서 쉽게 관측할 수 없는, 유비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이다.

3. 인재 기용

유비의 세력 내부 정치는 촉 정복 이전까지 크게 부각되지 않으며, 특히 지나친 측근인사 의존도는 그의 인생에서 두드러지는 한계이다. 유비는 호족층과는 괴리된 유랑 군세의 우두머리였기에 인재 수급이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이로 인해 통치에 적합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휘하 전사인 관우, 장비에게 자주 높은 지위를 허용했다. 서주 장비에게 맡겼다가 조표와의 불화로 인해 허무하게 본거지를 잃은 사건과, 관우 미방을 형주에 배치했다가 형주를 잃은 사건 등은 그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전사집단의 우두머리라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성공하고 호족-사족에서 본격적인 지지자를 얻게 된 시점은 형주의 유표 휘하에서 머무르던 무렵이며, 여기에 조조의 형주 공격 이후 피난민 집단이 합류하면서 유비 정권의 주요 구성원인 형주계 사족집단이 성립하게 되었다.

이후 익주 정복을 통해 세력이 급격한 외연 확장을 겪으면서 유비의 전사집단은 국가로 거듭났고, 계파간 정치적 안배를 취할 필요가 생겨났다. 그는 여러 세력을 오가며 얻은 계파 정치의 경험으로, 촉이 막 성립할 즈음의 유비는 꽤나 훌륭한 정치적 감각을 보여주며 익주 토착민과 동주계, 형주계에 각각의 자리를 분배했다.
그는 우선 자신의 기사라고 할 수 있는 친위 전사집단, 부곡들을 세력의 외연으로 투입했다. 장비가 파서를 맡았고 관우가 형주를, 그리고 부곡이면서 형주계의 영향이 짙은 위연을 한중독으로 세웠다. 순수한 전사집단으로서 군사력 이외에 다른 기반 없이, 군주와의 개인적인 유대를 통해 충성심이 유지되는, 군주의 '전우'들인 부곡들이야말로, 이익을 따져 다른 생각을 품기 쉬운 사인들보다 신뢰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을 것이다.

이렇게 수도권인 삼촉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들을 부곡들에게 배분하자 수도권이 남았다. 유비는 특정한 계파가 권력을 독점하는 사태를 강하게 의식하며 피하려고 했다. 유비는 우선 형주계의 수장인 제갈량에게 수도인 성도를 관리하게 함과 동시에 좌장군부의 일을 대행하게 하여 수도의 군권을 맡겼다. 이는 기존 형주계의 입지를 존중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유비는 투항한 동주계인 법정에게 수도인 성도를 포함한 수도권을 포괄하는 촉군태수직을 맡김으로써 중앙정계에서 동주계의 지위를 보장했다. 유비는 박힌 돌이지만 공이 적은 형주계와 굴러온 돌이지만 공이 큰 동주계를 동시에 중앙정계에 위치시켜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고 수적으로 가장 우세한 형주계에 중앙정계의 주도권을 잡아먹히는 사태를 피하고자 했다.

동주계와 형주계, 그리고 부곡의 처우가 마무리되자 마지막으로는 익주 토착민들이 남았다. 이들은 오랜 세월 유장 치하에서 동주계에 밀려 무시당해왔다. 유비 본인이 수도권에서 기존 유장정권의 중핵이었던 동주계의 입지를 보장한 상황에서 익주 토착민들을 단숨에 동주계, 형주계와 같은 반열에 세우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정권이 장기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익주 토착민의 인재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만 한다는 사실 역시 명확했다.
어려운 정치적 묘기를 요하는 상황에서 유비는 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유비는 이들에게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해주려 애쓰는 대신, 군주와 가까이에서 소통함으로서 강한 실권을 손에 넣는-어떤 의미에서는 환관을 닮은- 비서조직에 이들을 소속시켰다. 그는 황권을 중용하여 앞으로 익주계에게도 기회가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익주 토착민들을 자신의 종사, 즉 비서 조직의 일원으로 꽂아넣었다. 황권, 팽양, 장억이 모두 이 시기에 종사로 유비의 비서 조직에 합류하였다. 이렇게 가장 연약하면서도 잠재력이 높은 세력인 익주 토착민들을 군주 개인의 심복으로 삼아 자신의 보호 아래에 둠으로써, 이들 역시 장기적으로 정권의 중핵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렇게 꽤나 괜찮은 모습을 보였던 유비의 계파 안배는 그러나 아쉽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첫 삐걱거림은 법정의 급사였다. 동주계의 거두로서 한중공방전이라는 촉 건국신화를 일궈낸 실적을 바탕으로 제갈량 이상의 지위를 인정받던 법정이 급사하자, 본래 수적으로 형주계에 비할 수 없고 굴러온 돌 신세였던 동주계는 정치공간에서 형주계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유비는 법정의 대안으로 이엄의 지위를 올려줬으나 동주계가 형주계와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힘든 정국이 조성되었다.

여기까지에서 균열이 그쳤다면 이 체제는 아직 유비 본인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건전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체제의 안전성에 극단적인 타격을 입힌 사건은 단연 이릉대전과 관우, 장비의 죽음이었다.
이릉대전이 발발하기 전 세력 외연을 담당하던 부곡 우두머리인 관우, 장비가 사망한 사건은, 물론 촉이라는 어린 국가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음은 틀림없으나, 아직까지는 유비의 정치적인 대응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중앙정계에 직접 관여하기보다 외연을 관할하는 존재였다. (그런 면에서 파서를 관장하던 장비의 죽음은 관우의 죽음보다 조금 더 위험했다.) 부곡집단이 종래의 구심점을 잃으면서 구심점이 될만한 인물은 위연만이 남았는데, 위연은 형주에서 유비의 부곡이 된 인물로, 형주 계파의 입김이 강하게 서려 순수한 부곡으로 보기는 다소 어려웠다. 결국 세력의 균형은 다시금 형주계파를 향해 기울었다.
이 상황에서 유비는 이릉대전을 벌였다. 여파는 간단히 서술하기 어렵다. 유비는 원정에 나가기 직전 제갈량을 승상에 임명했는데, 그것은 원정에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언정 정치공학적으로는 이미 형주계파에 쏠린 무게추를 심각한 수준까지 더 기울이는 중대한 실책이었다.

여기 더해 유비는 원정중 익주 토착민으로서 비서집단 우두머리였던 황권의 건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원정의 주 접전지가 아닌 곳으로 '치워' 버림으로써, 다름아닌 자신이 익주 토착민에게 보냈던 긍정적 신호들을 스스로의 발로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원정이 궤멸적으로 실패한 결과 황권을 잃기까지 했다. 유비 본인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기에 유비의 토착민 비서집단은 더 규모가 커지지 못하고 그대로 형주계파의 수족으로 흡수되거나, 일부는 숙청당하는 최악의 결말을 맺고야 말았다.

마지막으로 원정 직후 사망으로 유비는 결코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린 정치 구도를 다시 바로잡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유비는 탁고대신으로 제갈량과 함께 이엄을 선정해 마지막 안전장치를 두려 시도했으나 그 안전장치가 현실에서 얼만큼 효용을 발휘했는지는 우리 모두가 봐서 잘 알고 있다. 군주 자신이 주도한 무리한 원정 뒤, 국내의 모든 정치적 거물들은 제갈량을 제외하고는 소멸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설령 유비가 생존하였던들, 정치 자체를 무너뜨릴 위험성 없이는 형주계파에 의한 국정 운영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유비의 건국 초 정치구도의 개편은 그가 중앙정계의 경험과 유리된 전사집단의 수장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아니, 설령 감안하지 않더라도, 대단히 훌륭했다. 유비가 만들어낸 체제는 이후 제갈량의 막부와 달리 여러 계파의 협치와 견제를 포용하였으며,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갖췄다. 이 체제가 유지되었다면 여러 의미에서 조조가 만들었던 초기 체제나 손권의 체제와 괜찮은 비교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결국 붕괴하였는데, 여기에는 앞에서 유비를 찬미하였던 만큼이나 유비의 책임이 적지 않았다. 그는 형주에 집착하고 동맹을 무시하여 관우, 장비를 잃을 계기를 스스로 마련하였으며, 감정적 동인으로 이릉대전을 일으켜 자신의 역작을 최종적으로, 스스로의 손으로 붕괴시켰다. 이 붕괴는 국초 체제 자신의 붕괴에만 그치지 않았다. 제갈량이 만들어낸 한중막부의 제한된 능력과 성장동력의 한계는 상당부분 유비 체제의 붕괴에서 유발된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평할 수 있다.

4. 음흉한 인물이라는 의혹

연의에서는 인의를 강조하면서도 여포와의 일화라거나 오나라와의 관계 등에서 현대 시각으로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주어 능구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특히 유비의 이러한 연의상 단점을 좀 더 부각시킨 이문열 평역 삼국지가 널리 퍼지면서 유비의 인물상에 대한 평가로 지나치게 기울었다. 사실 정사의 유비도 덕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효웅의 모습을 보인, 양면적이고 복잡한 인물이기에 평가가 갈릴수 밖에 없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여포의 경우, 여포가 사로잡힌 뒤 조조와 유비 앞에서 나를 기용하면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조조를 꼬드겼을 때, 이를 고민하는 조조에게 유비가 "(여포의 양아버지인) 정건양( 정원)과 동 태사( 동탁)의 일을 잊으셨습니까."고 진언하는 일이 있는데, 이때 여포가 원문사극의 일화를 언급하며 '천하의 간사한 인물이야말로 바로 너다.'라고 유비를 욕한다. 다만 이걸 가지고 유비가 음흉하다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 내지는 우스갯소리 이상을 벗어날 수 없다. 정사에서나 소설 연의에서나 여포는 신의가 없고 이기적이며, 눈 앞의 이익만 쫒는 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두 명의 주군을 죽였을 뿐더러, 자신을 받아준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차지한 전적도 있었다. 여포는 유비더러 간사하네 신의가 없네 할 자격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닌 것이다.

조조의 경우, 여포에게 공격당한 유비군을 조조가 받아줬지만 유비는 몸소 농사를 짓고 조조와 대화에서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천둥번개에 놀라는 쇼도 하며 조조를 방심시키고는 원술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를 받자마자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빼앗았다. 원소의 경우, 조조에게 서주를 다시 빼앗기고 떠돌이가 된 유비는 원담(연의에서는 정현)덕분에 원소군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원소에게서 유표에게로 도망간다.

연의에서 손건이 사자로 유표에게 갔을 때 채모가 "유비는 여포를 따르다 조조를 따르다 원소와 따르다가 갈라선 인물이라 믿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사자로 온 손건을 목베어 조조에게 보내면 조조의 환심도 사고 조조가 형주도 공격하지 않을겁니다."라는 말을 한다. 그만큼 연의에서도 배신 장면이 많이 나왔다는 뜻이다.

오나라의 경우, 주유는 땅을 유비에게 빌려줘선 안된다고 했지만 노숙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줬는데 유비와 손권사이에 언제 돌려주겠다는 명시는 없었다. 어쨌거나 량주를 취하면 형주를 돌려주겠다고 말을 돌려서 형주를 돌려주지 않았고 이 부분에 대해선 서로 통수치고 통수치다가 이릉대전 이후에야 그나마 진짜 동맹다운 동맹이 되었다고 평가 할 수 있을것이다. 하여간 촉한과 손오와의 관계에서 유비와 손권 둘 다 마냥 피해자는 아니라는건 분명한 사실. 이부분은 형주 공방전 문서를 참조하면 좋다. 결정적으로 유장을 치게 된 사건은 이미 익주로 들어올때부터 촉을 먹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백한 배신이다.

정사의 유비는 연의에서 묘사되는 마냥 군자가 아닌 당대의 효웅인만큼 그 역시 남을 배신하고 우롱한 행태가 없지 않다. 연의에서 장비가 매질한 감찰관인 독우 사건은 유비 자신이 벌인이 일로 독우가 만남을 거절하자 수백 대나 매질하고 임지를 버리고 도망친 사건은, 유비가 본질적으로 당대에 넘쳐나던 무수한 무뢰배들과 그 시작점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입촉 때 유장을 치게 된 것은 정사의 유비가 왜 '인의의 탈을 쓴 효웅'으로 불리는지 보여주는 일화로 고우영 선생은 유비의 이런 면을 조그마한 이득은 희생하고 더 큰 이득을 한번에 먹으려는 꿍꿍이를 가졌다고 표현했다.

유비가 장로와 대치하던 중 조조가 손권을 치게 되자 손권이 유비에게 구원요청을 보냈고, 조조가 보낸 악진의 대군을 얼마 안 되는 병력을 거느린 관우 혼자 이겨내기 힘들다 생각한 유비가 유장에게 지원군을 줄 것을 청했지만 유장이 지원군을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유장을 향해 군을 일으킨다. 그 전까지는 동족이라면서 친하게 굴더니 막상 자신이 힘을 얻으니 태도가 바뀐 셈이다. 이전부터 유비는 장로 세력을 공격해주길 청한 유장의 요청을 무시하며 유장이 보낸 군비를 자신에게 민심을 돌리는 수단으로 멋대로 사용했고, 배신하기 불과 6개월 전까지 지속적으로 유장에게 자신의 군을 증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지막으로 유비 스스로가 이 일이 명백하고 극명한 배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急)하면 나는 관(寬-너그러움)하고 조조가 포(暴-사나움)하면 나는 인(仁)하고 조조가 휼(譎-속임)하면 나는 충(忠)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小故)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구주춘추)

즉, 유비는 이 배신이 조조와도 같은 '너그럽지 않고 인하지 않은', '천하에 신의를 잃을' 배신행위라고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유비가 숨기고 있었던 야심은 방통과의 대화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연회에서의 기습을 논하는 방통에게 유비는 "이제 막 다른 나라로 들어와 은혜와 신의를 아직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리 할 수는 없소"라고 말한다. 즉, 유비는 자신의 은혜와 신의를 촉을 먹어치울 수단으로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군웅에게 아주 당연스러운 일이고 은혜와 신의라는 대외적 이미지를 주요 홍보수단으로 삼아온 유비에게는 특히나 중요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유비가 "배신을 꺼리는 도덕적인 군웅"이었다는 연의의 이미지는 대단히 편중되어 있으며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사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연의조차도 유비의 이런 면을 다 가려주지 못했거나, 심지어는 부풀린 부분이 있다, 연의의 유비를 보고 '유비는 울어서 강산을 차지했다'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겉으로는 안타까운 척하며 그걸 명분으로 강산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정사의 유비[9]는 연의에서처럼 걸핏하면 눈물을 질질 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 저 '조조와 나는 물과 불 같은 관계' 발언, '촉땅에 들어와서 아직 신의를 얻지 못함' 운운, '손권과 나는 순망치한이라 유장 네가 병사 좀 더 보내라' 운운은 연의에서도 나오고 있다. 이런 행태를 보고 연의에서 유파가 하는 말이 "유비는 효웅인데 촉에 오래 머물며 나가지 않으니 이는 호랑이를 풀어놓아 방 안으로 들인 것입니다." 결국엔 자기가 손권을 핑계로 병력을 요청한 주제에 유장이 지원을 줄이니까 화를 내면서 바로 촉을 칠 구실로 방통의 계략을 취한다. 인덕으로 포장해도 유비의 본질은 결국 효웅이라는 것이다.

물론 최대한 그렇게 안 보이려고 노력은 하지만 결국 연의에서도 법정이나 방통의 이런 계략을 취하는 건 유비이고 양회 고패를 죽인 다음 연회를 베푼후 술에 취해 기뻐하는 장면도 그대로 나온다. 또 정사나 연의나 유비가 방통의 계략에 따라 양회와 고패를 잡아다가 부성을 탈취하려 한다. 연의에서는 이때 장송의 일로 유비가 촉을 취하려는 계략이 탄로나자 양회와 고패가 "현덕은 죽어 마땅하오. 우리가 각각 예리한 칼을 몸에 숨겨, 그를 환송하는 곳에서 찔러, 우리 주공의 우환을 근절해야 하오." 라며 자기 주군인 유장을 위해 유비를 암살하려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유비와 방통은 이미 이들이 이럴줄 알고 있어 이들을 잡아 참했다. 이 다음 유비가 이들이 데려온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걸작이다. "양회와 고패는 우리 형제를 이간한데다 날카로운 칼을 숨겨 암살을 행하려 했기에 주륙했소. 그대들은 무죄이니, 놀랄 것 없소."
성 위에서 들으니 자가 군사들이라 즉시 개문한다. 대군이 몰려들어가니, 병사들은 칼날에 피 한방울 안 묻히고, 부수관을 얻는다. 촉군이 모두 항복한다. 현덕이 각각 큰 상을 내리고 병력을 앞뒤로 나눠 지키게 한다. 다음날 군사들을 위로해 공청에서 연회를 베푼다. 현덕이 술이 거나하게 취해, 방통을 돌아보며 말한다.

"오늘의 모임, 참으로 즐겁구려!"

"남의 나라를 정벌해 즐거워 하는 것은 인자 仁者의 전쟁이 아닙니다."

"내 듣자니 지난날 무왕께서 주왕을 토벌한 뒤, 음악을 연주하며 공적을 드러내셨는데, 이 역시 인자의 전쟁이 아니란 말인가? 자네 말이 어찌 도리에 맞지 않는가? 썩 물러가라!"

방통이 껄껄 웃으며 일어난다. 좌우에서 현덕을 부축해 후당에 들이니 반야 半夜[한밤중]까지 잠자다, 술이 깬다. 좌우에서 잇달아 방통의 말을 현덕에게 고지하자 현덕이 크게 뉘우친다. 다음날 아침 옷을 갖춰 입고 당에 올라, 방통에게 사죄를 청한다.

"어제 술에 취해 제 언어가 촉오 觸忤 [성내게 만듦/ 뜻을 거스름]했습니다. 부디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방통이 태연히 즐겁게 이야기한다. 현덕이 말한다.

"어제의 말은 오로지 제 실수입니다."

"주군과 신하 모두 실수했지 어찌 주공 홀로이겠습니까?"

현덕도 크게 웃으니, 그 즐거움이 예전과 같다.
- 삼국지연의 제62회 부수관을 취해, 양회와 고패의 목을 얻고, 낙성을 공격해, 황충과 위연이 공을 다투다. 중에서

참고로 이 일화는 정사 방통전에 그대로 나오는 일화이다. 다만 정사에선 이 연회 중간에 유비가 자신의 말을 후회하고 다시 방통을 불러 "조금 전의 논의에서 누가 잘못한 것이오?"라고 묻고 둘 다 잘못했다 하는 방통의 말에 다시 웃으며 즐겁게 술자리를 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유장이 상당부분 익주의 혼란을 초래한 면도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배신은 배신이다. 주석을 단 습착치 배송지는 이렇게 유비가 유장을 치고 양심의 가책 없이 기뻐하며 연회를 베푼 일에 대해 가열차게 비판했다.
무릇 패왕(霸王)은 필히 인의(仁義)를 갖추어 이를 근본으로 삼고 신순(信順)에 기대어 이를 근원으로 삼으니, 한 가지라도 갖추지 못하면 그 도가 어그러지는 법이다.[10] 이제 유비가 유장의 땅을 습격하여 빼앗고 권(權-권도, 권의)으로 일을 이루니, 신(信)을 저버리고 정(情)에 어긋나 덕의(德義)가 함께 잘못되었다. 비록 이로 말미암아 공(功)이 융성하다 하나 의당 크게 상하고 패한 것으로, 비유컨대 손을 끊어 몸을 보전한 격이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습착치의 주
유장을 습격하도록 꾀한 것은 그 계책이 비록 방통에게서 나왔으나, 의로움을 거슬러 공을 이루고 본래 궤도(詭道-부정한 방법, 속임수)에 말미암은 것이라 내심 꺼림칙하여 즐거운 마음은 절로 그치게 마련이니, 이 때문에 유비가 즐거워하는 말을 듣고 무심결에 경솔하게 대답한 것이다. 유비가 술자리를 한창 즐긴 것은 시의에 맞지 않아 그 일은 화를 즐기는 것(樂禍)과 같은데, 자신을 무왕에 비교하며 더더욱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유비의 잘못이고 방통에게는 잘못이 없다.
배송지가 덧붙인 주

이후에 촉한 황제 등극은 선양을 받은것도 아닌 자칭일뿐이라 엄밀히 따지고 보면 정통성면에서 참칭인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본인도 이 점을 인지하고 주변에서 제위에 오르라는데도 절대로 그것만큼은 안된다는듯이 계속 거부하다 결국 신하들의 압박에 마지못해 어쩔수 없이 오르는 모양새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제위에 오른후에는 그간의 행동이 무색하게 등극에 반대했던 비시는 좌천시켜 버리고[11] 옹무는 처형시킨다.[12]

4.1. 반론

유비(劉備)가 말하기를,
“대사(大事)를 이루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니, 이제 사람들이 나에게 귀의하는데 내 어찌 차마 버리고 가겠는가.”

습착치가 논하기를,
“유현덕(劉玄德)이 비록 전패(顚沛)하고 험난하였으나 신의(信義)가 더욱 드러나고, 형세가 절박하고 사정이 위태로웠으나 말이 도리를 잃지 않았다.”

자치통감 절요 中

들어가기에 앞서 제목은 연의에서 재평가되고 정사로 부각된 유비의 위선자 이미지에 대한 반론인데, 여기에 연의의 무능한 이미지에 대한 반론과 그래도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재반론이 섞여서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문단이 되었으니 이를 감안하고 보기 바란다. 위에서 보듯이 일단 정사에서도 유비가 패망하여 쫓기는 와중에 백성들을 버리기를 거부한 것을 칭찬하고 있다. 이는 연의와 정사가 일치하는 부분으로 훗날 주희까지 감동시킬 정도로 유명한 유비의 고사이다.

배신과 배신이 연이어 벌어지던 난세에 그 당시 군웅들에 비해 유비가 딱히 도덕적으로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 이유는 없다. 친구인 여백사를 죽이고 서주대학살을 벌인 조조[13], 한복을 배신한 원소[14], 정원 동탁을 배신한 여포, 손책을 배신한 원술[15] 등.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유비가 연의를 비롯한 민간 전설에서 인의군자로 묘사되는 것과 타 군벌들과의 이해관계는 큰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유비가 선인으로 묘사된 것은 당대부터 악명 높았던 조조에게 맞섰다는 사실로 얻은 반사 이익과[16], 유비 본인이 후한 말 군벌들 중에서도 그나마 민본주의 성향을 보였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관우, 장비, 제갈량 같은 자기 휘하의 충의지사들과 맺었던 관계가 오늘날까지 회자될 정도로 미담으로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유비가 선인으로 묘사된 것이 그가 다른 군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서 좋은 군주로 인식되었기 때문인데, 군벌들 간 이해 관계만으로 위선자 혹은 음흉한 인물이었다는 비판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군벌 간 이해관계를 봐도 유장의 건으로 인해 지나치게 다른 군벌들과의 관계까지 과대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금 시대보다 더욱 대의니 명분이니를 따졌던 과거의 학자들도 유장의 건만은 패도도 왕도도 아니라며 칼같이 비판[17]했지만 다른 군벌들과의 관계는 도덕적인 비판은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유비가 유종을 치지 않자 유종은 역적 조조에게 항복했으니 명분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다고 유비의 행동을 두고 헤아림이 부족하다고 비판할 정도였다.[18]

우선 여포의 경우, 유비는 갈 곳 없던 여포를 받아주었는데 여포는 유비를 배신한다. 그러므로 여포를 죽이라고 한 유비의 처분은 정당한 것이다. 여포가 방천화극의 가지 끝을 화살로 맞춰서 유비를 구해준 일을 들어 그래도 유비가 배신한 게 맞다고 주장하는데, 애초에 여포가 통수를 안 쳤으면 이렇게 될 일이 없었다. 유비 입장에선 애초에 자신을 배신해 사지로 몰아넣은 놈이 직접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별 쇼를 해가며 자신의 목숨 가지고 장난질하는 것으로 봐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여포는 정작 그렇게 구해준 유비가 힘을 키우는 것이 껄끄러워 소패에서 내쫓아버렸다.[19]

조조의 경우 실제로 그가 어떤 생각이었든 군사까지 주며 유비를 신뢰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유비는 시원하게 뒤통수를 쳐버렸다. 다만 유장의 경우와는 달리 유비에게도 명분은 있었는데 헌제의 밀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속마음은 어쨌든 한실 중시라는 스탠스를 취하던 유비에겐 절호의 기회면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황제가 직접 내린 밀명을 거스르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이 없고, 이 의대조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드러나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지니 유비가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제거됐을 판이었다. 또한 이전부터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할때 유비가 조조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는데도 정욱 곽가를 비롯해 유비는 위험인물이니 얼른 제거하자는 조조 세력 내의 목소리도 있었다. 유비가 이런 상황을 아예 몰랐다고 보기도 힘들다.[20]

설령 유비가 황제의 밀명을 따르지 않았더라도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은 성격의 조조가 유비에게 이용 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해 이를 빌미로 제거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관우야 나중에 유비가 도주한 후 조조가 아끼는 걸로 나오니 제한다고 쳐도 장비에게 중랑장 벼슬을 내리고 하후씨와 인척관계[21]를 맺게 하거나 미축, 미방에게 벼슬을 내린것도 여차하면 유비만 팽하고 유비의 인재들을 조조가 날로 먹으려는 것으로 유비가 인식하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상술했듯이 이것만으로도 부족해 이미 핵심 참모들이 유비는 위험인물이니 여차하면 죽이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었던데다, 논영회에서는 아예 조조가 유비는 자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웅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해버렸으니 유비는 언제 조조가 자기를 숙청하려들지 몰라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다.

원소를 배신하고 유표에게 붙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애초에 당시 유비는 원소 휘하의 객장이지 정식 부하도 아니었고,[22] 유표 또한 직접적으로 군사를 내지 않았을뿐 조조와 적대하는 입장으로 원소와 제휴하고 있었다.

유비의 역할 역시 이런 원소와 유표의 동맹을 확고하게 하고 조조의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였다. 그러다가 원소가 패배하고, 유비 역시 후방 교란에 실패한 뒤 원소에게 돌아가는 것도 어려워져 유표에게 의탁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조조가 유비를 직접 서주에서 두들길 때 원소는 어차피 유비가 전사하면 순교자로 포장해서 써먹을 수 있고 살아있으면 명분만 가져다 바치는 존재가 되어 더 좋다는 생각으로 직접 도와주지도 않았으니 배신이라면 원소가 먼저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원소의 부하들이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비어있는 조조의 후방을 쳐야 한다고 줄곧 간언했지만 원소는 죄다 무시했고, 결국 유비 세력이 무너진 이후 조조는 후방 걱정 없이 원소에만 그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예 안 도와준건 아니고 우금이 맡던 전선에 병력을 보내 공격해서 시선을 끌긴 했지만 우금 선에서 정리될 정도의 공격이었는지라 실질적으로 유비에게 도움은 안 되었다. 유비는 그때부터 원소를 믿을 수 없다고 봤을테고 실제로 관도대전 패배 이후 여남으로 떠날때는 원소를 떠날 목적으로 건의했으며 두번 다시 원소에게 돌아가지 않았다.[23]

오나라의 건은 누가 뒷통수를 쳤는지에 관해 자세한 내역은 복잡한데 누가 형주를 점령했는가, 어느 때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가가 모두 복잡하게 엉켜있고 학자들도 비판하는 세력이 다르므로 형주 공방전 문서를 참고하도록 하자.

유장을 친 것에 대해서는, 배송지는 유장을 친 유비를 비판했지만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이를 '유장은 영웅으로서의 자질이 없어 땅이나, 관직을 빼앗긴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 불행이라 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물론 배신은 배신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도덕적으로 옹호의 여지는 없긴 하지만 유비도 아예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게다가 형식상으로는 유장은 유비를 장로세력을 막아주기 위한 용병으로 불러 놓고 유비가 촉에서 명성이 높아지자 보급을 끊고 공격을 했으니 유장의 배신으로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결국 유비도 촉을 집어 삼킬 계획으로 유장의 요청에 응했고, 유장의 신하들이나 촉의 호족들과 연계하여 내부에서부터 촉을 공략했으니, 유비를 옹호하는 쪽에서도 대부분 유비가 결국 유장을 배신한 건 맞다고 인정하고 있다.[24]

그러나 이 배신으로 유비의 인품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당시는 군벌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군웅할거 시대였고, 난세의 다른 지도자들은 유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유비는 어쨌든 부하와 백성들을 거느린 주군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제갈량의 전략적 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익주 탈취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큰 포부를 안고 유비를 따르던 부하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고대 중국사에서 뛰어난 군주들은 모두 천하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만큼,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든 일어날 싸움이었다. 그리고 익주 탈취에 있어서 속임수를 쓰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공격한다고 생각해보자. 익주 땅은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세가 험하고, 정공법으로는 막대한 사상자가 나올 것이다. 공리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유비의 입장에서는 유장 한 사람을 배신하는 게 자신의 부하들을 저버리고 희생시키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개인의 명성 혹은 신념을 위해 불필요한 사상자를 늘렸다는, 송양공과 같은 평가를 듣게 될 것이다.

이런 유비의 행보에 대해선 청나라 학자 하작(何焯)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하작은 유비가 자신의 인덕을 깎아내릴 수도 있는 몇몇 행동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 것을 두고 "어려운 시기의 상황에서는 권도(權道)로써 일을 처리할 수도 있으니 상도(常道)의 관점에서만 이를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유비의 칭제를 참칭이라 비하하기도 하나, 다른 참칭 황제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유비의 행위가 참칭이 되려면 정통성 있는 황제가 있어야 하지만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정통성을 확보했다는 조위 정권이 말이 좋아 선양이지 헌제를 압박하여 얻어낸 사실상 찬탈이라는건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여러 이민족 왕조는 물론이고 서진의 후신인 동진까지 그 정통성을 부정할 정도로 조위에게 정통성은 없었다.

헌제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복위시키려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당시 상황은 황제가 갈아치워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후한이라는 국가 자체가 멸망한 상황으로, 헌제는 선양했을 때부터 이미 정치적 의의를 잃은 상황이었다.[25][26]

정통성 있는 황제가 없는건 고사하고 아예 후한이라는 국가 자체가 멸망한 상황, 유비 세력도 한나라 부흥운동의 성격을 띄면서 동진의 습착치가 평하고 배송지가 동의했듯 유비가 칭제한 것은 한이라는 국가를 지속하는 최선이었던 것이다.

당시나 그 이후나 중화제국의 통치 이념은 유교였다. 유비의 행위가 참칭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유비 또한 조조와 마찬가지로 역적 취급받았겠지만, 후대의 유비는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 확실히 정통성있는 황제로 받아들여졌다.

정사의 실제 행보를 보면 명성, 신뢰 등으로 나중에 돌아온 것들도 있기는 했지만 사람이 미래예지가 불가능한만큼 전혀 이익이 없는 선행들도 많이 하였으며 그럴 이유가 없는데 고작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건 도박을 하기도 했다. 유비를 무능하고 음흉하게 보이게 하는 일들도 여기의 서술들을 읽고 자세히 알아보면 유비의 현실적인 사고방식과 가진 이상이 괴리가 심해 벌어진 경우가 많다. 현실적으로 행동한 일들이 그를 음흉하게 보이게 하고,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한 행동들이 유비를 무능하게 보이게 한 셈. 본인도 스스로 덕이 없는 사람이니 본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더구나 당시는 난세였으므로 아무리 강직하고 굽힘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는 효웅이었음에도 최대한 인덕을 내세웠고 이러한 점이 그를 조조의 최후의 숙적으로 부각되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의 최강의 무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유비는 배신을 하더라도 인덕과 명분과 백성들의 인심을 장악하는 일을 등한시하지 않았고, 모름지기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주에서도 그랬고 그는 자신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얻어 추대되는 상황을 선호했다.[27] 형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장의 경우엔 어차피 자신도 배신인 걸 알았기에 그는 유장을 통수칠 때 곧바로 유장을 죽여 익주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굳이 방통같은 아까운 인재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여기 들어와서 인심을 충분히 베풀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런 방책을 거절한다. 오로지 계속 인심을 충분히 베풀고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리다, 핑계거리가 생기자마자 바로 인덕을 무기로 간교한 술책을 벌여 유장을 쳐서 점령한 다음 유장이 쓰던 인재, 쓰지 않던 인재를 모두 등용하고, 조운의 조언을 받아 농토와 과수원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면서, 명백한 배신 행위임에도 촉 사람들이 앞다투어 유비의 밑에서 힘쓰게 하였다.[28] 자치통감은 익주가 그 혼란과 난리를 겪고 유비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익주 사람들은 이로써 크게 평화로워졌다."(益州之民,是以大和) 이렇게 보면 능력이 되었건 인덕이 되었건 대체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인지 섬뜩해진다. 갈수록 유비는 말 그대로 술책을 교묘하게 쓰는 간교한 군주와 인덕의 군주가 혼재된 기이한 존재가 되어갔다. 여기에 본인이 타고났던 거친 임협의 기질까지 뒤죽박죽으로 섞인 것이 유비다. 그래서 파고들수록 유비라는 인간은 한 가지 말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의 군대는 백성들을 약탈하거나 인심을 잃는 일을 삼갔다. 사실 이 문제는 도덕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비군을 포함해서 민간 약탈을 안 한 쪽도 도덕성이 딱히 뛰어난 게 아니라 능력이 좋았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약탈은 매우 쉬운 공급법이지만 장기적인 수익원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약탈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덕성 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군량 공급원을 갖췄다는 능력 면에서도 고평가될 일이다. 참고로 이런 점이 부각되는 또 다른 후한 말 인물들이 유우 손책인데, 전자는 너무 인자한 탓에 죽었고 후자는 너무 난폭[29][30]한 탓에 죽었다는 걸 생각하면, 유비는 그 중도를 잘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유비의 인덕과 능력이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유비 본인도 인덕을 중시했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인의지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가 아들 유선에게 한 유언의 한 구절을 보자. "힘쓰고 또 힘쓰거라! 악이 작다고 해서 행하지 말고, 선이 작다고 해서 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오직 어질고 덕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네 아비는 덕이 부족하니 나를 본받지 말라". 평생 인덕과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왔다고 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이렇게 스스로 자신은 덕이 부족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스스로 인의지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결국은 효웅이 되었다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에야 고백한 게 아니었을까. 그의 삶은 인의와 간흉 사이에서 항상 줄타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유비의 고뇌는 한평생 자신의 백성들을 위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효웅이 되었다고 탄식한 후대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유비가 인의지사, 즉 인의의 대명사로 남은 까닭은 당대 군벌 중에서 유비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민심은 천심이란 말을 최대한 받아들여 실행했으며, 지존의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한 군주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유비의 평판에 도움이 된 것이 바로 조조였다.[31]

4.2. 결론

결론짓자면 유비는 확실히 능구렁이 같은 구석도 있고, 현실적인 판단으로 필요에 따라 중상모략 역시 피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편하다는 이유 하나로 중상모략만 일삼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의를 중시하고 사람을 우선하는, 현실적인 선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그 역시도 지방 군벌이자 정치인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개인적인 이념, 사상, 가치관이 인의를 중시했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는 복합적인 인간이었을 것이며 대외적 이미지를 신경 쓰고 실제 생활은 다를 정치인이었다. 물론 그의 디테일한 모든 부분이 사서에 적히지 않았고 적힐 수도 없었으므로 결국 이는 전부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당대의 평가는 인의를 중시하면서도 음흉한 구석이 있는, 날것으로 말해 겉과 속이 다르지만 잘 살펴보면 좋은 정치인이었다는 결론도 나온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보자면, 모든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중시한다. 이는 인간의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복지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 역시도 없다. 그럼 모든 정치인들은 절대선일까? 그렇지 않다. 실제로 몇몇의 정치인은 권력을 독점하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실제로 시행한 사람은 독재자가 되었고 혁명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역사는 그들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있고 민중은 그 힘을 드러냈다. 제 아무리 검은 속내가 있는 정치인일지라도 그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알고 있기에 티나지 않게 비리 정도나 저지르지 민주주의 가치와 기본권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일정 수준 이상의 집단을 이루면 당연히 정치가 동반 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비는 정치적인 행동을 한 것이고 이것이 한 집단의 리더에게 문제될 것은 없다. 더불어 당시와 지금의 가치관과 도덕 규범은 다르기 때문. 당장 학살을 벌인 동시대의 동탁이나 조조의 사례가 있는 만큼, 당시 트렌드인 유학에서 말하는 인의(仁義)를 대외적 이미지로 사용하고 이를 최대한 지키는 노력을 한 것은 높게 평가할만 하다. 정녕 그가 겉과 속이 달라 인의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한들, 혹은 인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진정 백성을 생각하였다 한들, 아무 상관이 없다. 적어도 그것이 옳은 방식이었음은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런 정치를 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정치인들이 아무리 권력욕이 많고 개인적으로 대중을 개돼지로 여긴다 한들,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듯이 유비 역시도 그 속내는 모르지만 인의라는 유학의 최중요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고 중시했다는 점에서 그는 인덕이 많은 인물이라고 평해도 손색없다.

애초에 이러한 논란은 유비가 인덕의 화신으로 묘사되면서 유학에서 말하는 군자(君子)에 가까운 이미지가 된 것에 대한 반발심리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너무 과한 평가절하는 문제가 되겠지만 삼국지의 로망스적인 해석을 지양하고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평가하여 인간 유비, 정치인 유비, 군벌 유비 등 현실적인 관점에서 평가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5. 정략

유비는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지도자였다. 초기에 못 나가던 시절에는 독우를 매질하기도 했고 이후 관직을 버리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때까지는 휘하의 관우, 장비와 다를 바 없는 유협 집단, 나쁘게 말하면 건달패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손찬에 귀부해서 본격적으로 행적이 기록되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행보가 달라진다. 단순한 유협이나 지역 군웅의 사고 방식이 아니라 자기 이상을 위한 정략을 사용할 줄 아는 '정치가'의 사고 방식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이다.[32] 어떻게 보면 이 시점부터 사람이 바뀐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오랜 시간 떠돌아다니며 본래 가지고 있던 자질이 각성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비의 출중함을 알지 못하겠다면 여기에 실패한 공손찬이나 손책, 여포같은 군웅들을 보면 된다. 이들은 평생을 한 지역의 힘깨나 쓰는 군웅 입장에서 생각하며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으나 그 비중을 낮게 평가받지는 않는다. 일례로 손책을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모두 박살내며 뒤가 없는 것처럼 살다보니 얼굴에 흠집이 나자 홧병이 나 죽을 만큼 자신을 추스리는데 실패했다. 공손찬을 보면 변방의 군사 영웅으로 명성을 떨치다 계교 전투에서 건 정면 승부로 처참한 패배를 경험한 뒤, 유우를 죽인다는 오판을 하여 공공의 적이 되어 역경루에 박혀있다 성이 함락되어 최후를 맞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후한 말엽의 중요 군벌로 역사에 남았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들이 이 시대 군웅 패거리의 평균인데, 유비는 무엇보다 실패에서 배워가며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일어나 온 힘을 다해 싸우면서 정략으로 이익을 얻는 법을 배웠다. 이 점은 정말로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좋던 싫던 초기의 자잘한 패배로부터 숙이는 법이나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한계를 계속 배워나가 그러한 성격이 된 것이다. 이는 자신의 한계와 정치적인 입지를 알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여기에 성공했고 입지도 딱 맞았던 군웅들이 바로 유비와 손권이었으며, 유비는 황족이라는 혈통과 임협으로서 밑바닥에서 성장하며 의탁하고 역적에 속하는 제후들을 제외한 한의 제후들을 먼저 공격한 적이 없는 행적으로 말미암아 이상적인 명분을 쥘 수 있었다.

보고 있자면 주위에서 좋은 사람들을 모으고 호족들한테도 미움을 사지 않아 그들의 추천을 받는다. 서주를 얻을 당시에도 공융이 추천하고 미축, 진등에게 선택받는데 이것의 의미는 꽤 크다. 조조를 견제할 필요성과 갈 데 없는 지위 등 여러 조건이 따라붙기는 했으나 일단은 선택받았다는 것이 중요. 사실 유비 자체는 호족이 달라붙을 만한 조건이 전혀 안 되었지만, 이것에 성공했다는 건 그저 유협 출신이던 유비가 호족들이 중요한 위치에 두길 원할 정도로 정치적 능력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조 = 천자를 겁박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 명분을 처음 만든 이들이 헌제의 친위 쿠데타( 의대조 사건)를 기획한 유비와 동승이라는 점도 특기할 부분이다. 관도대전 당시 패배한 유비를 맞이한 것이 원소였기 때문에 원소의 힘 역시 작용했다 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힘을 얻은 이 명분은 원소 사후에도 끈질기게 남아 처음 이것을 구축하는데 동참한 유비나 손권이 충실하게 이용한다. 이런 식의 정치 프로파간다는 최소한 지지 세력의 결집에는 유효했고, 원소와 유비, 손권 모두가 중앙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와 맞서기 위해선 어떤 논리로 대응해야 하는지 꿰뚫고 있었다 볼 수 있다.

유표 밑에 있을 적에도 유기에게 붙어 세력을 키웠고 사서에 나오는 일화성 정보들에서 유표 세력 내부 권력 다툼의 한 축을 맡았음이 암시되는데, 이 부분 역시 자신을 부각시키는 방식이 뛰어나다. 장자이자 유표의 후계자로서 결격 사유가 전혀 없는 유기를 통해 인심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조조와 오랫동안 직접 적대하지 않았던 유표 세력에서 장수의 위치를 계승한 유비는 단연 세력의 가장 단련된 호걸이었고 반조조 세력의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써 이 무게감을 잃지 않았다. 세를 믿고 무례해지는 대신( 국의- 공손찬- 손책- 여포를 떠올려보라) 유기에게 붙어 명사들과 호응하여 입지를 다져나갔고 형주의 인심을 장악해나갔다. 그 덕에 유표가 죽을 무렵 인심은 이미 강하로 간 유기와 전방에 주둔하던 유비에게 쏠려있는 상황이었다. 양양의 친 조조세력인 괴씨, 채씨 등을 제외한 형주의 호족과 관원, 군인, 백성들 중 다수는 친 유기(+유비), 반 유종-채모 쪽 여론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채모의 근거지인 양양의 호족과 백성들 등 양양의 형주 사람 대부분이 항복을 결정한 유종과 채씨 세력을 버리고 유비에게 귀부했을 때 유종과 채씨 세력이 전혀 막지 못한 것, 적벽대전 이후 유종의 항복으로 덩달아 항복한 유표의 부하 관리와 군사 대부분이 아직 황제의 권위를 등에 지고 있는 조조를 버리고 유비에게 귀부한 것에서도 드러난 점이다. 왕위같은 이가 수천 명의 정예로 유비를 쫒는데 정신없는 조조를 치자 한 것과 더불어 항복한 유종 세력에서도 반조조 세력은 상당하였고 유비가 그 대안이 되어 이 세력을 모조리 흡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정치가로써의 감각이 탁월하다 할 수 밖에 없겠다.

손권과 연합하여 정치적 이익을 얻어내는 행보를 되짚어 봐도 정략적인 감각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유협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붙들어야 할 명분과 이념을 제대로 짚는다. 유표 잔당을 그러모으기 위해 유기의 지위를 이용한 것이나 손권에게서 서슴없이 자신의 이익과 지분을 얻어내는 것, 한중왕 즉위 때까지 그럴듯 하게 명분을 쌓아가는 모습 즈음까지 가면 원소만큼이나 명분을 잘 짚는 행보를 보여 준다. 각성했을 적부터 사대부에게는 고결한 성인군자 이미지와 한실부흥의 충을, 민중에게는 의리 있는 협객 이미지와 다른 군웅들에 비해 잘 베풀고 수탈, 갈취와 거리가 먼 인덕있는 모습을 강조하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둘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 할 줄 아는 교활함은 덤.

조위나 손오 등의 건국 단계를 보면 군권 통제 면에선 신뢰할 만한 친족 집단에 크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조조의 군 수뇌부는 전부 친족 집단이었다. 유비에게서는 그러한 면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변변한 근거지 없이 여기저기 떠돌면서도 끝까지 정치적인 능력을 통해 여러 집단들을 규합해 나갔고 스스로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그 세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살아남았으며 조비가 선양받았을 때는 자신이야말로 사백 년 왕조의 정통 후계라는 명분을 잽싸게 차지한 배짱에서 정치적인 판단력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끝까지 살아남아 적수공권에서 삼국정립까지 간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다.

직속 부하였던 관우, 장비는 기본적으로 유협이었고 그 한계 또한 뚜렷했기에, 이들의 촉한 건국은 순전히 주군 유비가 유협의 성격과 특징을 유지하며 정치적 감각을 괜찮은 수준까지 성장시켜서라 볼 수 있다. 애당초 능력이 없었다면 그 까탈스러운 관우와 장비가 30여 년을 하루같이 죽을 때까지 유비를 배신하지 않고 동생처럼 따랐을 리가 없다. 이릉대전같은 사건을 보면 응원하는 이의 입장에서 아쉽기도 하나, 이는 유비 본인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결국 이 노련한, 늙은 정치가 속에는 여전히 건달 시절, 주먹패 시절의 그 기질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생애를 보자면 공교롭게도, 유비는 조상이자 선조인 한고제의 전철을 똑같이 밟았다. 한고제처럼 강력한 적들을 만나 깨지면서도 그 과정에서 점점 성장하며 인재를 모으고, 마침내 강력한 적을 쓰러뜨린 뒤 대업을 이루며 승승장구하나, 내부의 손실로 싸우면 안 되는 상황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려 씁쓸한 최후를 맞는다. 최후에 한고조는 한나라의 골칫거리인 흉노를 정벌하러 40만 대군을 끌고 가다 백등산 포위전에서 묵돌 선우에게 처절하게 패한 뒤 항우의 학살과 전쟁의 여파로 복수할 여력이 되지 않아 한나라는 백 여년 간 흉노에 저자세로 나가야 했으며, 그 후손인 유비 역시 형주 탈환을 위해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했으나 자신을 보조할 경험 많은 숙장들이 전부 없는 상황인 가운데 이릉대전에서 육손에게 처절하게 패배하여 백제성에서 씁슬하게 최후를 맞았다. 게다가 한고조나 유비 모두 후계자가 마음은 착했지만 나라를 이끌어갈 그릇은 아니었다는 점도 비슷했다.

물론 이러한 평가들 자체는 유비의 모든 행적을 정치적인 판단으로 몰아서 해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유비는 분명 뛰어난 정치가이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유비를 포함한 인간의 사상과 감정은 정치적 논리만으론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6. 성격

위에서 말했듯이 유비가 기본적으로 인덕을 내세우긴 했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누상촌 돗자리파 두목이라는 별명처럼 정사의 유비는 태생부터 임협으로서 활동한 가락이 어디 안 간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가 많다. 몰락한 귀공자풍인 연의의 유비와는 또 다른 모습. 독우를 패거나 익주에서는 심지어 다른 장군들의 가솔을 인질로 잡는 등 거친 모습도 보이고 황제 즉위를 반대한 비시를 좌천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하북에서 사람들을 다스렸을땐 그들 속에서 스스럼 없이 섞여 식사와 침식을 같이했고 이로서 인심을 얻은 것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유비의 인덕이 알려져 명성이 있었으므로 인덕 역시 혼재하고 있다. 유비는 실패를 두려워 하지않고 천하가 조조에게 다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조차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상과 생존 사이에 계속해서 외줄타기와 저울질을 해왔고, 바로 그것이 그의 정치였으며, 군웅할거 시대에 그가 살아남은 원동력이 되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영웅들이 그랬듯 유비 역시 어린 시절부터 야망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그의 선조 한고제가 황제의 행차를 보고 '오호라, 대장부라면 마땅히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감탄했던 것처럼 유비도 어린 시절부터 감히 황제의 수레를 타겠다고 말하다가 문중 어른들에게 혼이 나기도 했고. 그는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라는 진수의 평가처럼 마음속에서 그 누구도 자신을 아래에 둘 수 없는 위치를 은연 중에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그 옛날 한고제나 광무제처럼 포의에서 일어나 한실부흥의 꿈을 자신의 손으로 이루고자 하는 소망도 강렬했을 터이다. 한이 멸망한 이후 반대하는 신하들의 논의를 물리치고 스스로 황제의 직위에 오른것만 봐도 그렇다. 사실 대부분의 신하들이 찬성하고 몇몇 소신있는 신하들만 반대한 것이긴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유비가 큰 집단을 다스린 게 익주 입성 후라서 자료가 적지만, 익주에 입성하자마자 충분히 덕을 베풀어 인심을 얻는 모습도 보이나, 토목 공사나 금주령 등 빡빡한 모습도 보인다. 실제로 익주 입성 후 유비의 이런 빡빡한 정치에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실 이는 엄격한 법치를 주장한 제갈량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빡빡한 것은 아니었다.

의외로 깐깐한 면이 있었는지 은근히 부하들을 자주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완은 직무태만으로 처형당할 뻔했으며, 방통 역시 직무태만으로 높게 보지 않았다. 장완의 경우 오에 항복한 반준의 인척이라서 불이익을 당했을 수도 있으며 방통 역시 주유 밑에서 일했기에 유비가 신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하들의 말을 잘 듣고 그에 따르는 유연한 면도 있었다. 이 부분은 간옹 문서를 참조하면 좋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조가 촉을 치자고 하자 오히려 "유비가 익주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유엽이 말했다. 이로 볼 때 깐깐하게 사람을 가려 자신을 확실히 따를 사람을 남겨놓는 스타일인지도 모른다. 또 그러면서도 눈 밖에 난 신하라 해도 웬만해선 죽이지 않았다. 눈에 거슬리면 꼬투리 잡아 가차없이 숙청하던 조조와 다른 면모다.

7. 무력

유비 패왕설의 2번 문단 참조.

8. 조조의 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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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에 대하여 진수는 "유비는 항상 조조와 반대로 행동하였다. 조조와 하는 행동의 반대의 행동을 하여 세력을 구축하여 대항하였다" 라고 하였다. 덧붙여 그는 "이러한 유비의 행동은 그가 조조에게 대항하여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것보다는 조조가 자신을 받아들일 그릇이 아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평하였다. 실질적으로도 조조가 통일 군주가 되지 못한 연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유비 때문이었다. 유비가 원술 토벌을 명분으로 조조의 세력에서 벗어난 것과 천하삼분지계, 적벽대전이 바로 그 예다. 때문에 유비는 촉을 까는 위빠들에게 대역죄인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 반해 조위의 형법은 무거웠고 세금이 과했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대응한 적이 많다는 사실을 들어 "그나마 유비와 제갈량 덕분에 당시 중국 대륙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중 일부는 조위 아래에서 연명하던 궁핍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촉에 처음 들어갔을 당시에 『구주춘추』의 주석 「방통전」에 '나(유비)와 조조는 물과 불의 관계다. 조조가 엄격하면 나는 관대하게 대한다. 조조가 난폭하면, 나는 인덕에 의지한다. 조조가 책략으로 행동하면 나는 성실하게 행동한다. 언제나 조조와 반대 행동을 취해야만 비로소 일이 성취된다'라고 쓰여 있다.

이처럼 그는 항상 조조와 상반된 모습으로 정치적 행보를 보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조조의 ' 협천자' 논리에 맞서 일찍이 원소가 써먹었던 '한나라의 역적 조조'의 명분을 계승했다. 마침 대표적인 조조 암살 음모인 동승 의대조 사건 최후의 생존자라는 점도 여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 사건 이후 20여년이 지난 한중왕 시점에서도 한중왕에 즉위하며 올리는 표에 이 사건을 언급하기도 했고. 또 유비는 여기에 더해 자신이 한황실의 후예라는 점을 들어 한실부흥을 기치로 걸어 끝까지 조조에 대항했다. 이런 대의명분을 들고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유비는 조조 입장에서 생애 전반기 최대의 적이었던 원소 이후 말년에 이르기까지 가장 성가신 존재였을 것이다.

이렇듯 유비는 조조 중원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던 앙숙이었지만, 당시 문화가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간간이 서신을 교환했던 모양이다. 순욱이 죽었을 때 유비는 서신을 보내 간신이 나라를 망친다며 은근히 조조를 비판하기도 했고[33], 또한 조조가 죽었을 때 조비에게 조문을 위해 조의금으로 예물과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34] 삼국시대에 가장 호적수다운 인물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조조가 유비를 가리켜 자신과 더불어 천하의 단 둘뿐인 영웅이라고 평가한 점과 함께 적벽에서 패한 뒤 유비는 나의 영원한 맞수라고 평가했고, 조조가 한중에서 패하고 유비가 승리한 이유에 대해 법정이 유비를 도와줘서 그럴 줄 알았다고 말했으며, 유비도 언제나 조조와 반대되게 행동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열거한 뒤 생각해 보면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렇다 보니 실제로는 어떠했는가를 떠나 일단 대중적인 이미지로는 조조가 실력주의에 냉철하고 실리 위주, 대를 위해서 소는 비정하게 희생할 수도 있는 효율 정치의 대명사라면, 유비는 인정과 덕과 법으로 사람들을 대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무제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조조가 유비의 존재에 불안감을 내비친 적이 여러 번 있는 것을 생각했을 때,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주인공이 된 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대 최강의 군주였던 조조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서 결국 황제가 된 인물이었고, 삼국지 시대 당시의 여러 군웅들에 비하면 온화한 인물이었으니 역사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안성맞춤이었다. 더하여 유비는 늘상 조조의 제1종 경계 대상이었으니, 악역 조조에게 맞서기에는 유비보다 더 좋은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원래부터 유비를 향한 대중의 인기도 높았던 터라 서주 대학살, 회남, 하북, 한중 지방에서 대규모 백성 강제 이주를 통한 유랑민들 대거 발생, 원소군 투항병 생매장 사건, 황제인 헌제를 허창으로 강제로 모셔온 뒤 그 곁에서 칼을 차고 다녔던 것, 암살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주군인 헌제의 아이를 밴 동귀인 동승 일족, 그리고 황후였던 복황후 일족마저 참혹하게 죽여버리고 자신의 딸을 그 자리에 들어앉힌 일이나, 그래놓고 결국 아들 대에 왕조를 무너뜨린 일, 양수, 최염, 여백사, 순욱, 공융과 같이 토사구팽당한 자들의 처참한 죽음과 같은 이름 높은 악행들로 인해 당대에 이미 넌 그냥 나쁜놈으로 여겨지던 조조에 맞선 상대이니 소설에서 유비가 선역이요 주인공을 맡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9. 인덕과 매력

정사의 유비는 유엽이 유비와 관우의 관계를 일컬어 부자지간과 같다고 하는 등 깊은 인덕을 갖추었고, 연의보다 훨씬 실리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소위 말하는 인덕의 군주로 잘 나타나 있는 편이다.

연의에서는 가장 큰 강점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을 부각시켰는데, 정사에서도 유비를 가까이 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 인간성에 매료되었다. 통치한 곳의 백성들 역시 유비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예외가 있다면 유파 정도. 유파는 사람들이 왜 그런지 궁금해할 정도로 유비를 피해 도망다니다 익주 평정 이후 할 수 없이 부하가 되었다. 그러고도 유비의 황위 등극 반대 등 태클에 태클을 일삼았다. 유비는 '나 아니면 너 쓸 사람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그 재능을 아껴 중용했지만 말이다.

어릴 적 노식 밑에서 공부했을 때, 종친 유원기는 유비를 두고 보통 인물이 아니라 평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대주었다. 정사에서 '같이 공부한 동종 유덕연의 아버지 유원기'라고 언급하며 별다른 칭호를 붙이지 않는 점을 미루었을 때 유비와 가까운 친척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유비의 인간성 하나만 본 채 그런 지원을 해준 것이다. 사람 끄는 매력이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망도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다. 방랑 군주로 떠돌이 생활을 하거나 공손찬, 조조, 원소, 유표의 객장 위치에 있을 때도 그 인망은 잃지 않아서 끝까지 관우 장비, 공손찬의 옛 부하 조운 도겸의 부하 미축, 손건 등의 섬김을 받았다. 이들은 나중에 촉한을 건국하는 것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심지어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를 못 따라갔던 진등은 여러 명사를 칭찬하면서 유비에게는 왕패의 재력이 있다 평하고 공경한다고 이야기했다. 나중에 위나라에서 대성하는 전예같은 인물도 처음엔 자발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유비를 섬겼었다.

병사들이 흩어진 뒤 다시 모이는 것만 봐도 그 매력은 알 만하다. 아무리 힘든 세상이었다지만 싸워서 진 대장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자마자 그를 찾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유비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와 충성심을 알 수 있다. 후한 말, 많은 군주들이 몰락하고 군세를 잃었지만 유비의 경우처럼 패배 후에 알아서 주군을 찾아간 사병 조직은 많지 않다. 거기에 왕침의 위서를 따른다면 유비가 조조의 대장기를 보고 놀라서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간 뒤에도 그를 찾아 돌아온 사병들이 있었다.

이러한 이미지가 잘 드러나는 에피소드가 바로 신야 탈출이다. 유표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은 유종은 아버지가 다스리던 형주를 조조에게 갖다바쳤고, 이에 유표에게 의탁해 신야에서 조조를 견제하던 유비는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신야를 버리고 유표의 장가인 유기와의 연합을 위해 강하로 이동하게 됐는데, 이때 형주의 주민 10만 명이 애걸복걸하며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제갈량을 포함한 모든 신하들은 반대하였으나 유비는 백성들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며 무리를 무릅쓰고 모든 주민과 함께 길을 나선다. 항상 대의명분을 중시해왔을 뿐더러, 천하에 알려진 서주대학살의 악몽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정사 선주전에 따르면 이 일은 제갈량이 반대한 것은 아니다. 조조에게 쫒기는 유비 무리가 십여 만에 이르러[35] 하루에 행군이 10리를 못 갈 정도로 지체되자, 어떤 사람이 "지금 무리 가운데 갑옷을 입은 자는 적으니(군사는 부족하고 피난민은 많은 상태) 이걸 어찌 하겠습니까" 하고 이르었다. 그러자 유비는 "무릇 큰 일을 이룰 때는 필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법인데 어찌 내가 이들을 버리겠소!" 라고 답했다 한다. 훗날 동진의 학자 습착치는 이 말을 두고 "형세가 위급한데도 를 잃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애초에 연의의 제갈량과 정사의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군량도 군사도 부족한 채 적에게 쫒기는 상황에서 백성들까지 데려가 봐야 도망치는 속도만 느려지고 짐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순전히 유비의 정치적 입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비는 그 전에도 항상 백성들의 인심을 얻는 것으로 얄팍하고 미약했던 자신의 정치 생명을 간신히 이어갔으며, 하물며 곧 국가를 건설하려는 마당에 백성은 그에게 꼭 필요한 밑천이었을 것이다.

세세한 면을 보면 당시 유비의 인기가 천하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사에서도 유비가 유종이 항복한 것을 따지러 형주에 갔다가 세가 불리하여 형주를 떠나자 유종의 측근[36]과 형주의 민간인 다수가 유비를 따라갔다는 기록이 있다. 단순히 백성들 뿐만 아니라 유종의 측근마저도 유비를 따르려 했을 정도였으니 당시 그의 정치적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정사에서 언급된 유비의 매력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상대인 조조가 일찌감치 항복하면 받아주는 편이기에 유비의 매력이 더 부각되기도 한다. 항복하면 쫓기지도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38] 유비의 부하들은 처자를 버리면 버렸지 유비와 함께 쫓기는 길을 선택했다. 당장 개국공신인 미축같은 경우는 서주의 대부호였는데 재산과 동생들과 자신의 인생을 당시 아무것도 아니었던 유비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심지어 그 동생이 오나라에 항복하자 수치심을 못이기고 죽어버렸을 정도다.

전해를 따라 서주 구원병으로 파병됐을 때는 굶주린 백성 수천을 거두기도 했다. 정황상 조조의 1차 서주 침공 탓에 발생한 전쟁 난민으로 보이는데, 유비가 끌고 온 병력이 천 명 남짓한 숫자였다는 것과 이런 난민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이 하등 도움될 것 없다는 점을 볼 때 이후 당양 전투 때의 피난민 행렬과 비슷하게 볼 수 있을 듯.

하여간 정사고 연의고 간에 유비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끄는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워낙 확고하게 강조된 부분이라 대부분의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는 유비의 사람 이끄는 매력을 집중 부각시키는데, 조조빠 성향의 창천항로든 유비에게 우호적인 화봉요원이든 이 부분을 잘 묘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유비의 이런 면이 반영되어 매력이 100 아니면 99를 찍고 있다. 삼국지 시리즈의 매력 100 캐릭터는 3의 초선(특정 이벤트로 출현)과 후기 시리즈의 고대무장 조상님 정도다. 그 밖에는 옥새 정도. 반대로 유비 인생 최대의 숙적인 조조는 무력을 제외한 나머지 능력치에서 90 이상으로 출현하고 있다. 매력 수치가 사라진 12와 13에서는 매력을 대체하여 등용 쪽 특기가 높게 책정되는데 어지간히 상성이 나쁜 경우를 제외하면 인재들을 불러모으는데 탁월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제갈량을 얻기 전까지는 유학자들과 영 인연이 없었는데, 문제는 당시 유능한 문사나 지략가들은 대부분 유학을 공부했다는 것. 이런 점에서 유비의 인망은 피지배층에만 인기있는 반쪽짜리 인망이라는 평가도 있다. 유비의 배경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피지배층의 지지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반이 탄탄한 조조와 원소는 일찍부터 많은 인재들을 모았지만[39] 인생의 절반 이상이 방랑이었던 유비는 그런 배경이 없었기에 인재를 모으기가 힘들었다는 것. 진군이나 서서, 전예와 같은 인재도 만나긴 했지만 전자의 경우엔 유비가 중과부적으로 싸우다 박살나면서 세력이 분해되자 할 수 없이 조조에게 갔고 후자는 어머니 병환 때문에 낙향했다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관우가 조조를 버리고 유비에게 돌아간 것과 제갈량이 아무것도 없는 유비의 밑으로 들어간 것은 당시에도 현재에도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다.

그래도 '꽌시'가 있는 경우라면 유비도 상류층과 잘 지내기도 했다. 학연으로 이어진 공손찬이 그러했고 서주에 원군 온 인연으로 이어진 도겸이 그러했으며 황건적의 난 이후 어느 정도 어울렸단 기록이 있는 조조를 상대로도 견제를 받는 동시에 대접받았고, 원담의 벼슬을 천거함으로써 원소와의 연결고리도 만들어 이용해 먹었다. 혈연으로 이뤄진 유표와 유장 역시 마찬가지.

유비가 지배계층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대표적인 일화로 위의 평원상 시기의 일화가 거론된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서주 호족이었던 진등, 미축은 한 명은 유비에게 고평가와 지지를 받았으며, 그 중 한 명은 촉한 개국공신으로 유비와 끝까지 함께 했다. 이 점을 고려했을 때 유비가 유력자들과 인연을 만드는 능력이 아주 부족했던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유비는 생에 유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배신 당한 적이 적은 편이다. 배신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여포, 신의-신탐-맹달이 있는데, 여포는 서주땅에 혹해서 배신을 때려놓고 극에 화살을 맞추는 기행을 보여주며 살려준 사이코스러운 면모를 보여 변덕스러움으로 유명했던 자다. 후자의 경우 유비의 아래 있는 것이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배신을 감행한다.

10. 당대와 후대의 평가

10.1. 당대

"무릇 유비는 인걸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될 것이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使君, 유비)과 나 조조 뿐이오. 본초(원소) 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40]
조조 - 논영회
"유현덕은 품격이 높고 고아하며 신의가 있소. 서주 사람들이 그를 즐거이 추대하니 실로 내 소망에 부합하오."
원소
원술이 답서를 보내 말했다, "내가 태어난 이래 천하에 유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유비가 거병해 나와 더불어 싸웠소. 내가 장군의 위령에 힘입어 유비를 격파했으니 그 공이 세 번째요."
원술
"유비에는 웅대한 재주가 있고 제갈량은 나라를 잘 다스리며 신이 여러 신하들을 헤아려 보건대 유비와 손권에 대적할 자가 없고."
가후
"살펴보건대 유비는 웅재가 있고 민심을 크게 얻었으니 끝내 남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빨리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정욱
"유비는 웅재가 있고 뭇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신 곽가가 보건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며 그가 꾀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곽가
"유비는 용감하고 뜻이 크고, 관우와 장비가 그의 우익이 되어 있으니, 아마도 유비의 속마음을 논의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동소
"유비는 인걸로서 도량이 있고 계략도 있으며 권모로는 위엄과 무략으로써 스스로를 강하게 하고 있으며 만일 그들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두어 제갈량은 다스리는데 밝아 재상이 되고 관우와 장비는 삼군(三軍)을 뒤덮을 만한 용맹으로 장군이 되고, 촉나라 백성들이 이미 안정되었다면, 험준한 곳을 거점으로 하여 요충지를 지켜도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공격해서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유엽
"오늘의 일은 백성이 유능한 이(유비)에게 맡기자는 것이니,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고 뒷날 후회해도 늦을 것이오."
공융
"무릇 허현은 천자의 도읍입니다. 천자는 허현에 계시는데 공은 멀리 북쪽을 정벌하시니, 만약 유표가 유비를 보내 허현을 습격하고 이에 근거해 사방에 호령하면 공의 세력이 꺾일 것입니다."
장료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주유
"지금 사군(使君)을 위해 보기 10만을 모으려 하니, 가히 위로는 군주를 도와 백성을 구제하여 춘추오패(五霸)의 업을 이루고, 아래로는 할지하여 변경을 지키며 공을 죽백에 남길 만합니다. 만약 사군이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저 진등도 사군의 뜻에 따르지 않겠습니다."
"재지가 출중하고 왕패의 재력을 갖고 있는 점에서 나는 유현덕을 공경하오."
진등
유비는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조조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오늘 그가 우리의 경내에 있는데, 이것은 강대한 적수인 것이다.
육손
유비는 관대하고 어질면서도 법도가 있으며 사람을 얻는데 사력을 다합니다. 제갈량은 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화를 알고 바르면서도 모략이 있으니 재상으로 삼을 만합니다. 장비, 관우는 용맹하면서도 의리가 있으니 모두 만인지적으로 장수로 삼을 만합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로, 유비의 지략에다 세 인걸이 그를 보좌하니 무엇을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부간
"촉나라는 서쪽의 속국으로 토지가 험하고 견고하며, 게다가 유비의 통치 방법을 이었으므로, 그들의 수비는 오랜 시간 지탱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전복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화핵
"익주의 선주는 당대의 영제로 저명하며 북방의 평야에서 병사를 일으켰지만, 기주와 서주의 교외가 곤란하게 되고, 원소와 여포의 손에 운명이 쥐어졌던 것을 조조가 구출하여 도와주었으므로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중간에 다시 조조에게 등을 돌리고 같은 뜻을 지닌 친구를 버리고 따로 다른 쪽에 서게 되었습니다."
종회

출처

하나같이 유비를 천하의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적대관계에 있는 인물들은 자신들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황제(皇帝)가 남긴 자손은 팔방(八方)에서 번창하고 있다. 중산정왕(中山)을 다로 내보내 신령스런 정기가 응집하고, 기일에 따라 삶을 받아, 돌연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연(燕)ㆍ대(代)를 출발점으로 하여 예주(豫) 백(伯)ㆍ형주(荊)의 군(君)이 되었으며, 오(吳)와 월(越)은 귀순하여 신뢰했으며, 멀리서 풍모를 우러르며 결맹을 청했다. 파(巴)와 촉(蜀)을 지배하고 용(庸)ㆍ한(漢)을 병탄시켰다. 천지는 질서를 회복하고 종묘는 안정되었으며, 선조가 남긴 기초에 올라 덕망을 전하고 명성을 날렸다. 중화의 땅은 미덕을 사모하고, 서백(西伯)의 그림자를 따랐다. 후인에게 복을 열어주고, 대대로 흥성했다.
양희의 계한보신찬, 소열황제를 찬함(贊昭烈皇帝)

10.2. 후대

한말 크게 혼란해, 재주가 출중한 이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동탁, 여포, (二袁), 한수, 마등, 장양(張楊), 유표의 무리 같은 경우는 주를 아우르고 군을 연이으며 무리는 만 명을 넘어서 큰소리로 꾸짖는 가운데, 모두 한조(漢祖)를 계승할 수 있다고 스스로 이르며, 제환공, 진문공이 되는 것을 가벼이 여기며 힘썼으나, 위무제가 뛰어난 무용, 재간과 모략으로, 평정하고 도륙하며 죄다 없앴다.

당시에 선주의 명성은 미약하고 사람도 적었으나, 용이 오르고 봉황이 일어나듯이 할 수 있어, 예(豫)에서 우두머리가 됐고 서(徐)를 다스렸으며, 형(荊), 초(楚)를 임시 날개로 삼아, 양(梁), 익(益)의 땅에서 날아 올라, 한의 제위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오, 위가 그와 정립했다. 영웅의 재주와 일세에 뛰어난 인물이 아니고서, 누가 이와 같이 이룰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필시 조씨가 한을 폐하였기에, 의당 믿고 따르는 이들을 다스리며 지극히 공정함을 밝혀야 했으나, 도리어 명호(名號)를 부르짖어, 의로운 선비에게 비방당했다.

그가 죽음에 이르러, 제갈량에게 탁고하며 마음과 정신에 두 마음이 없었기에, 진자는 임금과 신하의 지극히 공정함이며, 고금의 아름다운 모범이라 여겼다.
화양국지
세상 사람들의 견해는 위무황제가 처소로 중원을 가졌기에, 유현덕보다 뛰어나다고 이르지 않음이 없다. 나는 현덕이 뛰어나다고 여긴다. 대저 난을 평정할 임금은, 응당 먼저 재상을 거두고 장수를 얻을 수 있음을 근본으로 삼아야지, 홀로 잘 싸우는 것에 의지하기엔 부족하다. 세상 사람들은 현덕이 여포에게 습격당했고, 무제에게 패주당했으며, 군을 일으켜 동으로 내려가다 육손에게 고꾸라졌다고 여기나, 비록 여포에게 습격당했다고 해도, 무제가 서영에게 패하여, 말을 잃고 상처를 입은 위기 만은 못하다. 현덕이 서주로 돌아와 점거했을 때는 형세가 아직 적합하지 못했다. 형주에서는, 유경승 부자가 그의 계책을 쓸 수 없어, 주를 들어 위에 항복했다. 수하의 보기가 수천을 채우지 못해, 무제의 대군에게 패주당했으나, 무제가 여포의 북쪽 기병들에게 잡혔다가, 불을 돌파하던 위급함만은 못하다. 현덕이 육손에게 고꾸라졌으나, 무제가 장수에게 시달려, 앞장서 달아나며, 아이를 잃은 것만 못하다.

만약 고조가 팽성에서 죽었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가 항우(項羽)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교함이 심했을 것처럼, 무제가 완(宛) 아래에서 잡혔다면, 장차 거듭 장수에 미치지 못한다고 일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잔인하고 가혹해, 순문약, 양덕조의 무리 다수가 해를 입었고, 공문거, 환문림 등은 오랜 원한으로 살해당했으며, 동공인, 가문화는 항상 어리석음을 가장하며 스스로 벗어났으니, 양장(良將)을 임용할 수 없었고, 용병하길 30여 년 친정하지 않음이 없어, 공신과 모사에게 일찍이 여러 땅을 봉함이 없었고, 어질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은 친척에게 미치지 않았고, 은혜와 덕택은 백성에게 흐르지 않았으니, 어찌 현덕의 위엄이 있으면서 은혜를 베품이 있었고, 용감하면서 의로움이 있었으며, 너그럽게 감싸면서 크게 다스림과 같겠는가?

제갈공명은 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통함을 알아, 거의 왕좌王佐의 재능인데도, 현덕은 강성한 세력도 없이, 헌신하게 했고, 장비, 관우는 모두 인걸인데도, 복종시키며 그들을 부렸다. 대저 밝음과 어두움은 함께 쓸 수 없고, 선과 악은 함께 운용할 수 없으니, 무제가 비록 안정되고 부강했어도, 그들을 쓸 수 없었는데, 하물며 위급한 때에 있으며, 형세가 약한 땅에선 어떠했겠는가? 만약 현덕이 중원에 웅거했다면, 장차 주실(周室)과 융성함을 겨뤘을 것이니, 어찌 다만 세 준걸에 그쳤겠는가!
태평어람에 인용되고 예문유취에 실린 장보(張輔)의 명사우열론(名士優劣論)
삼왕(三王)이 천하에 거주하며, 그의 자식 또는 손자가, 그의 족속과 더불어, 계승하며 부흥시켰으니, 즉 질서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초절(草竊)이 몰래 배신해, 약탈하며 함부로 웅거해, 마침내 사라졌다. 그러므로 예(羿), 착(浞)를 차지하면 소강(少康)이 일어났고, 견융를 엎으면 평왕이 나타났다. 오(吳), 초(楚)가 참호(僭號)하고, 제후가 왕으로 삼지 않아, 공자는 춘추(春秋) 를 써, 왕에게 정명(正名)을 더해주며, 대략 하나로 합쳤다. 오패(五伯)를 지나 현(顯), 난(赧) 두 주왕周王에 이르니, 왕실은 7읍이 남았고, 천하에서 떼지어 일어나며 칭왕, 칭제해, 주의 거느림이 진실로 이와 같았다. 한이 하늘의 정통을 얻어, 왕망이 찬탈하면 광무제가 있었고, 조조가 훔치면 소열제가 있어, 위, 오가 비록 참호해도, 대저 오, 초와 같았다.

소열제는 타고난 기품이 어질고 후덕했고, 도량은 넓고 굳세, 일세의 영웅으로 높이 솟아, 한실(漢室)을 회복함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으며, 처지가 어려워 여러 번 꺾여도, 엎어지면 더욱 굳세졌고, 엎어지고 자빠지는 때에도, 신의는 더욱 밝아져, 마침내 경명(景命)을 이으며, 천하에 대의를 밝혔다. 임현사능(任賢使能) 하며, 개운하고 깨끗함이 참으로 극치에 달해, 제갈량이 죽음으로 정성을 다하게 했으니, 삼대(三代)의 군신을 다시 보이며, 고조, 광무제가 사라지지 않았다. 국적을 아직 토벌하지 못했고, 국토를 복구하지 못했으나, 군이 엎어지고 죽었으니, 슬프도다!

찬(贊)하길 한의 도(道)가, 환관의 추한 놈에게 멸망해, 운수가 106을 지나, 재앙에 걸렸다. 땅을 쪼개고 해와 달을 나눠, 천자의 지위를 빼내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며, 흉악하게 탐하고 간사하며 사악해, 근원을 훔쳐 함부로 차지했다. 위엄있고 공경하며 삼가는 소열제는, 어질고 삼가며 현명한 도리를 따라, 자신의 한조(漢朝)를 넓혔고, 위엄있으며 씩씩하게 병권을 장악했다. 고조와 광무제를 이으며, 역적을 토벌해 나라를 세워, 손권은 두려워하며 동맹을 청했으니, 조비가 어찌 그의 적수랴! 연(燕)의 남쪽 세 선비와, 융중 한 현명한 이가, 좌제우설(左提右挈)[41]하며, 여러 번 꺾여도 더욱 굳세졌다. 늘그막에 해가 지며 동쪽을 비춰, 빛을 발함이 하늘까지 이르렀으나, 황제의 계통이, 이미 끊어져 다시 전한다.
원나라의 대학자이자 <학경 속후한서>의 저자 학경
공손한 사람이 몸을 굽히는 것이 자신에게 무슨 손해가 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니 이보다 큰 이득이 없는 것이다. 교만한 사람이 포악하게 구는 것이 자신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니 어떤 손해가 이보다 심하겠는가.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 유비는 그의 선조인 한고조 유방에 비하면 그 도량이 엇비슷하다. 그러나 고조는 신하들을 업신여겼기 때문에 청렴한 사람들이 의탁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동공은 잠깐 만나 보고는 곧바로 은둔하였고, 유후 장량은 3만 호의 상을 사양하고 벽곡(辟穀)하였으며, 상산사호는 멀리 피해 갔고 두 유생은 불러도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함께 일한 자들은 하급 관리나 백정, 장사꾼 등 보잘것없는 무리였다.

소열제는 어려서 진원방(陳元方, 진기(陳紀))과 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예절을 익힌 터라 충분히 자신을 굽힐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삼고초려하여 마침내 이윤 여상에 뒤지지 않는 천하제일의 보좌 제갈무후를 얻었고, 자신은 탕왕, 문왕과 나란히 칭해지게 된 것이다. 한나라를 중흥시킨 것은 주나라 선왕(宣王)과 후한의 광무제에 비견되며, 나라가 망할 때에도 영예로움이 있었다. 북지왕 유심은 종묘에서 곡하다 죽었고 제갈첨, 제갈상 부자는 면죽에서 전사하였으니, 이들의 순국은 모두 그의 유업인 것이다. 각정은 후주를 따라 낙양으로 들어가면서 죽어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니, 유선이 어찌하여 이런 충신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선제가 특별하게 대우해 준 것을 추념하여 그에게 보답한 것이다.

선조와 후손의 득실이 어떠한가?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공손함과 오만함의 이익과 손해는 알기 어렵지 않다.
조선의 학자이자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
* 손님: 삼대(三代) 뒤에는 다시 왕도를 행한 자가 없는 것은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 주인은 개연(慨然)히 탄식하면서 말했다. 도학(道學)이 밝지 못하고 행해지지 못한 때문입니다. 한대(漢代) 이후로는 왕위에 있는 자가 도학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오직 지력(智力)만으로 천하를 유지하여 미봉책으로 시일만 넘기려 하였으므로 적막하게도 수천 년동안이 오직 긴 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자(程子: 程伊川을 말함)가 말하기를 주공이 작고하자 백세에 선치(善治)가 없었다고 하였으니 사실입니다.
* 손님: 한대(漢代) 이후로도 글을 읽은 사람이 없지 않은데 이른바 도학(道學)이란 어떤 학문입니까?
* 주인: 고루(固陋)하도다 그대의 말이여! 무릇 도학(道學)이란 것은 격치(格致)로써 선(善)을 밝히고 성정(誠正)으로써 몸을 닦아, 그 학문이 몸에 지녀져 있으면 천덕(天德)이 되고, 정치에 베풀어지면 왕도가 되는 것이니, 저 독서라는 것은 격치(格致)중의 한 가지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글만 읽고 실천이 없다면 어찌 앵무새가 말 잘하는 것과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양나라 원제같은 이는 만 권의 책을 읽었지만 결국 위나라의 포로가 되었으니, 이것도 도학(道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손님: 삼대(三代)뒤에 도학하는 군주는 전혀 없었다고 할지라도 어찌 도학을 하는 선비마저 없었겠습니까?
* 주인: 어찌 그런 사람이 없기야 했을까마는 다만 윗사람이 그들을 현실에 동떨어진다고 의심하여 관직(官職)에 참여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학(道學)을 하는 선비를 진유(眞儒)[42]라고 하는데, 맹자 이후로는 진유가 나지 않다가 천 년이 지난 뒤 비로소 주렴계(周濂溪)가 태어나 오묘한 진리를 발명(發明)하였습니다. 다시 정자, 주자가 계승을 하니 그런 뒤에 이도(斯道)가 크게 세상에 밝아져 마치 중천(中天)의 태양같이 되었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송나라의 군주들이 도학을 알지 못하여 대현(大賢)을 하급 관리에 내버려두어 이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 손님: , 이후로 영명(英明)한 군주가 없지 않았는데 어찌 모두 진유를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다만 서로 만나지 못하였을 뿐일 것입니다.
* (중략)
* 주인: 만약 진유가 소열(昭烈: 유비를 말함)을 만났다면 아마 조금은 그 뜻을 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열이 공명 세 번 찾아갔을 적에 공명은 신분이 천하고 나이도 젊었으며, 소열은 지위도 높고 나이도 많은데다가, 공명에 대해서는 다만 이름만 들었을 뿐 깊이 알지도 못하는 처지였지만 부지런히 그리고 간곡하게 두 번 세 번 찾아갔으니,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없고서야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공명이 정말 진유였다면 소열이 반드시 존경하고 신임했을 것입니다. 나는 후세의 임금 가운데서 오직 소열만이 아마 진유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호문답(東湖問答) 군신상득지난(君臣相得之難) 저자 이이

[1] 한국의 고려사에서도 왕건의 정통성과 무관한 견훤은 그저 왕을 참칭한 반역자에 불과했다고 폄하하지만, 왕건의 정통성과 연루되어 있는 전대 국왕 궁예는 도중에 미쳐서 폭군이 되었다고만 할뿐 그에게 정통성이 없었다고 서술하진 않는다. [2] 진나라는 불과 몇십 년만에 멸망했으므로 제대로 지속된 통일 국가는 한나라가 최초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한족 문화권이 형성된 것은 한나라 때였고 중화 문화권이 형성된 것은 당나라 때였다고 배운다. [3] 진수가 이 글을 작성한 시점에서 이미 한나라는 멸망했지만 멸망한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심지어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은 한나라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기며 자신들을 한족이라 칭한다. 한고조를 평하자면 앞의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라는 수식어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4]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이 '유비는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고 저들의 기량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란 것을 헤아리고' 란 부분이다. 유비가 조조의 밑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조조가 유비를 받아들일 그릇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5] 다만 이 글은 유비의 혈통을 논하며 진짜 사칭일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데, 지금은 어지간한 유비까나 촉까가 아닌 이상 종친은 맞다고 인정하고 있다. [6] 배잠의 형제인 배휘의 6대손이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이다. [7] 다만 서주군은 도겸 시절 조조와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감안해야 한다. [8] 작계의 자세한 내용은 촉한멸망전 항목 참고. [9] 정사의 유비는 오히려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화를 내는 경우가 꽤 있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말수가 적고 표정에서 희노애락을 잘 드러내진 않았다지만. [10] 여기서 말하는 패왕은 문장으로 보아 순자가 말하는 패도(覇道)의 군주를 말하는것 같다. 이는 '덕이 온전치 못하고 의가 완전치 못하나 대체로 천하의 도리가 모여있음. 형벌과 포상이 매우 분명하여 천하와 뭇 신하들의 신임을 삼. 한번 선포한 정령을 바꾸지 않으니 백성을 속이는 일이 없음. 한번 협약을 맺는다면 동맹국을 속임이 없음. 옛날의 패자들은 이같이 하였으므로 변방의 나라이면서도 천하를 호령했고, 강대하여 중원을 위태로이 하였음. 이른바 '신信이 우뚝 서면 패자가 됨'은 이를 가리킴. [11] 적과의 형세를 살펴보니 대의명분이 없다고 반대했는데 유비가 분노하여 남만에 가까운 벽지의 영창종사로 좌천되었고 이후 제갈량의 남정때 보좌하게 된다. [12] 유파가 온 천하에 기량이 좁음을 알리는 것이라며 상소를 올려 반대했는데 이에 편승해 간언하다 처형되었다. 다만 유파는 정무적 고려와 그의 재능을 아껴서 살려준다. [13] 조조는 이 외에도 토사구팽이라던지 민간인 학살이라든지 역적질 등 여러가지 실책을 저질렀다. 역적질의 경우 협천자를 칭하면서 황제를 겁박했는데, 조조 외 군웅들은 협천자라는 명분이 없었기에 대놓고 하지 못한 점도 있다. [14] 한복도 원소를 이용하거나 방해하는 등 교활한 면이 있었지만 어쨌든 항복하면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은 원소다. 조조더러 도주한 한복을 보호하는 장막을 죽이라고 한 것은 덤. [15] 보통 하극상만 배신이라 보거나 원술이 정말 손책을 아꼈다는 주장도 있지만, 손책 입장에서 보면 신뢰를 배신한건 원술이다. 반면 손책은 정식으로 원술에게 절연했으므로 배신은 아니다. 원술이 칭제했다는 명분도 있었고. [16] 형주인들이 유비를 따라 남하한 것을 유비에 대한 호감보다 조조에 대한 반감에서 찾을 정도로 당대부터 조조의 악명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17] 여담이지만 이것도 당대 학자들은 비판 안 했고 오히려 '유장이 땅 뺏긴건 자연의 이치구만 뭘'하고 너무 당연하다며 넘겼다. 이런 부분을 비판한건 후대 학자들이다. [18] 첨언하자면 딱 그 부분만 비판한 것이 아니라 형주를 얻지 못해 이후 손권과의 관계가 꼬인 것에 대한 비판에 포함된 것이다. [19] 연의에서 나오는 장비의 말 도둑질은 연의의 창작이며, 삼국전투기처럼 조조가 꾸민 일로 재창작한 경우도 있다. [20] 나중에 귀순한 하후패에게 유선이 친척이라고 잘 대해줬는데 장비에게 하후씨가 시집온 것(야사에서는 장비가 어린 하후씨 처녀를 데려다 취했다고 나온다.)을 말하며 이 역시 이런 상황의 연장선이다. 유비에게서 주요 신하들을 떼어놓기 위해 결혼 공세를 펼쳤던 것. [21] 장비가 하후연의 조카딸 하후씨를 납치했다고 위략에 적혀있는데 이는 장비에게 벼슬만 아니라 하후씨 집안의 사위로서 인척으로 삼으려다가 실패하자 납치라고 언플했을 가능성이 높다. [22] 연의에서는 이런 객장들을 전부 거대세력의 신하들로 묘사했지만 실제로 유비, 장패, 이전, 이통 등의 독자세력이 있던 군벌들은 거대세력과 제휴하던 소세력으로 동등하지는 않지만 신하가 아니라 하나의 외교대상으로 대우 받았다. [23] 그리고 연의와 정사 통틀어 다른 사람도 아닌 관우가 원소의 상장인 안량을 직접 죽이기까지 했다. 당연하지만 원소 세력 내부에서 유비를 의심하며 참소하는 목소리들이 나왔을 테고 원소 역시 마냥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니만큼 유비도 이전에 조조의 객장으로 있었을 때처럼 계속 원소 곁에 있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를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24] 유비 본인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 조조랑 비교하면서 자신이 처음으로 도의에 어긋난 일을 조조처럼 저질렀다고 할 정도였던 것. [25] 당장 한국사의 고구려와 백제의 사례를 봐도 보장왕과 의자왕은 당으로 압송되었을뿐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지만 부흥운동의 구심점은 다른 인물들로 이들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헌제를 죽은 사람 취급한 덕에 헌제의 목숨이 그나마 붙어있을 수 있기도 했다. 유비가 헌제 복위 따위를 내세웠다면 조비 성격에 가만 둘 리가 없었으니 유비가 칭제를 해버린 이상 헌제가 실제로 살아있는 편이 명분상 더 낫기도 했다. [26] 또한 명분상으로도 이미 조비가 찬탈을 한 이상 유비가 헌제 때문에 왕위에만 머물러 있다면 이는 왕이 황제에 개기게 되는 것이므로 오히려 명분이 떨어진다. 즉, 이 상황에서 한중왕에만 머문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조비의 찬탈을 용인한다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27] 선주전을 보면 유비가 서주의 호족, 백성들의 추대를 받고도 서주를 통치하는 것을 사양했다고 하는데 진군전을 보면 서주 사람들이 그를 대환영하니 유비가 "가 봤자 원술이랑 여포 때문에 힘들어지게 될 텐데, 그냥 가지 마시죠?"라는 진군의 조언을 듣고도 기어이 서주로 갔다는 서술이 있다. 즉, 선주전의 서술은 일종의 겸양으로 보이며 본심은 그 역시 서주를 아우를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28] 사실 이건 유장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조가 원소의 땅을 차지할 때 원소가 정치를 잘해서 꽤나 시간이 걸린 반면, 유장은 항복하기 전에 자신의 입으로 '우리 부자가 20년간 은덕을 베푼 적이 없다'며 자조하고, 정사를 집필한 진수가 '유장은 영웅으로써의 자질이 없어, 관직이나 땅을 뺏긴건 자연스러운 이치이니 불행이라 할 수 없다.'라고 평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유장이 축출되고 유비가 익주를 완전히 자신의 땅으로 만드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고, 동맹을 깨버리고 촉의 형주 영역을 빼앗은 오나라가 유장의 신변을 확보하자 곧바로 명목상으로나마 익주목으로 삼아 촉을 흔드는 시도를 했지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는 유비의 능력이 엄청난 것과 함께 유장이 정말 능력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9] 유비와 손책 모두 민중을 대할 때는 충분한 인덕을 갖추었지만, 유비와는 달리 손책은 강동의 기성 세력들을 상대적으로 포용하지 못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30] 손책에 대해 너무 평가가 박하다 볼 수도 있지만, 한복을 축출하고 기주를 삼킨 원소 역시 유비와 비슷하게 기성세력들을 포용하면서도 일부 한복 친위세력 외에는 큰 반발을 산 적이 없음을 본다면 손책의 기성 세력에 대한 포용력은 뛰어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31] 조조는 서주 대학살이나 황제 및 지식인 탄압 때문에 당대에 악으로 규정되어 있던 인물이다. 유비 같은 후발 군웅을 키워주고 정당성을 부여할 여지를 만든 것이 바로 조조 본인인 셈. 정책적으로도 둘의 성향은 판이했는데, 후일 유비와 제갈량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할 정도였으니 촉의 정책은 상대적으로 민중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2] 물론 처음부터도 민심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정치적 기틀 만큼은 한결같았다. 다만 저 시점부터 그것을 현실과 맞게 조율해나가는 모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났을 뿐. [33] 유비는 순욱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늙은 도적(조조)이 죽지 않으니 천하에 아직 환란이 끝나지 않았다'고 분노한 적이 있다. 또 《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유비가 촉에 있으며 복황후가 조조에게 죽었다는 일을 듣고는 발상(發喪)했다고도 한다. [34] 그러나 조비는 예물은 받고 이 사신을 죽였다. [35] 병사들과 피난민을 합친 수치였을 테니 연의의 묘사대로 10만 명 모두가 민간인은 아니었을 것이나 갑옷입은 자가 적었다고 언급되었으니 민간인의 수가 적어도 수만은 족히 넘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36] 연의에서 유비를 살리는데 큰 도움을 준 이적(삼국지)이 대표적이다. [37] 이 내용은 배송지가 각주로 단 위서에 나오는 기록이다. 엄밀히 말해 정사는 아니고, 배송지는 스스로 각주를 덧붙이면서도 '이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기록의 신뢰성을 비판했다. 당시 유표의 정황을 보았을 때 유일하게 형주의 호족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던 유비에게 무게를 실어줌으로서 기반이 없는 자신의 후계를 보호하려는 시도가 아니면 모를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대단히 낮다. 어찌보면 유비가 죽으면서 제갈량에게 한 말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 말 역시도 진심이라기보다는 죽기 전에 유비의 속내를 떠보려는 계략이었거나, 아니면 유기의 후원자로서 유비의 권위를 높여주려 했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유비의 행적을 보면 좌우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유종을 공격하지 못하거나, 이후에도 유기가 살아있는 동안은 형주의 지배자를 자처하지 않고 공식적으로는 후원자에 머물러있는 등 마음의 빚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후자 쪽이 좀 더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38] 특히 장비 미축 등은 조조 밑에서 중랑장과 같은 높은 자리에 임명되었지만 하나같이 벼슬을 버리고 유비와 함께 쫓기는 길을 선택했다. 장비야 거병동지기는 했으나 하후연의 조카 하후씨와 혼인시켜 인척으로 삼을 만큼 대우를 받았다. 관우가 두말 할 것도 없이 두터운 대우를 보장받았음에도 유비의 소식을 알자마자 미련없이 유비를 찾아 떠났다는건 잘 알려진 이야기. [39] 조조는 후한 말의 실질적 지배 계층인 환관 집안(할아비 조등은 십상시를 쥐락펴락하는 진짜 실세였고, 문자의 옥 때에는 청류파의 존경까지 얻었다)이 었고, 원소는 명문가의 자식이다. 원소같은 경우는 어머니가 노비기에 유비와 비슷하게 자수성가한 유형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지만. [40] 이는 원소를 저평가할 때 가장 인용되는 문구지만, 일반적인 창작물의 묘사와 달리 조조가 원소를 강하게 의식하는 장면이 사서 여기저기 나오고, 조조 쪽이 원소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을 개연성이 큰지라, 오히려 원소를 가장 견제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까내린 것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당시 비빌 언덕도 없이 사실상 제 손 안의 물건이나 진배없었던 유비를, 중국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양대 최강 군벌인 원소와 조조 자신하고 동렬로 놓고 논평한 것만으로도 조조가 유비를 비범하게 보았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말뿐만인게 아닌데, 이후 유비가 서주로 튀어서 다시 서주를 장악하자 원소와 사이가 안 좋은 상황에서 신하들의 만류에도 '유비는 인걸이니 지금 쳐야한다'며 친히 군대를 이끌고 서주를 공격한다. [41] 왼쪽으로 끌고, 오른쪽으로 이끈다는 뜻으로, 서로 의지(依支)하고 도움을 이르는 말이다. [42] 진정한 선비라는 말로, 천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신하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