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同盟運動 /Non-Aligned Movement(NAM)
1. 개요
동맹에 속하지 않은 국가들의 중립적 외교정책 노선 운동. 제3세계 국가들이 중심이 된다.2. 상세
비동맹운동에 따른 국제기구는 유고슬라비아, 인도, 인도네시아, 가나와 이집트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반둥 회의에서 탈식민 국가들의 연합으로서 최초 구상되었고 1961년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설립되었다. 상술한 탈식민화에 바탕한 배경 덕분에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제3세계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비동맹운동 자체는 강대국과의 쌍무적 동맹관계를 가진 국가들을 가입국으로 승인하지 않으나, 가입국 대부분이 비동맹운동 가입 이후에 동맹관계를 형성했거나, 느슨한 동맹관계에 있었던 국가들도 있었다. 북한도 가입 당시 소련과 중국과 깊은 군사동맹 관계에 있었으나, 소련 해체이후 비동맹운동을 중시하며 반 서방 정책을 펼쳤다. 북한에서는 비동맹운동을 '쁠럭불가담운동'으로 부른다.한국 역시 가입을 시도하였고 1975년 리마 비동맹 외상회의에서 한국의 가입안이 심의되었다. 이 과정은 대단히 흥미롭고 복잡한 문제지만 단순히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이 거부되었다는 정치적인 설명이나, 한미동맹이기 때문에 '비동맹'이 아니라서 거부되었다는 단조로운 설명만을 찾아볼 수 있지만 당시 외교문서들을 확인해보면 실상은 대단히 복잡했다.
북한의 경우 별 이의 없이 즉시 가입안이 통과됐다. 남한의 가입안은 사우디아라비아, 가봉 등의 강력한 지지로 인하여 과반수 이상의 국가들이 한국 가입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회의 개최 직전에 북베트남에게 멸망해서 괴뢰국으로 전락한 남베트남 공화국 외상의 호소와 쿠바를 비롯한 친북 국가 외상들의 행패에 가까운 난동 속에서 표결조차 못하고 부결되었다. 비동맹운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이집트는 북한의 갖은 로비에도 불구하고 중립에 가까운 자세를 유지했고 인도는 딱히 남한에 억하심정은 없었지만 한미동맹을 이유로 기술적인 이유에 따라 반대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 이후 한국은 옵저버 국가로 참가하며, 한국 대표를 총회 때마다 보내기도 하였다.
북한은 비동맹운동 가입을 외교적 대승으로 선전하였지만 북한의 희망사항과 달리 비동맹운동은 반미의 강철대오가 아니었고 비동맹인 것과 무관하게 미국과 실리적인 관계는 다 가지는 것을 넘어 친미 국가들도 나름대로 가입한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비동맹운동을 자기네 반미 외교의 선전장으로 활용하려다가 외면받기도 했다. 1976년 9월 13일, 헝가리 대사관과의 면담에서 외교부의 헝가리 담당자는 소련과 중국 모두 믿을 수 없으나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비동맹국가들이라고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냉전기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실질적 맹주에 인도, 이집트, 가나와 인도네시아가 주요 국가들이었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유고슬라비아가 멸망한 후에는 후자 4국이 맹주로 꼽힌다. 당장 1961년 운동 성립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이 5국의 지도자들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 자와할랄 네루, 콰메 은크루마, 가말 압델 나세르와 수카르노였기 때문. 중국도 과거 냉전시절 소련과 갈등을 빚으면서 여기에 발을 좀 걸치기도 했다.
애초에 운동의 성립 배경이 냉전기 급격한 양극화 즉, 제1세계와 제2세계 블록들로 세계가 나뉘어지던 것에 대한 반발때문이었다. 그렇기때문에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는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맹주국인 유고슬라비아는 내전으로 분열되었고 유고슬라비아의 계승국들은 비동맹운동 가맹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한편 냉전 이후 제1세계의 확장으로 몰타와 키프로스가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현재 유럽에 남은 가맹국은 벨라루스 뿐.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동의 가맹국이 늘어난것도 2011년 아제르바이잔[1]과 피지의 가입이 다다. 따라서 현재 비동맹운동은 단순히 블록 불가담 뿐만이 아닌 개발도상국들의 착취 문제나 남북 문제와 같은 새로운 존재의의를 찾아 나서는 것이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