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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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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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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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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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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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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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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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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전쟁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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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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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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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 |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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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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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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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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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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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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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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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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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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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봉기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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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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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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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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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벌지 전투(아르덴 대공세) 독일어: Unternehmen Wacht am Rhein(라인을 수호하라), Ardennenoffensive 영어: The Battle of the Bulge, Ardennes Counteroffensive 프랑스어: La bataille des Ardennes, Opération Wacht am Rhein 네덜란드어: De Slag om Ardennen, Ardennenoffensief |
||
제2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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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당시의 지도 | ||
날짜 | ||
1944년 12월 16일 ~ 1945년 1월 25일 | ||
장소 | ||
나치 독일, 벨기에, 룩셈부르크, 아르덴 숲 일대 | ||
교전국 |
[[틀:깃발| 프랑스 [[틀:깃발| ]][[틀:깃발| ]][[캐나다 자치령| ]] |
]][[틀:깃발| ]][[미국| ]]|
지휘관 |
[[틀:깃발|
연합군 총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오마 브래들리| ]](제12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코트니 호지스| ]](제1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조지 S. 패튼| ]](제3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알렉산더 패치(제7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윌리엄 H. 심슨(제9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앤서니 맥콜리프( 제101공수사단 부사단장)[1] [[틀:깃발| ]][[틀:깃발|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제21집단군 사령관) |
]][[틀:깃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서부전선 총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핫소 폰 만토이펠| ]](제5기갑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요제프 디트리히| ]](제6SS기갑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에리히 브란덴베르거(제7군 사령관) |
]][[틀:깃발| ]][[발터 모델| ]](B집단군 사령관)
결과 | ||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
나치 독일 멸망의 가속화[2] | ||
전력 |
◆ 12월 16일 기준 - 병력 228,741명 - 6개 보병사단 - 2개 기갑사단 - 전차 483대 - 장갑차 1,921대 - 대전차포/각종 포 971문 - 돌격포 499문 ◆ 1월 16일 기준 - 병력 700,520명 - 22개 보병사단 - 8개 기갑사단 - 2개 기갑여단 - 전차 2,428대 - 장갑차 7,079대 - 대전차포/각종 포 3,181문 - 돌격포 1,912문 |
◆ 12월 16일 기준 - 병력 406,342명 - 13개 보병사단 - 7개 기갑사단 - 1개 기갑여단 - 전차 557대 - 장갑차 1,261대 - 대전차포/각종 포 4,224문 - 돌격포 667문 ◆ 1월 16일 기준 - 병력 383,016명 - 16개 보병사단 - 8개 기갑사단 - 2개 기갑여단 - 전차 216대 - 장갑차 907대 - 대전차포/각종 포 3,256문 - 돌격포 414문 |
피해규모 |
[[틀:깃발| - 전사 19,276명 - 포로/실종 23,554명 - 부상 47,493명 - 전차/포 800대 이상 손실 - 항공기 647대 손실 [[틀:깃발| ]][[틀:깃발| ]][[영국군| ]] - 전사 200명 - 부상 969명 - 실종 239명 |
]][[틀:깃발| ]][[미군| ]]
[[틀:깃발| - 전사 25,652명 - 포로/실종 27,582명 - 부상 41,600명 - 전차/포 800대 이상 손실 - 항공기 800대 이상 손실[3] |
]][[틀:깃발| ]][[독일 국방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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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12월 16일부터 1945년 1월 25일까지 서부전선에서 이루어진 독일 국방군 최후의 대공세이며 겨울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다. 아르덴 공세(Ardennes Offensive),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미국에서 주로 쓰이는 명칭), 또는 바스토뉴 공방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여기서 벌지(Bulge)란 '돌출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전략지도를 보면 독일군 전선이 서쪽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다.
벌지 전투는 서부전선에서 점점 불리해져 가고 있던 독일군은 연합군이 장악한 제공권만 없다면 승산이 있다 여겨서 연합군 공군이 뜰 수 없는 기상 상황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걸고 감행한 회심의 반격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 독일군은 의외의 일격으로 연합군에게 피해를 주며 연합군의 진격을 6주 늦추었지만 동부전선의 병력을 대거 빼간만큼 제3제국의 패망을 6개월 앞당겼다. 더불어 베를린에 서방 연합군 대신 소련군을 들이게 되는 결과를 맞이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춘계 공세( 루덴도르프 대공세)의 재현이다. 처음 작전안이 제기된 후 장성급 지휘관들의 반대에 부딪히지만 참모본부에서 이를 강행하는 과정도 상당히 유사하다.[5]
임팔 작전과 더불어 보급을 적에게서 탈취한 것에 크게 의존하려 한다면 어떤 참혹한 결말이 나는지 보여주는 전투이며, 임팔 작전과 벌지 전투는 해당 전투로 인해 국가의 패배를 앞당겼다는 것도 공통점[6]이다. 그러나 승패의 결과만 공통점일 뿐, 작전 전개 과정과 미군에게 상당한 출혈을 강요한 점 등에서 차이점이 더욱 많은데 임팔 작전은 일본군은 나름대로 있을 건 다 있는, 심지어 독립만 하면 바로 추축군이나 다름없던 인도군에게 약간의 지원까지 받은 상태였는데도 무타구치 렌야가 개념 없이 일을 저질러서 다 말아먹은 거라면[7] 독일군의 전황은 프랑스 침공 당시의 일선 지휘관들이 물러났거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했거나, 보다 직접적인 위협으로 판단된 동부전선에 상당수가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OKH(육군최고사령부)는 동부전선의 지휘관들을 서부전선으로 전속시키기도 했지만 아무리 유능한 지휘관이라 해도 기갑, 항공 부대의 연료와 이를 운용할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고 풍부한 전투 경험이 있었던 정예 병력과 상당수의 기계화 전력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이후의 팔레즈 포위전, 동부전선에서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의 거듭되는 격전을 겪으면서 상실한 후였기 때문이다.
2. 배경
연합군이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발목이 잡혀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고,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의 방어선을 밀어내는데 실패해 기껏 점령해놓은 항구들을 쓰지 못하게 되자, 결국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진격을 멈춘 덕분에 서부전선은 교착 상태로 돌입하였다. 게다가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들을 때려잡고 다니던 소련군도 8월 1일 바르샤바 방면 선두 부대였던 제 2전차군이 발터 모델이 재조직한 독일군에 의해 격퇴당한 이후 보급 문제와 후방 정리 등의 이유로 진군을 멈춘 상태였다.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성공한 후,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3개월 만에 49개 사단으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단의 병력도 원래의 절반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8] 독일이 라인 강에 세워 놓은 방어선이 연합군의 진격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지만, 이 방어선이 뚫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에 아돌프 히틀러는 그때까지 방어에만 급급했던 독일군 병력을 최대한 집중시켜 아르덴 지방의 숲을 전격적으로 돌파하여 벨기에 지역의 연합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일련의 반격 작전을 구상하였다. 정확히는 서방 연합군을 최대한 몰아세워서, 서방 연합군이 보급 기지로 삼고 있었던 벨기에의 안트베르펀을 점령해 버리면 서방 연합군은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9]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래 독일군은 프랑스 북부에서 네덜란드에 이르던 항구나 항구 이용에 필수적인 시설 및 하구 등을 직접 파괴하거나 최대한 사수하여 연합군의 항구이용을 거부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붙들고 있던 몇몇 항구들은 독일군이 항복하고 나서야 다시 가동할 수 있었다. 연합군이 마켓 가든 작전을 통해 네덜란드 강습을 시도한 것도 베네룩스 3국 연안의 항구 도시들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이 승리를 거두는 바람에 독일군의 방어선이 안정되면서 연합군의 진격은 예정보다 훨씬 둔화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연합군이 확보한 안트베르펜은 사실상 유일한 최전방 보급 창구였다. 여기를 잃으면 노르망디에서부터 보급품을 끌고 와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아프리카 군단과 비슷한 보급 거리를 달성한다.[10] 그렇게 보급선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서방 연합군이 독일과 평화 협상을 맺으면 그 뒤 독일군이 남은 병력을 전부 몰고 소련군과 싸운다는 계획이었다.
거기다 히틀러는 여러 국가에서 파견한 군대가 이름대로 연합한 연합군의 특성상 연합군이 각국 수뇌부의 협의를 거치고 조율을 마친 다음에야 부대를 배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는 "기습 공격으로 우위를 장악한 뒤 영미 연합군의 대처가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에 전부 섬멸해 버리면 된다"라는 히틀러의 망상을 더욱 부추겼다.
하지만 히틀러의 이런 생각과는 달리 서방 연합국은 진작에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s of Staff, CCS)를 구성하여 효과적인 의사결정으로 전쟁을 지도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 전개된 연합군은 아이젠하워를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국 원정군 최고 사령부 #의 단일 지휘권의 통제를 받았다. 연합국의 수반과 각국 군 수뇌부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현장에서의 권한을 크게 부여했으며 다른 국가의 사령관의 간섭도 거의 없었다. 덕분에 아르덴 대공세에서 아이젠하워는 그의 재량권을 발휘하여 신속하게 독일군에게 대응할 수 있었다.[11] 이와 같이 연합국의 지휘체계는 그에 상응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조직이 없던 추축국, 그리고 특히 전쟁 말기에 단위 제대 하나하나의 이동마저도 간섭하고 일일이 통제하려 들었던 히틀러의 모습과는 크게 대조되는 것이었다.
독일군의 가장 큰 문제는 주력 전투 부대인 기갑부대를 움직일 연료의 부족과, 병력과 장비를 어디서 가져오는가 하는 것인데, 이미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독일에서 동원 가능한 남성의 숫자가 바닥이 난 지 오래라서 동부전선의 병력을 빼다가 돌려막기해야 되는 상황이었다.[12] 그리고 이 계획을 알게 된 서부전선 총사령관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는 히틀러의 생각처럼 전황이 낙관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희박했고, 남아 있는 모든 독일군의 전력을 동원한 이 작전이 실패하면 오히려 독일군이 패망한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개진하였다. 동부전선을 총괄하게 된 육군참모총장 하인츠 구데리안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반대했고, 여유 병력이 있다면 소련군의 공세를 대비하기 위해 동부전선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룬트슈테트는 안트베르펀은 목표로 하기엔 너무 멀다는 의견을 개진했고, 전후에 '말도 안 되는 작전이다. 우리가 뫼즈강에 도달하기만 해도 무릎 꿇고 신에게 감사 드려야 했을 지경'이라고 진술했지만, 사실 9월에 발터 모델의 B집단군이 마켓 가든 작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헨 전투에서 분투하는 동안 프랑스 방면에서 무사히 퇴각한 G군집단을 G집단군으로 개편하여 독자적인 공세 계획을 수립하려다가 이를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다. 아르덴 대공세가 '룬트슈테트 대공세'라고 서방에 알려진 것과 달리, 룬트슈테트는 2개월에 걸친 작전 회의에서 히틀러에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고 참석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참모장인 지크프리트 베스트팔 장군이 대리 참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Panzers in Winter: Hitler's Army and the Battle of the Bulge>에서는 이러한 룬트슈테트의 직무유기에 대해서 '모든 것을 거절하고 그렇게도 좋아하는 코냑과 담배, 미스터리 서적만 곁에 둔 채 성 안에 안주했다.' 라고 비판했다. 룬트슈테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부터 줄기차게 휴전을 요구해온 사람이지만[13] 히틀러가 들을 일도 없고 그의 작전에 일일이 간섭해오니 사실상 손을 놓아버렸다.
한편 연합군은 독일군의 병력 손실이 심하여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부대가 퍼져 있었고, 수많은 전투를 치른 베테랑들은 후방으로 이동하여 휴식하고 재정비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면서 독일군의 보안 체계가 강화되고 작전에 참여할 대부분의 독일군 부대가 독일 영내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명령이 유선을 사용하는 전화와 전보로 내려졌으며, 12월 들어서는 도저히 항공 작전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날씨가 악화됐기 때문에 독일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는 발터 모델이 르제프 퇴각 작전인 들소 작전에서 이미 성공시켰던 기밀 유지였다.
특히 오마 브래들리는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방어전의 1인자 발터 모델 원수에게 휘말려 3개월 동안이나 숲과 진흙탕에서 싸우면서도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며 지크프리트 라인에 봉쇄당했던 터라, "이럴 바에야 차라리 독일군이 서부방 벽의 요새선에서 한꺼번에 튀어나와 깨끗하게 한 판 붙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피력해 왔다.
그런데 정말로 말이 씨가 되었다. 게다가 실제로 튀어나온 독일군의 규모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천부적인 전쟁 감각을 갖고 있는 조지 S. 패튼[14]은 휘하 정보장교의 보고를 받으며 아르덴 방면의 독일군 공세를 거의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와 달리 아르덴 지역에서 공세를 예측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브래들리 휘하의 정보 참모 에드윈 L. 시버트 준장은 해임 조치되었다. 아르덴과 아이펠 방면의 기본적인 정보 분석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5]
3. 작전 준비
벌지전투 당시 독일측 사령관 발터 모델도 이길 가능성이 적은 도박이라 판단할 만큼 여러 장성들이 가을 안개 작전에 부정적이었지만, 히틀러는 반대 의견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세부적인 작전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히틀러는 작전 계획의 모든 세부 사항, 심지어 폭격 시간까지도 직접 결정하였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16] 원로 장성들조차 히틀러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총통에게 반대하며 '작은 해결책'을 마련하려 애쓴 것은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과, 새로이 5기갑군 사령관에 임명된 핫소 폰 만토이펠 기갑대장이었다. 10월 말, 오랜 참모장인 한스 크렙스를 통해 아르덴 대공세의 작전안을 전해 받았을 때 "나한테는 말야, 이 모든 게 박살난 목발로 서 있는 것처럼 보여." 라고 독설을 퍼부었던 모델은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뫼즈 강에는 도달할 수 있다." 라고 자신한 만토이펠과 3년 전의 악연부터 청산한다.만토이펠 장군이 모델 원수에게 보고하러 왔을 때, 모델의 집무실엔 손에 잡힐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1941년의 모스크바 전투 당시 만토이펠 중령은 군단장이었던 모델의 명령을 거부했다가 군법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었으나, 회부 직전 그의 직속 상관이 만토이펠을 서부전선으로 전임시키면서 도피에 가깝게 동부전선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만토이펠은 모델과 만난 적이 없었으니 이러한 갈등을 해명할 기회조차 없었다.
모델은 냉정한 시선으로 긴장한 모습의 만토이펠을 바라보았다. "우리 두 사람은 동부전선에서 불화가 있었지." 만토이펠이 이를 수긍하자 모델이 말을 이었다. "이제 끝난 이야기네. 지금 우리에겐 반드시 함께 완수해야 할 임무가 주어졌으니."[17]
모델은 냉정한 시선으로 긴장한 모습의 만토이펠을 바라보았다. "우리 두 사람은 동부전선에서 불화가 있었지." 만토이펠이 이를 수긍하자 모델이 말을 이었다. "이제 끝난 이야기네. 지금 우리에겐 반드시 함께 완수해야 할 임무가 주어졌으니."[17]
그날로 만토이펠은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 개편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었고 모델과 함께 뫼즈 강 도달을 목표로 하는 '작은 해결책'을 준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작전명인 라인 강의 수비(Wacht am Rhein)는 가을 안개(Herbstnebel)로 변경된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병력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그 동안 반격 작전을 위해 아껴두고 숨겨둔 항공기들을 모조리 긁어모으고, 마지막 있는 연료와 탄약까지 거의 다 긁어모아 작전 준비가 척척 진행되었다. 기갑사단의 경우 SS 소속 5개 기갑사단과[18] 국방군 소속 5개 기갑사단[19]을 합해 10개가 동원되었다. 이들 사단들이 보유한 전차와 돌격포, 구축전차를 다 합하면 1,000대 이상에 달했다.
- 기갑교도사단: 4호 27대+판터 30대+구축전차 20대
- 제2기갑사단: 4호 28대+판터 64대+돌격포 35대
- 제9기갑사단: 4호 28대+판터 60대+돌격포 24대
- 제11기갑사단: 4호 61대+판터 47대+돌격포/구축전차 19대
- 제116기갑사단: 4호 26대+판터 64대+구축전차 25대
- 제1SS기갑사단 "LSSAH": 4호 37대+판터 42대+돌격포/구축전차 22대
- 제2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 4호 28대+판터 58대+돌격포/구축전차 48대
- 제9SS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 4호 32대+판터 58대+돌격포/구축전차 28대
- 제10SS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 4호 36대+판터 35대+돌격포/구축전차 30대
-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 4호 37대+판터 41대+돌격포 22대
여기에 1944년 12월 기준으로 72대의 4호 전차와 38대의 판터 전차, 8대의 4호 구축전차를 보유하고 있던 제21기갑사단도 고려되었으나 결국 투입되지 않았다.[20] 이 외에도 SS 제501 중전차대대, 제506 중전차대대, 제559 중구축전차대대, 제560 중구축전차대대, 243 돌격포여단 등 여러 전차부대들이 동원되었고[21] 이렇게 동원된 기갑사단과 독립전차부대들의 차량 수는 1,400여대 정도였다. 그리고 연합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공수부대와 함께 오토 스코르체니 SS 보병 중령이 이끄는 위장 부대 역시 준비되고 있었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장병들을 미군 군복을 입히고 미군 장비를 사용해 미군의 후방을 기습하는 작전이었다.[22] 심지어 노획한 미 육군 전차로 위장한 기갑 부대까지 투입한 상당한 규모였다. 이런 준비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장비는 한참 모자랐고, 결국 2~3선급 국민척탄병 부대들이 정예병들의 빈 자리를 채워야 했다. 루프트바페 공수부대 강하를 위한 집결도 문제가 많았는데, 사실상 보병이 되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공수부대를 집결시켜서 비행장으로 가려 했으나, 이들을 태워야 할 트럭에 기름이 없어서 못 가는 황당한 사태도 벌어졌다. 지상군의 작전에 맞춰 준비된 공군의 보덴플라테 공세 역시 신무기인 Me 262 등이 갖춰졌으나 조종사들은 비행시간도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작전 개시일에서 고작 2주 전인 12월 2일, 여전히 모델과 만토이펠은 안트베르펀 점령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작은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히틀러는 재차 이를 거부했다. 그나마 변경된 점이 있다면 초기 작전 목표대로 공세를 시작하나 진행 과정에서 안트베르펀 점령 확률이 낮아질 경우에는 작은 해결책으로 작전 목표를 전환한다는 것, 그리고 알프레트 요들 장군과 히틀러의 초기 작전안에서의 공격 시간인 오전 11시를 새벽 5시 30분으로 앞당기는 것이었다.
이처럼 독일은 이 작전이 실패하면 더 이상의 그 무엇도 불가능할 만큼 여력을 쥐어짜서, 초기 작전 지역의 미 육군을 압도하는 규모의 공세 병력을 집결시켰다.
4. 전투 진행
4.1. 작전 초기
12월 16일에 시작된 독일군의 공세에서 해당 지역을 담당하던 미군 8군단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핫소 폰 만토이펠은 기습 시점을 새벽 5시 30분으로 변경하면서, 칠흑 같은 안개 속 적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틈을 타 미리 정해진 목표에 효율적인 포격과 동시에 고사포 진지에서 탐조등을 비추어 보병의 돌격로를 이끌어낸 다음, 일몰 후에 전차를 투입하여 전과를 확대시키는 작전안을 편성했고 이에 맞춰서 제5기갑군을 철저하게 훈련시켰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군복을 갈아입고 전투 지역을 미리 답사하는 등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기 때문이다.게다가 외형상으론 이 지역에 4개 사단과 그외 다수의 지원 부대를 보유한 8만 3천 명의 미군[23]이 주둔했어도 전부가 일선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또한 일선 부대가 담당하는 구역이 너무 넓어[24] 해당 지역의 미군 내부에서도 이를 우려하였으며, 항공 정찰을 통해 포착한 이상 징후도 상급 사령부에서 무시당했다. 해당 지역을 맡은 병사들의 수준과 사기도 평균 이하였다. 일부 부대는 처음 배치된 병아리 부대였으며 다른 일부는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휴식과 재편성 목적으로 배치된 부대였다. 게다가 연합군 수뇌부는 아르덴 지역을 위험도가 낮은 지역으로 분류했다. 미군 사령부는 이곳을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후방으로 돌려진 미군들을 위한 휴양지로도 운영하였다. 또한 아르덴 지역의 연합군 부대들이 많은 장병들에게 휴가와 외출을 허용해 병력이 줄어든 상태인 데 반해 독일군은 아르덴 지역에 25만 명 이상을 투입해서 3배나 더 많은 수적 우세를 확보하였다. 이런 배경 상황과 허술한 대비 태세가 맞물려 초기엔 작전이 독일군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게다가 미군에겐 다른 불운도 있었다. 하필 아르덴 대공세 직전 회의를 위해 18공수군단장 매튜 B. 리지웨이와 101공수사단장인 맥스웰 테일러가 미국 본토에 가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지휘 공백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는 다행히 당시 82공수사단장인 제임스 가빈 소장과 101 공수사단 부사단장인 앤서니 맥콜리프가 각각 군단장과 사단장 임무를 대행해서 공백을 막을 수 있었다.
허를 찔린 연합군은 충격과 공포에 빠져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밀리고 있었다. 연합군의 대응이 늦어진 것은 독일군의 공중 강습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독일군은 대대 규모의 팔슈름예거를 투입했는데, 이들은 너무 분산된 채로 강하하고 만다. 또한 원래의 목표에 도착하지도 못했다. 노르망디에서 일어난 연합군의 사례가 '공수 작전 금지' 조치로 공수 노하우가 부족한 독일군에게 그대로 재현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본대를 위장하기 위해 같이 투하한 독일군의 공수부대 인형이 정확히 목적지에 도착한 까닭에 연합군은 독일군이 최소 여단 규모의 공수부대를 투입했다고 착각하고 만다.[25] 이에 후방 지역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추가 부대 파견을 잠시 주저하면서 독일군의 압박을 받고 있던 연합군 일선 부대들이 줄줄이 털려나갔다.
여기에다가 독일군이 펼친 교란 작전도 주효했다. 오토 스코르체니 대령이 영어를 잘하는 병사들을 선발하여 미군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면서 허위정보를 뿌리고 표지판을 바꾸고 다니는 덕분에 후방까지 교란당해 버린 것. 이 과정에서 사기치고 다니는 독일군을 색출한답시고 토박이 미국인만 알 수 있는 상식을 물어보는 등 검문 검색이 강화되었다. 예를 들면 미키 마우스의 여자친구 이름은? 일리노이 주의 주도는 어디? 뉴욕 양키스의 주전 선수 이름은?[26] 같은 것. 하지만 아무리 미국인이라도 이런걸 전부 알진 못했기 때문에 졸지에 스파이로 몰렸다. 심지어는 검문하는 병사들이 답을 잘못 알고 있어서 정답을 말했는데도 장군이 잡혀가거나,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최악인 경우 아예 총살돼버리거나 오인폭격당하는 병사들까지 속출했다.[27] 심지어 오마 브래들리 장군마저 정답을 말하고도 수 시간 억류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신이 거주했던 미주리 근처이기 때문에 정답을 말했으나 병사는 시카고로 정답을 착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헌병이 '멍청해서 브래들리를 억류한' 것이기만 했는지는 좀 묘하다. 이후에 헌병이 '베티 그레이블(당대의 미국 여배우)의 남편 이름을 말하라'라는 질문을 하였고, 브래들리는 여기에 대답을 하지 못했는데도 그냥 브래들리를 풀어줬기 때문이다. 즉 상대가 브래들리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골탕을 먹이기 위해 구금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스코르체니 특공대의 병사들이 연합군에게 붙잡힌 후 고문을 끈질기게 버틴 끝에[28]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원수의 목을 따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는 거짓 자백을 하여 후방에 대기 중이던 연합군이 총사령부 건물에 전차를 출동시키는 등 비상이 걸려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기도 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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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르체니 특공대의 판버린 |
이러한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독일군은 초반의 며칠 동안은 주도권을 잡고 아르덴 각 지역을 쑥대밭 내며 연합군을 몰아붙일 수 있었다. 끝이 없는 미군 포로들의 행렬에 병목 현상이 일어나자,[30] 발터 모델 원수가 직접 원수 지휘봉을 들고 교통 정리를 했으며 독일 병사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희망까지 품게 되었다. 이러한 독일군의 초기 승리에 고무되어 디 도이체 보헨샤우(Die Deutsche Wochenschau)[31]는 독일군의 전과를 적극 홍보했고, 일시적으로나마 독일 국민의 사기가 진작되고 국방군에 대한 신뢰도와 인기가 급상승하기도 했다.
독일군 선봉장인 만토이펠의 제5기갑군의 진격은 후일 미군 부대의 분석에서 '주어진 여건을 초월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극찬을 받게 된다.[32]
4.2. 정체된 공세
하지만 히틀러의 망상과 달리 당시 서부 유럽 전선 사령관이던 아이젠하워 원수는 중간 협의 과정 다 씹어먹고선 부대를 신속하게 재배치시켰으며, 특히 자신의 재량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미군 소속 공수부대인 82사단을 생비트로, 역시 다른 공수부대인 101사단을 바스토뉴로 (트럭에 탑승시켜서) 급파했다. 이어서 뒤늦게 정신차린 연합군이 맹렬히 대응하기 시작하자 독일군의 진격은 서서히 둔화되었다.한편으론 초창기 전선이 급격히 붕괴되면서 많은 연합군 병사들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포로가 된 미군의 수는 7,500명 이상[33]이었다. 벌지 전투에서 수 개의 사단급 부대가 붕괴되었고 다른 사단과 통폐합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미군 106보병사단과 99보병사단.[34] 이 와중에 12월 17일 말메디에서 요아힘 파이퍼가 지휘하는 슈츠슈타펠 파이퍼 전투단 병사들이 사로잡은 미군 포로들에게 뚜렷한 이유 없이 기관총 사격을 가하여 대부분의 포로들이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말메디 학살 참고.
4.3. 바스토뉴 공방전
벨기에 스타벨롯(Stavelot, Belgium) |
독일군은 스타벨롯과 생비트를 공격하였으나, 미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스타벨롯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으며 1944년 12월 23일 차량과 각종 장비를 버리고 철수하였다. 이 때문에 아르덴 북부 지역을 통하는 통로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봉쇄된 상태였다. 아르덴 중부의 교통 요지인 생비트의 경우에는 12월 21일에 독일군이 점거했지만 미군의 저항이 이어져 완전히 장악한 건 23일 이후였다.
벨기에 장크트비트(생비트) Sankt Vith(Saint Vith), Belgium |
그 결과, 단계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던 독일군의 작전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발터 모델 원수도 이쯤 되자 슬슬 끝장이라는 걸 알아채고 은근슬쩍 볼프샨체의 OKW(독일군 총사령부)에 작전 중지를 에둘러 물었으나 그 말을 히틀러가 귓등으로라도 들을 리가 없었다.
벨기에 바스토뉴 |
한편 12월 21일에는 독일군이 아르덴 남부의 교통 요지인 바스토뉴를 성공적으로 포위하여 수비를 맡고 있던 제101공수사단을 포위했다. 당시 미군은 수적으로도 열세에다가 장비도 빈약했지만, 바스토뉴를 포위한 독일군이 모든 병력을 동원한 일제 공격 대신 주요 지점에 순차적으로 제파 공격을 가한 탓에 독일군의 공격 방향에 대한 보고를 받으면 그 지역에 가용 전력을 몽땅 때려 박는 형태로 방어해 냈다. 이 당시 포위된 101사단에게 상부에서 상황이 어떤지 질문하자, 101사단 참모 장교는 처음엔 보고를 주저했다. 포위한 독일군이 통신을 감청하고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적절한 비유를 떠올리고 그대로 보고했다. "지금 상황은... 도넛 구멍을 그려 보십시오. 그게 우리입니다."[35]
12월 22일 11:30시, 2명의 운전병을 대동한 독일군 기갑교도사단 장교 2명이 백기를 들고 르몽포스-바스토뉴 가도를 따라 진입했다. 이들은 제47기갑군단장 하인리히 폰 뤼트비츠 기갑대장의 지시를 받고 미군에게 명예로운 항복을 제안하기 위한 사절들이었다. 이에 미군 장교들은 독일군 장교 사절단 2명이 전달한 항복 문서를 가져가서 사령부로 이동해서 맥콜리프 준장에게 문서를 보여줬다. 독일 측이 보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December 22, 1944 1944년 12월 22일 To the American Commander: 미군 지휘관에게: To the U.S.A Commander of the encircled town of bastogne. The Fortune of War is Changing. 포위된 도시 바스토뉴의 미군 사령관에게. 전쟁의 운명이 바뀌고 있습니다. This Time the U.S.A Forces in near Bastogne have been Encircled by Strong German Armored Units. 이번에는 바스토뉴 근처의 미군들은 강력한 독일 기갑부대에 의해 포위된 상태입니다. There is Only one Possibility to save The Encircled U.S.A troops From Total Annihilation. that is the Honorable surrender of the Encircled town. 완전한 전멸로부터 포위된 미군들을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포위된 마을에서 명예롭게 항복하는 것입니다. In Order to think it Over a Team of Two hours will be granted beginning with the Presentation of this note. 그것을 생각하기 위해 이 메모의 발표를 시작으로 두 시간의 여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If this Proposal should be Rejected one German artillety Corps and Six Heavy A. A. battalions are ready to Annihilate The U.S.A. troops in and near Bastogne. 만약 이 제안을 거부한다면 독일 포병 군단 1개와 중대공포대대 6개가 다음 작전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바스토뉴와 인근의 미군들이 전멸하게 될 겁니다. The german Commander" 독일군 지휘관 |
아르덴 공세가 벌어지기 전에 회의 참석차 미국 본토로 가서 자리를 비운 맥스웰 테일러[36] 사단장을 대신하여 101공수사단을 지휘 중이던 부사단장 앤서니 맥콜리프 준장은 이 보고를 받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Nuts!"[37]라고 말한 뒤 공식적인 항복 거부 서신을 어떻게 작성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때 참모가 "항복 요구를 처음 들었을 때 장군님께서 보인 반응을 그대로 적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조언했고 그리하여 N U T S ! 전문이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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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사단 병사들에게 전달된 크리스마스 편지 |
The German commander received the following reply: 독일군 지휘관은 다음과 같은 답신을 받았다. December 22, 1944 1944년 12월 22일 "To the German Commander: 독일군 지휘관에게: N U T S ! 옘 병 하 네 ! The American Commander" 미군 지휘관 |
이 답신을 받아든 독일군 사절들이 무척 당황하자 제327글라이더 보병연대장 하퍼 대령이 또 하나의 조언을 덧붙였다.
"만약 NUTS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 그냥 지옥에나 가라는 뜻 정도로 이해하면 될 걸세.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해 두겠는데 만약 앞으로도 계속 공격을 해 온다면 우리는 바스토뉴로 들어오는 모든 독일군을 죽여 버릴 걸세."
이 대답을 들은 독일군 전령은 "좀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기대했는데 말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여기에 대해서도 끝까지 쿨하게 "가서 그대로 전하기나 하슈. 그리고 댁들의 행운을 비오."라고 인사하고 보냈다고 한다. 당연히 NUTS라는 단어를 완전히 해석한 뤼트비츠는 극도로 강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이를 갈았다. 결과적으로 미군의 항복할 의사 대신 저항하겠다는 뜻을 확인한 독일군 진영에서는 바스토뉴 일대에 엄폐하고 있는 미군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초토화 작전을 시행하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워낙 유명한 일화인지라 이후 아르덴 대공세를 다룬 영상물인 벌지 대전투, 패튼 대전차군단,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소설에서는 한 챕터의 제목이기도 하다. 나중에 각색된 이야기 같지만 정말로 저렇게 보냈다. 맥콜리프 준장이 그 대답을 정해지자 미군은 그걸 인쇄해서 부대에 돌렸고 병사들은 그 대답에 호응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자신감과 사기가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연히 뤼트비츠는 맥콜리프의 유머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냥 거절당한 게 아니라 미국식 욕설을 들은 것이었다.
4.4. 연합군의 반격
12월 23일에 날씨가 좋아지자 연합군의 항공 작전이 재개되었고 각 지역에 고립된 연합군 병력에게 보급을 단행하였다. 물론 많은 수의 물자가 독일군의 손으로 넘어간, 일명 루즈벨트 보급[38]이라고 불린 일 때문에 M1 카빈으로 무장하고 허쉬 초콜릿과 코카콜라와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에 맛들인 독일군[39]도 엄청나게 느는 등 충분한 보급이 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고립되어 있던 병력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보급이었다.[40] 설상가상으로 원래 날씨가 나쁠 때 끝장을 보려던 계획은 연합군의 전폭기(야보)들이 다시 설치면서 암울해지기 시작했다.12월 24일이 되자 점점 좁아지는 통로를 전진하던 독일군도 결국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한다. 전투 중반부터의 연료 보급은 노획한 연합군의 연료를 사용하기로 했지만, 이걸 눈치챈 연합군이 대부분의 연료 저장소를 모두 소개하고, 단 하나 남은 것도 불을 질러서 폭파한 덕택에 연료는 독일군 전차 연료탱크가 아니라 하늘나라로 날아갔으므로 뫼즈 강 근처에서 발목이 잡혀버렸다. 게다가 연합군도 그동안의 전투와 독일군의 통신 감청, 항공 정찰을 통하여 독일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독일군이 의도하고 있던 기습적인 공격 역시 실패했다. 이에 모델 원수가 다시 한번 히틀러에게 넌지시 작전 중지 의사를 밝혔지만 이번에도 히틀러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팔레즈 포위전에서 그랬듯 그나마 남은 병력을 보존할 수 있는 기회까지 날려 버렸다.
한편 연합군의 조지 S. 패튼 장군은 12월 19일 아이젠하워 원수로부터 즉시 반격이 가능하냐는 문의를 받자 48시간 안에 가능하다고 답했다. 패튼 장군이 연합군 수뇌부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이미 유사시 긴급 상황 형태로 아르덴 대공세와 비슷한 상황을 가정하고 계획 및 준비를 어느 정도 진행시켜둔 상태인 제3군은 반격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패튼이 부대로 돌아오자 즉시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각 지역에서 독일군과 맞닥트리는 바람에 조금씩 시간이 지연되고는 있었지만,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중령이 지휘하는 제4기갑사단 선두대대가 독일군의 저항을 피하면서 우회하다가 샛길을 찾아내서 바스토뉴의 포위망을 부수고 각 지역에 고립된 연합군의 활로를 열면서 전황이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그 외로 12월 22일 패튼은 악천후로 인해 항공 작전도 잘 되지 않고 진격도 지지부진해지자, 제3군의 수석 군종 목사에게 기도문을 작성하라고 명했다. 기도문의 내용은 '전쟁을 위해서 눈과 비가 그치고 쾌청한 날씨를 주시기를' 기원하는 내용이었다. 하도 갑갑한 마음에 신에게 기도라도 올리기로 한 것인데, 정말로 앞서 언급했듯이 다음 날인 23일부터 날씨가 맑아졌다.
이 작전에 참전한 전차 중 유명한 네임드 차량이 여럿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중령의 4기갑사단 37전차연대 소속 증가장갑 부착형 M4A3E8 "썬더볼트 7"과 같은 4기갑사단 소속의 M4A3E2 "점보 셔먼" 차량번호 3083084번 전차다. 특히 일명 " 코브라 킹"이라 불리는 이 전차는 독일군의 화망을 뚫고 제일 먼저 바스토뉴에 도착하는데 성공한 전설적인 전과를 지니고 있다.[41]
4.5. 독일군의 공세 실패, 보텐플라테 작전
1945년 1월 1일 독일군은 공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다시 한번 공세를 가하여 연합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터프하기로 유명한 조지 패튼조차 1월 4일자 전쟁 일기에서 '우리는 여전히 지고 있다.' 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원래는 미군의 공격을 선도해야 할 제6기갑사단이 발터 모델 특유의 '재편성 후 반격'에 휘말려 패퇴하자 패튼은 '독일인은 우리보다 더 춥고 굶주렸지만, 더 잘 싸우고 있다.' 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기도 했다.그러나 연합군의 압도적인 항공력에 밀린 이상, 독일군은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다. 본래 독일 공군의 공세 작전은 육군의 최초 공세에 맞추어 동시에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연료의 확보와 항공기의 정비 및 보충, 그리고 날씨 문제로 인해 계속 연기하다가 겨우 시작한 것. 이러한 독일 공군의 사실상 마지막 공세는 보텐플라테 작전이라고 하며, 초반 기습으로 300여 대 이상의 연합군 항공기를 지상에서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아군인 독일 방공 부대의 대공 사격 등에 의해 오인 사격을 당했다. 이 문제가 더욱 심각했던 건 기습 효과를 노리느라 공습 정보를 지상군 부대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 전부 못 받은 건 아니고 몇몇 부대는 알고 있었으나, 정확한 상황을 업데이트해 주지 않았기에 여기도 연합군으로 판단하고 쏴 댔다. 게다가 연합군을 속이려고 일부러 항로를 V2 발사대 등 방공망이 촘촘한 지역만 골라서 짰던 것도 있다. 덕분에 독일군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숙련된 조종사와 항공기들을 상당수 날려먹었다. 반면, 연합군 입장에서는 대다수가 지상에서 격파된 것이라 조종사 같은 고급 인명 피해는 독일군에 비하면 없다시피 했다.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영국 공군 주둔지처럼 정예 부대가 투입되어 공습에 성공한 부대가 이런 상황인데, Asch(Y-29)같이 연합군 에이스가 발생한 곳이 있다. 이 공세 이후 독일 공군은 이러한 정규 작전을 다시는 행하지 못하였다. 당시 서부전선의 독일군 전투기 사령관이었던 아돌프 갈란트 중장은 이 공세가 끝난 직후 '보텐플라테는 루프트바페의 묘비명이 되었다.'고 발언했을 정도였다. 이후의 독일 공군은 공군 전체 차원의 체계적인 작전이 아닌 각 비행 기지 및 비행단의 간헐적인 개별 전투만 행하다가 종전을 맞게 된다.
게다가 아이젠하워 장군 역시 재빠른 대처를 보이면서 독일군의 공세가 둔화되었다. 그리고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와 패튼 장군이 돌출부 북쪽과 남쪽에서 반격을 시작하자 물자 부족 등의 문제가 겹친 독일군은 공세를 중지하였다. 독일군 사령부는 1월 7일 다시 한번 히틀러에게 병력 철수를 건의하였고, 더 이상 공세 성공 가능성이 없다는 현실을 수용한 히틀러가 철수안을 수락하면서 독일군이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철수를 하는 동안에도 추격하는 연합군으로부터 피해를 입었고, 각지에 고립된 연합군 부대와 독일군 부대가 마구 뒤섞인 까닭에 전투는 1월 27일 마무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5. 공세의 여파
예상치 못한 독일군의 공세에 상당한 피해[42]를 입은 연합군의 라인 강 진공 계획은 예정보다 6주 정도 미뤄지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는 본토에 배치되었던 전략 예비 부대와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던 정예 부대와 더불어 나름 확보했던 물자들까지 전부 소모하면서 병력이 완전히 약체화되어 패망을 6개월 앞당겼다.[43] 그래도 1945년 3월까진 연합군의 공격에 지연전으로 버티긴 했지만, 3월 말 레마겐의 철교를 확보한 미군의 쾌속 진격으로 상당수의 독일군이 패주하거나, 포위당하거나, 항복하였고 탈영병이 급증했다. 결국 4월 중순, 루르 포위전에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실질적으로 전투를 종료한다.또한 윈스턴 처칠이 소련군에게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소련의 붉은 군대도 예정을 앞당겨서 1월 12일,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개시하였다. 결국 동부전선에서 빼온 기갑 부대를 뒤늦게 동부전선으로 되돌려보낼 정도로 양 전선의 전황은 독일군에 극도로 불리해졌다. 마켓 가든 작전의 승리로 나름의 방어 전략을 구사했던 B집단군 사령부는 아르덴 대공세 후기에 이르면서 완전히 수동적인 대처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한다.[44]
독일군의 아르덴 대공세가 실패로 끝날 무렵 영국의 몽고메리 원수는 기자회견을 열어서 자신과 영국군의 역할을 부각시켰고, 이는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미군 측의 분노를 일으켰다. 물론 몽고메리의 영국군이 독일군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해서 발빠르게 뫼즈 강의 다리를 사수하여 독일군의 공세를 막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잘 짜여진 통신체계를 통해서 전황파악도 미군에 비해 빨랐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하지만 몽고메리는 특유의 독선적이고 오만한 면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부터 미군 장성들과 마찰을 빚고 있었던 데다가, 벌지 전투의 미군 전사자는 2만 명에 근접하지만 영국군 사망자는 대략 200명에 불과했는데 그 상황에서 미군을 깔아뭉개고 자신의 전공만 내세우면서 독일 진공 작전 지휘권을 넘기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자신과 사이가 괜찮던 영국의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45]을 몽고메리의 자리에 임명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했으며, 오마 브래들리마저도 참았던 분통을 터뜨리는 등,[46] 몽고메리의 평판은 더욱 떨어졌다. 이를 알게 된 참모진이 미군 장성들을 설득하는 한편 몽고메리에게 지금 상황을 알려주었다. 결국 몽고메리가 아이젠하워에게 사과문을 올려서 사태는 겨우 진정되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역시 미군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다. 1945년 1월 중순 영국 의회의 연설에서, 벌지 전투에서 활약한 미군을 찬양하고 영국군의 전과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내용이 있었다(관련 내용은 타임라이프 2차 세계대전 전집에서 발췌).
또한 이 서부전선 방어군, 그것도 정예병력들이 아르덴 대공세에서 대부분 큰 피해를 입은데다 남은 병력마저 베를린으로 몰려오고 있는 동부전선의 소련군을 막느라 차출된 탓에 결국 아르덴 대공세가 종료되고 약 2달 후, 3월 23일에 조지 S. 패튼이 이끄는 미 제3군 병력에게 지크프리트 선의 방어부대간의 지경선을 뚫려버린 다음, 라인 강을 건너는 것을 허용하게 되며 실질적인 지크프리트 선까지 완전히 돌파당하게 된다.
6. 공세 실패의 원인
푀글러: 물론 마지막 카드겠죠. 모든 곳에서 생산이 중단되고 있어요. 이번 공격은 소련을 겨냥한 겁니까? 그보다는 동부 전선에서 중압감을 덜려는 목적이겠죠?
알베르트 슈페어: 역시 동부전선 쪽일 겁니다. 미친 사람이 아니고는 동부 전선에서 손을 놓고 서쪽에서 밀려오는 적을 막으려는 생각은 안 할 테니까요.[47]
알베르트 슈페어: 역시 동부전선 쪽일 겁니다. 미친 사람이 아니고는 동부 전선에서 손을 놓고 서쪽에서 밀려오는 적을 막으려는 생각은 안 할 테니까요.[47]
1944년 10월 말의 대화. 히틀러는 민간인 관료조차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무모한 작전을 실시하여, 브래들리의 소원을 장렬하게 이루어준 셈이 되었다.
6.1. 교통 문제
6.1.1. 비좁은 도로망
프랑스 침공 때도 발생한 문제였지만, 아르덴 지역은 산악 지대인데다가 도로망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미군도 빈약한 도로 상황으로 피해를 본 것이 있으니 초기에 미군 부대들이 후퇴 과정에서 서로 엉켜서 많은 혼란이 발생했고 일부 부대는 도로상에 장비들을 유기한 사례들이 있다. 독일군은 이렇게 버려진 장비들을 유용하게 써먹었으며 공세 시간을 더 벌었다. 이것 또한 미군이 한참 고전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게다가 숲까지 무성해서 객관적으로 보면 기갑 부대가 진격하기 곤란한 곳이다. 아울러 이 지역의 강은 유속이 빠르고 강행 도하를 할 만한 곳이 거의 없는 천연의 대전차호나 다름없는 탓에 일단 다리가 하나 파괴되면 먼 길을 돌아가거나 거기서 더 진격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아르덴 대공세의 전투 양상은 잘 닦여진 길과 도로를 확보하려는 독일군과 이를 기를 쓰고 막으려는 미군의 대결이었다. 당연하게도 독일군의 공격은 도로가 많거나 교차하는 요충지에 집중되었고 해당 지역을 수비하던 미군은 많은 손실을 입었다.독일군은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250km에 이르는 대규모 교통 정체[48]가 발생했지만 그때는 결과적으로 병목에 시달리던 독일군이 아르덴 삼림지대를 빠져나올 때까지 저항을 받지 않은 상황 덕분에 작전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아르덴 대공세 때는 삼림지대의 좁은 병목구간부터 미군의 저항을 받았고, 선두 부대가 저항을 받자 후속 독일군중 다수가 교통체증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연합군과 싸우지도 못했다. 그리고 낫질 작전 당시와 아르덴 대공세 당시의 주력 전차의 체급이 달랐던 것도 한 몫 제대로 하게 되었다. 낫질 작전 당시에 주력으로 이끌었던 2호 전차 같은 경장비에서 판터나 티거 2 같은 운용하기 힘든 중장비로 바뀐 지 오래였기 때문에 안 그래도 빈약한 도로는 과중한 교통량과 전차들의 과도한 중량[49]을 이기지 못하고 공세 개시 몇시간 만에 개박살이 나 버렸다.[50]
실제로, 위에서 언급된 오토 스코르체니의 위장 기갑 부대 역시 원래 목적대로 운용될 수 없었다. 판터 자체의 중량 문제와 교통 체증 때문에 작전 목표였던 적진 후방으로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며 결국 나중에 필요한 전선으로 전차가 이리저리 끌려가면서 흩어졌다.
6.1.2. 진흙탕 도로
도로에 진흙으로 된 늪이 생기기도 했다. 교통 문제는 특히 자주포와 기갑척탄병의 제병 합동 공격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 자주포와 장갑척탄병이 문제 없이 미군의 거점을 제병 합동 공격으로 방어선을 뚫고 지나가는 작전이었지만, 도로 상황이 악화되면서 자주포가 늪이 된 진흙에서 허우적대는 바람에 기갑척탄병의 공격을 제때에 지원하지 못해 거점을 공격한 기갑척탄병 부대가 연합군으로부터 대규모 피해를 입고 퇴각하는 사례가 공세 초반에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오히려 자주포 부대가 포격은 제대로 갈겼지만 역으로 기갑척탄병들이 늪에서 허우적대어 반대로 미군이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 반격하는 경우도 발생했다.[51] 어떤 때에는 아예 해당 임무를 맡은 부대의 예하 정찰부대가 이 지독한 뻘밭에 갇혀버린 채 길을 잃어서 작전지의 기본적인 정보도 모르는 채로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6.1.3. 공병
게다가 연합군의 경우 이미 한 번 당한 경험이 있는 데다가 늦어도 2일 이내에 미군의 공병대가 다리 같이 생긴 모든 물체에 폭탄을 설치한 다음,[52] 독일 기갑 부대가 접근하면 코앞에서 다리를 폭파하는, 당하는 입장에서는 미치기 직전까지 가는 작전을 구사하였다.이렇게 번번이 엿을 먹은 요아힘 파이퍼가 내뱉은 "이런 죽일 놈들!" 이라는 말은 파이퍼가 미군 공병대에게 바치는 최고의 찬사였다. 이미 마켓 가든 작전에서 다리 사수 및 폭파 작업에 노르망디 당시보다도 공병들의 중요도가 무척 올라갈 대로 올라간 시기였고, 결국 벌지 전투에서 미 공병대의 역할은 정말 대단했다. 교량 폭파 및 재설치 같은 교량 작업은 기본 중의 기본이 되어버렸고, 진흙탕 속에 지뢰를 파묻어서 독일군의 진공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으며, 그 외에 최전방에서 방어중인 보병은 물론 기갑부대 같은 다른 병과를 지원해 준 사례가 많다. 특히 땅이 물기를 잔뜩 먹어 땅 자체가 물러버릴 대로 물렀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하며 야전 작업을 어려워하던 보병들이 얼어버린 땅에 참호를 파는 게 어려울 때 공병의 장비와 폭약으로 참호를 팠으며 많은 전투공병들이 호전적으로 독일군과 교전해 싸웠다.
물론 독일군도 공병이 있고 가교를 설치하는 법은 알았으나 빠른 진격으로 인해 공병대의 교량가설차량이 후방에 있었던지라 독일측에서는 부서진 교량을 봤어도 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6.2. 병참 문제
당시 독일군의 연료 수급 상황으로는 목적지인 안트베르펀에 도달할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었고 뫼즈 강까지만 가면 엄청난 성공이었다. 실제로 일부 기갑 부대는 최대 진격 가능 거리가 60km 정도인 부대도 있었다. 문제는 독일군이 출발한 아르덴 삼림 지역에서부터 목적지인 안트베르펀까지는 적어도 120km는 되었다는 것. 곧 연료를 노획하지 않으면 전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미인데, 획득 시기와 획득량, 그리고 품질을 보장할 수 없는 노획품을 보급 수단의 주력으로 삼는 순간 이미 현대전의 기준에서 제대로 된 전술이나 전략이라고 보기 어렵다.[53] 작전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성공 여부가 의심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또한, 아르덴 작전 동안 독일군에게 있어 새로이 만들어진 기갑장비를 대거 투입했는데, 대표적으로 5호 전차 판터와 더불어 이 작전에 투입된 독일군의 티거 2는 그 중량이 현재 미군의 주력 전차인 M1 에이브람스 계열보다 더 무거운 약 68톤(!)이나 되었지만 엔진 출력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700마력이어서[54] 연비가 최악이었다. 이러한 불균형으로 인한 각종 고장도 티거 2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작전에 투입된 티거 2의 상당수가 연료 부족으로 인해 전진도 후퇴도 못하다가, 전차병들이 전차를 포기하고 자폭시켜 버리는 일도 벌어졌다. 상황이 좀 나아보이는 중형전차 판터조차도 사실 연합국 대부분의 중전차보다 무겁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 1940년의 프랑스 침공 당시에는 작전에 소요되는 연료와 보급 문제를 확실히 계산해서 그 필요량을 미리 알고 있었음은 물론 수요량을 충족시킬 만한 물자가 있었으며, 유사시 공중 보급도 실행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교전 중이던 부대가 대전차 포탄이 고갈되는 순간 공중 보급을 받아서 위기를 모면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55] 하지만 1944년의 아르덴은 1940년의 아르덴이 아니었다.
6.3. 제공권 장악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군은 연합군보다 훨씬 많은 전투기를 공중전에 투입하여 제공권을 장악하였다. 비록 항공기의 보유량은 독일이 불리했지만 독일이 프랑스 침공 당시 사활을 걸고 모든 공군력을 동원한 것에 비해 연합군의 비행기는 대부분 후방에서 예비대로 있었기 때문에 축차투입되어 소모됐다.그러나 나중의 아르덴 대공세 때는 기본적으로 독일군을 도울 공군이 활동할 날씨도 아니었고, 이미 유럽은 연합군이 하늘을 장악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오히려 날씨가 나쁜 쪽이 독일군에게 더 도움이 되는 상태였다. 심지어 벌지 전투 이전 동부전선에서 이 악물고 빼온 루프트바페는 1944년 2월 경 부터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머스탱에게 꾸준히 갈려나가고 있었고 마음이 급해진 독일은 비행기 조종법을 안다 싶은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을 차출하여 전선으로 갈아넣고 있었다. 제대로 훈련을 받았던 독일 공군 조종사들도 머스탱의 서부전선 투입이후 연합군 공군을 상대로 고생을 하고 있던 상황에 비행기만 몰 줄 알던 히틀러 유겐트들이 영국 본토 항공전,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단련된 배테랑들에게 교육 받은 연합군 공군에게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따라서 날씨가 좋아지자마자 독일군은 발리는 형국에 처하게 된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서전에서 날씨가 갠 뒤에는 낮에 도로를 다니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썼다. 그 이유는 연합군 폭격기가 낮에 하루 종일 떠 있어서였다고. 게다가 그 당시 호위 전투기들에게도 적기가 안 보이면 지상으로 내려가서 움직이는 모든 것에다 기총 소사를 해라! 는 명령이 내려진 뒤였다. 그러니까 독일 점령 지역은 맑은 날 도로에 나오기만 해도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의 12.7mm 탄환과 히스파노 20mm 기관포의 고폭탄이 비처럼 쏟아져서 독일군들의 뼈와 살을 분리시켜 주는 상황 이었던 것이다.
6.4. 연합군의 발빠른 대응
1940년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아르덴 삼림 지대를 통해 몰려드는 독일군을 보고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았고, 라퐁텐 장군은 부대를 이동시키기 위해 1시간도 안 되어서 갈 수 있는 거리를 17시간에 걸쳐서 이동했다. 이유는 이동시키는 데 서류가 필요해서였다. 또 전차가 보병을 지원하는 교리 때문에 프랑스군의 진격은 보병에 맞춰졌지만, 전차를 중심으로 전투하는 교리의 독일군은 전차에 맞춰서 진군했다. 때문에 독일군이 진격해야 되는 거리는 프랑스군보다 길었지만 선수를 친 건 독일군이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은 낫질 작전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굴러들어왔으면서도 그것을 저지하지 못했다.그러나 아르덴 대공세를 맞이한 아이젠하워 장군은 병력 운용에서의 전권을 연합국 각국 수뇌부로부터 보장받았다. 또한 연합군 지휘부는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해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56]
영국군의 몽고메리 말고도 직접 당하는 입장인 미군에서 조지 S. 패튼 중장 또한 이런 움직임을 예측했고 이미 그에 대한 대응방안을 구상[57]해 놓았기 때문에 완전히 모르고 당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6.5. 독일군의 훈련 및 경험 부재
독일군은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에는 전군의 훈련 상태가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서방의 선전포고가 이어지고 프랑스 침공을 위해 공격 작전을 담당할 부대에게는 벙커와 기타 방어 시설이 설치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실시했으며, 다른 부대도 훈련을 지속하여 적어도 선봉에서 공격을 담당하는 부대만큼은 1939년의 개전 상황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질적 향상에 성공하였다. 또한 스페인 내전을 거치면서 정립된 임무형지휘 덕분에 말단 지휘관과 부사관, 병에 이르는 개개인까지 높은 수준의 군사적 재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는 프랑스 침공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하지만 아르덴 대공세 당시에 이미 독일군 전력과 숙련도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숙련된 장교들과 부대들은 북아프리카에서 시작하여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공세에 대부분 끔살당했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기점으로 끊임없이 밀고들어와 항구란 항구는 닥치는대로 점령하며 팔레즈 포위전에서 연합군들에게 포위되며 압도적 열세에서도 연합군을 노르망디 에서 2달간 묶어두었던 서부전선의 정예병들은 히틀러의 후퇴금지 명령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타격을 제대로 받은 서부전선 사령부의 혼란 속에 제대로 탈출하지도 못하고 상당수 잃었다. 그 결과 아르덴 대공세에서는 대부분의 보병들은 4주에서 6주의 훈련만 받거나, 초기에 훈련해둔 산악보병들을 끌어오거나, 헝가리나 체코 등지의 타지역 군들을 끌어모으거나, 잔존 현역병, 예비군들을 박박 긁어모아 만든 부대를 보낸다던가, 이름만 공군인 공군 지상 부대에서 놀던 보병들을 차출하는 식으로 급조 사단을 만들어서 대거 동원했다. 물론 이렇게 만든 병력의 수준은 최악으로, 간이 훈련을 받은 자는 물론, 정규 편제였던 공군 지상 부대도 헤르만 괴링의 욕심으로 양질의 보병장비를 지급받았으나, 아예 처음부터 독일군 최악의 전투 능력으로 평가될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팔슈름예거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크레타 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팔슈름예거의 주력인 7항공사단이 재편성 판정을 받을 정도로 처참한 피해를 받은 팔슈름예거는 심각한 피해에 충격을 받은 히틀러에 의해 공수작전이 일체 금지 당하며 일개 알보병 취급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명령이 그리 철저히 잘 지켜지진 않았는데 크레타 섬 전투에서 살아남은 공수부대원들은 후임들을 엄격하게 훈련시켰고 공수 훈련도 병행하였다.
1942년 11월 제 5 낙하산 연대가 튀니지 일대에서 대대급 공수작전을 펼쳤지만 수송기 조종사들이 잘못된 곳에 내려주며 작전을 실패하였지만 1943년 이탈리아가 추축국 전열에서 이탈할 때가 되자 크레타 섬 전투 직전 수준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는데 성공했다. 1943년 10월 도네카스 전역에서 팔슈름예거들은 대대적인 공수작전을 벌여 8,000명의 이탈리아군과 영국군을 사로잡는 화려한 전과를 신고했다. 하지만 아르덴 대공세 시점에서 몬테카시노 전투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선에서 명성을 떨친 1공수사단은 여전히 이탈리아 전선에 박혀있었고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에 맞서 싸운 2 낙하산 군단의 정예병들은 팔레즈 포위망에서 전멸 당했다. 급하게 재편성한 2낙하산 군단은 경험없는 풋내기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전처럼 이들에게 전투 노하우를 전해줄 선배 공수부대원들은 없었다. 결국 벌지 전투 당시 미군 1개 중대의 방어선을 팔슈름예거 1개 연대가 반나절 이상 걸려서 겨우 돌파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그 수준이 정규군과 민병대 사이의 어디쯤으로 뚝 떨어져있던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들을 실어 보낼 비행기는 물론 조종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선 1942년 튀니지에서 실시한 공수작전의 실패에서 증명하듯이 정확한 위치에 수송기 조종사들이 공수부대원들을 수송해야 했는데 공수작전에 제한이 걸려있고 당장 제공권을 잡는 것도 버거웠던 독일 공군 상황상 수송기 조종사들도 풋내기였다. 하지만 독일은 이러한 풋내기 조종사와 풋내기 공수부대원들을 연합군 전선을 돌파하도록 강요하였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차량을 운전하는 운전병들도 겨우 운전대를 잡아본 적이 있으면 일단 운전병이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전차는 전차를 몬 경험조차도 없는 병사들이 탑승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동원된 '엘리트' 병력이라는 것도 (한줌의 베테랑을 제외하면) 독일군 입장에서나 그렇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연합군 입장에서는 그저 그런 평범한 병력인 데다가 그나마도 공세 초기에 전투력이 소진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전체적으로 독일군은 공세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나마 동부전선에서 겨우 끌어온 병력들은 베테랑이라고 할만 했지만 전투가 결과적으론 무의미한 탕진으로 끝나며 동부전선의 소중한 자원까지 전부 잃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이 작전에서 그나마 동부전선에서 끌어온 '엘리트 병력'도, 서부전선에서 어떻게든 훈련해둔 병력도, 독일의 주축인 기갑부대마저도 싸그리 사라진 독일군은 나치 독일의 최후의 발악인 국민돌격대까지[58] 총동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독일은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고 제대로 된 군복과 무기조차 지급받지 못한 이들로 독일을 지키는데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6.6. 부실한 기계화
독일의 전투력은 1944년 서방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그 소모율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기갑사단들의 상황이 심각했으며 그 결과 상당한 전력 악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기계화 부대는 원래 소모율이 극심한 병과이기도 해서 소련과 서방 연합군 역시 같은 문제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과 다르게 전쟁수행 능력이 고갈된 독일은 이를 보충할 방법이 없었다. 44년 하반기 무렵 즈음에 이르면 미군의 보병 사단 편제가 독일의 기갑척탄병 사단보다 기계화율이 더 높은 참담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기갑척탄병 사단같은 독일의 기동제대들은 점령지의 민수용 차량까지 징발해서 온갖 잡다한 차량을 끌어모아 완전 차량화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44년 하반기 동서 양쪽에서 대타격을 입었고 보충은 요원한 실정이었다. 반면 미군은 보병사단에 충분한 차량은 물론 장갑차나 전차까지 배속시키고 있었다. 결국 기계화된 서방 연합군을 상대하면서 안 그래도 부실한 독일의 보병전력은 극심한 손실을 보았다.곤란을 겪은 건 보병들 뿐만 아니라 독일 기갑사단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노르망디 지역에 배치되었던 제12SS기갑사단만 하더라도 기갑사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4호 전차만 100여 대, 판터나 구축전차, 자주포 등 적어도 250여 대 이상의 전차 및 차량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44년 6월 이후 전황이 심각하게 악화되고 독일군의 손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기갑사단의 기본적인 편제도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59] 또한 원래 독일 산업의 생산성이 소련과 미국에 비해 열세였던 데다가, 인해전술로 몰려오는 적 전차를 전차무쌍으로 막기 위해 비록 엄청난 고성능이지만 생산량이 T-34와 M4 셔먼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티거에 이어 티거 2를 우선순위로 생산한 결과, 이런 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게다가 그마저도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군수공장들이 파괴되고 구리나 철광석 생산지 등이 점령당하면서 장갑재의 질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기갑사단들의 편제를 뜯어보면 몇 대 안 되는 판터와 티거 I, 돌격포, 4호 전차 그리고 군 직할부대에서 쓰는 티거 II를 빼면 적인 연합군 전차와 맞서서 싸울 만한 전차의 수와 질, 양이 모두 모자랐다. 1944년형 기갑사단 편제를 보면 각 기갑사단은 전차연대에 소속된 판터 79대[60]와 4호 전차 81대[61] 대전차대대에 소속된 구축전차 31대[62] 등 전차+구축전차를 200대 가까이 보유하고 있어야 했지만 아르덴 공세에 투입된 사단 중 이 정도의 기갑장비를 보유한 사단은 전무했고 거의 다 정수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의 전차/구축전차/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사단 편제 아래에 장군과 믿을 만한 베테랑 장교 및 부사관 몇 명을 빼면 숫자도 제대로 못 채운 기초적인 훈련조차 못 받은 부대원들이 바로 최전선으로 보내지니 성과가 나올 수 있을 리가 전무하다.[63] 보병 전력인 팔슈름예거 부대들 역시 엘리트라는 명함은커녕 제대로 훈련받은 군대라고 하기에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결국 아르덴 대공세에서 주축이 된 제5기갑군과 제6SS기갑군 예하의 기갑사단의 경우 히틀러 유겐트 사단에 비해 차량 보유량이 절반 이하였다. 공세적으로 강력한 기동을 펼칠 수 있는 기갑사단에 상당한 무게를 두는 작전이었지만 그 기갑사단들이 반신불수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반면에 연합군의 경우 미국의 렌드리스와 상상을 초월한 보급 등으로 상당한 수준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수준의 기계화를 달성했다. 앞서 말한대로 이미 미군 '보병사단'의 기계화 수준이 온갖 잡다한 차량을 긁어모은 독일 기갑척탄병사단을 능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거기다가 미군은 보병사단에 전차중대를 배속시킬 정도의 독일은 감히 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패튼의 제3군만 하더라도 아르덴 대공세 때 상당한 기동력으로 지원을 와 주었던 것[64]을 생각하면 이미 독일군과 연합군의 기계화율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당장 독일군은 보병을 수송해야할 반궤도 장갑차가 부대당 겨우 1대가 있을까말까 한 상황에서 민수용 트럭은 물론이고 말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반해, 연합군의 경우 M3 하프트랙이 차고 넘쳤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의 기동력을 갖출 수 있었다.
7. 미디어
7.1. 영화 벌지 대전투
1965년 <벌지 대전투>라는 이름으로 영화화했다. 워너 브라더스 제작. 감독은 역시 전쟁물에서 명작급으로 알아주는 지상 최대의 작전을 연출한 켄 애너킨(1914~2009).
독일군 요아힘 파이퍼 무장친위대 대령을 모델로 한 기갑여단장 마틴 헤슬러 역에 로버트 쇼, 상당히 강력한 공세를 예측해낸 카일리 중령 역에 헨리 폰다, 그밖에도 찰스 브론슨, 텔리 사바라스, 로버트 라이언 같이 출연진이 제법 호화진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일단 영화상에도 따로 자막으로 언급할 정도로 역사를 상당히 크게 왜곡한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이나 사건들도 현실과 어긋난 게 많고, 후반은 사막 지형에 맑은 날씨가 유지되어 실제 배경과 엄청난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오죽 고증이 엉망이었으면 실제 벌지 전투의 총사령관이였던 아이젠하워가 은퇴에서 나와 기자 회견을 열어 영화의 고증에 대한 비판을 했을 정도였다. 또 독일군의 전차가 몽땅 티거 2인 것처럼 나온다는 것, 영화에서는 이 부대가 티거 2로만 구성된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림도 없었다. 티거 2 대역으로 스페인군의 M47 패튼 전차가 대신 등장했으며 미군 M4 셔먼은 M24 채피 경전차가 대신 등장했다. 사실 영화 스케일 상 전차를 수십 대나 동원해야 하는데 영화 촬영 당시에는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예전에 다 고철 처리된 것들인지라 어쩔 수 없었기는 하다. 스페인군 전차를 빌려서 촬영하느라 배경이 갑자기 사막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약간의 사소한 문제가 있는데 패튼 전차와는 달리 채피는 2차대전에 투입된 경전차라 독일기갑사단을 상대로 경전차만 투입하는 착각이 든다.
전차들이 나오는 영화 후반 대규모 전차전은 상당히 볼 만하다. 특히 전차의 기동과 사격 장면이 굉장히 뛰어나게 연출했고, 이로 인해 전차 팬이 된 사람도 많을 정도다. 판처리트가 유명해진 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투 장면도 처절한 연합군의 버티기를 잘 보여준다.
앞에 나온 제101공수사단의 궁극의 트래쉬 토크 이벤트도 재현되었으며 미군으로 위장한 독일군 부대의 활약도 나오는 등 그럭저럭 실존한 것들을 넣어두었지만, 영화 종반으로 갈수록 개연성이 부족해진다. 특히 이성적인 지휘관인 줄 알았던 헤슬러 대령은 알고 보니 전쟁광이라는 깨는 반전 이후 독일군 측 전개가 약간 2류스러워지기도 한다. 특히 마지막 전투 장면은 기름을 뿌려 전차를 태워 격파한다는 것인데 기름을 독일군 전차 위에 뿌리는 것도 아니고 흘려서 태운다는 설정이니 심하게 말이 안 된다. 전차포 및 기관총 사거리가 수십 미터밖에 안 되는 것도 아니고, 후진만 슬쩍 해 주면 피할 수 있는 건데 그대로 불타는 기름 바다에 돌진한다는 상황이다.[65] 그래서인지 제작비가 1,000만 달러에 달했는데도 흥행 수익은 450만 달러로 실패했다.
(휘발유를 써서 독일군 전차를 막은 것은 실제 사실이다. 미육군 공식전사인 'Battle Of Bulge' 266페이지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https://history.army.mil/books/wwii/7-8/7-8_11.htm
미군의 보급 능력을 보여주는 유명한 초콜릿 케이크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헤슬러가 상관에게 미군에게서 노획한 케이크를 보여주며 "미군은 일선 병사까지 집에서 초콜릿 케이크를 받아다 먹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승산이 없다고 주장하는 장면인데 이는 각색된 내용이다. 실제로는 에르빈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미군의 노획품을 점검하다 케이크를 발견하고 절망했다는 야사에서 따온 것이다.[66]
7.2. 그 외
- 가장 초기 영화로, 1944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혹한과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바스토뉴'를 지켜 낸 제101공수사단의 이야기를 다룬 < 배틀그라운드(Battleground, 1949)>가 있다.
- 미국 장군 조지 S. 패튼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 패튼>(1970년 작)에서도 극 후반부에 중요 이벤트로 다뤄진다. 고위 지휘관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해당 작품의 특성상 구체적인 전투장면은 그리 부각되지 않으나 아르덴 대공세 당시 연합군 지휘부의 분위기를 대략 알 수 있다.
- 101 공수부대원들의 2차 대전 참전기를 바탕으로 하여 2001년에 제작된 10부작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이 전투가 비중 있게 그려진다. 5화 말에서부터 7화에 이르는 분량이 바스토뉴 방어전 투입 후 반격으로 이어지는 101 공수부대의 행적을 그대로 쫓아간다. 위의 <패튼>과 달리, 주역들이 일선 장병들인지라 개별 장병들의 시각에서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다. 어떤 상황에 처할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적을 기다려야 하는 심정과 보급 차단, 추위, 일방적인 적의 공세, 내부의 적에 시달리는 병사들의 모습들이 그대로 묘사된다. 깨알 같은 패튼 디스도 있다. 트래쉬 토크 이벤트도 일선 장병들의 입장에서 다뤄진다. 지휘관 훈시를 통해 그 회신 내용을 전달 받은 병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Nuts(개소리)!!"를 외쳐댄다. 상세는 해당 문서 참고.
- 2012년에는 국내작가 강동훈이 <벌지 대전투>라는 제목으로 이 전투를 만화화했다. 단, 내용상 오류가 꽤 있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에서는 아르덴 대공세를 주제로 삼은 캠페인 <아르덴 어설트>가 등장한다. 시점은 최초 대공세 시작 시점에서 공방전을 통해 역습에 성공하여 이후 지크프리트 선을 돌파하는 것으로 마무리짓는다. 관련 트레일러
- 콜 오브 듀티: 유나이티드 오펜시브의 미군 미션이 아르덴 대공세를 주제로 하고 있다. 또한 콜오브듀티1에서도 벌지 전투를 잠시 다루긴 한다.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3에서는 8번째 미션 "악마와 함께"에서 이 대공세 당시의 바스통이 전뇌공간으로 등장하는데, 플레이어가 존 테일러의 팀원인 사라 홀의 DNI를 통해 그녀의 의식 속 전뇌 공간으로 들어간 것이다. 왜 이런 공간이 만들어졌냐 하면, 사라 홀 본인이 사관학교 햇병아리 시절 시험으로 접하고 끊임없이 디테일을 상상하는 등 인상에 아주 깊게 남은 전투다. 헌데 전투만 상상하고 무기는 아오안이었는지 독일군과 미군이 1945년에 미래 소총을 들고 나오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특히 후반부에 낡아빠진 티거 II가 순식간에 보행전차로 바뀌어 주인공을 위협하는 장면은 일품. 멀티플레이 맵으로도 등장한다. 얼마 안 되는 장거리전 위주의 맵이다. 역시 가상현실이기 때문에 둥둥 떠다니는 바위나 인셉션 같은 직각으로 꺾인 땅도 배경에 보인다.
- 콜 오브 듀티: WWII의 미션 중, 벌지 전투라는 이름으로 아르덴 대공세 미션이 있다. 아르덴 대공세 말고도 앞서 휘르트겐 숲 전투 또한 다루고 있다.
- 메달 오브 아너 시리즈의 경우에는 오리지널판 얼라이드 어설트의 첫 확장팩인 스피어 헤드의 두 번째 미션에서 첫 등장한 이후 PS2판 시리즈인 유러피안 어설트[67]의 네 번째 미션으로 재등장하였고 PSP판의 시리즈인 메달 오브 아너 히어로즈[68]의 세 번째 미션으로 등장한다.
- 서든 스트라이크 4에서 독일군 캠페인과 연합군 캠페인으로 나온다. 독일군 캠페인은 미군 방어선을 밀어붙이다 결국 연료부족 문제와 공세종말점으로 인해 그 강력한 티거 2를 투입시켰음에도 처철하게 후퇴하는 내용이고, 연합군 미션은 미군 시점으로 독일군의 공세에 대한 방어전을 보병, M4A4 셔먼, M18 헬캣, M36 잭슨을 비롯한 기갑부대 및 롱톰 평사포 등으로 펼쳐 방어에 성공해 결국 연료부족 문제와 공세종말점으로 인해 미군 방어선에 대한 공세를 포기하고 패퇴하는 독일군 병력을 티거 2를 포함해 남김없이 쓸어버리는 내용이다.
- SD 세계대전에서 서방 연합군 시나리오 9번째 임무로 나온다.
- 레고를 이용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벌지 전투를 재현한 사람이 있다.
- 스웨덴의 밴드 Sabaton의 Screaming Eagles의 주제가 바스토뉴 전투에서 싸운 101 공수사단이다.
- 프레데터 2의 초기 구상은 벌지 전투에서 미군이 프레데터와 마주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뤘다.
8. 기타
- 독일연방공화국 5대 총리인 헬무트 슈미트가 루프트바페 소속으로 아르덴 공세에 참가하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 미국의 前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미합중국 육군 소속으로 이 전투에 참전했다.
[1]
원래 제101공수
사단장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통해 잘 알려져 있듯이
맥스웰 테일러였으나 회의가 있어 미국 본토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공세가 시작되어 부사단장인 맥콜리프 장군이 사단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NUTS!의 일화로 유명한 그사람 맞다.
[2]
그 이유는 서부전선을 뚫는다고 동부전선 병력을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르덴 대공세(벌지 전투)가 막히고 전투가 막바지에 들어설 무렵인 1월 12일부터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진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서부전선 연합군의 골칫거리였던
지크프리트 선까지 돌파당하고 말았다.
[3]
이 손실 중에 280여 대는 독일 공군 최악의 삽질이라 불리는
보텐플라테 작전 당시 손실했다.
[4]
릭 앳킨슨의 서적 "벌지 대전투"를 비롯한 해외 서적들에서 비슷한 발언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휴 마셜 콜의 서적 "The Ardennes: Battle of the Bulge"에선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선 한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것을 겁내선 안된다.(in our present situation, however, we must not shrink from Staking Everything on One Card)"라는 좀 더 구체적이고 비슷한 발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5]
다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르덴 대공세보다는 루덴도르프 공세가 독일 측에게 더 승산이 있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이다. 그야 당연한 것이, 루덴트르프 공세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부전선이 이미 정리된 상황이었기에 서부전선에 영끌할 수 있었지만, 아르덴 대공세는 동부전선도 감당하면서 펼쳐야 했다.
[6]
다만
일본 제국의 경우 임팔 작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종전까지
버마에서
영국군과 대치했고 점령지로 확보한
중국 본토,
동남아시아,
필리핀, 서태평양의 섬들로 인해 최전선에서 일본 본토까지의 종심은 무척 길었다.
독일의 경우와는 다르게
일본 본토에 대한 전략 폭격도 1944년 중반부터 시작되었고 본토 공략 준비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한 1945년 7월 시점에서야 활성화된다. 그나마 미군은 종전 직전
오키나와까지 진출했지만 다른 연합군은 일본 본토로부터 수천km에서 떨어진 동남아시아, 태평양 곳곳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나치 독일은 1944년 9월 이후로 전쟁 전(1939년)의 독일 국경선(
지크프리트 선,
동프로이센)이 전쟁의 최전선이 되어 버렸다.
[7]
따지고 보면 이쪽의 병크가 더 크다. 그나마 아르덴의 독일군은 미군을 어느 정도 고전시키는 전과라도 거두었지, 임팔의 일본군은 90,000명이나 되는 대군 중 일부 소규모 부대의 우발적인 충돌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전투조차 몇 번 없이 지들끼리 알아서 정글에서 말라죽었다.
[8]
게다가 그 원래의 사단들도, 동부전선에서 갈릴 대로 갈리고서 재편성을 위해 독일 본토와 프랑스에서 쉬다가 다시 동부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즉 동부전선에도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소리다.
[9]
물론 안트베르펀이 독일군에게 떨어졌다면 서유럽 전선의 보급망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합군이 유럽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사실 노르망디는 물론이거니와
용기병 작전을 통해
마르세유의 항만이 뚫리면서 연합군의 유럽 내 보급선은 이미 꽤 안정적인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작전 목표인 안트베르펜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북프랑스 일대의 연합군에 약간의 혼란을 줄 수는 있었겠지만, 히틀러가 의도한 작전 목적인 프랑스 침공의 재현 따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0]
게다가 이 보급 문제는
백년전쟁과 과정이 거의 똑같다.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캉 먹고 뭐 먹고 하다가 정신 차려 보니 보급 문제로 항구로 쳐들어가고 있었다.
[11]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의 세계 정세'였다면 각국의 국력이 비등비등하고 각국 정부의 지시도 무시할 수 없으니 연합군 사이에서 이 같은 협의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정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영국을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들은
망명정부 신세로 전락했고, 영국마저
미국의 물자 지원에 의지하는 상황이라서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강해진 상황이었다.
[12]
이 때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 괴벨스의 연설과 함께 최후의 카드로 1,000만을 징발해 동부전선에 투입시켰고, 아르덴 대공세가 시작될 즈음엔 이미 그 병력마저 상당수가 갈려나간 뒤였다. 작전을 위해 준비해야 할 병력의 규모부터 이미 불가능한 문제였던 것이다. 본래 포위섬멸전이라면 적군을 포위하는 아군의 수가 적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어야 했다. 1940년 프랑스 침공 때 동원된 독일군은 거의 400만에 달하는 규모 였고, 출격한 루프트바페의 규모 또한 영프 연합군의 공군을 압도하는 숫자로 프랑스의 제공권을 움켜쥐고 있었다. 44년의 서부전역은 이미 독일 본토까지 수 천대에 달하는 연합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활보하며 제공권을 빼앗은 지 1년이 넘어가는 상황이었고, 프랑스와 벨기에에 전개된 약 200만에 달하는 영미 연합군을 상대로 히틀러가 동원할 수 있는 독일군은 병력의 질마저 뒤처지는 채로 프랑스 침공 때의 10분의 1도 되지 못했다. 이걸 타개하려면 히틀러와 OKW는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하는 게 아니라, 아예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전부 끌고와야 했다.
[13]
룬트슈테트는 이미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에르빈 롬멜과 함께 늑대굴에서 연합군과의 강화를 건의하였지만 거부당하고 서부전선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된 경험이 있었다.
[14]
벌지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주요 교전지역은 미 제1군(코트니 하지스 중장)의 구역이었고, 전투 기간 동안 미군의 사상자가 제일 많이 생긴 부대도 제1군이었다. 당시 패튼과 그의 미 제3군은 아르덴 남쪽 너머에서 작전 중이었고 벌지 전투 초기까지만 해도 그와 그의 부대는 벌지 전투의 무대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 제1군의 피해가 극심해지고 대응 능력이 감소하자 패튼은 휘하 부대를 제1군 지역에 지원군으로 보냈다. 이 당시 패튼과 제3군은 독일 영내의 자르 지역에 대한 공격(제2차 휘르트겐 숲 전투의 시작일 수도 있다. 1차 전투에서의 주 병력인 제1군은 많은 사상자를 기록했고, 생존자들도 지옥 같은
PTSD에 시달려야 했다. 패튼의 이 시도는 목표 면에선 독일 본토로의 공격을 목표로 한 1차 전투와 비슷했다)을 시작했고 이것은 벌지 전투의 시작 시점과 날짜가 비슷했다. 독일군의 가용한 자원과 인력이 아르덴 정면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그의 공격은 어렵지 않았으나 벌지 전투의 영향으로 작전이 중지되었고, 한참 전방에 진출했던 부대들은 공격 개시선으로 철수해야 했다.
[15]
스코르체니의 자서전에 따르면 스탈린은 독일 내 스파이 집단 '붉은 오케스트라'를 통해 독일이 공세를 취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미군과 영국군이 먼저 베를린에 입성할 게 두려워서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16]
흔한 인식과 달리 히틀러가 독일군 장교단을 무시하고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저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전쟁 중반까지는 오히려 참모들의 의견을 듣고 현장의 상황을 살피면서 판단했고 그 이후에도 장교단이 단체로 반대하거나 잘 설득하면 받아들였다. 물론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로 서서히 국방군 장성, 장교들에 대한 불신이 쌓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7]
The Ardennes, 1944-1945: Hitler's Winter Offensive
[18]
제1 SS 기갑사단 "LSSAH", 제2 SS 기갑사단 "다스라이히", 제9 SS 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 제10 SS 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
[19]
기갑교도사단, 제2기갑사단, 제9기갑사단, 제11기갑사단, 제116기갑사단
[20]
출처: Jentz, Thomas (1996). Panzertruppen: The Complete Guide to the Creation & Combat Employment of Germanys Tank Force 1943–1945. Schiffer publishing, Cole, Hunge M.(1965). The Ardnness: Battle of the Bulge
[21]
이들 부대 상당수는 기갑사단에 예속되어 지휘를 받는 상태로 전투를 수행했다.
[22]
따라서 스코르체니 특공대원들은
스파이였고
제네바 협약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연합군에게 포로가 된 대원들은 전부 총살형 혹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5년작 '벌지 대전투'에서도 그들을 두고 잡히면 스파이로 처형, 살아남아도 반역자로 처형될 것이라는 대사가 있다. 이들의 존재가 밝혀지자 미군은 "미키 마우스의 여자친구는?", ""일리노이 주의 주도는?" 등의 질문을 내면서 스코르체니 부대원들을 색출하려고 했지만, 정작 문제를 내는 헌병들도 답을 몰라서 (가령 일리노이 주의 주도는
스프링필드지만 많은 수가
시카고로 착각하고 있었다), 정답을 말했는데도 '너 간첩이지' 하고 잡혀가는 사례가 속출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다름아닌
오마 브래들리였다.
[23]
나중에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아르덴 지역에 전개된 미군은 60만 명 이상이었다.
[24]
전선 정면의 최북단부터 최남단까지 112km의 구간을 딸랑 1개 군단이 수비했다.
[25]
하지만 공수작전 금지 명령으로 인해 독일군은 크레타 섬 전투 이래 여단급 공수작전을 실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도네카스 지역과 아프리카에서 제한적인 대대급 공수작전을 펼친 것이 전부였다.
[26]
정답은 각각
미니 마우스,
스프링필드,
조 디마지오다.
[27]
영화 '세인트 앤 솔저'에서도 이런 상황을 묘사한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선 한술 더 떠서 주인공 일행이 계속 정답을 말하자 검문하던 헌병 왈, 어떻게 그걸 다 알고 있냐?였다.
[28]
스코르체니가 "고문을 오래 견딜수록 게르만인의 긍지가 빛날 것이며 적들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라고 훈시했다고 한다.
[29]
이들 위장 특공대원들은 나중에 군사재판에 넘겨져 전원 총살형에 처해졌다.
[30]
다만 서부전선도 히틀러의 자살 이전까지는 격전이 계속됐고 미군이 대규모 패배를 당하지는 않았으나 독일 본토에서 대대급 이하 소부대가 궤멸되는 일은 꾸준히 반복됐기 때문에 미군 포로는 전쟁 막판까지 꾸준히 발생하기는 했다. 이 때 붙잡힌 미군 포로들은 포로수용소로 압송되고 유대인으로 밝혀지면 학살당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다음해 5월 독일의 항복으로 석방되었다.
[31]
독일 주간 뉴스.
[32]
Battle of the Bulge 1944 (2): Bastogne (Osprey Campaign)
[33]
영문 위키피디아의 내용에 의하면 최종적으로 23,000명이 포로 및 실종 상태로 되어있다.
[34]
특히 제99보병사단은 사단 자체가 배치된 지 얼마 안 되어 대부분 신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독일군의 초기 공세를 전면에 받아서 90%의 사상자를 냈다. 취사병까지 총을 들고 싸웠다고 한다.
[35]
말 그대로 사방에서 포위당한 상태.
[36]
이 때문에 바스토뉴 전투 이후 101사단의 장병들은 맥스웰 테일러에 대해 감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물론 테일러 본인의 책임은 아니지만 어쨌든 투스타 사단장으로서 중요한 순간에 자리에 없었기 때문. 그래서 아르덴 공세 이후 맥스웰 테일러는 '바스토뉴에서 제군과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라고 말하면서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달래기도 했다.
[37]
점잖게는 ~에 미쳤다는 식으로 열정적이라는 말이라고 하지만(이 경우에는 사실 Guts!가 더 많이 쓰인다), 보통은
"미친 소리!" 혹은 "어이가 없네" 등으로 통한다. 그래서 번역문마다 표현이 다르다. 보통 한국
밀리터리 동호인들은 답신이라는 의미에 집중해서 "좆까세요!"라고 의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각국 군대간의 전보치고는 도발적인 성격이 강한 게 흠이다. "염병한다!"나 "지랄!", "놀고들 있네!" 정도가 적당한 수준이다.
[38]
비슷하게
지구 반대편에서
무타구치 렌야 때문에 아사할 위기에 처해있던 버마와 인도 전선의 일본군들은 영국군의 보급이 의도치 않게 자기네 진지에 떨어지자 이를 처칠 급여라고 불렀다.
[39]
럭키 스트라이크가 독일 담배보다 맛있다기 보다는 그냥 독일군에게 보급된 담배가 별로 없었다. 그것도 최전선에 투입된 독일군 우선으로 보급됐는데, 히틀러 본인이 금연주의자였고 군인의 흡연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군대의 담배 보급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설령 히틀러가 금연주의자가 아니었다 한들 당시 독일의 전황과 공업(비료)과 농업사정을 생각하면 담배의 주재료인 담뱃잎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잡기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40]
재밌게도, 이후 전쟁에서 살아남은 독일군 중 이렇게 미국 문화에 맛들린 참전자들이 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41]
덧붙이자면 이 일을 기념하겠다고 승무원들이 전차 측면에 "First in Bastogne(바스토뉴 첫 번째 입성)"이라고 적어놨다.
[42]
영문 위키피디아의 내용에 의하면 벌지 전투 기간, 1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연합군의 사상자는 10만 명(95% 이상 미군으로 봐도 좋다)에 거의 근접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악명 높았던 생지옥 전장
오키나와 전투에서 거의 3개월의 기간에 발생한 미군 사상자가 5만을 조금 넘는다. 전투 지역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 양측 쌍방 40-50만 명의 대결은 격렬했음이 틀림없다.
[43]
전쟁 영화 '레마겐의 철교'와 '
퓨리'를 보면 45년 독일군의 빈약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SS가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 하나 없어 전차 하나에 대대 하나가 녹아 버리는 장면이 예시다.
[44]
Derek S. Zumbro <Battle For The Ruhr>, 2006
[45]
1942년 후반부터 종전까지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 본토에서 연합군을 지휘했던 최고위급 지휘관. 벌지 전투 시점에선 지중해 전구 연합군 최고사령관(미-영 합동)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서열, 계급으로는 아이젠하워와 동급이었으며 경력과 계급, 보직으로도 몽고메리보다 항상 한 등급 상관이었다.
[46]
성격 지랄맞기로 둘 다 마찬가지인 패튼과 몽고메리 사이를 중재시켜서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이젠하워의 명령과 지휘를 받게 한 것이 바로 이 사람이라는걸 생각하면 당시 얼마나 열받았는지 알 수 있다.
[47]
독일이 수행한 전투의 4분의 3은 독소전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동부전선은 제1차 세계대전과 달리 매우 중요했다. 서부전선의 1차적인 존재이유가 동부전선의 압박을 덜기 위해 소련이 요청해서
제2전선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48]
경부고속도로의
어떤 250km 길이의 구간에 있는 수십만 대의 차들이 오도가도 못한다고 상상해 보시라.
[49]
2호 전차의 중량이 8.9~9t인데 비해, 판터의 경우 G형 기준 44.8t에 육박했으며 티거 2로 가면 제조사에 따라 68.5t에서 69.8t에 이를 정도였다. 기존에 비해 중량이 5배, 심할 경우 7.5배에 육박했으니 도로가 버티는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50]
궤도 주행형 장비들(Ex: 전차)이 험지, 야지 주행에 좋지만,
지면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은 땅으로 움직이면 땅이 움푹 꺼진다. 그러면서 차체도 같이 슬슬 땅 밑으로 들어간다. 꺼진 땅으로 장비가 들어갔다면 대개 자력으로 나올 수 없으며, 빼내는 시간이 종일 걸릴 수도 있다. 또한 궤도형 중장비들은 원래 포장도로 주행에 부적합하고 속도도 끔찍하게 느리다. 그래서 군용 장비가 아니라면 단거리 이동 외에는 트레일러를 불러서 탑재시켜 이동하며 군용 장비도 전시가 아니라면 트레일러를 부르거나 철도로 이송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51]
아니면 앞에서도 언급되듯 다리나 도로 같은 주요 목표를 폭탄으로 파괴하는 식으로 임무를 달성한 후 튀어버리는 전개로 미군이 작전을 진행하였다.
[52]
스코르체니 부대원들의 방해 공작으로 몇몇 교량은 폭파되지 않았다. 벌지 전투 당시 어떤 다리에서 독일군의 진입이 임박한 상황에서 폭파시키려 했으나 점화가 되지 않았고 미군은 혼란 상태에 빠졌다가 방치한 채 후퇴했다. 다리엔 어떤 미군 헌병들이 있었는데 한 병사는 그들의 행동에 의심을 품었지만 그냥 후퇴했고, 수개월 후 그는 독일 영내에서 작전 중 독일군 포로들을 만난다. 그중의 한 독일 병사가 영어로 말을 걸었는데, 바로 그때 다리에 있었던 헌병들 중 한 명이었다. 독일군 포로는 "그 헌병들은 모두 위장한 독일군이었고, 당신들은 우리 때문에 다리를 폭파하지 못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미군 병사는 갈 길을 계속 갔다.
[53]
연료를 문제 없이 노획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미군이 보유한 연료는 양도 많았고 품질상 당대 최고급이었다. 미군이 내줄 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
[54]
M1A2 계열은 1,500shp 정도다.
[55]
칼 하인츠 프리저, 《
전격전의 전설》
[56]
아르덴 지역에 대한 연합군의 증원 병력 이동 시기와 규모는 세계적인 군수, 병참 혁명의 하나로 많은 책에 역사상으로 기록될 정도이다. 벌지 전투 개시 1주일 경과 시점에서 연합군은 이미 20만 명이 넘는 증원 병력을 전개시켰고 전투 막바지엔 최종적으로는 60만 명이 넘는 미군이 아르덴에 배치되었다.
[57]
그래서 반격 작전이 언제 실행 가능하냐는 말에 48시간으로 말한 뒤 그대로 반격에 돌입하여 바스토뉴의 포위망을 부술 수 있었던 것이다.
[58]
예비군으로 구성된 국민 척탄병과 달리 이들은 예비군 연령을 한참 넘어선 노인이나 입대 연령조차 되지 못한 히틀러 유겐트에게 군복조차 제대로 지급해주지 못하고 소총만 쥐어주었다.
[59]
요제프 디트리히: 6 SS 기갑군이라는 이름 잘 붙였네. 단지 6대의 전차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60]
전차연대 본부에 3대가 있었고 1대대 본부에 8대, 그리고 1대대에 소속된 4개 중대에 각각 17대씩 배치되어 있었다.
[61]
전차연대 본부에 5대, 2대대 본부에 8대, 그리고 2대대에 소속된 4개 중대에 각각 17대씩 배치되어 있었다.
[62]
구축전차 대신 3호 돌격포가 배치되는 경우도 많았다.
[63]
편제상으로는 장교 411명을 포함해 14,053명이 정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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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에서 작중의 벌지 전투 시점에서 연합군 고위지휘관 회의가 열렸을 때 증원병력의 투입가능 주체를 놓고 의견들이 있었고 그중 패튼은 자신의 부대를 48시간 이내 작전 실행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는다. 이에 브래들리 장군(미군 12집단군 사령관)은 준비시간이 촉박하다 여긴 듯 시간을 더 줄 수 있다고 하고, 패튼의 답변 직전. 일어나서 좌중을 돌면서 바스토뉴의 중요성을 설파하던
월터 베델 스미스 중장(아이젠하워의 참모장)은 패튼 군의 작전개시선부터 바스토뉴까지의 거리가 160km(100마일)라는 것과 혹한의 날씨로 인한 악영향을 지적한다. 실제 역사 속에서 패튼 군은 12월 22일에 작전을 시작해서 26일 바스토뉴에 도달한다. - 타임라이프 벌지 전투 편, 영화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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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를 해주자면 유류 저장소 근처에서 대령이 사격하지 말라고 못 박아 놨다. 게다가 입구에서 미군이 드럼통을 굴리던 것도 단순히 자기네 특공대가 '우리의 급유를 위해 준비하고있다'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후진을 못한 것도 뒤에 탱크들이 서 있는데, 대령의 전차병들이 그랬듯이 대부분 전차의 전차병들이 탈출하고 도망갔으니 전차가 장애물 역할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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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실제로는 에르빈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미군과 전투를 치렀던 건 카세린 협곡 전투 외에 거의 전무하였기 때문에 야사의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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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작으로 생 제르망, 아프리카 전선, 러시아 북부, 아르덴 전투의 총 4개의 미션으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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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PSP로 나온 시리즈로 아발란치 작전, 마켓 가든, 벌지 대전투의 3개의 미션이 있으며 한 개의 미션당 총 5개의 스테이지가 있다. 또한 2007년에 2탄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