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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블린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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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마데이코 작, <루블린 연합>, 1869년.
1. 개요2. 배경3. 경과4. 조약의 내용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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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69년 7월 1일, 당시 폴란드 왕국의 도시였던 루블린에서 폴란드 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제 통일을 선포한 사건.

2. 배경

1386년, 폴란드 왕국의 여왕 야드비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요가일라가 결혼하면서, 두 나라의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 그후 두 나라는 개별적으로 주권을 행사했고, 단지 야기에우워 왕조의 군주를 통치자로 함께 받들기만 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지속적으로 침략하던 튜튼 기사단을 공동으로 상대해 그룬발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후에도 외세를 상대할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등 우호 관계를 이어갔다. 또한 본래 발트 전통 종교를 신봉하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폴란드를 통해 서유럽의 문화를 전수받았다.

그러나 두 나라의 동군연합은 종종 삐걱거렸다. 폴란드 측은 잃어버린 고토인 실레시아 포메라니아를 회복할 때 리투아니아인들이 도와주길 희망했지만, 리투아니아 측은 자기들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그 일에 도와주기를 꺼려서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반면 모스크바 대공국과 리투아니아가 전쟁을 벌일 때, 폴란드 대귀족들은 리투아니아의 구원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폴란드 귀족들은 폴란드 국왕에 리투아니아 대공을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리투아니아 측은 이에 맞서 독자적인 주권을 기필코 사수하려 했다. 여기에 포돌리아, 볼히니아 등 양국간의 국경 지대를 놓고 영토 분쟁이 종종 벌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양국간의 갈등은 종종 일어났고, 심지어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위태롭게나마 이어지던 양국의 동군연합은 두 나라의 공동 군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자식을 끝내 가지지 못하면서 끊어질 위기에 봉착했다. 지그문트 2세는 자신이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 될 것을 직감하고 왕조의 유산이나마 보존하기로 마음먹었다. 리투아니아 귀족들 역시 폴란드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크림 칸국 소속 타타르인들의 끊임없는 습격으로 인해 수많은 리투아니아 주민들이 노예로 끌려갔고, 모스크바 대공국과 그 후신인 루스 차르국의 침략은 갈수록 거세져 한 때는 전 영토의 1/3이 강점되기도 했다. 1560년대에는 차르 이반 4세의 지휘하에 루스군이 리투아니아의 북쪽인 리보니아로 쳐들어가 대부분을 석권하면서, 리투아니아인들의 압박감은 더욱 심해졌다.

반면에, 폴란드 귀족들은 1560년대에 폴란드에서 징수한 세금의 70%가 리투아니아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고, 자신들이 계속 동방으로 보내져서 루스 차르국과 크림 칸국을 상대하는 등 리투아니아를 위해 애썼는데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들은 리투아니아를 도와주는 대가로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에 온전히 병합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이에 대해 그리 되면 자신들의 지위와 부가 부유한 폴란드 대귀족이 아닌 소귀족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떨어질 것을 우려해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렇듯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상호간의 이권 충돌로 인해 합의가 잘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지그문트 2세는 자신이 죽기 전에 통합을 이루기로 마음먹었다. 1564년 3월 13일, 지그문트 2세는 바르샤바 세임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계승권을 폴란드 왕국의 왕관에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1565년에는 각 지역의 귀족들이 개별적으로 모이는 지역 세임 제도를 설립했고, 1566년에는 자신의 권한 중 일부를 리투아니아 세임에 양도해 폴란드 세임과 유사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폴란드 세임과 리투아니아 세임의 대표자들이 지속적으로 만나 통합에 관한 논의를 이어가게 했다.

3. 경과

1569년 1월 10일, 스타니스와프 셍지보이 차른코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세임이 루블린 성에서 열렸다. 리투아니아 세임 역시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회의를 시작했다. 루블린이 회의 장소로 선택된 건 전적으로 지그문트 2세의 의중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요가일라가 1386년 2월 2일 루블린에서 열린 최초의 세임에서 폴란드의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로 선출된 역사적 사실을 참석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이번에는 이곳에서 양국의 통합을 이뤄내고 자신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통합 군주로 등극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다. 크라쿠프 주교 필립 파드니에프스키는 두 세임이 하나로 통합되고, 공동 선거를 통해 단독 군주를 선출하며, 공통된 국방 정책을 수립하고, 같은 동전을 쓰되, 나머지는 각자가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세임을 장악한 대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지그문트 2세의 전 처남인 미코와이 라지비우는 이 합의가 폴란드에 의한 리투아니아의 평화적 병합이라며 반대했다. 급기야 리투아니아 대표단은 3월 1일 밤에 폴란드 측의 압력에 항의한다는 서신을 남기고 비밀리에 루블린을 떠났다. 이에 지그문트 2세는 그들이 주군인 자신의 허락 없이 회의장을 멋대로 떠났다며 성토했고, 리투아니아, 루테니아 내 소지주들 역시 폴란드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이 무책임하게 행동했다고 비판했다. 지그문트 2세는 이러한 여론을 등에 업고 그해 3월 포들라스키에와 볼히니아주, 포돌리아와 키예프를 폴란드 왕국에 합병한다는 일반 합의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귀족들의 재산과 지위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했다. 폴란드의 일부 귀족들은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다른 모든 영토를 합병하고 리투아니아를 영원히 금지하고 "신 폴란드"로 대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상황이 이처럼 나빠지자, 리투아니아 대표들은 4월 5일에 다시 루블린에 왔다. 그들은 이제 연합이 이뤄지는 것보다 폴란드에게 영토를 잃는 것을 더 걱정했고, 지그문트 2세에게 일반 합의를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은 11세기 초에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이끄는 폴란드군이 키예프를 일시적으로 장악했던 일을 거론하며, 이 땅은 오랫동안 폴란드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모든 것이 결정될 때 리투아니아인들은 세임에 무단으로 결석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니 어떠한 반대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여기에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로 귀속된 것에 기뻐한 볼히니아, 포들라스키에, 포돌리아 등지의 사절들은 리투아니아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밝혔다.

지그문트 2세는 뒤이어 궁지에 몰린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설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탁월한 웅변술과 외교력을 갖췄던 그는 리투아니아 세임에 지속적으로 참석해 귀족들을 열심히 설득했고, 때로는 뇌물 공세를 벌였다. 이에 여러 귀족이 설득되었는데, 특히 포들라키아, 볼히니아, 포돌리아, 키예프 등 루테니아 일대의 귀족들은 폴란드가 제공하는 정치적, 경제적 잠재력을 활용하기를 열망하고 연합에 가담하기로 했다. 1569년 5월 24일, 리투아니아 대표단은 어쩔 수 없이 폴란드 국왕이 그 땅을 가지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다. 그후 키예프와 브라트슬라프 지방 세임이 폴란드 왕국에 합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리투아니아의 통치에 남아있는 지역은 베레스테이시나와 핀시니 뿐이었다.

리투아니아 대표 얀 히에로니모비치 코드키에비츠[1]는 폴란드 대귀족들에게 그들과 동등한 지위와 명예를 보유하는 걸 보장해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낸 뒤, 동지들에게 연합을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다. 이에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장고 끝에 1569년 7월 1일에 폴란드 국왕이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의 군주에게만 충성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루블린 협약을 승인했다. 7월 4일, 지그문트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자격으로 이 협약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통합이 성립되었다.

4. 조약의 내용

1.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국왕 및 리투아니아 대공을 공동으로 선출해 한 명의 통치자를 받든다.
2. 바르샤바에 합동 세임이 선출되며 77명의 폴란드인과 50명의 리투아니아인 대표로 구성된다. 상원에는 113명의 폴란드인과 27명의 리투아니아인이 포함된다.
3.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두 회원국은 공통된 국방 및 외교 정책을 추구한다.
4. 별도의 중앙 관직, 직함 및 위엄은 양국에서 동일한 역량 범위와 함께 유지된다.
5. 각 국은 별도로 주조된 균일한 동전을 도입한다.
6. 별도의 폴란드군과 리투아니아군을 유지한다.
7. 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러시아어 모두 공용어로 존중받는다.
8. 리투아니아에서는 왕실 토지의 집행과 왕실 보조금에 대한 추징이 적용되지 않는다.
9. 양국에서 시행된 기존의 모든 권리와 특권은 그대로 유지된다.
10. 폴란드인이 리투아니아에서 부동산을 구매하는 것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한다.
11.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 왕국에 통합된다.

이리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한 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고 하나의 의회(입법부)를 가지며 공동으로 외교를 수행하기로 정해졌으며, 빌뉴스의 의회 및 리투아니아 대공 선출[2] 제도는 폐지되었다.다만 행정과 재정 그리고 군대와 사법권은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했으며 당시에는 아직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법 체제가 더 정교하고 판례가 많다는 점 때문에 연방의 법 체계는 리투아니아 대법전을 기본으로 하여 재작성되었다. 이로써 여태까지 단순한 동군연합 관계였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완전한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지그문트 2세 시기에 이루어진 루블린 연합, 이른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795년 폴란드 분할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조약에 따라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경계가 조정되었는데 우크라이나 영토 대부분이 폴란드로 이관되면서 현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갈라지는 실질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5. 여담



[1] 폴란드-리투아니아 역사상 최고의 기병대장이었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의 아버지다. [2] 말이 선출이지 리투아니아 대공위는 야기에우워 왕조에서 사실상 세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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