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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9:57:44

모리모토 타카유키

모리모토 다카유키에서 넘어옴
일본의 前 축구 선수
파일:모리모토 타카유키.png
<colbgcolor=#eeeeee> 이름 모리모토 타카유키
森本 貴幸 | Morimoto Takayuki
출생 1988년 5월 7일 ([age(1988-05-07)]세)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체중 77kg
직업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클럽 도쿄 베르디 (2004~2006)
칼초 카타니아 (2006~2011)
노바라 FC (2011~2012)
칼초 카타니아 (2012)
알 나스르 SC (2013 / 임대)
제프 유나이티드 (2013~2015)
가와사키 프론탈레 (2016~2017)
아비스파 후쿠오카 (2018~2020)
AEP 코자니 FC (2020)
스포르티보 루케뇨 (2021)
타이중 후투로 FC (2022~2023)
ASD 아크라가스 2018 (2023)
국가대표 10경기 3골 ( 일본 / 2009~2012)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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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국적의 전 축구선수.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도쿄 베르디

2004년 3월 13일, 15세 10개월 6일의 나이에 주빌로 이와타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르면서 J리그 사상 최연소 출장 기록을 세웠다.

2004년 5월 5일, 15세 11개월 28일의 나이에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를 상대로 데뷔골을 기록하며 J리그 사상 최연소 득점 기록도 경신했다.

시즌 종료 후 J리그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J리그 최연소 수상 기록도 갈아치웠다.

J리그의 각종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는 소년의 등장에 일본 언론들은 일제히 모리모토에게 괴물, 일본의 호나우두 등의 수식어를 붙였고 언론과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초신성으로 떠올랐다.

2006년까지 52경기 7골을 기록했다.

2.1.2. 세리에 A 시절

2006년 7월, 세리에 A 승격팀인 칼초 카타니아로 이적했다. 완전 이적 옵션이 포함된 1년 임대 이적이며 이적료는 비공개.

이적 후 한동안 유스 리그에서 뛰었으나 유스 리그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1군으로 콜업되었고 2007년 1월 28일에 치러진 세리에 A 21R 아탈란타 BC전에서 86분 교체 출전하면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투입된지 2분 만에 동점골을 터뜨리며 데뷔골까지 기록했다.

2007년 3월 13일, 왼쪽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5개월짜리 장기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 아웃되었다.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구단은 모리모토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 2007년 6월 완전 이적 옵션을 발동시키며 완전 영입했다.

2007-08시즌에는 쥐세페 마스카라, 지오나타 스피네시의 백업 선수로 19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2008-09시즌에는 기량이 만개하여 팀의 주전급 선수로 25경기에 출전하여 9골 3도움을 기록하는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특히 멀티골을 터뜨려 팀을 승리로 이끈 12R AS 로마전과 고군분투했던 23R 유벤투스 FC전은 이탈리아 축구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만큼 빼어난 경기력을 선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카타 히데토시, 혹은 그 이상의 선수로 성장할지도 모른다는 큰 기대감을 갖는 팬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하지만...

2008년 12월 14일, 3년 계약 연장에 합의했으나 2008-09시즌 이후 부진과 부상에 시달렸고 막시 로페스, 곤살로 베르게시오 등에게 완전히 밀리면서 2009-10시즌에는 31경기 6골 3도움, 2010-11시즌에는 13경기 2골에 그쳤다.

2011년 7월 11일, 250만 유로에 세리에 A 승격팀인 노바라 FC로 이적하였다. 당시 노바라 구단 사상 역대 최고 이적료를 지불하고 데려온 선수였던만큼 주전 선수로 중용되었지만 부상과 대표팀 차출로 인해 28경기 4골 2도움만을 기록했고 팀도 리그 19위로 강등당했다.

2012년 6월 21일 카타니아로 복귀하였고 이후 반년간 주급 루팡으로 지내다가 2013년 1월 7일 전 카타니아 감독이자 은사인 발테르 쳉가 감독의 부름을 받아 알 나스르 SC로 임대를 떠나면서 중동 리그에 진출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반년을 지낸 뒤 다시 카타니아로 복귀했다.

7년 동안 세계 4대 리그 중 하나인 세리에에서 버틴 것 자체만으로 대단하다고 볼 수 있지만 2008-09시즌 한 시즌 살짝 반짝한 것 외에는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2.1.3. 이후

2013년 8월 14일, J2리그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로 이적하면서 유럽무대 진출 후 7년 만에 고국 일본으로 돌아왔다. 2014시즌에는 34경기에 나서 10골을 넣으며 커리어 첫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달성했다. 하지만 이것이 모리모토의 마지막 불꽃이었고 그 후로 가와사키 프론탈레 아비스파 후쿠오카에서 뛰었지만 3골을 넘기는 시즌이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만 보였다.

2020년 10월, 그리스의 AEP 코자니로 이적했으나 COVID-19로 인해 리그가 무기한 중단되는 바람에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했고 FA 신분이 되었다.

2021년 파라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스포르티보 루케뇨로 이적했지만 1경기 만을 소화했고, 2022년 일본인이 구단주인 대만 풋볼 프리미어 리그 타이중 후투로 FC로 이적했다.

2023년 8월 19일, ASD 아크라가스 2018로 이적했다. 그러나 취업 비자 등의 문제로 인해 경기를 뛰지 못했고 연말에 귀국 후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고 뒤늦게 밝혔다.

2.2. 국가대표 경력

월반에 월반을 거듭하여 불과 15~16세의 어린 나이에 2004 AFC 청소년 선수권 대회와 2005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모두 일본 U-20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도 U-23 대표팀으로 참가하였으나 3전 전패 조별리그 탈락했다.

매우 빨랐던 프로 데뷔와 청소년, 올림픽 대표팀 데뷔와는 달리 일본 성인 대표팀에는 21세라는 평범한 나이에 첫 소집되었고 2009년 10월 10일에 치러진 스코틀랜드와의 친선전에서 56분 교체로 출전하면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10월 14일에 치러진 토고전에서 오카자키 신지와 최전방 투톱으로 선발 출전하였고 세 번째 쐐기골을 넣으며 A매치 2경기 만에 데뷔골을 기록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같은 포지션인 혼다 케이스케에게 밀려 단 한경기도 못 뛴채 전부 벤치만을 달궜다.

2011 아시안컵은 십자인대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2012년 5월 23일에 치러진 아제르바이잔과의 친선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한때 일본의 호나우두로 불렸던 선수인 만큼 호나우두와 유사한 면이 많은 공격수였다. 기본적으로 피지컬과 운동능력이 탁월했는데 웬만하면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단단한 체격과 바디 밸런스를 가졌고 거기에 빠른 주력과 순간 가속력도 갖췄다. 뿐만 아니라 수준급의 개인기와 볼 컨트롤 능력까지 장착했는데 특히 일명 헛다리 짚기로 불리는 시저스 페인팅이 그의 시그니처 기술이었으며 헛다리 짚기 하나만큼은 호나우두를 연상시킬 정도로 그 특유의 폼이 비슷했다. 또한 오프 더 볼 움직임도 좋은 편이었다. 이러한 장점들을 활용해 수비와 몸싸움을 하면서 드리블 돌파를 하거나 오프사이드 라인을 허무는 데 능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코리안 베컴이나 코리안 메시와 마찬가지로 플레이 스타일이 유사하다 뿐이지 그 수준이라는 건 아니다.

호나우두와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 때문인지 몰라도 단점도 비슷했는데 그건 바로 심각한 유리몸이라는 것. 시즌 30경기만 소화해도 굉장히 잘 버텼다고 할 수준이었다. 또한 호나우두와 반대되는 단점들도 있었는데 공격수답지 않게 슈팅이 정직하고 단조로워 골 결정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패싱 센스, 찬스 메이킹, 연계 능력 또한 부족했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사건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