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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광장에서 바라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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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어: Monumento Nazionale a Vittorio Emanuele II
1. 개요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랜드마크이자 기념관. 근대 이탈리아를 통일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조국의 제단(Altare della Patria)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2. 역사
1878년 1월에 몇 천년 만에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국왕에 올랐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사망하자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돈을 기부했다.[1] 당시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이탈리아를 정신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권위를 높일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Padre della Patria', 즉 국부로 추앙하면서 그를 위한 거대한 기념관을 짓기로 결정했다. 기념관을 짓기로 결심한 이탈리아 정부는 그 위치를 어디에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장소였던 카피톨리누스 언덕 북쪽에 기념관 부지를 잡았다.[2]이탈리아 정부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부지를 잡은 후 약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쳐서 원래 있던 건물들을 모조리 철거했다. 워낙 카피톨리누스 언덕이 사람이 거주한 지 오래된 장소이고 상징성도 크다보니 한꺼번에 다 철거하지 못하고 조금씩조금씩 철거하다보니 시간이 굉장히 지체되었던 것이다. 이때 철거되었던 건물들 중에는 심지어 중세 시대에 지어진 고건물들도 많았지만 정부는 그냥 밀어버렸다. 로마 시내가 워낙 오래되어서 함부로 개발도 하지 못해 아직 제대로 된 근대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 이탈리아 측에서는 이 기념관을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처럼 국가의 상징으로 만들고 싶었고, 때문에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을 따라 거대한 기념관 건축을 계획했다.[3]
이후 레오나르도 비스톨피, 아우구스토 리발타, 피에트로 카노니카 등 당시 이탈리아에서 쟁쟁하던 조각가들이 몰려와 본격적인 기념관 공사를 시작했고, 1911년 6월 4일에 이탈리아 통일 50주년을 맞아 부분적으로 낙성식을 열었다. 다만 낙성식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기념관의 크기가 컸기에 완전히 완공되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설계가 변경되어 10년 후에는 공사 중인 기념관 내부에 '무명용사들의 묘'가 들어서기도 했다.[4] 묘에 묻힐 시신은 특별히 선별된 11구의 신원미상의 전사자들 중 한 명을 고르도록 했으며,[5] 이 시신은 1921년 11월 4일에 국가장으로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앞에 안치되었다. 현재에도 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앞에 가면 2명의 군인들이 정복을 차려입고 무명용사의 묘 앞에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6] 어찌되었든 기념관은 부분적인 낙성식 이후 24년만인 1935년에 완공되었다.
1922년 이래 점차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판치기 시작한 이래 파시즘의 수괴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애국심과 국수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파시즘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그 앞에서 여러 차례 대규모 열병식을 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줄을 잘못 서서 완전히 패망한 이후, 기념관에 붙어있던 파시즘 관련 장식들은 연합국에 의해 모조리 폐기처분 당했고, 다시 국가와 국민을 기리는 기념관 본연의 목적으로 되돌려 놓았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들이 기념관을 지나치게 구태의연한 유물 정도로 여기기 시작했고, 이탈리아가 공화국이 된 지 50년은 넘은 21세기 들어서는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이탈리아 대통령이 기념관을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건물 목록에서 삭제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3. 모습
조국의 제단[7] | 청동상 |
무명용사의 묘와 로마 여신상을 합쳐서 '조국의 제단'이라고 따로 부른다. 국가와 조국을 수호한 국민들에게 바치는 제단으로, 이탈리아 내에서는 이 제단 때문에 아예 기념관을 조국의 제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마 여신상은 황금빛 벽에 새겨진 부조 형태로 세워져 있어 굉장히 눈에 띄는 편이고,[8] 그 바로 아래에 무명용사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기념관의 핵심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청동 기마상이다. 엔리코 치아라디아의 작품으로 높이는 12m, 길이는 10m, 무게는 50톤에 달한다. 아래에 대리석 받침대가 있는데 이 받침대의 높이까지 합하면 높이가 무려 24.8m에 달해 상당히 높아보인다. 이 대리석 받침대에는 14개의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의인화한 인물들이 새겨져 있다. 다만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14개의 도시들을 새겨놓은 것이 아니라 사보이아 가문이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직전에 각기 다른 왕국[9]의 수도였던 14개의 도시들을 새긴 것이다.
기마상 뒤편으로 길게 세워져 있는 주랑 열주들을 '포르티코'라고 부른다.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들로 이루어진 기념관의 포르티고는 약간 타원형으로 휘어진 형태를 하고 있으며 서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길이는 약 72m이고 16개에 달하는 기둥의 높이는 15m이며 주두에는 아칸투스 잎이 장식되어 있다. 참고로 이 기둥의 개수인 16에도 상징적인 의미가 숨어있다. 각각의 기둥 바로 위에 있는 코니스에는 이탈리아의 16개 지방을 상징하는 조각상들이 하나씩 붙어있다.[10]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열주들로 이루어진 상징적인 입구를 '프로필라이아'라고 한다.[11] 기념관에도 이 프로필라이아가 양쪽에 하나씩 총 2개가 있다. 기념관의 프로필라이아 위에는 각각 청동 사두마차상이 하나씩 얹혀져 있으며 이 사두마차상에는 승리의 여신이 타고 있다.
[1]
이탈리아 통일의 3걸로 불리는
주세페 마치니,
카밀로 카보우르,
주세페 가리발디에 비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역시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하였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손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등 후손들의 연이은 삽질로 그 빛이 바랬고 지금은 가리발디가 떠먹여준걸 날로 먹었다고 알고 있는
이탈리아인도 많을 정도로 위상이 떨어졌다.
[2]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로마 제국 시절 최고신
주피터의 대신전이 있던 자리로, 고대부터 로마의 최고 중심지였다.
[3]
기념관 설계를 맡은 건축가 주세페 사르코니는
페르가몬 박물관의 페르가몬 제단 등 옛
헬레니즘 양식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념관을 로마 시대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는 만남의 장이었던
포룸처럼 짓고 싶어했다.
[4]
설계를 변경해서 무명용사들의 묘와 여신 로마의 조각상을 추가하자는 것은 군인
줄리오 두헤의 아이디어였다. 이 주문을 받은 주세페 사르코니는 설계를 변경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청동 기마상 바로 앞쪽에 로마를 상징하는 여신상을 세운 후, 그 아래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성화를 점화하고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묘를 만들었다.
[5]
참고로 이 시신을 고른 사람은 마리아 베르가마스라는 한 여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유일한 자식을 잃은 피해자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바람직한 어머니상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기념관에 묻힐 시신을 골랐다.
[6]
이 위병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당연히
이탈리아군에서 지급받은 것인데, 약 10년 주기로 교체된다고 한다.
[7]
황금빛 벽을 배경으로 서있는 로마 여신상 아래에 있는 것이 무명용사의 묘이다. 그 옆에 2명의 위병들이 경호를 서고 있다.
[8]
참고로 이 여신상은 당시 여신들의 모습을 창이나 칼을 들고 있는 호전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던 유럽의 관행을 깬 것이다.
[9]
교황령,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
토스카나 대공국,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등
[10]
건축가 주세페 사르코니는 이 열주를 설계할 때에
포로 로마노의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11]
이 프로필라이아를 통해서 꼭대기의 포르티코가 있는 층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들어가려면 돈을 추가로 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