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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훈장 | |||
형상 | |||
정장(순서대로 육· 해[1]· 공군[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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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장 | |||
제정 |
해군: 1861년 12월 21일 육군: 1862년 7월 12일 공군: 1965년 4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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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대상 | 의무 이상의 부름을 넘어 생명의 위험에 처한 눈에 띄는 용감함과 대담함을 보여준 인물 | ||
시상자 | 미국 대통령 | ||
상위 훈장 | 없음 | ||
하위 훈장 |
수훈십자장 해군십자장 공군십자장 해안 경비대십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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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예 훈장(Medal of Honor)[3]은 미국 의회의 명의로 미국 대통령이 미군 소속 장병에게 수여하는 훈장으로,[4] 미국의 최고 등급 무공훈장이다.그 훈격은 아래의 훈장과의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으며, 미합중국 군인 신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로 여겨진다. 미군에 소속되지 않은 신분에서는 명예 훈장의 심사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민간인인 미국 시민권자 또는 영주권자나 외국인에게는 수여될 수 없다(수여 자격 및 심사과정 문단 참조).[5] 육·해·공군이 각각 고유한 디자인의 명예 훈장을 수여한다.
2. 역사
미합중국 최초의 무공 훈장은 미국 독립전쟁 때 조지 워싱턴이 만든 군사훈장 배지( 퍼플하트 훈장의 전신)로, 이후 그 외 훈장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가 남북 전쟁 때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이 관련 법안에 서명하면서 명예 훈장이 만들어졌다.공훈 기준으로 첫 번째 명예 훈장을 받은 군인은 1861년 2월, 미 육군 7 연대 조지 N. 베스컴 중위와 60명의 부하들이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아파치에 포위되자 당나귀를 타고 160km를 달려와 포위를 뚫고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부대원 모두를 생환시키는 데 공헌한 버나드 어윈 하사(31세)로 명예 훈장이 제정된 이후 소급하여 수여되었다.
명예 훈장이 정식으로 제정된 이후 첫 번째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이들은 남북 전쟁 때 대열차추적(Great Locomotive Chase, 앤드류 습격대)에 참여했던 대원들이었다. 이들은 미리 전보선을 끊어 남부연합군이 습격을 알지 못하게 한 후 열차가 역에 정차할 때를 노려서 기습했다. 이 습격에 참여했던 이들은 후에 남부군에 체포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제임스 J. 앤드루스(James J. Andrews)와 7명이 처형되었고 민간인이었던 앤드루스와 캠벨을 제외한 나머지 19명이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남북 전쟁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수여 기준을 충족한 장병들에게 수여되었고, 신미양요 때도 15명의 미합중국 해군 소속 장병들이 받았다.
본래 명예 훈장이 미국의 유일한 무공 훈장이었는데, 이러한 점 때문에 지나치게 남발되는 경우가 많아져 이후 하위 무공 훈장들을 제정하면서 수여 기준이 올라갔다.
3. 수여 자격 및 심사과정
- 미군 내의 각군[6] 소속일 것.
- 미국의 적과 전투 중에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신의 직무 범위를 넘어 눈에 띄는 용맹을 보여줄 것.
- 목숨을 거는 조건 때문에 수여자의 약 70%가 전사 후 가족이나 친지에 의해 대리 수령되었다.
- 현대에 들면서 미군의 전쟁 양상은 다수의 소규모 전투들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이에 맞게 전군 정예화를 추구하는 지라 전술적 목표 달성의 실패가 거의 확실하면 무리한 임무 완수보다는 생환을 택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통신 두절과 포위되는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면 무공훈장을 수여할 만한 상황 자체가 잘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무공훈장 수여 케이스 대다수는 누군가가 심각한 잘못을 해서 전투원이 사지로 내몰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7] 누군가 명예 훈장을 받을 만큼 절박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 훈장 수여자가 영예를 얻을 때 누군가는 옷을 벗거나 대차게 까이게 된다. 어떻게 보면 지휘부의 추태로 인해 미합중국의 명예가 실추될 상황에서 자신을 희생해 국가의 명예를 지킨 것을 치하하는 훈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목숨을 걸더라도 임무 상정 범위의 피해였다면 훈장을 받을 수 없다.
- 각군 지휘관이 재량으로 훈장 수여자를 추천하거나[8], 미국 의회 구성원(상원의원 또는 하원의원)이 직접 훈장 수여자를 추천할 수 있다. [9]
- 추천받은 사람들을 육·해·공군부장 및 ( 해안 경비대원일 경우) 국토안보부 장관이 판단하여 미 하원에 추천을 올린다.
- 하원에서 투표를 통해 ⅔ 이상의 동의를 얻는다. 이 때문에 의회 명예 훈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의회의 승인 이후 국방부로 돌아와서 국방부 인적자원부 및 국방부 부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 이후 합동참모부로 올라와서 합참의 심사를 거쳐 국방부 장관의 승인을 받는다.
-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승인하고 수여식을 연다.
4. 명예 훈장과 수훈십자장
몇몇 사람들은 수훈십자장과 그 동격인 해공군, 해안경비대십자장을 미군 최고 훈장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실제 훈장으로서의 격은 '명예 훈장 > 수훈십자장/해군십자장/공군십자장/해안경비대십자장 > 은성무공훈장 > 동성무공훈장' 순이라고 보면 된다.이런 착각이 일어날 만도 한 게, 수여자의 거의 70퍼센트 이상이 살아서 훈장을 받지 못했고[10], 전사하고 나서 한참 후에 영웅적인 희생과 전공이 재발견되어 추서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보니 보통 살아서 바로 받는 최고의 훈장이 수훈십자훈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거기다 명예 훈장은 그 디자인이 수훈십자장과 다르게 약장은 아예 다 똑같다.
두 훈장의 특성이 다른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명예 훈장의 경우 뛰어난 무공도 당연히 훈장 수여 심사 항목이지만 그것보다 미합중국 군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스스로를 희생한 것에 더 수여 심사의 기준을 맞췄다.[11] 한편 수훈십자훈장의 경우는 순수 무공이라는 것에 주로 초점을 맞춰서 수여된다. 수훈십자장도 서열 2위의 무공훈장인 만큼, 이거만 받아도 군생활 및 전역 후 생활과 여러 혜택이 많다. 명예는 말할 것도 없다.
2차대전 당시도 명예 훈장 수여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사를 보면 엄청난 공적을 올려 당연히 명예 훈장을 받았겠거니 싶었는데 받지 못한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 중에는 명예 훈장 수여자를 압도하는 전공을 세우고도, 심지어 미국의 적과 전투 중에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신의 직무 범위를 넘어 눈에 띄는 용맹을 보여준 군인인데도 수훈십자장밖에 못 받은 군인들도 있다.
- 미드웨이 해전에서 존 월드런 소령은 일본 함대를 상대로 전투기의 호위없이 거의 자살공격에 가까운 뇌격에 돌입해 전사했으나 그 결과 일본 호위기들을 저공에 잡아둘 수 있었고 미국의 급강하 폭격대가 아무런 방해없이 일본 함대를 폭격해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월드런 소령은 명예 훈장을 받지 못했고 해군십자장(Navy Cross)을 받았다. 다만 한 미국의 기자는 월드런이 명예 훈장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 미드웨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의 제6급강하폭격기대대 대대장 C. 웨이드 매클러스키 소령은 그 유명한 운명의 5분으로 태평양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켰는데도 명예 훈장을 못 받았으며 그 다음 훈장인 해군십자훈장을 받는데 그쳤다. 매클러스키의 뒤를 따르던 리처드 베스트 대위는 자기 편대를 이끌고 돌입, 일본군 나구모 함대의 기함인 아카기를 폭탄 한 방으로 격침시키고 같은 날 히류에게도 폭탄을 명중시켜 격침에 일조했다. 그런데도 베스트 대위는 명예 훈장을 못 받았고 해군십자훈장을 받았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격추한 토머스 랜피어 대위도 명예 훈장을 못 받았다. 사실 랜피어 대위는 작전을 마치고 귀환하면서 무전으로 "내가 야마모토를 격추시켰다"고 떠들어대서 기밀을 누설한 적이 있어 이를 전해들은 홀시 제독이 훈장 주지 말라고 했다가 다른 사람들의 만류로 육군의 수훈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 해군십자장과 동격)이라도 겨우 받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훗날의 연구와 조사에 따르면 실제 야마모토를 격추한 것은 렉스 바버(Rex T. Barber) 중위로 확인되었으며, 미 공군은 랜피어와 바버 두명의 공동 격추로 인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거의 바버의 단독 격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바버 중위도 명예 훈장을 못 받았다.
- 더 퍼시픽으로 유명한 미 해병대의 전설 루이스 풀러 장군도 못 받았다. 대신 이쪽은 해군십자장을 5개나 받아서, 잠수함 에이스인 로이 밀턴 대븐포트 제독과 함께 역대 해군십자장 수훈 공동 1위이다.
-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을 이끌며 처절한 장진호 전투를 치른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소장)도 명예 훈장을 못받았다. 당시 수많은 미 해병대 장병들은 스미스가 당연히 명예 훈장을 받았어야 했다며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다.[12]
-
레이테 만 해전에서 플레처급 구축함 USS 히어만의 함장이었던 에이머스 T. 해서웨이는
어니스트 에반스의 구축함 USS 존스턴의 뒤를 따라 구축함 호엘, 호위구축함 새뮤얼 B. 로버츠와 함께 돌격했으며, 함께 싸운 존스턴, 호엘, 새뮤얼 B. 로버츠가 격침된 후에도 끝까지 최전선에서 구리다 함대에 맞섰다. 이때 태피 3의 호위항공모함과 그를 호위하는 구축함들은 히어만과 함께 싸울 수가 없었는데, 이는 히어만이 어디까지나 호위항공모함이 달아날 시간을 버는 총알받이였기 때문이다. 호위항공모함이 히어만과 함께 싸운다는 것은 탈출에 실패했다는 의미이며, 실제로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는 탈출에 실패한 후 최후까지 싸우다가 침몰했다. 히어만이 죽을 때까지 싸운 이유는 호위항모의 안전을 위해서인만큼, 다른 호위항모들은 히어만을 내버려두고 도망쳐야 했다. 그것이 그들의 의무였기 때문이고, 이대로라면 히어만도 용감한 동료 구축함 3척과 함께 가라앉을 운명이었다. 그 뒤는 당연히 태피 3의 전멸과 레이테 만의 미군 상륙부대가 박살나는 것이며,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히어만은 일본의 자랑이라는 16인치 포 탑재 전함 나가토, 세계 최대이자 최강이라는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 실전경험이 풍부한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를 상대로 혼자 싸운 끝에, 야마토와 나가토를 어뢰로 쫓아버리는 기적을 일으켰다. 하루나가 히어만의 어뢰를 피했지만 이후 전과를 올리지 못한 것까지 감안하면, 히어만은 일본 전함 3척을 혼자 물리친 셈이다. 일본에서는 야마토가 어뢰를 피한 후 다시금 싸웠다고 주장했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구축함 히어만은 전함 야마토와 2시간이나 싸우고도 승리한 셈이다. 심지어 일본의 중순양함 토네와 치쿠마까지 덤벼들었는데도 히어만은 끝까지 버텼고, 일본 함대가 구리다 턴을 시전하며 퇴각하면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구축함이 대낮에 전함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히어만 함장 에이머스 T.해서웨이와 히어만의 장병들은 미국의 적과 전투 중에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신의 직무 범위를 넘어 눈에 띄는 용맹을 보여준 군인이라는 명예 훈장의 수훈요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킨 셈이다. 그 어떤 사령관도 구축함 함장에게 "대낮에 자네 혼자서 전함을 막아내라"고 명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해서웨이 함장은 명예 훈장을 받지 못했다. 히어만이 이런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누구보다 먼저 죽음을 각오하고 앞장서서 돌격하여 히어만을 포함한 구축함들을 이끈 USS 존스턴이라서 그랬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차피 존스턴이 돌격했든 안 했든 태피 3은 전멸하고 레이테 만은 쑥대밭이 될 운명이었다. 일본 전함들을 구축함과 호위항모가 포격전으로 막아내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존스턴을 포함한 태피 3의 어떤 군함도 일본 전함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어니스트 에반스가 무능해서 일본 전함의 포격에 존스턴이 대파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불가능한 일이라서 그랬다는 말이다.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야마토와 나가토를 막아낸 것은 전적으로 히어만과 그 함장 아모스 T. 해서웨이, 그리고 히어만의 용감한 군인들의 공로였고, 그것이 사마르 해전, 나아가서는 레이테 만 해전 전체를 미군의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기에 해서웨이 함장이 명예 훈장을 받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어니스트 에반스가 명예 훈장을 받을 만한 전공을 세운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해서웨이 함장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명예 훈장을 받을 만한 전공을 세운 사람이 여러 명이라면 여러 개를 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해서웨이는 어니스트 존스턴과 달리 명예 훈장 바로 다음 등급인 해군십자장을 살아서 받았으며, 미국 정부와 필리핀 정부는 히어만에게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여했다.
첨언하자면 태피 3의 사령관인 스프레이그도 명예 훈장을 못 받고 해군십자장만 받았다.
5. 외양
육군·해군·공군마다 고유한 디자인이 각각 있으며, 해군은 해병대·해안 경비대와, 공군은 우주군과 공유한다. 이는 수훈십자장도 비슷하나, 수훈십자장은 해병대는 해군십자장을 받지만 해안 경비대는 해안 경비대 십자장을 2010년 10월 15일에 따로 제정했다.목에 거는 부분은 옅은 파란색을 띠는 비단으로 만들었고, 너비는 30㎜, 길이는 552㎜이다. 수여식 및 정장 패용시에는 목에 걸지만, 약장으로 패용할 수도 있다.
이와 별개로 우주 개발 시대가 열린 뒤에는 Congressional Space Medal of Honor라고 해서 우주인들을 위한 명예 훈장도 있다. 닐 암스트롱· 존 글렌· 앨런 셰퍼드· 프랭크 보먼 등 초대 수여자들부터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데, 아무래도 달나라 마실 가듯
6. 혜택 및 법적 보호
염라대왕 면접하고 온 사람들이나 받는[18] 훈장인 만큼, 명예 훈장 수여자에게는 굉장한 혜택과 법적 보호가 주어진다.[19]- 각 명예 훈장 수여자는 명예 훈장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으며, 이는 재향군인회에서 인증하여 수여자가 받을 자격이 있는 다른 군 연금이나 다른 혜택 유무와 관계없이 월 1,027불(한화 약 130만 원)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2004년 12월 1일부터 이 연금은 생계비 인상의 대상이다.
- 수여자가 사병( 병 및 부사관)일 경우 새 군복을 청구할 수 있다. 과거 사병들의 월급이 사비로 피복을 맞추기 곤란할 만큼 적은 데다, 군 피복이 정복과 전투복의 구분 없이 하나만 지급되어 전투 후 수여식 등에 참석하려면 훼손된 피복을 입고 가야 하는 일이 많아 생긴 규정이다. 현재도 훈장 수여식에 가급적 깔끔한 정복을 입고 가야 하는 사병들 입장에선 새 피복 지급 시기 이전 혹은 예비역이라 추가 지급이 안 나올 경우 등에 매우 유용하다. 장교의 경우는 제정 당시엔 사비로 맞춰 입게 되어 있었기에 이 혜택이 없었는데, 지금도 규정이 개정되지 않고 있다.
- 미 국방부 규정 4515.13-R이 명시하는 이용 가능 공간 여행Space-Available Travel 규정에 따라, 명예 훈장의 수여자는 미 국방부 소속 항공기를 여행 목적으로 탑승하는 것이 허용된다(국내·외를 막론하고). 퇴역한 민간인 신분[20]으로도 서류 몇 장 준비하면 이용 가능하다. 여행하려는 경로에 적합한 미 국방부 소속 항공기 일정이 있고, 수여자는 자리만 있다면 국방부 소속 항공기로 공짜로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수여자의 피부양자는 동승자 조건만 갖추면 '국외-국외' 혹은 '국내-국외' 여행 목적의 탑승이 허가된다. 물론 엄연히 군 소속 항공기므로 항공 일정이 취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21] 물론, 민간 소속 항공기라도 명예 훈장 수여자가 탑승한다면 엄청난 우대를 넘어 항공사까지도 굉장한 영예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국내선이라면 기장이 알아서 '이 비행기에 명예 훈장 수여자가 탔음 지린다' 하고 자랑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또, 입·출국 어느 쪽이든 수여자(가 탑승한 비행기)가 공항으로 오고 있다면 미리 공항 전체에 방송이 나가며, 수여자가 지나갈 길목에 관계자들이 깃발을 세워놓고 열렬한 환영식을 해준다. 1등석 자리가 비어 있으면 자리를 1등석으로 옮기라는 제안을 받기도 하며, 1등석이 비어 있지 않으면 1등석 손님 중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자리를 양보해 줄 가능성이 거의 100%다.[22]
- 각종 행사의 개·폐막식에 명예 훈장 수훈자가 참석해 있으면 별도의 안내 방송은 기본으로 나오며, 당사자가 동의하는 경우엔 식순에 명예훈장 수훈자를 위한 단독 코너를 만들 정도로 우대한다. 행사 주최는 물론이고, 이 행사의 참석자들 모두 큰 영예로 여긴다.
- 수여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특별한 신분증, 매점과 환전 특전이 주어진다.
- 수여자는 따로 자격이 누락되지 않는 한 사후에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을 갖는다.
- 수여자의 자녀들에게는 추천과 할당 요구사항에 관계 없이 미국의 사관학교 입학이 보장된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사관학교 입학은 입학을 원하는 생도의 출신 주에서 상위권 성적과 출신 주 미국 상원 의원의 추천이 필요한데, 추천 여부와 성적과도 무관하게 자녀들이 원하면 자유롭게 입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23] 수여자의 출신 군 사관학교가 아니어도(예컨대 수여자가 육군에서 훈장을 받았는데 자녀는 해군사관학교 입학을 희망한다 해도) 상관없다.
- 수여자는 미 연방법 10장 3991조에 의거하여 퇴직금의 10%를 더 받을 수 있다.
- 2002년 10월 23일 이후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자는 명예 훈장 기를 수여받는다. 또한 연방법 14장 505조에서는 현재 생존한 이전 수여자 103명에게도 이 기를 수여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집에 걸어놓거나 하며 명예 훈장 수여자 거주 중이라 표시하는 데 써도 되고, 명예 훈장 수여자가 행사에 참석하거나 할 경우 및 본인의 장례식 등에 이 기를 걸 수 있다.
- 수여자는 다른 모든 훈장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민간인 복장에 명예 훈장을 착용할 수 있다. 또한 정치적·상업적 또는 과격주의 목적 등이 아니라면, 임의로 군복을 입을 수 있다고 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인 예비역 및 퇴역 군인은 법령에 지정된 경우에만 공연하게 군복류를 착용할 수 있다. 전역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전환된 군인들은 군, 혹은 자신의 모교·지역 연회들에 참석한다거나, 각종 개막식 등의 특별한 행사 등에 규정에 따른 군 정복의 착용이 허가되고,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는 적극적으로 전·퇴역 후에도 군복 특히 정복류의 착용이 장려되는 등 사실상 자기 친인척 결혼식이나 장례식 말곤 합법적으로 전·퇴역 후 정복 등을 입기 힘든 대한민국보단 훨씬 법령이 널럴하다. 사칭이 동반되지 않는 문화 행사 등에는 미필 밀덕들이 현용 피복을 입는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 현용 피복의 비군인에 대한 매매는 일부 훈장류를 제외하면 크게 막혀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 널럴한 법령을 조금이라도 위반하면 꽤 처벌이 큰데, 미국이 얼마나 문민통제가 강력한 나라인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명예 훈장 수여자는 그런 것 없이, 그냥 군복을 아무 때나 착용하고 다녀도 아무 상관이 없는 파격적 대우를 받는다. 가급적 단정한 정복류를 착용하는 것을 권장하지만, 어지간해서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해도 노출이 심하고 단정치 못한 사복[24]이나 불량하게 착용한, 혹은 정치적 메세지를 띤 의상 위에 훈장을 패용하고 나타날 경우, 아무리 웬만한 거 다 봐주는 수훈자라 해도 훈장을 모독한 것에 대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 군 규정에는 없지만 모든 미군은 상관이라도 수여자에게는 먼저 거수경례를 하는 게 관례이며 이것이 강력하게 권장된다. 군 최선임자인 원수도, 심지어 통수권자인 대통령도 먼저 경례를 한다. 이는 수상자가 현역인지 아닌지와는 무관하다. 드라마 NCIS 시즌 2 7화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 가상의 수여자 항목에서 다룬다.
- 2006년 후반까지 명예 훈장만이 유일하게 연방법으로 위조 및 매매가 금지되어 있었다가 2005년의 도난 훈장 법령(Stolen Valor Act)이 2006년 12월 20일부터 제정됨에 따라 모든 훈장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 모든 명예 훈장은 미 국방부에서 원본을 수여자에게 수여하며, 훈장의 오용(인가되지 않은 생산 및 착용 포함)은 최대 10만 달러의 벌금 또는 1년의 금고형에 처할 수 있다(미 연방법 18장 704(b)조에 의거). 이베이 등지에 명예 훈장의 재현품이 꽤 많이 올라오긴 하는데, 당연히 미국 법이 적용되지 않는 중국 등 타국에서 생산한 것이라 이것을 구매하는 것 자체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단, 이를 영화 촬영 등 합당한 이유 없이 패용하거나 수훈자를 사칭할 경우 별도의 법령으로 처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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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50개중 40개 주는 매우 낮은 가격, 혹은 아예 무료로 자동차(오토바이) 번호판을 명예 훈장 수상자의 차량에 제공한다.
이 번호판은 공통적으로 Medal of Honor라는 문구와 발급한 주 표기가 있고, 이런저런 장식이 붙는 일반적 미국 차량 번호판과는 달리 명예 훈장 이미지나 성조기 등의 이미지만을 사용하는 간단한 디자인이다. 해당 번호판은 수상자의 평생 영구 사용이 가능하며, 주에 따라 수상자의 배우자 역시 사용 가능하다. 미국은 자동차세를 낸 후 받을 수 있는 번호판에 유효기간이 있으므로, 명예 훈장 수훈자는 주에 따라 자동차세를 딱 한 번만 내거나 평생 안 낼 수도 있는 특혜를 받는 것이다. 또한 사용자가 차량을 교체할 경우 매우 낮은 가격, 혹은 아예 무료로 해당 번호판을 그대로 옮겨 달 수 있다. 수여자의 전용 번호판 사용은 강제가 아닌 선택이다.
7. 통계
출처<rowcolor=#fff> 연도 | 전쟁 | 수여자 |
1861년 ~ 1865년 | 남북 전쟁 | 1,523명 |
1865년 ~ 1891년 | 인디언 전쟁 | 426명 |
1865년 ~ 1939년 | 평화로운 시기(Peacetime) | 193명 |
1871년 | 신미양요 | 15명 |
1898년 | 미국-스페인 전쟁 | 110명 |
1899년 | 제2차 사모아 내전 | 4명 |
1899년 ~ 1901년 | 의화단 운동 | 59명 |
1899년 ~ 1902년 | 미국-필리핀 전쟁 | 86명 |
1912년 ~ 1933년 | 니카라과 점령 | 2명 |
1914년 | 베라크루스 점령 | 56명 |
1914년 ~ 1918년 | 제1차 세계 대전 | 126명 |
1914년 ~ 1973년 | 무명용사 | 9명 |
1915년 ~ 1934년 | 아이티 점령 | 8명 |
1916년 ~ 1925년 | 도미니카 공화국 점령 | 3명 |
1939년 ~ 1945년 | 제2차 세계 대전 | 472명 |
1950년 ~ 1953년 | 6.25 전쟁 | 146명 |
1955년 ~ 1975년 | 베트남 전쟁 | 261명 |
1967년 | USS 리버티 사건 | 1명 |
1993년 | 모가디슈 전투 | 2명 |
2001년 ~ 2021년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 20명 |
2003년 ~ 2011년 | 이라크 전쟁 | 7명 |
2014년 ~ 현재 | 대 IS 군사 개입 | 1명 |
<rowcolor=#fff> 육군 | 해군 | 해병대 | 공군 | 해안 경비대 | 합계 |
2466명 | 749명 | 300명 | 19명 | 1명 | 3535명 |
8. 수여자
수여식 영상 |
원칙적으로는 공을 세우거나 전사한 뒤 2년 내에 대통령에게 소식을 알리고 3년 내에 수훈되도록 하고 있지만, 시체조차 찾지 못한 전사자들이나 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면서 고군분투했던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훈장을 받은 이들도 많다. 또한 공적을 최대한 정확히 파악하여 수훈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아직도 제2차 세계 대전이나 6.25 전쟁에서의 영웅적 활약을 기려 명예 훈장이 수훈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이 경우 수훈 당사자가 살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으므로[25] 배우자나 그 가족이 대리로 수여받으며, 실제로 전사자의 아내가 가장 많이 메달을 전달받게 된다.
총 3465번 수훈되었으며 수여자는 3446명이다. 19명이 2중 수훈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 중 5명은 같은 행동으로 서로 다른 군의 명예 훈장을 중복 수여받았고 나머지 14명은 다른 행동으로 두 번 수여받았다.[26] 육군이 가장 많은 수여자를 배출했고 해안 경비대는 1명의 수여자를 배출한 것이 전부이다.[27] 아무래도 해안 경비대는 영해에서 해안 경비 임무를 수행하고 해외에 파병되더라도 전투 임무는 해군이 맡고, 해안 경비대는 비전투 임무를 수행하기에 이런 훈장을 받을 정도로 험한 일은 드물다. 만약 해안 경비대나 주립 민병대가 몇십 명씩 무더기로 명예 훈장 받을 일이 있다면 그건 분명 미국 본토가 공격받는 상황일 것이다.
8.1. 실제 수여자
자세한 내용은 명예 훈장/수여자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각종 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수여자 위주로 나열했다. 수여받은 사람의 수가 총 3,535명이나 되는 만큼 문서 길이가 너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이름이 없다고 해서 훈장을 받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니란 말은 아니고 이 훈장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무공이 뛰어났던 사람이라는 것도 아니다. 명예 훈장은 창설 초기에 있었던 남북 전쟁 당시 이것 외에 이렇다 할 무공 훈장이 없어 좀 잘 싸웠다 싶으면 수여 대상이 되어 창설 초창기에 남발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운디드니 학살사건에 가담한 20명의 장병들에게도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고, 그 훈장은 현대에도 유지되고 있다. 다만 20세기 들어 중간 단계의 훈장들이 여럿 생기고, 훈장 수여 규정이 엄격해져서 그 가치가 올라가 제2차 세계 대전 즈음에는 군 내·외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훈장이 되었다. 물론 미국이 참전한 전쟁 규모나 미국이 동원한 병력 수를 생각하면 이 수여자 수도 많다고 할 수 없다. 수여자들의 내역을 읽다보면 하나하나를 영화화해도 부족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텐데, 실제로 핵소 고지, 위 워 솔저스, 블랙 호크 다운, 론 서바이버, 더 퍼시픽, 아웃포스트 등의 영화가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 문서도 참조. 미국의 군함들이 워낙 많아 그 군함들에 붙일 만한 이름들이 바닥났고, 군함에는 전사자나 전쟁 영웅들의 이름을 붙이는 전통이 있다보니 명예 훈장이 수여된 사람들의 상당수(특히 해군·해병 출신)는 최신 전투함들의 함명으로 선정되고 있다.
찰스 휘틀시 육군 중령[28] | 조지 맥머트리 육군 대위 | 넬슨 홀더먼 육군 대위 |
앨빈 C. 요크 육군 상병 |
제임스 둘리틀 육군[29] 중령 |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
조나단 웨인라이트 육군 대장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Daniel_Inouye%2C_official_Senate_photo_portrait%2C_2008.jpg |
대니얼 이노우에 육군 대위 |
랜디 슈가트 육군 중사 | 게리 고든 육군 상사 |
마이클 머피 해군 대위 |
살바토레 쥔타 육군 하사 |
패피 보잉턴 해병 대령 |
발도메로 로페즈 해병 중위 |
- 히로시 미야무라: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6.25 전쟁에 참전해 훈장을 받았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존 바실론 해병 중사 |
오디 머피 육군 소위 |
클린턴 로메샤 육군 하사 | 타이 카터 육군 상병 |
다코타 마이어 해병 병장[34] | 윌리엄 스웬슨 육군 대위[35] |
윌리엄 스웬슨(1978년 11월 2일 ~)은 2002년에 미 육군 OCS로 임관한 장교이며, 마이어과 함께 간즈갈 계곡 전투에서 싸웠던 육군 대위다. 스웬슨은 당시 전투에서 구출 작전을 주도했고 그로 인해 명예 훈장 후보에도 올랐으나 탈락했다. 이유는 수뇌부에게 개겨서 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상부에 화력 지원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고, 이를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간즈갈 계곡 전투에서 윌리엄 스웬슨 대위의 활약은 마치 이순신 장군이 녹둔도에서 여진족을 무찌르던 군공을 연상케 하는데 몇 명 되지도 않는 병력을 이끌고 탈레반과 맞서 싸워 승리하고 20여 명의 병력들을 성공적으로 구출해냈다. 이렇게 활약하고도 수뇌부에게 밉보인 스웬슨은 당연히 수훈에서 탈락했다. 훈장도 받지 못한 채 2011년에 전역을 했고, 그 이후 미혼인데다 무직인 상태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스웬슨을 알던 종군기자가, 이후 마이어의 수훈과 그 전공에 의문을 품고 추적해 이러한 사실을 폭로했다. 마이어도, 자신의 저서에서 종군기자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해병대에서는 크게 반발했지만, 캘리포니아의 하원의원이 리언 패네타 국방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져서 2013년 10월 15일에 그는 명예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이어 역시 해당 전투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수훈은 유지되었다. 참고 1 참고 2 위키백과의 스웬슨 대위 항목 역시 참고해도 좋다. 스웬슨은 2014년에 현역 신분으로 복귀하여, 다시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다. 현재는 중령 계급이다. 보직은 미 육군 10산악사단 32보병연대 1대대장으로 근무중이며, 현재 명예 훈장을 수여 받은 유일한 현역 장교이다.
윌리엄 H. 카니 육군 상사 |
조슈아 L. 체임벌린 육군 대령 |
어니스트 에반스 해군 중령 |
작은 호위항공모함을 필두로 한 구축함과 호위구축함 정도로만 이루어진 소함대에게 야마토급 전함을 포함한 일본 해군 주력함대가 달려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명령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함선인 존스턴 포함 3척의 구축함, 1척의 호위구축함과 함께[38] 일본 함대를 향해 돌격해 모가미급 중순양함 쿠마노의 함수를 어뢰로 날려버렸고, 대파된 쿠마노를 피하려던 스즈야도 미군의 공습에 대파되게 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공고와 야마토의 포에 큰 손상을 입혔지만, 응급수리로 함 기능을 어느정도 복구한 후 호위항공모함을 노리고 접근하는 아가노급 경순양함 야하기를 비롯한 구축함 4척에게 단신으로 덤벼들어 시간을 끌었다. 유감스럽게도 일본군의 공격으로 USS 존스턴이 격침되고 퇴함 후 실종되고 말았지만, 에반스의 돌격은 태피 3의 다른 함선들에게도 용기를 주었으며, 에반스의 용기를 이어받은 태피 3 장병들은 용감하게 싸운 끝에 더글러스 맥아더를 비롯한 필리핀의 수많은 미군들을 구하고 일본을 무찔렀다. 사후 추서.
에드 W. "투 톨(Too Tall)" 프리먼 육군 소령 |
관련 영화로 위 워 솔져스가 있다.[40] 영화에서 상부의 명령을 묵살하고 위험을 무릅쓴 헬리콥터 기동을 하는 파일럿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에드 프리먼 소령이다. 전투 이전에 진지에서 야구를 하다가 주인공인 무어 대령을 만나는데, 고증에 맞게 무어 대령보다 키가 머리 하나만큼 커서 무어 대령이 올려다봐야 했으며 콜사인도 "투 톨(Too Tall, 멀대)"이다.
에밀 카폰 육군 대위 |
찰스 워터스 육군 소령 |
데스몬드 도스 육군 상병 |
윌리엄 맥고너글 해군 중령 |
윌리엄 F. 딘 육군 중장 |
한편 미군에서는 실종 중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가 1950년 10월말 북진 중 평양 부근에서 포로로 잡은 북한군 병사의 진술로 미군에서도 이때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을 인지하였다고 한다. 6.25 전쟁사 제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166P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그렇지만 미군은 포로의 진술보다는 당시 상황을 놓고 봤을 때 전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1951년 2월 16일에 명예훈장이 추서되었으며 부인과 자식들이 대리 수상을 하였다.
그 후 생사여부를 계속 조사 중 1951년 12월 18일 북한군이 오스트레일리아 종군기자 월프레드 버쳇를 초청해서 인터뷰를 시키면서 딘 장군이 생존해 있고 자신들이 포로로 잡고 있다는 것을 공개하면서 딘 소장의 상황이 명확하게 알려지게되었고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일반 포로들을 교환한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에 의해 1953년 9월 4일 석방되어 귀환하였다.[44] 여담으로 도피 중 한국 민가에서 얻어먹은 김치나 마늘장아찌가 입에 맞았는지 나중에 미국에서도 종종 만들어 먹었다고 하며 전북 진안에는 딘 루트로 불리는 딘 장군의 도주 루트가 둘레길, 트래킹 길로 조성되어 있다.[45] 이후 미국으로 귀국 후 제6야전군 부사령관으로 몇 년 재직한 후 중장 진급과 동시에 퇴역하여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윌리엄 카일 카펜터 해병 상병 |
에드워드 바이어스 해군 상사 |
더글러스 A. 먼로 해안 경비대 하사[47] |
제임스 스톡데일 해군 중장 |
허셜 우드로 윌리엄스(Hershel W. Williams) 해병 상병 |
이오지마 전투를 넘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으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참전자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그는 퇴역 이후에도 강연, 비영리 단체 우디 윌리엄스 재단(Woody Williams Foundation) 설립 등 현역·퇴역 군인들을 위해 다양한 곳에서 활동했다. 2018년 2월 4일에는 슈퍼볼 LII에 나와 그를 포함한 15명의 명예 훈장 수여자들을 대표하여 심판·선수들 앞에서 코인 토스를 하기도 했으며[51] 2020년 3월에는 본인의 이름이 붙은 원정이동기지선 USS 허셜 "우디" 윌리엄스의 취역식에 참석하여 수병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웨스트버지니아 주에 있는 해안 경비대 무기고와 앞 문장에 언급한 2017년 8월에 진수·2020년 3월에 취역한 미합중국 해군의 2번째 루이스 B. 풀러급 원정이동기지선은 그의 이름을 붙여 그가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
2021년 증손자가 자신을 뒤이어 미 해병대 훈련소를 수료한 것을 지켜본 후 현지 시간으로 2022년 6월 29일, 9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데이비드 버거 해병대사령관은 미합중국 해병대에는 많은 영웅들이 있지만 우디 윌리엄스는 오직 한 명뿐이라는 글을 트위터에 적어 그를 추모했으며 해병대는 F/A-18 2대, F-35 2대를 보내 '추모 편대 비행'을 해주어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로버트 L. 하워드 육군 대령 |
헨리 E. 어윈(Henry Erwin) 공군 상사:
추천 후 최단 시간 내에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인물.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
항공병으로, 1921년 태생이며 1942년에 입대했다. 직책은
육군 항공대의
B-29
폭격기의 통신 담당 승무원이었다. 1945년 4월 12일, 폭격기 편대의 선두기에 탑승했는데 표적 표시용
백린연막탄[53]을 투하하라는 지시를 받고 연막탄의 안전핀을 제거하고 낙하산에 매달아 투하하려 했는데, 신관 이상으로 연막탄이 조기격발되어 기체 안에서 터져버렸다. 1100도 불길을 뿜는 연막탄은 제멋대로 움직이며 어윈의 얼굴을 강타했고, 어윈은 그대로 양쪽 눈의 시력을 잃고 한쪽 귀가 타버리고 코가 뭉개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 후에는 백린 연기가 기체 안을 가득 채워 조종사가 자기 앞에 있는 계기판을 못 볼 지경이 되어 추락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어윈은 이 폭탄을 내버리면 승무원실의 바닥을 녹이고 폭탄창으로 들어가 다른 폭탄들을 유폭시킬 것이라 생각하였고, 이에 불붙은 백린탄을 맨손으로 감싸들고 기체 맨 앞의 부조종사석의 창문으로 향했다. 비행기 중간에서 폭탄을 들고 가던 어윈은 항법사의 책상이 앞을 가로막자 폭탄을 한쪽 옆구리에 끼고 다른 손으로 스프링 잠금장치를 풀고 책상을 밀어재낀 뒤, 양 눈이 멀고 불 붙은 폭탄을 맨손으로 든 상태에서 한 손으로 길을 더듬어가며 마침내 부조종석까지 도달했고, 폭탄을 기체 밖으로 던진 뒤에야 쓰러졌다. 연기가 걷히자 조종사는 비행기가 바다를 향해 다이빙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종간을 당겨 바다 위 90m 지점에서 간신히 비행기를 구했다. 승무원들은 어윈의 불 붙은 옷을 잘라내고, 응급처치를 했으나, 불 붙은 백린은 산소만 있으면 다 탈 때까지 꺼지지 않기 때문에 어윈의 몸에 묻은 백린 조각들은 계속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어윈은 의식이 있어서 극심한 고통의 와중에도 도리어 승조원들을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간신히 이오지마까지 도착한 기체에서 어윈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의사들은 어윈이 아직 살아있다는 데 놀랄 지경이었다.
몇 시간의 수술 끝에 일단 목숨은 건졌지만, 어윈의 상태는 워낙 위중해서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후 훈장이 수여되기 까지의 상황도 매우 드라마틱한데, 지휘관이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새벽에 훈장 추서를 요청하는 전화를 자다 깨서 받았으나 상황을 설명받자 그 즉시 명예 훈장을 추천하고, 전속부관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용사가 죽기 전에 훈장을 가져 올 것" 을 지시했다. 어윈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은 분명해 보였고, 때문에 부관은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명예 훈장 재고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즉시 수송기 편으로 호놀룰루로 날아갔다.
그런데 그 재고라는 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훈장이었다. 부관은 그 박물관의 훈장을 훔쳐서 다시 특별 수송기 편으로 가져왔고, 그 동안 괌으로 후송된 어윈은 4월 19일 괌의 병실에서 훈장을 수여받았다. 놀랍게도 어윈은 이 혹독한 참사로 죽지 않았고, 향후 30개월 동안 41번의 대수술을 받아 시력을 회복하고 한쪽 팔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후유증으로 상시 선글라스를 끼고 살아야 했다. 이후 1947년 공군으로 전군하여 상사(Master Sergeant)로 장애 제대했다.
전역 이후에는 앨라배마 버밍엄에 있는 재향군인 병원에서 상담원으로 근무하였으며, 2002년에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마이클 A. 몬수어(Michael A. Monsoor) 해군 하사 |
* 어니스트 코우마(Ernest R. Kouma) 육군 상사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계급은 당시 중사로, 1950년 8월 31일 낙동강 전선에서 M26 퍼싱을 타고 교전하던 도중 다른 보병들은 후퇴하고 그가 탄 퍼싱이 혼자 후미를 지키고 있었다. 곧이어 북한군 보병들이 그의 전차를 공격하였고, 어니스트는 전차포와 기관총을 이용해서 교전했다. 이 때의 교전은 퓨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북한군이 전차에 올라타자 직접 해치를 열고 기관단총을 쏘거나 포탑을 돌려서 북한군을 쳐 떨어뜨리는 일까지 있었다. 어니스트의 전차는 약 9시간 동안 교전하면서 250여명의 북한군을 사살했다. 어니스트의 전차에서 전사자는 없었다. 이후 1951년 5월 19일에 어니스트를 비롯한 장병들에게 트루먼 대통령이 직접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
- 찰스 린드버그 공군 준장
-
윌리엄 H. 피첸바거(William H. Pitsenbarger) 공군 하사
베트남 전쟁 당시 미 공군 파라레스큐 소속으로 참전했다. 1966년 4월 11일 베트남전 중 미군 최악의 전투로 기록된 '애블린 전투'에서 베트남군에 포위당해 발이 묶인 미 육군 찰리 중대의 구조 요청을 받고 피첸버거 하사가 탑승한 항공구조대 헬리콥터 한 대가 현장으로 향한다. 중대 의무병이 피격돼 중태인 걸 알고 피첸바거는 줄을 타고 전투 현장으로 내려간다. 헬리콥터의 안전이 위태롭자 응당 본대로 귀대해야 했던 그는 부상병을 실은 헬리콥터를 떠나보내고 자신은 전장에 남는다. 전투에서 약 300번의 구조 임무를 수행하였고 60명이 넘는 병사를 구한다. 부상병 치료와 시신 수습을 도맡았을 뿐만 아니라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자진하여 전투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베트남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현장이 수습되면서 전해지기론 사망 당시 피첸바거가 한 손에는 총을, 한 손에는 구급상자를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
전사 후 피첸바거는 영웅적 행위로 공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지만 살아남은 찰리 중대원들과 파라레스큐 전우들은 그 훈장이 그의 행위에 합당한 훈장이 아니라고, 즉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피첸바거가 군인으로서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국 정부에 끊임없이 요청해 32년 만에 그에게 명예훈장을 추서케 하였고, 그의 부모님이 대신해서 훈장을 수여받았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미군 내에서는 장교를 중심으로 수여해야 훈장의 권위가 오른다는 잘못된 인식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오늘날까지도 명예훈장을 받은 공군 사병은 피첸바거를 포함해 모두 3명 뿐이다.
피첸바거가 훈장을 수여하기 까지의 과정을 다룬 영화로 더 라스트 풀 메저가 있다.[54]
토머스 페인(Thomas P. Payne) 육군 원사 |
9·11 테러를 보고 크게 분노하여 2002년 미 육군에 입대,
제75레인저연대에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작전에 여러 차례 참전한 후 OTC 선발과정을 통과하여
델타 포스 대원이 되었다. 중사 시절이던 2015년 10월 22일 이라크에서 대
ISIL 작전 도중 ISIL이 불타는 건물에 가둬놓은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적의 사격에도 불구하고 건물로 진입하여 인질 37명을 구출하였다. 그가 직접 구출한 인질 37명을 포함하여 그 작전에서 구출된 인질은 75명에 달하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9월 11일 명예 훈장을 받았다.
# 현재 원사로 계속 델타 포스 복무 중이며, 최근에는 오스틴 스콧 밀러
ISAF 사령관[55] 경호 팀 중에 있는 것이 목격된 바 있다.
랄프 퍼켓(Ralph Puckett Jr.) 육군 대령 |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 한국전쟁 참전 당시 계급은 중위였다. 1950년 11월 25~26일
미 육군 특수부대인
제8군 레인저 중대에서 병력을 지휘하던 랠프 퍼켓 중위는
청천강 북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205고지 점령 과정에서 중공군에 맞서 활약했다. 작전지 이동 도중 중공군의 공격을 받자 가까운 탱크에 올라 최전선으로 이동했고, 205고지 점령 과정에서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이 지휘하는 레인저 대원들과 함께 고지 전면 개활지에서 적의 총격을 유도하는 등 용맹하게 활약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과 한국군의 3배에 달하는 중공군의 반격에 퍼켓 중위는 수류탄 파편을 맞고 중상을 입는 부상을 포함한, 3번의 부상을 연이어 입었음에도 대피를 거부하고 작전을 지휘했다. 결국 11월 26일 03시에 자신을 버리고 후퇴하라는 명령을 부하들에게 내렸으나 2명의 부하가 명령을 거부하고 그를 안전지대에 옮기는 데에 성공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이후 그가 활약한 205고지 점령 작전 역시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2021년 5월 21일,
조 바이든 대통령이 명예 훈장을 수여했으며[56], 수여식에는 외국 정상으로는 최초로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 당시 퍼켓 주니어는 고령으로 거동이 힘들어 휠체어를 타고 들어왔지만 훈장을 받기 전 수여 사유를 말하는 2분 50초의 적잖은 시간을 두 다리로, 허리를 곧게 피면서 당당한 자세로 서있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휠체어를 끌던 보조역을 맡던 여장교가 보행보조기를 가져다 놓은 것을 옆으로 치우고 부축을 권해도 그저 미소로 거절했다. 이렇게 서있던 이유는 당시 수여식에 온 두 국가원수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라고. 그래도 고령으로 인해 앞 뒤로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바이든 대통령과 여장교가 양 팔을 부축하면서 훈장 수여까지 끝까지 서있을 수 있었다. 당연히 훈장을 목에 거는 순간 현장에서도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8.2. 창작물에서
- 9전단 1941: 김진한(벌레), 이진한(빨갱이), 최창기(창), 조윤하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유진 킴[57][58]
-
김치 전사: 김치 전사[59] - 납골당의 어린 왕자: 한겨울[A]
- 높은 하늘의 한국인: 스카이에이지 리(이천세)[A]
- 더블 타겟: 아이작 존슨 대령
- 더 록: 프랜시스 재비어 험멜 장군
- 람보 시리즈: 존 람보[62]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썬더볼트 로스, 존 워커[63]
- 마블 코믹스: 프랭크 캐슬
- 메탈 울프 카오스: 마이클 윌슨 주니어 대통령
- 빅 게임: 오스카리
- 스펙 옵스: 더 라인: 존 콘래드
- 에어 포스 원(영화): 제임스 마셜 대통령
- 월드 인 컨플릭트: 파커[64]
- 울펜슈타인 3D: B.J. 블라즈코윅즈[65]
- 커리지 언더 파이어: 카렌 월든 대위 [66]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미합중국 육군 지휘관[67]
- 콜 오브 듀티: 고스트: 일라이어스 T 워커
- 톰 클랜시의 소설들: 존 클라크
- 포레스트 검프: 포레스트 검프
- 포 올 맨카인드: 고든 스티븐스, 트레이시 스티븐스
- NCIS 시즌 2: 어니 요스트(Ernie Yost)[68][69]
- 귀환했지만, 총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유진
9. 기타
- 넷플릭스에 같은 이름의 컨텐츠가 있는데 실제로 이 훈장을 받은 영웅적인 군인의 활약을 영상화한 프로그램이다.
- 군인만 주지만 민간인 신분으로 군대와 같이 용맹하게 싸웠거나 큰 역할을 한 경우 받은 경우도 있다. 총 8명이며 명단은 여기에서 확인하자. 유명한 인물로 버팔로 빌이나 유일한 여성으로 남북전쟁때 군의관으로 활약했던 메리 에드워즈 워커가 있다. #
- 병이나 부사관이 수훈했을 경우 수훈 이후 준사관은 물론 GTG(Green to Gold)와 같이 장교로의 신분 전환 과정을 지원하면, 장애인이 되었거나 나이가 너무 많은 등 신체적 문제가 아닌 이상 거의 무조건적으로 합격한다. 나이가 너무 많다 해도, 본인이 원한다면 특례를 인정해 임관 후 소위 계급으로의 전/퇴역 등의 의전을 줄 수는 있다. 대한민국 국군에선 원사나 준위 등 고급 부사관이 소위 계급이 된다는 걸 강등처럼 여기겠지만, 미국 등에선 이런 식으로 고령에 소위가 되는 것을 명예로 여긴다.
- 영어 위키백과에는 수훈자가 전부 개별 항목으로 존재한다.
- EA사에서 만든 제2차 세계대전 FPS 게임 메달 오브 아너 시리즈 가 명예 훈장에서 이름을 따왔다.
10. 미군의 포상제도 목록
11. 미국의 포상제도 목록
12. 외부 링크
[1]
해병대 및
해안 경비대 포함
[2]
우주군 포함
[3]
Congressional Medal of Honor와 혼용되지만, 정식 명칭은 그냥 명예 훈장이다. 군이 아니라 국가 전체가 인정하는 면을 강조하기 위해 국민을 대변하는 의회가 수여한다고 Congressional이라고 붙인다.
[4]
"the President may award, and present in the name of Congress", DOD MANUAL 1348.33, VOLUME 1 MANUAL OF MILITARY DECORATIONS AND AWARDS: MEDAL OF HONOR, pp.8. 참조.
[5]
과거 외국인을 모병하여 입대와 동시에 시민권을 부여하는
MAVNI 제도가 있었으나, 2018년 이후 사실상 중단되었다.
[6]
미합중국 육군,
미합중국 해군,
미합중국 해병대,
미합중국 공군,
미합중국 우주군,
미합중국 해안경비대 중 한 부처.
주방위군으로 번역되는 내셔널 가드(National Guard)도 원칙적으로 미육군과 미공군 소속
예비군이므로 명예 훈장을 받을 수 있다. 대서양 횡단비행으로 유명한
찰스 린드버그도 주방위군 육군 항공대 소속(미주리 주방위군 35사단 110관측대대)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2001년 사후 추증이지만 뉴욕 주방위군 소속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의 참전 공로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그 밖에도 주 방위군에서 전쟁에 소집되어 명예 훈장을 받은 사람이 여럿있다.
[7]
가장 극단적인 예로 후술할 헨리 E. 어윈 상사의 예가 있다. 만약 어윈 상사가 투하하려던 백린 신호탄이 정상적으로 제조된 물건이었다면 극심한 부상을 무릅쓰고 자기 희생을 해야 할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8]
이 경우 훈장 추천 사유 발생일로부터 3년 이내에 추천되어야 한다는 기간 제한이 뒤따른다.
[9]
이 경우 지휘관의 추천 제한 기간을 넘긴 후보자를 추천한다. 미국
NCIS(드라마)에서, 수여 후보자가 게이라는 이유로 지휘관이 추천서를 묻었으나 후보자의 희생이 언론에 보고되자 상원의원 한 명이 직접 추천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는 장면은 여기에 근거한 것.
[10]
실제로 살아서 명예 훈장을 수여받는 사람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각 주 내에서는 물론이요, 미국 내에서도 살아있는 전설 대우를 받을 정도. 실제로 방송에서 만약 명예 훈장 수여자의 모습이 나오면, 그의 이름이 방송 자막에 따로 표시된다.
[11]
예를 들자면 부상을 입었어도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용감히 싸웠다거나, 후퇴하는 아군의 후미를 지키기 위해 혼자 남아 적군과 맞선 것 같이 말 그대로 미군으로서의 '명예'를 지킨 행위를 높게 친다. 비교적 덜 알려진 수여자를 중심으로 보면, 2차대전의
미드웨이 해전 당시 포격으로 중상을 입었음에도 자리를 지키면서 통신시설을 복구하도록 하고 자신은 전사한 조지 캐넌 중위,
타라와 전투 당시 혼자서 여러 일본군 총좌를 파괴하고 그 와중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동료 병사까지 구출한뒤 다시 공격을 이어나가다 전사한 윌리엄 보들론 해병 중사,
사이판 전투 당시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직접 기관총을 잡고 일본군에 맞서 부하들을 지키다 결국 전사한 윌리엄 오브라이언 육군 대령, B-29 폭격기 안에서 백린탄 오발로 기체가 추락할 위기에 처하자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태워(!) 동료 전우들과 기체를 구한 헨리 어윈 육군 항공대 상사(수십 차례의 수술 끝에 생존) 등이 그 예이다.
[12]
마틴 러스, 《브레이크 아웃》(나남출판) 참조.
[13]
미드웨이 해전 중 운명의 5분에 관련된 조종사들의 경우 항공모함 격침이 전술적 목적이었으므로 당연히 해야 할 임무 달성 범위 안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무공임에도 불구하고 십자장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을 격추한 조종사들 역시 애초부터 야마모토를 잡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십자장에 그친 것이라 볼 수 있다.
[14]
장진호 전투의 올리버 스미스 소장 역시 대단히 훌륭히 전투를 치렀지만 결과적으로는 패배였고, 장진호 전투만의 이유는 아니지만 이북에서 완전 철수라는 결과가 뒤따라왔으므로 명예 훈장을 못 받았다고 봐야 한다.
[15]
미드웨이 해전의 존 월드런 소령의 경우 공격 이동 중 상관인 링 중령에게 대놓고 항명 및 하극상을 벌였고 이를 모든 부하들이 듣고 있었으므로 무공이 뛰어난 것만 반영하여 십자장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링 중령이 엄청난 관심간부였고 장성 빽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날뛰는 바람에 항공모함 전체에서 경원시되는 인물이었고, 그 '빽'이었던 미처 제독은 링을 보호하려고 보고서 조작을 시도하다가 스프루언스의 분노를 사서 짤렸다, 미처 제독이 사람 보는 눈은 없었지만 능력은 있으니 복귀시키자고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니미츠 제독이 건의했음에도 스프루언스는 미처 제독을 계속 불신했고, 1년 넘게 한직을 전전하다가 니미츠가 '전임자인 파우널 제독을 동승시킬 것, 실망스러운 행동을 할 경우 변명 듣지 않고 즉각 지휘권 박탈 및 보직해임'이라는 초강경한 조건을 건 뒤에야 스프루언스의 동의를 얻어 다시 승함할 수 있었을 만큼 제대로 찍혔었다. 다행히 그 전투에서 전공을 올렸기에 망정이었지 안 그랬으면 괘씸죄로 다시는 지휘권을 받을 수도 없었을 지경. 결과적으로 링 중령의 관심간부짓에 항명 안 했으면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4척은 무사히 살아돌아갔을 거라는 것까지 생각하면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를 불러온 항명이었다.
[16]
대표적으로 진주만 기습 이후 일본 본토 공습을 가한 돌리틀 중령의 경우, 단순히 보면 본래의 작전계획대로 본토를 공습 성공한 것으로만 볼 수 있지만, 이 공습 자체가 거의 자살특공에 가까운 임무였고, 결과적으로 미국을 결집시키고 희망을 주어 분위기를 반전시켰다는 데 커다란 상징적인 의의가 있으므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17]
6.25 전쟁 당시 윌리엄 딘 소장의 경우 전투에 패배하고 포로로 잡히는 치욕까지 겪었지만, 후퇴를 최대한 하지 않고 사단장이 직접 진두지휘해서 전차를 격파하는 등 분전한 결과 적의 공세 지연이라는 전략적 목표 자체는 달성하였고, 그 결과 국군이 재정비하고 미군이 투입될 시간을 벌었던 데다가, 당시 사단장이 전사했다고 판단하여 추서 차원에서 명예 훈장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2차세계대전 필리핀 전역의
조나단 웨인라이트 장군 역시 결과적으로는 패배하여 포로 생활까지 했지만, 맥아더 대신의 희생양으로서 끝까지 분전하여 일본군의 애초 작전계획을 최대한 지연시켰으며, 그 결과 미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호주로의 공세를 단념시킨 데 공이 크므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18]
거기에 위기에 처한 전우나 민간인 여럿을 같이 데려오면서 자기가 살아야 할 정도니 살아서 오는 군인이면 그의 무공담을 바탕으로
영화 한 편 정도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19]
이 혜택 규모가 미국답게 어마무시한 것 때문에 인터넷에서 최고 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수여자의 혜택과 비교하며 우리나라의 시궁창스러운 군인대우 정책을 까는 글이 자주 보인다. 실제로 무공훈장을 제외한 다른 훈장은 혜택이 전혀 없으며, 무공훈장조차 수훈시 사후 국립묘지 안장, 항공료 30% 할인, 지정된 보훈병원 사용료 60% 할인이 끝이라 아래에 줄줄히 나열되는 혜택과 비교하면 정말 초라하다.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3항에 명시된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라는 문구 때문이기도 하고, 훈장 자체가 너무 쉽게 남발되어 훈장의 가치가 바닥을 치기 때문이다.
[20]
말이 민간인이지 전쟁에서 이 훈장을 받았다는 건 거의 전쟁영웅이기 때문에 군 입장에선 그야말로 전설급 인물일 것이다.
[21]
Space-A는 어디까지나 그 근본적 목적이 군사 목적인 프로그램이고, 편의를 봐줘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규정에 맞기만 하면 이용은 가능한데, 군인 우대 항공표를 파는 단체들에서는, Space-A를 이용하다가 표가 취소되거나 해서 문제가 발생해서 휴가 미복귀 손해 같은 상황이 터저도 우린 책임 못 짐. 애초에 이 목적으로 쓰지 말라니까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휴가 목적으로는 진짜 시간 널널하게 주어진 경우에나 써야 함"이라는 설명도 있다.
[22]
그냥 군인에게도 좋은 좌석을 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평생 한 번 만날까말까 한 명예 훈장 수여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명예 훈장 수훈자한테 1등석 자리를 양보한 적이 있다는 게 주변인들한테 자랑할 거리가 된다.
[23]
특히 미국의 사관학교는 상위권 성적도 성적이지만 사관학교 졸업 후 어지간한 전쟁범죄나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영관급 고급장교까지 갈 수 있는 엘리트 코스로 유명하여서 입학하기가 엄청 힘들다. 그런 사관학교를 의지만 있다면 프리패스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24]
이것도 경우에 따라 다르다. 속옷으로나 입을 런닝티 차림에 명예 훈장을 패용해도, 그게 하계 스포츠 행사가 열리는 자리였다면 오히려 '야 저 아저씨 센스 있구나' 하며 박수를 쳐줄 것이다.
[25]
애초에 수여자 중 다수는 수여자로 결정되기 전 이미 전사한 경우가 많다.
[26]
https://www.cmohs.org/recipients/lists/double-recipients
[27]
1943년 5월 27일 더글라스 먼로 신호중사가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활동으로 훈장을 받았던 것이 해안 경비대의 유일한 수훈 사례이다.
[28]
1921년 11월 뉴욕에서 아바나로 가는 배 안에서 실종되었다. 자살했을 것이라는 게 정론이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29]
정확히는 육군 항공대 소속으로 훗날 공군이 창설되자 공군으로 전군했다.
[30]
둘리틀의 진급은 진짜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파격적이었다.
소령에 진급한 지 몇 개월 안 되어
둘리틀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서
중령이 되었고 그걸 성공했다고 바로
준장이 된 건데 소령에서 준장으로 올라간 게 같은 나이라는, 실로 괴물같은 고속승진을 한 것이다.
[31]
미 해군 함선 중에서 일본계 함명으로는 강습상륙함 이오지마 이후 오랜만에 나오는 사례.
[32]
이로 인해 손에 화상도 입었다. 참고로 빈 총 무게 기준으로 15kg이지, 전투시엔 냉각수가 차 있는 데다가 탄띠까지 장전한 상태라 20kg은 가볍게 넘겼다.
[33]
아프가니스탄 파견 전, 동두천의 캠프 케이시에서 근무한 주한미군이다.
[34]
왼쪽 가슴에는, 상이군인에게 수여하는
퍼플 하트 훈장도 있다.
[35]
좌우의 인물은
미국 육군부 장관인
존 매큐와 미국 육군참모총장
레이먼드 오디어노 대장이다. 스웬슨도 굉장한 장신으로
오바마와 키가 거의 같다.
[36]
명예 훈장 수여를 알리기 위해 백악관에서 마이어가 일하는 곳으로 전화를 했는데, 마이어 병장은 지금은 현장에서 일하는 중이며 업무 시간에 다른 짓을 하면 수당을 받을 수 없다며 점심시간에 다시 전화하라고 했다. 이에 백악관에서는 그의 점심시간에 맞추어서 다시 마이어에게 통화를 했으며, 통화를 마친 마이어는 다시 일을 하러 갔다고 한다. 후에 백악관에서 열린 수여식에서, 오바마는 이 일화를 언급하며 "내 전화를 받아줘서 감사하다"는 조크를 했다.
[37]
해군 십자상, 육군 수훈 십자상과 동일하다.
[38]
존스턴과 함께 돌격한 함선은 같은
플레처급 구축함 호엘과 히어만,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 사무엘 B. 로버츠였다. 이 중 전투 종료까지 살아남은 함선은 히어만 혼자였다.
[39]
영화
위 워 솔저스로 영화화되었다.
[40]
멜 깁슨이 주연했다.
[41]
당시 미군 의무병은 무장을 하지 않았다.
[42]
정확히 75명은 아니다. 당시 동료 전우들은 100명 이상이라고 증언하였는데, 이에 반해 도스 본인은 50명도 안 될 것이라며 겸손을 보이자 트루먼 대통령이 75명으로 정했다고 한다.
[43]
이 사건에서 이스라엘군이 리버티함의 승조원들 전부를 몰살시키려고 공격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한번에 격침시키려 하였으나 오폭이었던 척 어물쩡 사과하고 구조를 제안한 것인데, 평범한 군함도 아닌 '최첨단 도감청 장비를 갖춘 정보수집함'이라면 이런 속내를 일찍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스라엘과 마찰을 빚기 싫은 미국 고위층에서 이를 싹 기밀로 묻어버렸으니 결국 현장 실무요원들만 죽어나갔다.
[44]
딘 소장이 유엔군이 붙잡은 공산군 측 최고 계급의 포로인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으로 귀환했다는 설이 있지만 휴전 협정 과정에서 오랜 진통 끝에 유엔군과 공산군이 원칙적으로 자유 의사에 따라 귀환을 원하는 포로들을 모두 상대방에게 송환하기로 합의를 했었다. 즉 양 측이 포로 인원수 및 계급 등 조건에 따라 포로 교환을 진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엔군에서 리학구라는 고위급 장교 포로를 수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딘 소장은 귀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덧붙여 미군 측 기록에도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하였다는 근거자료는 찾기 힘들며 국내에서도 2000년대까지 딘 소장이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했다는 기사 등이 전혀 없었고 2010년대 이후 이런 설이 생겨났다.
[45]
개판 오분전의 급조된 파병 부대를 가지고도 지연전을 훌륭히 성사시켰고 수적, 질적이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사단장이 몸소 전선에서 싸우는 등 그 공이 결국 포로가 됐음에도 적지 않았다. 더군더나 딘 소장은 인천상륙작전을 알고 있음에도 포로가 된 후 철저히 비밀을 유지했고 결국 한국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한국 입장에서도 참 고마운 장군.
[46]
인스타그램 아이디까지도 chiksdigscars, 즉 여자들은 흉터를 가진 남자를 좋아한다이다.
[47]
Signalman First Class. 국군에서는 번역시 이 계급을 하사로 보고 있지만 실질적인 위상을 감안하면
중사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48]
모친 역시 해안 경비대에서 중위로 전역하였으며 'The Hero's Mother', 'Old Lady(여사님)' 등의 별명이 붙었다. 먼로 중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49]
포로로 살아온게 뭐 대수냐 싶을 수도 있지만…스톡데일의 항목에도 일부 나와있듯이 그는 북베트남의 비인간적인 포로 대우와 선전을 위한 각종 모략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힘을 내어 미군 포로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결국 꺾이지 않고 살아 돌아와 미군의 기상을 보여주었기에 그 공이 결코 작지 않았다. 비슷하게 제러마이아 덴턴(Jeremiah Denton)은 눈을 깜빡임으로서 Torture이란 단어를 모스 부호를 통해 북베트남의 비인간적인 포로 대우를 알린 공로로 2등급 무공훈장인 해군수훈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가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온갖
고문이란 고문을 다 받고 조국으로 살아돌아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50]
화염방사병은 일본군 기관총 사수 입장에서 최우선 제거 대상인 걸 고려하면 목숨을 건 초인적인 행동을 4시간 동안 한 것이다. 그것도 일본군이 가장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싸웠던 이오지마에서였고, 4명의 동료들이 같이 투입되었지만 그들이 모두 전사해 홀로 일본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고.
존 바실론과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그의 행적에 방송 자막에서는 살아있는 전설 (Living Legend)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그를 칭송했다.
[51]
슈퍼볼 전 인터뷰 영상,
슈퍼볼에서 코인 토스를 하는 윌리엄스
[52]
부상은 14번 당했다고 한다.
[53]
선두기가 떨어뜨린 백린연막탄의 연기와 불꽃을 보고 후방에서 따라오던 기체들이 폭탄을 투하한다
[54]
세바스찬 스탠,
새뮤얼 L. 잭슨,
윌리엄 허트,
에드 해리스,
크리스토퍼 플러머 등 대배우들이 열연했다.
[55]
밀러 역시 델타포스 출신이며, 육군 대장임에도 불구하고 본인도 직접 M4 카빈으로 무장하고 다닌다.
[56]
이때 바이든 대통령이 전화로 퍼켓 주니어에게 훈장 수여를 알렸는데, 퍼켓 주니어는 대수롭지 않게 괜히 야단피우지 말고 그냥 우편으로 보내달라며 털털한 반응을 보였고, 바이든이 야단피울 만한 가치가 있다며 설득한 끝에 수여식에 직접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수여식에는 퍼켓 주니어의 손주 6명도 초대받았는데 미 전역에 흩어져 지낸 탓에 여행준비에 정신이 없었다는 후일담은 덤.
[57]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귀국한 직후 1차 대전의 업적을 이유로 대장 진급과 함께 수여받았다. 실질적으로는 롬멜을 갈아버리고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대승을 거둔 전적으로 수여받은 셈, 물론 1차대전기에 캉브레 전투에서 수천 명의 포위된 병력을 구출한 것이나 적 1개 사단을 갈아버린 아미앵 전투 둘 다 명예 훈장을 수여받을 만한 공적도 맞지만 그 직후에 본인이 올린 흑인 장병들에 대한 훈장추천을 상부가 기각한 것에 대한 문제로 참모본부에서 폭력사태를 일으키는 바람에 군사재판은 면했지만 훈장도 못 받았었다.
[58]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더글러스 맥아더 역시 명예 훈장을 받았지만 시기가 다르다. 보너스 아미 사건 시기 즈음 참모총장일 때 우유 원정대 사건에서의 결단으로 미합중국의 명예를 지켰다는 이유지만, 우유 원정대 사건은 미국 정부에게 있어서 치욕적인 사건이기에(멀쩡한 참전용사들을 빨갱이라고 보고했다며 군 정보부의 관계자들 상당수가 군사재판에 회부되기까지 했다) 명목상으로는 1차대전의 군공으로 받은 것으로 대장 전역과 동시에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그 이후에는 민간 정치인으로 캔자스 주 상원의원을 거쳐 FDR 거국 내각의 전쟁부 장관직에 오른다.
[59]
위에서 설명했지만 미군 소속이 아니라 원래라면 수훈을 못 받는다.
[A]
2번 받는다.
[A]
[62]
월남전 참전 활약으로 한 번,
베트남에서의 인질 구출 임무로 또 한번 추대된다.
[63]
이쪽은 무려 3개나 수여 받았다는 설정이다
[64]
이 사람은 대대도 아니도 중대 하나와 대대의 지원만으로 소련군의 공세를 막고 미군의 반격을 모두 해냈다.
[65]
미국이 멀쩡히 존재하는 3D 스토리 한정. 최종 미션을 클리어하면 명예 훈장을 수여받고, 덤으로 미국의 부모들이 블라즈코웍즈의 이름을 따서 아이 이름을 지으며 영화배우와 사귀는 영웅이 됐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66]
어떤 한 부하군인의 의도치 않는 성차별 발언을 딛고 희생과 헌신 섞은 큰 공헌을 세웠다.
[67]
제29보병사단 예하 166연대 소속 에이블 중대,
제101공수사단 소속 폭스 중대 등 여러 부대들을 이끌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고
팔레즈 포위전에서 후퇴하는 독일군 300명을 사살하는 등
서부전선에서
미군의 승리를 이끈 공로로 받게 된다.
[68]
2차대전 참전용사인 80세 노인으로, 퇴역 해병대 상병(Corporal)이다. 배우는
찰스 더닝(Charles Durning, 1923.2.28–2012.12.24). 시즌 2 에피소드 7, "Call of Silence"에 등장하며, 해당 에피소드는 요스트가 2차대전 당시 전투중 아군을 죽였다고 자수, 처벌을 요구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그게 언제인지도 기억을 못 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서 그냥 좋게 끝내려 했지만, 군대식으로 인식번호를 물어보니 군대식으로 바로 답을 하고, 해군장관이 요스트가 보낸 편지를 읽는 등 상황이 들어맞자 하는 수 없이 체포하려고 해군 법무소령 페이스 콜먼(Faith Coleman)이 해병대
헌병 둘을 대동하고 출동해 규정대로
수갑을 채우려 했는데, 수사관
앤소니 디노조가 콜먼과 케이트간의 실랑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요스트의
넥타이를 옆으로 넘겨 명예 훈장을 보여준다. 그것을 보자마자 헌병들은 (착모중일 때에 한해 경례를 한다는 규정에 따라)바로 직립부동 자세로 경례했고 콜맨 소령은 (실내라서 정모를 벗고 있었기에 경례를 대체하는)부동 자세를 취했다. 당연히 수갑 착용도 면제받는다. 요스트가 살해했다고 자백한 전우는
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한 동료 해병으로, 죽기 직전
지뢰를 밟아 두 다리가 날아가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마침
일본 육군이
야습을 위해 바로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대원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동료 해병의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죽었던 것이다. 깁스가 기지를 발휘해 일본 육군 출신 참전자
노인을 데리고 와서 맥기를 시켜서 준비한 영상과 성냥들을 계속 태움으로 유황냄새를 풍기게 함으로, 재연을 통해 일련의 상황들이 요스트의 입에서 나오게끔 유도하여 무혐의로 종결된다. 설령 기소됐다 한들 명예 훈장 수훈자를 우대하는 특성상 법정에서 알아서 긴급 피난 등 위법성 조각 사유를 들거나 해서 무죄 판결해줬을 것이다. 그
일본인 노인은 근처
일식집
주방장이었는데, 사건 이후 요스트가 그 노인의 일식집에 와서 뒤풀이를 하며 다시 만난다. 일본인 노인은 이오지마 전투에 참전한 것은 아니고
과달카날 전역에 참전했다며 요스트에게 건배를 제의한다. 이를 알게된 요스트는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받는데, 본인 역시 과달카날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요스트 본인이 수십년간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이야기하고, 법정에서 당당하게 무죄까지 받아 마음의 짐까지 덜며 훈훈하게 마무리됐다.
[69]
배우 찰스 더닝 또한 2차대전 참전용사로 육군 사병으로 복무했으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
벌지 전투에 참전했고 전공으로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2012년 89세로 사망했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