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1:40:41

마터호른

마테호른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명일방주의 오퍼레이터에 대한 내용은 마터호른(명일방주)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5-lakes-hike-zermatt-Switzerland.jpg
가장 유명한 구도 중 하나인 리펠제 호수에서 촬영한 샷.[1]

1. 개요2. 등반 역사3. 찾아가는 길4. 기타5. 관련단어

1. 개요

파일:마터호른.jpg


한국어 마터호른
독일어 Matterhorn

스위스 관광청의 안내 페이지(한국어)

마터호른(또는 마테호른)은 알프스산맥의 봉우리이며, 특유의 삼각뿔 모양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가장 유명한 봉우리 중 하나이다.

스위스 체르마트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10km 떨어져 있으며,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다. 스위스 쪽에서는 뿔모양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길게 늘어진 릿지 지현의 능선 끝 부분에 봉우리가 있다. 구글 어스

해발 4,478m이며,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보다 300m 낮다. 그럼에도 몽블랑보다 늦게 정복되었다. 이유는 당연히 특유의 깎아지른 지형 때문. 이탈리아쪽은 계단식 경사이나 스위스 쪽은 장벽처럼 가팔라 오르기가 쉽지 않다.

꽃보다 할배에서 이 산이 등장했을 때, 영화배우 경력이 많은 백일섭이 이 산을 보고 파라마운트 픽쳐스 로고에 쓰인 산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파라마운트 로고는 이 산이 아니라 벤 로몬드 산으로 창립자의 동네에 있던 산을 그대로 로고화한 것이라 한다. 다만 꼭 꽃할배 탓만은 아닌 게 사실 스위스 관광사에서도 마터호른을 파라마운트 로고라고 소개한다. 파라마운트 로고가 마테호른?

마터호른은 알프스 3대 북벽중 하나로 유명하다. 알프스 3대 북벽은 마터호른 이외에도 아이거, 그랑드 조라스 등이 있다.

지형학적으로는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 판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알프스 산맥에서 횡압력에 의해 형성되는 역단층의 일종인 오버트러스트(over-thrust)단층에서 횡와습곡에 의해 암체가 횡적으로 이동한 nappe가 해체 되어 klippe라 불리는 독립 구릉으로 남은 형태의 봉우리다.[2]

에베레스트에 비하면 높이가 절반 수준이지만 등산 중 사망자는 에베레스트의 두 배 정도 된다. 에베레스트의 경우 현재까지 290여명 가량이 등산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3] 마터호른의 경우 200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약 500여명이 사망했으며 매년 평균 50여건의 사망사고가[4] 발생하고 있다.

2. 등반 역사

파일:external/s3-eu-west-1.amazonaws.com/B001771.jpg

알프스 황금시대의 종결자, 그 이후의 삶은 어땠나

1865년 7월 14일에 영국인 탐험가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 1840~1911)가 스위스 능선을 타고 처음으로 산 정상에 도달했다. 윔퍼는 본래 판화 작가였다가 20세의 나이에 처음 찾은 알프스의 아름다움에 깊은 인상을 받아 등산가가 되었고,[5] 이미 마터호른 정상 도전에 여러차례 나서기도 했다. 마터호른의 정상을 처음으로 정복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그러나 하산 도중, 실족에 이어 로프가 끊어지는 사고로 총 7명의 등반대원 중 4명(쿠로, 허도우, 더글스, 허드슨)이 사망했다. 이 등반대는 처음부터 큰 위험성을 안고 있었는데, 급조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윔퍼 자신은 당시 기준으로는 꽤 오랜 기간 준비를 해왔지만, 그의 계획에서의 핵심은 이탈리아의 베테랑 등반 가이드 조반니 안토니아 카렐을 고용하여 오른다는 것이었는데, 카렐이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난관에 봉착했다.

사실 카렐은 조국인 이탈리아 등반대와 함께 마터호른에 초등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윔퍼에게 이를 숨기고 협력하는 척하며 이탈리아 등반대에 윔퍼의 정보를 누설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7월 11일 이탈리아 등반대가 카렐과 함께 마터호른 산기슭에 등장했고, 카렐이 뒤늦게 윔퍼에게 계약종료를 통지하였다.

마음이 급해진 윔퍼는 다른 가이드를 찾게 되었는데, 다음날 인근의 다른 산을 등정하고 돌아오던 18세의 영국 등반가 프랜시스 더글라스 경이 자신이 고용한 스위스 출신 가이드 페터 토우발더 부자[6]를 소개했고, 여기에 영국의 목사이자 등반가였던 찰스 허드슨이 동료였던 더글라스 허도우,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프랑스의 전문 가이드 미셸 오귀스트 쿠로와 함께 참여하면서 등반대가 결성되었다. 즉 '이탈리아 인들이 영국인을 속이고 마터호른을 초등하려 한다'는 소식에 열받은 영국인들에 의해 불과 하루이틀만에 3개 팀이 합동 등반대를 급조했고, 그나마 그 중 한 팀은 원래 마터호른 등반계획이 없었던 것.

특히 위험하기로 유명한 마터호른 등반대에 참여한 허도우가 불과 19세의 초심자였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는데, 결국 하산도중 이 사람이 발을 헛딛는 바람에 아랫쪽 4명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물론 등반대는 이런 위험성에 대비해서 추락한 아랫쪽 4인을 로프로 연결된 위쪽 3인이 버텨주도록 로프로 연결하고 있었지만, 담당자가 총 300kg만 견딜 수 있는 너무 약한 예비용 로프를 사용하는 바람에 끊어져 버렸다. 결과적으로 위쪽 3인은 같이 추락사하는 위험을 회피한 셈이어서, 특히 이 로프에 관한 의혹에 시달렸다.

비록 초심자를 데려가거나, 약한 로프를 사용한 것이 그의 결정은 아니었지만, 살아남은 등반대의 리더는 그 뿐이었다.[7] 심지어 어떤 이들은 로프가 끊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 살기 위해 칼로 끊은 것이 아니냐라고 의심하기도 했다. 결국 이 일로 윔퍼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고 죽을때까지 이에 대하여 괴로워했다. 비난도 비난이었지만, 윔퍼는 매일밤마다 사고장면이 환영으로 나타나고, 추락해가는 사망자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롭다는 회고를 남겼다.

이후 윔퍼는 알프스와는 거리를 둔 채 그린란드와 안데스산맥, 로키산맥을 비롯해 세계의 여러 산악 및 극지방을 탐험해 명성을 남겼고, 엄청난 장수는 아니라도 71세의 천수를 누리며 편히 세상을 떠났다. 노년에 비로소 알프스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날 당시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살만큼 살았다. 죽은 동료들을 만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프랑스 샤모니의 알프스 인근에서 죽었고, 그곳에 묻혔다.

한편 윔퍼의 등정로부터 불과 3일 후, 위에서 언급한 이탈리아인 조반니 안토니아 카렐이 이탈리아 등반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능선을 통해 산 정상에 도달했다. 카렐은 이후에도 등산 가이드로 활동했고, 1880년에는 윔퍼와 함께 안데스 등반에 나서 과거의 악연을 씻어냈다. 그리고 1891년 8월 마터호른에서 자신이 안내를 담당한 등반대의 하산을 안전하게 진행시킨 후 고산병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숨을 거두었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한 윔퍼도 애도의 뜻을 전했다.

윔퍼는 생전에 <알프스 등반기>라는 회고록을 남겼고, 오늘날까지 세계 산악계의 명저로 읽힌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1988년 번역 출간되었지만, 워낙 오래된 책이라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2011년에 윔퍼의 생애를 다룬 평전 <마터호른의 그림자>가 번역 출간된 바 있다.

3. 찾아가는 길

마테호른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단 근처의 가장 큰 마을(도시)인 체르마트로 가야한다. 열차편으로 가려면 어디에서 출발하든 일단 브리그(Brig)나 비스프(Visp)까지 가서 체르마트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한다. 비스프에서는 체르마트로 가는 우편버스도 있는데, 시간만 더 걸리므로 그냥 브리그나 비스프에서 사철타고 가는 게 낫다. 참고로 사철이므로 스위스 패스는 이용가능하지만 유레일 패스는 추가요금을 내야 했.. 는데 2017년 1월 1일부터는 유레일 패스 역시 추가요금 없이 이용 가능하다.

자동차로 가려면 마찬가지로 비스프에서 체르마트로 운전해 가면 되는데, 화석연료로 가는 차는 체르마트에 진입할 수 없으므로, 체르마트 아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마테호른을 등반하려면 전문적인 산악인이 아니면 추천하지 않는다. 사진으로 보듯이 산세가 험하고 아주 높은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등반하려면 일단 Hörnlihütte(회른리휘텔. 회른리산장)까지 간 다음에 거기서 회른리 능선을 따라 Solvay Hut(솔베이 훗, 솔베이 대피소)까지 간 다음에, 거기서 정상까지 등반하면 된다.

전문적인 등반을 하지 않고, 그냥 트레킹만 해도 좋다. 트레킹 코스가 정말, 다양하게, 엄청나게 많다. 가장 인기가 많은 트레킹코스는 5개 호수 트레킹이다. 일단 수넥가(Sunnegga) 전망대까지 간다음에 슈텔리 호수-그린예 호수-그륀 호수- 모스예 호수- 라이 호수(Stellisee - Gründjesee - Grünsee - Moosjiesee - Leisee)를 거쳐 다시 수넥가 까지 되돌아오는 코스이다. 일단 트레킹을 하기로 결심 했다면 체르마트 관광안내소에서 트레킹 지도를 반드시 받아서 챙기자. 트레킹 코스가 정말로 많고, 길을 잘못 들면 1시간 갈 거리를 5시간 넘게 걸어가야 할 경우도 생기므로 반드시 지도가 있어야 한다.

전망대 중 해발 3,100m의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는 마터호른이 인쇄된 위스키 잔을 판매한다. 체르마트에서 출발하는 등산철도( 푸니쿨라)로 올라갈 수 있으며 마터호른 외에도 360도 이탈리아 쪽 봉우리들까지 모두 감상할 수 있는 뷰포인트가 있다. 가 보면 마터호른봉을 배경으로 온더락 위스키 잔을 들고 컨셉사진 찍는 관광객들이 상당히 많다.
고르너그라트에서 등산철도를 타고 내려오다가 중간 역에서 내리면 본 문서 상단의 리펠제 호수가 있다. 사진이 가장 잘 나오는 포인트인지라 호숫가에 얼핏 봐도 50명 정도 이상의 인원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도 상술했듯 트래킹 코스가 매우 잘 되어 있어 이정표도 상세하며 3,000미터급 고산준봉과 고원의 모습을 감상하며 하산할 수 있고, 리펠제 호수에서 트래킹을 즐기며 리델알프역까지 내려오면 식당이 하나밖에 없는데 알피타라는 이름의 이탈리안 펍이다. 트래킹 후 마터호른 봉우리를 감상하며 휴식을 겸해 멕주와 식사를 할 수 있는 포인트이니 참고.[8] 아니면 등산철도를 타고 체르마트까지 내려가야 한다.
Matterhorn Glacier Paradise라고 하는 전망대도 있는데 해발 3883m 고도까지 올라간다. 이쪽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이탈리아쪽에서도 접근이 가능한데, 그러려면 발레다오스타 주의 Breuil-Cervinia에서 마테호른을 즐길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여기를 경유한다면 체르마트 뿐만 아니라 아오스타의 다른 봉우리를 감상하기 위해 가는 경우가 많다. 스키장은 이탈리아 쪽에 더 많다. 다만 Breuil-Cervinia은 체르마트보다 가기가 훨씬 까다로운데, 일단 기차로 Châtillon/Saint-Vincent까지 간다음에(DB에서 검색시 Chatillon로 검색해야 한다.)거기서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차로는 A5 Torino-Aosta motorway를 타고 Châtillon/Saint-Vincent출구로 나오면 된다. 그러면 거기서 Strada Regionale 46을 타고 끝까지 가면 Breuil-Cervinia. 자신이 스키를 정말 좋아하면 여기로 가는 걸 한 번 고려해 보면 좋다.

4. 기타

5. 관련단어


[1] 때로는 물빛이 탁할 때가 있고, 봄이면 꽃이 만개한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래도 평소에는 마터호른의 압도적 웅장미와 호수에 비치는 풍경은 그것만으로도 관광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높다. 특히 날씨가 좋으면 근처 등산철도의 아래 역까지 약 50분 걸리는 하산코스로 걸어내려가면 3000미터급 고산준봉들의 또 다른 웅장한 자연미를 감상할 수 있다. [2] 이 때문에 마터호른뿐만 아니라 인근 고산준봉들에서 가로 줄무늬를 볼 수 있는데, 테티스해 시절 퇴적층이 습곡이 되어 굳어진 흔적이다. 히말라야산맥에서도 똑같은 것을 볼 수 있으며, 생성 기작은 똑같다. 그러다보니 두 곳 모두 삼엽충 등 화석이 많이 발견된다. [3] 에베레스트에서는 평균 매년 10명에서 20명 안밖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4] 급성고산병으로 인한 뇌의 부종, 추락, 저체온증 등으로 인한 [5] 등산가가 된 후에도 자신의 활동을 담은 여러 판화 작품을 남겼다. 당시에는 판화 출판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장르였고, 윔퍼는 이들 판화 작품을 등산 및 탐험 활동을 위한 경비 마련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6]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 모두 페터였다. [7] 허도우를 데려간 허드슨은 이 사고로 사망했다. 살아남은 다른 두 명은 문제의 로프를 사용한 토우발더와 그의 아들이었는데 이들은 현지에서 고용한 가이드였다. 물론 토우발더 역시 스위스 현지에서는 이 일로 엄청난 의심과 비난을 받았고, 결국 가이드 생활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에 이른다. [8] 2023년에는 노홍철이 다녀갔다는 모양으로, 주인장은 "그 유쾌한 사람 한국에서 엄청 유명한 셀렙이라던데?"라고 한국인 트래커들에게 말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노홍철의 마터호른행은 초행길이 아닌데, 2014년 나 혼자 산다 촬영 시 고르너그라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