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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7 19:36:19

장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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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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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 행궁 <colbgcolor=#fff,#1f2023> 화성행궁
성문 장안문(북문) | 창룡문(동문) | 팔달문(남문) | 화서문(서문)
수문 화홍문(북수문) | 남수문
장대 동장대 | 서장대
돈대 동북공심돈 | 봉돈 | 남공심돈 | 서북공심돈
적대 북동적대 | 남동적대 | 남서적대 | 북서적대
노대 동북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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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종주
장안문 종로/ 화성행궁 팔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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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gan Gate

1. 개요2. 그 외

1. 개요

수원화성의 북문이자 정문[1]이다. 그래서 이곳을 칭할 때에 북문이라고도 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910 (북수동) 소재.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 18년(1794년)에 정조의 부친 되는 사도세자의 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할 때 다른 수원 화성 성곽과 함께 건립되었다.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시)에서 따온 것이다. 장안은 그 자신이 수도를 가리키는 대명사쯤 되기도 한다.

높이 3.8 m, 너비 3.6 m, 두께 7.9 m에 달하는 홍예 위에 2층으로 된 누각이 설치된 전형적인 성문 구조로서, 문루의 높이는 상하를 합하여 13.5 m이고, 좌우의 너비가 18 m(10칸)에 옆 너비가 9 m(5칸)이다.
파일:attachment/수원화성/Suwon.jpg
6.25 전쟁 휴전 직후 찍힌 사진. 'THIS IS SUWON' 표지판이 눈에 띈다.
일제강점기 때 장안문과 팔달문을 잇는 종로 확장 공사로 성벽 일부가 헐렸다. 그러나 남문인 팔달문과는 달리 옹성은 남아있었지만 하필이면 1950년 6.25 전쟁 때 폭격을 당해 문루가 반파되고 옹성과 성벽에는 무수한 총알 자국이 생겼다. 휴전 후 그나마 남아있었던 반쪽 문루마저도 무너져 버리고 한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976년 화성 복원사업 때 원래대로 복원됐다. 그래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보물로 지정된 팔달문이나 화서문과 다르게 보물로 지정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팔달문에 있는 것처럼 장안문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 형식의 로터리 교차로가 있었다. 그러나 2006년 장안문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는 복원 공사를 진행하면서 로터리 서쪽은 아예 없어졌고, 동쪽 부분은 도로 위로 육교를 개설하여 그 위로 성벽을 연결시키는 구조가 되었다. 이 때문에 로터리 교차로는 일부만 남으면서 변형된 십자 형태의 교차로가 되었다. 이 공사로 장안문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되어 화서문이나 화홍문 - 창룡문으로 갈 수 있게 됐다. 한편, 화서문 방면으로는 장안 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한다.

장안문 앞에 있는 장안문 교차로는 정조로(종로)와 팔달로가 만난다.

2. 그 외

서울 숭례문보다 크다고 한다.
[1] 대한민국에서는 대체로 남향을 선호하기 때문에 남문인 팔달문을 정문으로 생각하는데, 수원 화성에서는 왕이 북문으로 행차하기 때문에 북문을 정문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